견훤은 태산허씨 탄생 지네마을(蚣洞)인가
견훤의 광주북촌 탄생지를 찾아보는 탐방 이야기
정읍시 산외면 공동마을은 99칸 김동수 문화재 가옥은 지네마을 공동(蚣洞) 이다
이곳은 동학군 영수 전봉준 김개남도 이주하여 살았고 99칸 궁같은 집이 3곳이나 있었다
왕자산과 육조봉 평사낙안이라는 풍수를 최치원시대 도선선사가 지적했다는 말이있다
태인허씨(인천이씨) 칠보송씨가 고려시대 왕권을 장악하였기에 그런 말을 믿으려고 한다
그래서 견훤같이 태어난 지네마을에 터를 잡아 김동수의 6대조인 김명관이 1784년 김명관이 이곳에 99칸의 집을 지었다
현 산외면 소고기 마을 남북에 두채가 13가옥 씩을 헐고 99칸 집을 지었으나 지금은 지네마을 蚣洞 한곳뿐이다
무진주(광주)에서 북쪽에 태산태수 서쪽에 영주(고부)의 동쪽에 남원의 거대한 고려 행정구역이였다
그러므로 태산지역이라고 쓰지 않는 이유는 태인허씨 인천이씨 족이 정권을 쥐고 있는시기이므로 광주의 ‘북촌(北村)’이라고 숨겨 버린것 같다
파란의 풍운아 태인허씨 동북아 활동의 역사를 살펴본다
가야는 철기무기등 강력한 국가로 신라국 경주에 인접한 경북 청도군까지 점령하여 서라벌을 급습한 경력이 있다.
가야는 백제땅도 지리산 남원까지 점령했었다.
여기서 놀란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군을 지원받아 가야를 멸망시켰다.
가야 패망후에반 신라 가야부흥군 세력의 후손 허세신부족이 백제에 귀화해서
토착화하여 시산(태산)허씨가 되었다. 시산군이란 태산군 명칭의 호로 대대로 호족이 되어 통치하다가 백제마저 망하자 통일신라시대 서남해안의 위도, 선유도, 인천해안의 해상을 떠돌다가
동진강과 섬진강의 교통 중심지 태산(정읍 칠보)과 지리산에서 유격대로 잠적한 세력이다.
그 세력이 백제저항군 지수신. 흑지상지장군의 세력과 연계되어 당나라 측천무후의 군사력으로 흡수되게 된다.
당나라 3대 고종의 후궁 측천무후의 잔혹한 정권 찬탈과 독재정치가 장기간 지속된 것은
노예 서민등을 막론하고 과거 등용을 철저하게 능력과 책임으로 실시하여 민심을 얻은 결과다.
여기에서 고선지, 이정기, 왕모중 등..이 벼슬을 하여 패망한 고구려 백제의 유랑인들이 당나라로 몰려들었다.
태인허씨도 이시기에 당나라에서 포로에서 군사로 배치되어 서해 해상에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측천무후가 죽은 뒤에 당현종의 심복이 된 왕모중(고구려인)은 선왕 중종을 위씨황후가 독살하여 왕권을 차지하려 하자
왕모중이 급습하여 위씨황후 일파를 숙청하고 현종황제를 옹립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왕모중 세력이 커저서 당나라 궁중을 장악하여 그 세력이 커지자 환관들이 시기하였다.
당나라 환관들은 미녀 양귀비를 등장시켜 미인계로 현종을 이간시켜서 왕모중을 숙청하고
이어서 또 안록산을 숙청하려다 안록산이 눈치채고 755년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전 중국을 장악한 안록산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다.
정읍시 산외면 이치마을과 지네마을(공동)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
고구려와 백제계 왕모중의 세력으로 당나라 현종시대 합류한 정읍호족에서 서해 해상으로 망명한 태인허씨 들이 당현종을 ‘허기’ 라는 사람이 신라사신으로 찾아갔다고 삼국사기에 기록했다
그러나 허기는 가야의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백제에 망명한 가야인 이기에 신라사신이 절대로 될 수가 없었다
신라에 항복한 김유신의 후손 김원웅이 전주도독으로 훗날 당나라에 참전한다
당나라에서 김수로왕의 후손 김원웅이 먼저 참전한 태인허씨 허기의 후손과 합류하고
군산 선유도(문창)군수 아들 최치원도 후에 황소의 난에 참전하여 장보고, 김원웅, 이정기, 이사도 등이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고 당나라 대륙을 장악하게 된다.
이사도(고구려 장군 이정기의 손자)와 장보고의 진영에 도우러 찾아간 허이기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피난한 호남성 장사현(장가계 근방)으로 찾아가서 풍전등화의 당나라 현종을 도왔다.
이에 당나라 현종황제는 친필로 감사의 글을 허이기에게 써주었다.
후에 이사도가 '국토회복의 야망'으로 돌아서서 낙양성을 함락하고 중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이때에 이사도의 군사령관 '유오'가 이사도를 암살하여 야망은 수포로 끝났다.
‘유오’를 기억하자 중국을 탈환하는 유일한 기회는 이사도를 암살한 ‘유오’였다
무정부 상태인 이 시기에 이사도 암살로 종전이 되고 중국 상황이 불안해지자 장보고는 신라
청해진(완도)에서 살면서 신라의 왕족에 접근하며 강력한 한.중.일.해양을 장악한 활동을 하였다.
당나라 운주자사 이사도가 백제국의 의미로 제(濟)나라라는 나라를 세우다
그 당나라 이름으로 산내면에 운주산아래 견훤의 왕박암이 있다
그 후, 장보고가 염장(염문)에게 암살된 후 장보고의 부장이었던 이창진 등..이씨 청해진을 근거로 일본을 왕래하며 계속 대적했다.
이 시대에 이창진, 이충, 이소정 등 이씨들이 중심이 된 것을 보면 그들은 태인허씨 계의 후손 인천이씨 부족 이씨성으로 이것은 당나라 이사도 군 소속에서 활약한 태인허씨계 세력이 대거 장보고 세력에 참여한 결과로 보인다.
태인허씨와 양천허씨가 주로 남해안 지방에 많이 사는 이유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장보고를 암살한 염장의 재토벌로 장보고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갔고 남은 유민들은 모두 신 정읍 태인 벽골군에 851년 (문성왕 13년) 강제 이주됐다.
따라서 부안 장씨는 김제 부량면이 집성지로서 장보고 후손이다.
김씨왕조가 신라가 박씨왕조로 구테타가 성립되어 김씨 호족 추장들이 인심을 얻고
견훤은 가야세력 태인허씨가 신라인 아자개의 양자로 변신하다가 당나라 안록산에서 황소의 난까지 긴 세월 참전하여 뭉처저서 귀국한 장보고 김원웅(김해김씨)세력이 태산태수로 만난지 4년만에 지원으로 후백제가 급성장으로 일어났다
상주 가은현 아자개의 족보 「이제가기」에 따르면 견훤은 그 조상이 신라 제24대 진흥대왕의 비(妃)로서 시호(죽은 뒤에 올린 이름)가 백융부인인 사도(思刀)이 있다.
사도의 셋째 아들이 구륜공(仇輪公)이고 그 아들이 파진찬 선품(善品)이며 그 아들이 각간 작진(酌珍)이다. 이 작진이 왕교파리(王咬巴里)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라고 전한다.
이것이 「삼국유사」가 인용한 「이제가기」에 기록된 견훤 족보이다.
이를 쉽게 정리하면 사도→구륜공→선품→작진→원선(아자개)→견훤이 된다는 말이다.
일개 무명군장이 갑자기 조직 없이 구테타 성공하기는 불가능하다
견훤의 거대한 세력을 믿고 신라 호족들이 호응하여 의지하여 후백제가 급성장한 것이다
여러 부족국가 가야에서 태인허씨는 강력한 철기군사로 신라를 습격하여 고구려 구원병에게 망하고 백제에 망명하여 독립운동하다가 백제가 망하여 서해 해상세력으로 유랑하고 당나라 안록산의 난에 참전군으로 오랜세월 단련한 군사전투전문의 호족으로 보인다
당현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허기’가 이씨 ‘이기’로 되어 태인허씨는 이씨 허씨를 혼용하며 유랑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태인허씨로서 진흥왕 후손 아자개의 양자로 살다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장보고 허기 김원웅(김해김씨 김유신의 후손)같은 종족 세력으로 규합하여 나라를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견훤의 태자신검의 반란으로 고려에 망명시킨 태산호족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읍 산내면 운주산은 당나라 운주지역이름이며 견훤이 만들었다는 왕박암 굴이 있고 견훤은 성씨가 이씨인 광주 북촌사람이라고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으며 당나라 혼란기에 활동지 운주이름으로 운주산 아래에 있다
무진주 (광주)의 북촌은 태산태수 지역으로 태인 허사문이 통치하는 곳에 당나라에서 참전한 최치원이 887년에 태수로 자원해오고 이해에 장보고 후손이 따라와서 부안장씨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태인허씨 시조 굴과 사당 전설이 있는 정읍시 산외면 이치마을과 옆에 지네마을 공동마을이 있다
견훤의 탄생설화에 지네굴에서 남자가 처녀를 간통한 것으로 진훤 (陳萱;지네훤)이름으로도 표기한다
삼국사기를 김부식이 쓴 시기는 태인허씨 이자겸 정권시대이며 삼국유사를 일연이 쓴 시기가 고려 충열왕시대로 이곳 송씨의 세력시대였기에 후백제를 숨기고 신라 귀족으로 위장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의 성씨가 이씨라면 당나라 현종황제부터 안록산 황소 이극용 주전충의 반군을 토벌하며 참전한 장보고 김원웅 허기의 세력으로 보인다
고구려 왕모중 계통의 후손으로 보이는 왕건이 장보고를 죽이고 나주로 간 반 장보고 세력염장의 지역에서 고구려 족으로서 후고구려 건국의 꿈이 태동했다
그래서 견훤은 신라 김씨왕족의 마의태자를 부안변산에 망명시키고 왕건은 신라박씨 세력박술희 장군과 나주의 태자 혜종을 후계자로 삼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모두가 후백제 지역호족이 왕권을 차지한시대로서 상주 신라인
후백제 견훤의 이씨를 고려왕건이 몰락시켰으나 태인허씨 후손 인천이씨의 이자연이 글안군의 침입으로 고려현종이 나주로 피난하는 도중에 고려궁중세력을 장악했다
그 뒤를 고려무신 이씨 이의방이 계승하였다. 고려 무신정권의 주장세력인 이의방은 태산군사람으로써 정중부에게 죽게되고 이의방을 죽인 정중부 부자는 태인 허씨 허승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 지역엔 고려 이자겸이 정읍사 궁중악으로 송나라사신을 맞이하고 고려무신 최충헌 시대에 태인허씨 허경의 소유지로서 유자량 현덕수등..이 풍류를 즐겼던 음성서(音聲)부락이 있다.
현장의 옛이야기 자료를 청년학도들의 연구에 도움이 될까 하여 여기에 제시 한다
권희덕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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