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전북의 땅과 문화, 사람들 - 정읍]

도심안 2009. 6. 24. 22:20

[전북의 땅과 문화, 사람들 - 정읍]
갑오년 역사가 깊은 전봉준의 땅

장세길 문화저널 기자

정읍 땅은 한자만 파도 물을 한 동이 길어올릴 수 있을 만큼 지하수가 넉넉하다 해서 이름 첫머리에 언제나 '우물 정(井)'자가 따라다녔다. 백제때에는 정촌(井村)현으로 불렸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인 경덕왕 22년부터 지금의 정읍(井邑)으로 불렸고, 한때 '정주시'로 불렸을 때에도 '우물 정'자는 언제나 함께 했다.
풍족한 물이 넉넉하니 들녘의 풍요로움이야 두말해서 뭐하랴. 노령산맥의 줄기인 입암산, 내장산, 고당산, 묵방산, 삼두산과 같은 굵직굵직한 봉우리들이 곳곳에 솟아있고, 한편으로는 지세가 낮게 활짝 열려 관청들, 이평들, 거산들, 신태인들, 도평들, 동진들 같은 너른 평지가 정읍땅 곳곳에 펼쳐져 있다. 이 산들에서 흘러내린 고부천, 팔왕천, 하모천, 정읍천, 평사천, 호동천, 원평천 같은 하천들이 '우물의 도시'답게 들녘을 가로질러 호남평야의 젖줄인 동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산과 하천, 들녘의 만남이 '안성맞춤'인 고장답게, 그리고 전라도의 두거점인 전주와 광주의 중간에 버티고 서 있는 지역답게 '정읍'은 인근의 물동량이 모이는 중심지였다. 순창군, 고창군, 부안군, 김제시들과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그 일대 농산물의 집산지였던 것이다. 지금이야 정읍시에 딸린 면에 불과하지만 주위에 줄포, 염포, 동진, 사포와 같은 나루들이 있던 고부는 어선과 상선이 활발하게 오갔던 정읍땅의 제일 큰 마을이었다.

문화적 특징이 서로 다른 고부와 태인, 그리고 정읍
백제시설 인근 지역을 관할하는 오방성 중에서 거점지역에 설치되던 중방성이 자리하던 곳이 바로 이곳 고부, 옛말로 고사부리군이었다. 전라도의 역참을 관할하던 삼례역참과 함께 중요 역참으로 손꼽혔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고부의 중요성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호남선이 전라도를 관통할 때 "시끄러운 기차길이 지나가서는 안된다"는 고부사람들의 반대로 작은마을이었던 '정읍'에 기찻길이 놓이면서부터 고부와 정읍의 신세는 뒤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많은 불교유적과 흔적만이 한때 백제의 거점도시였던 고부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다.
이에 비해 칠보 등 신태인은 유교문화가 융성하던 지역이었다. 지금도 태산리, 무성리라는 작은 마을에 무성서원, 용계서원 등 이름난 서원과 다섯 개의 사당이 있을 정도. "전국을 통털어 이런 곳이 없다"고 최현식 전 문화원장이 자랑할 정도로 이 지역 유교문화의 뿌리는 깊다. 조선의 대학자 일재 이항이 학문을 위해 태인에 내려올 정도로 유서가 깊은 유교의 뿌리는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으로부터 시작됐다. 최치원은 지금의 신태인면인 태산현에서 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데 오늘에도 남아있는 피향정은 그 유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단종 폐위를 슬퍼하여 벼슬을 버리고 태인에 머물었던 문장가 정극인도 이곳에 뿌리를 내린 유학자 중의 하나다.

그 전봉준의 땅
은근히 자랑으로 내세우는 유교의 뿌리가 깊은 이땅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는 점은 흥미롭다. 물론 유교의 폐해가 심할수록 저항이 드세것도 사실이지만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정읍이라는 지명과 정읍사람들의 특성때문이라는 색다른 주장도 내놓는다.
'우물'은 임금을 상징하고, 그 상징성이 상해임시정부가 제 위치를 찾지 못할 즈음 정읍땅에 발현되고 있었다는 주장은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정황은 이런 해석도 가능케 한다. 당시 고창, 부안, 김제를 아우르는 거점도시이자 교통의 요충지였던 정읍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곳. 특히 미륵신앙의 흔적이 남원 다음으로 많이 남아있다는 점도 '저항'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내세나 다음 세상을 바라는 미륵사상이 사회가 혼란스러울때는 현세불로 바뀌게 된다고. 정읍 땅에 드셌던 미륵사상이 현세의 부패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됐다는 얘기다. 그래서 동학의 세력이 거셌고, 보천교와 강증산을 비롯해 신흥종교가 활성화 됐던 고장일 수 있었단다.
굳이 그런 주장이 아니라도 정읍은 분명 '혁명의 땅'이다. 반외세 반봉건의 깃발을 높이든 혁명, 우리나라 근대사의 시작을 알린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학정과 부패에 이기지 못한 이들은 항상 가슴 한켠에 불만이 쌓여 갔다. 제 아비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천냥의 돈을 거두었고 황무지에도 세를 매겼고 사람을 잡아다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워서 가둔 다음에 돈을 받고서 풀어 주는 등 그 행패는 극에 달했다. 게다가 1893년에는 이평면에 있는 저수지인 만석보를 다시 쌓는다고 돈을 걷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을 시켰다. 가을이 되어 만석보가 완성되고 농민들이 추수를 하자 처음에 걷지 않겠다던 '보세'를 칠백섬이나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가장 피해가 심했던 이평면 부근의 주민들이 이듬해인 1894년에 이평면 조소리에서 훈장을 하던 전봉준을 앞세워 진정서를 냈지만 돌아온 건 감옥신세뿐이었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여 관청을 습격, 조병갑을 쫓아내고 만석보를 부숴버렸다. 동학농민혁명의 들불이 타오른 것이다.
지금이야 '자랑'으로 일컫어지지만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정읍사람들에게 갑오년의 역사는 '아픔'이자 '숨기고 싶은 비밀'일 뿐이었다. 남편을, 아들을 보내야 하는 설움도 크건만 살아 남아있는 이들은 그런 사실조차 입밖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동학비도'로, 심지어 '역적'으로 몰렸으니 더 말해 뭐하랴.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황토현에 세워지던 1963년까지 그렇게 70여년의 세월을 가슴앓이로 보내야만 했다.
그 응어리가 지금도 정읍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정읍? 영원한 야당땅이지…"라고 주저없이 말하는 촌로들의 말속에 '저항의 땅'이라는 뜻과 함께 '그늘진, 소외받던 땅'이라는 뉘앙스가 풍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읍사와 정읍농악, 그리고 내장산
'정읍사'와 '내장산'은 정읍 사람들이 내놓는 보물. 가을만 되면 온 산하를 붉게 물들이는 내장산 단풍은 정읍의 큰 관광수입원이다. 여기에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노래 '정읍사'는 정읍의 역사와 문화를 '은근히' 내세울 수 있게 하는 자랑거리다.
"…어긔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드리 / 전져재녀러신고요 / 아긔야 즌듸를 드듸욜세라…". 길을 떠난 남편을 걱정하며 아내가 불렀다는 백제때의 노래 '정읍사'는 '선운산곡' '무등산곡' '방등산곡' '지리산곡' 등 다른 백제노래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는 노래다. 정읍곡은 수제천이란 이름으로 신라 고려 조선때까지 궁중음악으로 불리었단다. '상춘곡'도 이곳에서 났다. 조선시대 학자인 정극인이 벼슬에서 물러나 태인 고현내로 돌아와 있으면서 봄의 흥겨움을 읊은 노래로 가사문학의 시작이 되는 문학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다.
우도농악의 한자락을 잇고 있는 정읍농악의 명성은 정부수립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경원에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이봉문)에서 고려때 여인이 모란꽃을 따는 형태의 춤인 가인전모란무(佳人剪模丹舞)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정읍농악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다음 해에는 이정범씨가 연거푸 두해연속 대상을 차지해 정읍농악의 위상을 높였다. 이런 정읍농악의 위상은 보천교의 역할이 컸다. 입암면 대흥리에 본부를 둔 보천교는 6백만 신도에게 풍물을 권장, 정읍풍물굿의 체계를 세우는데 산파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읍농악도 1970년대 전국을 휩쓴 '근대화' 물결 아래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마을마다 있었던 걸립은 이농현상으로 사라져갔고, 그나마 배우려는 사람도 찾기 힘들 정도. 다행히 민족문화의 뿌리찾기가 시작됐던 1980년를 거쳐 유지화씨를 주축으로 한 정읍농악보존회가 결성되고 우도농악전수관을 세우면서 옛 정읍우도농악의 자존심 찾기가 한창이다.
그러나 어느 지역이든 다를까마는 옛 선조들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전통문화가 사라져가는 아쉬움은 정읍땅도 다르지 않다.
정읍을 상징하는 그많던 '우물 정(井)'자형 우물도 지금은 정해마을 한곳뿐이다. 도작문명의 발상지라고 일컫어지는 고부면의 눌제도 쓸쓸한 옛 영광만을 간직하고 있다. 김제의 벽골제, 익산의 황등제와 함께 3제 중의 하나로 불려지지만 눌제유지비 하나 덩그란히 있을 뿐 지금은 잘 다듬어진 논들이 질펀하여 제모습을 겉눈으로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게 바뀌고 말았다.
여자가 이겨야 아들을 낳는다는 산외면 정량리 줄다리기, 신태인읍 육리의 당산제, 허수아비 등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비는 옹동면 내동 당산제, 단속곳 춤으로 재앙을 막는 여성만의 북면 오류리 당산제 등도 '내장산'과 '동학농민혁명'이 주는 강한 이미지에 가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 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