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교장로회(통합)과 예수교장로회(합동)
(1)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신학적 대립
한국장로교회는 1948년 암스텔담에서 WCC가 창립될 당시부터 회원교회로서 김관식 목사를 대표로 파송했다. 감리교회도 창립회원이 되었다. 1954년 제2차 WCC 총회가 미국의 에반스턴에서 열릴 때 장로교 총회는 한경직 목사와 김현정 목사를 대표로 내정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한경직 목사에게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그 당시 이승만 정권은 WCC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미국의 국제기독교협의회(ICCC)가 WCC에 대해 용공혐의를 씌워 반WCC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승만 박사는 그 영향을 받았다. 둘째, WCC는 한국전쟁에 휴전입장을 표명했는데 그것은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 배치되었다. 셋째, 한경진 목사는 이승만 박사로부터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로 의심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부터 이승만 박사는 안창호의 흥사단과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집권 이후 흥사단은 철저하게 권력에서 배제시켰다. 결국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명신홍 목사가 대표로 참석했고, 기독교연합회(NCC) 총무였던 유호준 목사도 연합기관 옵서버로 참석했다.
장로교 일부에서는 WCC는 용공, 신신학, 교파통합운동이라고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대다수는 WCC가 단일교회를 추구하지 않으며, 회원교단 간에 친선과 협조를 통해 복음증거와 봉사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여 이 운동에 참여했다.
WCC운동에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들은 누구였던가? 그들은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을 비난했던 51명과 그 외 10여명이 포함된 “복음동지회”였다. 이들은 1952년 7월 “복음주의협의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의 한국지부를 조직하고 12월에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의 고문은 박형룡 박사였다. 1958년 제43회 총회 때는 총회임원의 상당수가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이 조직은 강력한 정치조직으로 성장한 것이다.
NAE 주최 전국목사구국기도회 (1956)
한국의 NAE인사들은 미국의 근본주의자이며 극우 반공주의자인 칼 매킨타이어(Dr. Carl McIntyre)가 세운 국제기독교회협의회(ICCC)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실 미국의 NAE는 근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고 신복음주의를 주창했던 해롤드 오켕가(Harold Ockenga)와 빌리그래함이 중심이 되어 세운 기구였다. 그러나 한국의 NAE 인사들은 역설적으로 근본주의 단체인 ICCC와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NAE의 신학적 관점을 모르고 있었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칼 매킨타이어 박사 1906-2002
ICCC 암스테르담 창립총회
이들의 반WCC 주장의 이론적 근거는 ICCC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들이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용공, 교파단일화운동, 신신학, 반복음주의, 인본주의라고 비판한 것은 대부분 ICCC의 주장에서 빌어 온 것이었다. 실재로 그 당시 국내의 인사들 가운데 국제 에큐메니칼 운동의 내용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ICCC주최 반공강연회(1959) WCC는 한국전쟁을 남침으로 규정하고 UN군 파견을 촉구하여 사회주의권 교회들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WCC 헌장은 “교회들의 친교”를 목표로 하며 단일교회를 지향하지 않는다. 분단과 전쟁, 정부의 반공정책 하에 있는 국내 교회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해할 신학적인 폭이 없었다. 특히 전쟁 중에 많은 이북의 교인들이 남하하면서 반공과 신앙이 하나로 묶여진 상황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용공으로 몰아간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2) 박형룡 박사 3천만환 공금사기사건
장로교 3차 분열의 배경에는 장로회 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 공금사기사건이 있었다. 1957년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부지를 불하 받도록 해주겠다는 박호근이라는 인물에게 속아 3000만환을 지촐했으나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교장 박형룡은 궁지에 몰렸다. 그는 도의책 책임을 지고 교장직을 물러나고 집을 팔아 얼마라도 변제하는 방식을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기오, 박찬목 등 소장파(한국 NAE측) 등은 교장은 책임이 없고 교장직 사임이나 사택 매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박형룡 박사를 두둔했다.
1958년 3월 7일 이사회에서 박 교장의 사표가 수리되었고 그는 명예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사회의 일부는 박교장의 인퇴가 신학교에서 정통주의가 무너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박형룡 박사를 지지하는 인사들의 정치적인 지위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총회 안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복권을 위해 다수의 총대표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 반면 에큐메니칼 측에서는 이것을 막기 위해 다수 총대를 확보하려고 했다.
1958년 “3천만환사건”이 터지기 전 박형룡 박사는 WCC에 대해 두 가지 근거로 비판하였다. 첫째, WCC는 모든 교파를 포괄하고 교리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결국 자유주의자들(사회복음주의, 바르트주의, 성공회 가톨릭주의, 현대주의)의 지도를 받게 된다. 둘째, 궁극적으로 세계교회의 조직적 통일을 원하는 초교파운동이다. 따라서 복음주의에 입각해서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보수하려는 교회는 세 가지 대응방식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첫째, 친선교우(親善交友)의 사업에만 동행하거나 둘째, 전혀 참여하지 않고 외부에서 보수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따로히 전개하거나, 셋째, 아무 에큐메니칼운동에서 참여하지 않고 고립독행(孤立獨行)함
그러나 그는 결론에서 한국장로교회는 “세계적 교회친교의 중요함을 생각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지만 “교리상 경계와 비타협의 태도”를 취할 것이며, 장차 “교파합동의 계획이 구체화”되면 단연 탈퇴해야 한다고 말한다.1
즉 박형룡 박사는 “3천만환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WCC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탈퇴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 점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교단분열의 직접 원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3) 경기노회 총대사건
당시 경기노회는 가장 영향력이 크고 총대 수가 많은 노회였다. 1959년 5월 12일 경기노회에서는 에큐메니칼 측과 반에큐메니칼 즉 사이에 총대 선정의 문제로 치열한 갈등이 일어났다. 경북노회의 예를 들면
“1959년 봄 노회가 열려 44회 총회 고지 점령을 위해 자파총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선거운동이 전개되었는데 …. 경북노회는 이때 NAE파들을 중심으로 에큐메니칼 측 표를 잠식하기 위해 WCC의 용공문제를 들로 일어나 이를 최대의 무기로 삼았다. 그들을 아예 신신학이요, 용공주의자로 몰아붙였다.” 2
경기노회의 경우는 더 치열했다. 투표결과 총대 28명중 NAE측 18명, 에큐메니칼 측 10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황금천 목사의 경우 당선이 되었는데도 이름이 누락되어 부정개표의 시비가 생겼다. 임시노회에서는 정기노회의 총대 선거를 무효화하고 새로운 총대를 선출하였으나 NAE측이 임시노회에 참석하지 않아서 대부분 총대가 에큐메니칼으로 선출되었다.
여기서 임시노회 측은 노회법상 정기노회에서만 총대를 선출한다는 원칙을 어겼다. 그러나 NAE측은 임시노회를 열기로 합의하고 고의적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은 총회에 가서 투표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9년 9월 제44회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에서 열렸을 때, 경기노회에서는 양쪽의 총대명단을 접수했다. 결국 총회는 양쪽을 놓고 전체 투표한 결과 124대 119, 기권5표로 임시노회 측 총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NAE측은 그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뒤바꾸기 위해 무리 수를 두다가 총회 장소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제44차 총회 환영아치 대전중앙교회 (1959.9.24-28) 제44회 총회 1959 통합 합동분리
1959년 9월 29일 에큐메니칼 측 149명의 총대들과 선교사들은 연동교회에 모여 총회를 속회했다. 그해 11월 24일 NAE측은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했다. 그 후 양쪽을 화합하려는 중재안은 실패로 돌아갔고 연동 측은 1960년 2월 17일에 통합총회를 개회했다.
총회통합을 위한 평화안(1959.11)
연동교회통합총회(1960) 승동교회 합동총회 (1960)
(4) 한경직 목사와 박형룡 목사
양낙홍 교수는 교단분열의 배경에 박형룡과 한경직으로 대변되는 미국신학의 갈등이었다고 본다.3 박형룡은 미국의 NAE(신복음주의)까지도 “이단”적으로 보는 근본주의자였다. 반면, 한경직은 조선신학교 이사진에 참여했고 김재준과도 친분을 유지했던 “온건한 신정통주의적 보수주의자”였다.4 NAE측은 박형룡을 필사적으로 변호하는 과정에서 NCC측의 거두로 한경직을 지목하였다.
양낙홍은 경기노회 총대사건에서 회의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은 NAE측에 대해 선교사들이 반발감을 가지면서, 1959년 9월에 모인 연동 측 총회를 합법으로 인정했고, 11월에 모이기로 예정된 승동 측 총회의 정통성을 미연에 부인해버렸다고 본다.
(5) 선교사들의 영향력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교회는 세계 에큐메니칼 질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미국의 주류교회들과 NCC는 진보적 노선으로 경도되었다. 한국의 장로교ㆍ감리교 선교사들은 내용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본국의 노선은 에큐메니칼 노선이었다. 그들은 한국 장로교의 분열이 구체화되자 반(反) WCC 세력에 대해 냉담한 반대 입장을 표현했다.
1959년 총회에서 “에큐메니칼파”와 “NAE파”의 총대는 각각 124명과 119명으로 표차는 5표에 불과했다. 당시 선교사 총대는 18명이었다. 선교사들의 표는 캐스팅 보트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장로교 선교사 출신 중에는 마삼락(Samuel Moffet)과 같은 적극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지자도 있었다. 고신의 분열과 기장의 분열 과정에서도 미국 선교사들이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6) 장로회신학교와 총회신학교의 대립
연동 측은 남산의 신학교에서 기물을 옮기려 하였으나 NAE측 학생들의 제지로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다만 학적부는 우여곡절 끝에 장로회신학교에서 소유하게 되었다. 장신대는 태능에 토지를 매입했으나 그것은 서울여자대학에 매도하고 광장동에 학교를 건립하였다. 총신 측은 ICCC 매킨타이어에게 10만불을 받아 한강로에 4층 빌딩을 구입하여 수업을 하다가 5년 후에 사당동의 현 총신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7) 통합을 위한 노력
총회, 신학교가 양분되면서, 노회, 각 교회도 양분되어 전국교회가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한 가족들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당시 총신 측에서 통합 측을 용공으로 매도한 것은 너무 비신사적이었다. 한국정치사 속에서 반대파를 이념공세로 제거하는 비극이 만연했는데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재산문제로 인해 교인들끼리 법정에 섰고, 설교하는 목사에게 똥물을 끼얹는 사건도 일어났다.
갈라진 교단을 하나로 회복하자는 중도파들의 견해가 있었다. 따라서 연동 측은 1960년 WCC 탈퇴를 전제로 하는 통합 안을 제시했으나 승동 측은 계일승 씨의 교장서리 취소, 이사장 안두화 파면, 교수 계일승, 김윤국, 박창환을 파면할 것 등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들을 제시했다.
통합은 1969년 수송교회 김용준 목사의 발의로 경기노회가 WCC 재가입을 총회에 헌의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고 1975년 11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WCC 총회에 김윤식목사, 노정현장로, 김형태 목사가 참석했다. 이러한 공백은 통합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상당히 후퇴시켰다. 한편 기장은 1954년 에반스톤 총회에 가입신청서를 냈고 1961년 뉴델리총회에 정식회원으로 참가했다.
(8) 합동 측과 고려파의 합동실패
1960년 연동 측과 결별한 승동 측은 10년 전에 갈라진 고신 파와 합동하자는 여론이 높았다. 신학적으로 같은 근본주의 노선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커 보였다. 총회가 하나가 된 이후, 신학교도 하나가 되어야 했으나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가 부산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타협안으로 고신은 총회신학교의 분교로 하고 별과 3년생은 서울 본교에 와서 수업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경남노회 명칭문제, 고신 측의 율법주의적 도덕성, 이근삼 교수 채용 문제에 대한 이견 등으로 고신측은 환원하고 말았다. 고신교단 600교회 중에서 200교회가 합동 측에 잔류했다. 잔류파의 재산을 재판을 통해 찾아오자는 “고소 측”(송상석 목사)과 세상 법정에 고소할 수 없다는 “반고소파”(석원태 목사)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어느 시대든지 주관과 독선적인 사상이 강한 집단이나 신학적이 훈련과 성서의 바른 이해가 부족한 집단에는 외부와의 단절은 물론 자체 내에서도 분열, 분쟁이 쉽게 일어나기 마련이다."5
(9) 합동내부의 분열
고신 측이 환원한 이후 합동 측의 교권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호남 출신들이 장악했다. 이 그룹은 1963년 이후 12년 동안 합동 측을 주도했고 거두는 정규오 목사였다. 소외되어 있던 중부 영남권은 이영수 목사를 중심으로 뭉쳐 교권 장악에 성공했고 17년 동안 교권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1979년 64회 총회는 주류 비주류의 분열이 생겼다. 당시 이영수 목사 즉 중부 영남 세력에 의해 교권에서 소외된 비주류 측은 64회 총회에서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합동보수'라는 교단을 세웠다.
2년 후 '합동 보수'는 호남 계의 '개혁 측'과 이북 및 호남 일부로 구성된 '합동 보수 측'으로 양분된다. 그 후 합동 비주류 안에서는 분열을 거듭해 80개가 넘는 수많은 장로교단을 형성하였다. 합동 비주류 계열의 분열은 철저하게 지방색과 교권을 둘러싼 다툼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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