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큰 산' 박형룡, 새롭게 올라 바로 보자

도심안 2019. 4. 13. 04:52
'큰 산' 박형룡, 새롭게 올라 바로 보자

  • 김은홍 기자
  • 승인 2006.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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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민 교수, 평전 <박형룡 - 한국 보수신앙의 수호자> 펴내
산 밑의 추종과 폄하만 무성 … 학문적 입장, '정치'에 매도 안돼야
'자유주의'에 맞서 정통신학 지켜 … 후기의 '편협'에는 아쉬움 남아
  "박형룡이라는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산의 거대함에 놀랐다"(장동민). "오른 쪽에서 보든 왼쪽에서 보든 그는 '큰 신학자'이다"(박정신).
 박형룡이라는 '거대한 산', '큰 신학자'의 그늘이 짙고 깊게 드리워져 있는 한국 교회는 우선 그 그늘을 걷어내고 그 산에 오르려는 새로운 마음자세부터 다잡아야 한다. 우러러보거나 깎아내리려만 했던 그 산을.
 지금까지,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그 산을 감히 우러러보았을 뿐이었고 그를 폄하하는 이들은 그 산의 높이를 애써 깎아내리려 했을 뿐이었다. 이들 모두 이제 제 발로 산을 올라 그 산의 높이와 그 곡의 깊이와 그 숲의 품과 그 뻗어온 맥의 연원을 몸소 재어 내야 한다.
 평전 <박형룡>(사진)의 저자 장동민(백석대학교 교수)은 박형룡의 추종자이자 비판자라 스스로를 평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박형룡의 평전을 씀에 있어 학문적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썼다고 말했다.
 지난 11월 4일 한국개혁신학회 '박형룡 재조명' 학술심포지엄에서 주제 강연을 하며 역사학자 박정신(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은, 신학의 장벽을 넘고 교단이나 교파의 정치를 넘어, '교회 밖의 학인'의 입장에서, 박형룡을 자유로이 논했다. 물론 박정신의 그날 청중은 '교회 안의 학자들'이었다.
 박형룡을 '객관적으로'나 '자유로이' 본다는 것은 한국 교회 풍토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를 학문적으로 인식하려는 그 자체가 교단이나 교파의 '정치'에 매도될 수가 있다"는 그날 박정신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장동민의 <박형룡> 평전은 도드라져 보인다. 더욱이 그가, 박정신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교회 안의 학자들'에 속한다고 할 수 있기에, 그것도 박형룡을 아마도 '오른 쪽에서' 보는 이들이 대부분일 '총신'에서 신학과 학문의 바탕을 다진 이기에, 더욱 그렇다.
  한국 교회 신앙 수호자 장동민은 평양 숭실전문(1916-1920), 난징 금릉대학(1921-1923), 미국 프린스턴신학교(1923-1926)와 남침례신학교(1926년 1년)를 거치며 수학한 다음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하기 시작한 1928년부터 1978년 소천하기까지의 박형룡을 '한국 교회 신앙의 확립자'로, 그리고 처음에는 신사참배에 맞섰고 나중에는 자유주의와 투쟁한 '한국 교회 신앙의 수호자'로 크게 그려낸다.
 장동민의 평전에서 어쩔 수 없이 부각되는 박형룡은 자유주의와 투쟁한 투사이다. 숭실대학 전도대의 일원으로 삼남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불온한' 설교를 한 죄목으로 일경에 잡혀 옥살이를 한 그였으며,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할 때는 처음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평북노회의 노회장이 교정에 심은 나무를 절단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취조를 받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리고 출옥성도들의 신학적 지도자로서 교회의 정화와 재건 운동을 도모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의 이런 모습은 김재준과 조선신학교, WCC와 연동측, 신복음주의 들과의 잇따른 신학 투쟁의 한복판에서 어느덧 투사가 되어버린 그에 비하여 그리 강렬한 인상을 빚어내지 못한다.
 장동민은 박형룡이 당시 한국 교회에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유일한 일급 신학자"로 출옥성도들이 그를 교회개혁과 재건의 지도자로 추대할 정도였음에도, 그가 "교회의 회개와 자숙 문제에서 물러나 '자유주의' 문제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유감스런 일"이라 평한다. 물론 이 '방향 전환'에는, 둘 가운데서 한 쪽을 버리고 다른 쪽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는 배후에 자유주의가 있다"는 박형룡의 생각이 깔려있기도 했다.
 신사참배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여 또 다른 모습으로 한국 교회에 지도자로서 우뚝 설 수도 있었던 박형룡이 달려간 해방 이후의 삶은 "한마디로 자유주의와의 투쟁"이었다.
  신학교 재건 총력 박형룡의 투쟁전략은 신학교의 재건이었다. 곧, 그대로 자라게 두었다가는 한국 교회를 집어삼킬 자유주의의 요람인 조선신학교에 맞서 이 신학교를 내리누를 신학교를 반듯하게 세우는 일에 박형룡은 그의 생애의 나머지 대부분을 바쳤다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다.
 신사참배의 격랑에서 비켜나 일본에서 주석을 집필하고 만주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비교적 조용히 7, 8년을 보내고 귀국하여 처음 한 일이 바로 고려신학교를 자유주의 척결의 전국적 신학교로 육성하려는 시도였다. 이어, 교회정화를 제일 과제로 삼았던 부산의 출옥성도들과는 동상이몽의 꿈을 꾸다가 결국 서울로 올라오게 된 박형룡이 한 일도, 신학교 곧 장로회신학교를 세워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를 축출하는 것이었다. 그의 기도(企圖)가 어디까지였든, 결국 박형룡이 세운 장로회신학교는 조선신학교의 이탈과 기독교장로회라는 또 한 번의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중심이 되었다. 그 때 장로회신학교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 교계 원로들 대부분이 신사참배를 했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에 박형룡은 적잖이 괴로워했겠지만, 장동민의 말로, "당시 박형룡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의 촉구보다 '자유주의' 신학을 막는 것이 더욱 시급했기에 결국 이들과 함께 신학교를 세웠다."
 목사면직과 함께 김재준이 축출된 1952년 이후 박형룡은 총회신학교를 통해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 했지만 교회의 내부에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노선 갈등이 곪아가고 있었고, 박형룡은 이 갈등의 한복판에서 또 다시 강경 보수주의 신학자로 자신의 모습을 역사에 각인한다.
 그리고 승동-연동 분열 이후에도 박형룡은 그치지 않고 투사의 이미지를 그의 말년까지 끌어간다. 마지막 그의 투쟁 상대는 '신복음주의'였다. "현대주의와 신정통주의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에" 차라리 "신자유주의"라 불러야 마땅하다며 신복음주의에 대한 공격을 주변의 추종자들에게 독려하는 노년의 박형룡은, 그의 추종자들이 총회신학교가 좌경화되었다며 '비주류'를 세워 나가는 분열의 역사에서는 그나마 직접 당사자가 되지 않고 반세기 투쟁의 삶을 마감한다.
 '근본주의'로 변화 보여           
장동민은 "박형룡의 정통적이고 전통적인 신학운동의 대척점에는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에큐메니컬 신학, 신복음주의 신학 등이 자리하고 있다"고, 그리고 "해방 후 박형룡의 신학은 근대주의(신학적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발달한 근본주의와 일치한다"고 평한다. 또 장동민은 프린스턴을 졸업할 당시 그가 양향을 입은 구 프린스턴의 개혁신학이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포괄적 복음주의'에서 '근본주의'로로 변화를 보이는 박형룡의 후기의 신학은 한국 교회의 신앙 유형의 변화와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한국 교회는 박형룡이 걸어온 만큼 걸어왔고 그가 멈춘 곳에서 멈춘 감이 없잖다는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장동민은 한국의 장로교회와 복음주의적 교단의 목회자들이 박형룡에게 또한 많은 빚도 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기독교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던 초기 한국 교회에 진정한 복음과 기독교가 무엇인지, 기독교와 기독교적 애국운동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기독교와 전통 종교의 영성이 어떻게 다른지, 기독교와 현대주의는 어떤 공통성과 차이점이 있는지, 분명하게 구분지어 준 이 또한 박형룡이라는 평가이다.
  더 넓은 곳을 바라볼 때 박형룡이라는 '큰 산'이 없었다면, 한국 교회는 어찌 되었을까? 일본 제국주의 '신사'의 영성이라는 외풍에 휩쓸려 벌써 사라져버렸을지, 전통 종교의 영성들에 함몰되어 토속 종교가 되었을지, 민족주의의 도구로 전락한 '기독교적 애국주의'가 오늘 우리의 신앙이 되었을지,  생명은 시들어버린 채 신학만 웃자란 그런 교회가 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큰 산이 품어 삭풍을 피할 수 있어 오늘 한국 교회는 이만큼 자라고 힘이 붙었다. 이제 그 산에 올라 더 넓은 곳을 바라볼 때는 또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