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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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한국교회의 분열사
분열이란 것은 한순간에 충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은 아니다.
오랜시간 갈등과 반목이 쌓이고 쌓여 결국 마지막 순간에 폭발하는 것이 분열이므로
분열의 원인을 잘 분석하면 무엇이 핵심이고 어떤 어려움들이 있었는지 알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의 중요한 쟁점들을 살피는데 있어서 분열의 역사는 그래서 중요하다.
해방후 신사참배에 찬동한 교회지도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일단 신사참배후 획득한 기둑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락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반면 이들을 진심으로 회개하기전에는 절대 용서하면 안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기선 목사는 평양에 혁신복구파를 만들어 이들을 단죄하려 했고
한상동 목사는 부산에 고려파를 만들어 개혁하려 했다.
그리고 더욱 강경한 사람들은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과 교회를 사탄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응징할 것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사이에 갈등이 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실이었다.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출옥한 사람들은 신사참배를 한 목회자들에게 2개월 정직이라는 다소 온건한 제안을 했다.
그러나 신사참배로 인해 교권을 지킨 사람들은 이마져 응하지 않았다.
회개라는 것이 골방에 들어가서 개인이 하나님께 직접 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이는 이들의 자기방어를 위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개인적인 죄를 지으면 개인이 회개하면 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죄를 지었다면 반드시 공적으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교회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공정하고 엄격해야 한다.
암튼 기존의 교권세력들은 출옥한 사람들에게 교회권력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했다.
일제 강점기 말에 기독교가 일본화되었고 신사참배의 죄를 지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해방이 되었다면 다시 재자리를 찾아야 한다.
정치적으로 반민특위가 실패한것처럼 교회에서도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죄를 징계할 최고의 기관이 범죄했고 그 구성원들 대다수가 밤죄함으로 인해 징계의 법적 권위가 상실되고 말았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인 박형룡 역시 신사참배 문제를 피해 일본과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의 동북 신학교에서 박형룡에게 사사받은 가운데 가중 유명한 분은 문익환 목사와 그 동생 문동환 목사였다.
그로인해 고려파가 분열하고 교권주의가 판을 지면서 한국에서 기독교는 존경받지 못하는 종교단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터지고 이북은 공산당의 계획대로 교회가 통폐합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죽거나 월남을 감행했다.
그중 대표적인 목사가 부산의 초랑교회를 세운 한상동 목사다.
그는 교회정화운동을 벌이면서 참된교역자를 길러내기 위해 고려 신학교를 세웠다.
이렇게 고려신학교는 한상동, 박윤선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고
얼마후 박형룡이 만주에서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후 박형룡과 한상동의 의견대립으로 박형룡은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신학교를 세웠다.
전국적인 신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개혁운동의 본거지가 부산보다는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박형룡은 한상동이 주장한 교회의 개혁과 정화를 뒤로 미루더라도 자신과 정통신학이 총회이 다수파를 장악해야 하며
해외 네 선교부의 힘을 합해야 자유주의 신학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첫 행보가 바로 서울에 신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고려파의 한상동과 박형룡의 길 가운데 어떤 길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상동의 고신측은 교회의 정화운동을 최우선에 두었고 박형룡은 자유주의로부터 교회와 신학교를 방어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보수적인 한국 장로교회는 교리적으로 자유주의를 척결하는 데 있어서는 앞장을 섰지만 정작 그들의 교회를 개혁하고 정화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개혁과 정화의 대상인 교권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운영한 신학 교육을 통해 교회를 개혁 정화한다는 박형룡의 생각은 순진했다.
고려파 교회역시 장로교회로부터 축출되어 교단을 세웠지만 교회당을 차지하기 위한 소송 문제로 큰 내홍을 겪기도 했다.
한상동과 박형룡의 분열이 1차분열이었다면 박형룡과 김재준의 분열은 2차 분열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김재준이 이끄는 조선 신학교가 있었지만 박형룡이 보기엔 조선 신학교는 평양 신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정통신학교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조선 신학교를 개혁하고 김재준을 자유주의자로 몰아부쳐 몰아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게 되자 신사참배에 가담한 원로 목사들과 함께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운영이 그리 수월하진 않았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수업료로 학교가 운영된 것이 아니라 외국 선교사들의 절대적인 지원이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했다.
훗날 총회 직영 결의를 얻기까지 박형룡은 선교사들에게 거의 구걸하다시피 하여 장로회 신학교를 운영했다.
그리고 장로회 총회는 조선 신학교와 장로회 신학교를 통합하여 숫적으로 우세한 장로회 신학교를 통해 김재준의 조선 신학교를 몰아내고자 했지만
이 또한 여러 문제로 해결되지 않차 총회 직영 신학교를 또 대구에 설립하고 이름도 총회 신학교라 했다.
그리고 총회는 경기 노회에 김재준을 목사직에서 파면 조치할 것을 명령했으며 조선 신학교 출신의 신학자들에게는 일체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말것을
결의한다.
이에 반발한 조선 신학교는 총회에서 탈퇴하여 기독교장로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구성했다.
그리고 박형룡은 장로교회가 운영하는 대구의 총회 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종교조직 역시 권력암투가 자행되는 정치조직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교회의 분열이 신학적인 차이가 교회의 분열의 원인인듯 보이지만 실상은 밥그룻 싸움이 가깝다.
이들에게 신학은 결국 자신들의 교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다.
그러한 권력싸움에서 이겨 힘을 차지한 자들이 만들어낸 교리들을 일반신도들은 무비판적으로 주입받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는 박형룡의 독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형룡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교단에서 몰아냈고 총회 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미국 장로교회 선교부의 전폭적인 제정지원을 받았다.
북장로교 선교보의 재정적 지원으로 뷱미여행을 하면서는 총회 신학교 건물을 옮기기 위해 펀드를 모았는데 이 또한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마삼락 선교사는 박형룡이 메이첸, 매킨타이어의 영향으로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이며 한국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판단했다.
3차분열은 wcc 에큐메니컬의 찬성여부와 관계가 있다.
즉 찬성하는 쪽은 연동의 통합으로 반대는 승동의 합동으로 분열했다.
참 뭐 이리도 패거리 싸움을 하는지 이해가 안되지만 암튼 생각이 조금 다르면 재 밥그릇 챙겨서 자신들의 소왕극을 세운다.
반대하는 쪽은 박형룡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는데 이들은 에큐메니컬 운동에 동구권교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핑계아닌 핑계를 삼아 용공이라 몰아부쳤다.
당시 용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이미 건저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이었다.
사실 박형룡은 삼천만 환 사건으로 총회 신학교에서 제명이 되었는데 박형룡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자신들의 기득권까지 위협을 받자
강력하게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찬성하면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고 용공화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승동 합동측은 미국의 극보수주의자 메킨타이어의 지원을 받았고 고려파와 연합을 했다.
그러나 연합이 이루어진 지 10개월 못되어 재분열되었다.
정리해보자면 1952년 고려파의 분열, 1953년 예장과 기장의 분열 1959년 연동(통합), 승동(합동)의 분열 1963년 고려파의 환원 등...
참으로 볼쌍스러운 분열의 역사를 걸어왔다.
신학과 교리라는 이념의 껍데기 속에 권력추구의 본성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교회의 분열에는 신학적인 차이 외에도 정치, 경제, 지역적인 차이로 인해 분열되기도 한다,
1953년의 박형룡과 김재준의 분열은 정통주의와 신정통주의 혹은 자유주의의 신학적 차이로 인한 분열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서북-영남의 주류세력과 관북-호남의 비주류 세력간의 세력 다툼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예장과 기장이 분열될때 많은 전라도 교회들이 김재준의 기장측으로 합류했는데 사실 전라도는 가장 보수적인 미국 남장로교회의 선교지였다.
이렇게 보수적인 전라도 지역의 교회가 기장측으로 갔다는 것은 무언간 비신학적 요소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59년의 장로교 분열도 에큐메니컬이라는 신학적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박형룡을 따르는 황해도 출신 목회자와 한경직을 중심으로한
평안도 출신의 목회자의 십 년에 걸친 대결과 반목이 그 원인으로 보는 견해도 힘을 얻는다.
교회의 분열에는 이렇듯 신학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이유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분열이 비단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 그리고 유대인교회와 이방인교회의 분열등 성경에도 수 많은 분열의 역사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이 쉽게 통합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소통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삶의 세계는 사로 다른 의미의 세계를 가지게 된다.
그 다른 의미의 세계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할때 비로서 소통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의미의 세계는 대부분 자기 역사 해석에 의해 결정되므로 상대방의 의미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역사를 살펴야 한다.
우리와 상대방이 과연 어떠한 역사적 정황속에서 어떻게 말하고 또 행동했기에 분열이 일어났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상대방의 역사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접근해서는 안되고 기본적인 호의를 바탕으로 이에 접금해야 소통의 가능성이 있다.
바울이 유대교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소통을 위해 어떻게 호의와 지혜를 활용했는지 진지하게 살펴보는 것이 분열과 반목으로 허덕이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
교회에 꼭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진리에 기초한 연합이 또 하나의 사역임을 자각하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극교회의 분열사에 미국교회의 역사가 역시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당시 미국교회는 진화론과 고등비평의 도전을 받고 이었는데 그로인해 독일의 볼트만, 스위스의 바르트등이 중심이 된
신정통주의가 신학의 중심에 서게된다.
그중 바르트에 의견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신학이 인간학으로 바뀌고 주권적이며 초월적인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의 감정에 하나님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자유주의라 비판했다.
당시 독일황제의 전쟁을 지지하는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보고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실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정통주의란 무엇인가?
바르트는 "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되게하자" 를 모토로 하였다.
하나님은 객관이 될 수 없고 언제나 주관이라는 것이다.
적접적으로 인지되는 것은 신의 우상이며, 살아있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말할 수 없고 하나님께 그져 말할뿐이다. 신의 초월성을 강조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도 특정한 시공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닌
단지 하나님이 인간세계를 심판하고 화해하기 위한 게쉬히테라고 보았다.
성경역시 인간의 말이고 그 인간의 말을 통해 초자연적인 신의 계시가 표현된 것이므로 성경무오를 믿지 않는다.
성경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종이교황을 섬기는 것이라 했다.
바르트는 고등비평과 진화론을 다 인정한다.
성경은 인간의 문서에 불과하기에 다양한 비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칼바르트의 신학을 대공황 이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금융지상이 무너지고 실업이 증가하고 경제가 완전히 망가져가고 있을때 인류문명의 발전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한 것이다.
인간의 종교가 하나님의 계시와는 다르다는 바르트의 신학이 미국에서 대환영 받기 시작했다.
때를 맞추어 미국에 신정통주의의 거두 라인홀드 니부어와 폴 틸리히가 미국으로 건너왔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전도와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각각의 이해집단과 국가가 가진 집단 이기심을
경계했다.
그러한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인간이 사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깊게 고민한 인물이다.
버락 오바마도 이러한 견해에 크게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폴틸리히는 바르트, 볼트만과 함께 3대 현대 신학자 가운데 한명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기초위에 계시의 개념을 다른 종교에까지 확대시켜 종교 다원주의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신정통주의와 함께 신복음주의도 등장한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근대 과학을 용인하면서 유신 진화론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또한 고등비평이나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에 반대한 사람들은 메이첸의 제자 칼 매틴타이어가 중심이된 신근본주의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규정하고 공산주의자와의 전쟁을 영적인 전쟁으로 생각했다.
베트남 전쟁의 승리를 위해 가두행진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복음주의와 신근본주의는 한국의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당시 미국은 새로운 신학의 사조들이 밀려들어왔으며 또한 현대주의에 대한 각교파의 대응 방법에따라 선교부가 분열했다.
미국 선교부의 분열은 그대로 한국 장로 고댠의 분열에 영향을 주었다.
장동민 교수
"대화로 풀어보는 한국교회사" 발췌 정리
[출처] 13. 해방후 한국교회의 분열사|작성자 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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