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지역의 재발견]정읍-순창과 쌍화점

도심안 2019. 1. 28. 00:27
[지역의 재발견]정읍-순창과 쌍화점


  • 새전북신문
  • 승인 2009.01.27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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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쌍화점’ 이름은 순창 쌍치면 삼장 쌍구정 산천축제 노래였다.

최근 영화 '쌍화점'이 최악의 불경기 속에서도 최대의 관객이 몰리는 호응을 얻고 있다.

쌍화점은 고려시대 순창 쌍치면 삼장사의 쌍구정 산천축제인 쌍거북 기우제로 불리던 유행가였다. 고려 충렬왕은 애첩 태인 시씨(柴氏)와 이곤의 강간 사건이 일어났어도 이곤을 죽이지 않았던 왕이다.

충렬왕의 비애가 담긴 유행가 '쌍화점'은 70년 후인 공민왕시대에 노래로 불려졌다. 순창 삼장사 연등놀이는 고려 궁중에서 충렬왕이 폐위되자 유행가로 불렸다.

쌍화점의 ‘쌍화점 구렁이가 용의 꼬리를 물고 ‘태산’을 넘어간다'는 본래 쌍구정(삼장) 처녀가 송인을 따라 도시인 태산군청으로 따라 간다는 내용이며, 이것이 고려 궁중악으로 불렸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 시대 ‘삼장’과 ‘사룡’이란 시는 조선시대 쌍화점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쌍화점은 고려 충렬왕 때 지어진 고려가요 또는 향악곡으로 고려사악지(樂志)에는 ‘삼장(三藏)’이라는 제목으로 전하고, 조선시대에는 한시로 개작한 ‘쌍화곡’이 전해지고 있다.

쌍화곡 이야기는 고려 고종43년(1256) 정월에 입암 산성에 몽고군이 침입으로 비롯된다. 이 전투에 고종은 이광(李廣)과 송군비(宋君斐)를 보내 선사(船師) 300명으로 이를 막게 했다.

하지만 이광은 몽고병이 두려워 강화도로 도망치고, 송군비가 이곳을 지키다가 몽고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송군비는 다수의 포로와 4명의 몽고 고급관원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요새지에 집단 거주하던 송씨 세력의 협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씨는 중국어에 능숙했던 바 몽고 포로와 고급관원을 통해 고려와 몽고의 화친을 이뤄냈다. 화친이 이뤄지던 1259년까지 4년간 이들은 정읍 산내 송씨의 본거지인 태산 매죽리에서 기거했다. 송인의 별장에 기거하던 포로 몽고인은 원나라와 연락하여 화친을 도모하고 송인의 딸이 원나라 황제 유모의 며느리로 들어갔다

태인 태산은 원종 충렬왕시대의 최고 세력가 이던 송인의 산천숭배지로 이곳의 산신전은 국사봉 삼장사이고, 수신(용왕)의 기도처는 ‘쌍거북’ 신에게 기도하던 냇가 ‘쌍구정’이다.

이곳은 현재의 정읍 산내면과 순창 쌍치면의 접경지역이다. 쌍화점 노래가 유행하던 시대에 몽고황족과 결혼한 송씨 가문은 정치 중심세력으로 다수의 주민들이 개성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를 계기로 몽고 궁중에서 이곳 마을 이름이며 민요와 삼장(쌍화점)이 대유행했고, 고려사 정사에 기록되는 노래가 됐다.

충렬왕의 애첩이 됐던 태인 시씨(柴氏) 무비(無比)는 본래 태산군(泰山郡)에 살던 시씨(柴氏)의 딸로 몽고 궁중에 뽑혀 들어간 후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충렬왕은 도라산(都羅山)에 왕래할 때는 반드시 그녀를 시종케 했다.

송씨 일가는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시대 들어온 성씨로서 고려시대 이자상, 이자의, 이자겸 등 태인 허씨 권력의 문하생들이다. 송씨 일가는 예전 송나라 사신을 맞이한 장소였던 정읍 태산 음성향 지역을 소유하고 살았다.

이들은 쌍구정에서 송나라에서 유행하던 유상곡수연을 즐겼다. 또한 왕희지가 42인의 제자와 시를 지었다는 지금의 난국정(蘭鞠亭)에 풍류를 즐겼다. 이곳은 신라시대 태산태수 최치원을 비롯해 고려시대 이자겸, 김극기를 비롯해 조선시대엔 태인현감 신잠이 이곳에서 매화도를 그리기도 했다.

이곳은 정읍 산내면, 순창 쌍치면 접경으로 지금의 옥정호 일대 구절초 공원으로 그들의 묘비와 유적이 남아있다. 순창은 이곳에서 ‘국사봉 철죽제’와 ‘전봉준장군 피체지’ 등 축제행사를 벌이고 있다.

/권희덕 국악교육 신지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