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 ' 고려시대 삼장 .사룡 마을에 봄이 왔네'
고려시대 송인을 따라가 왕비로 출세하였다는 산골 삼장마을의 봄 사진
그 충열왕의 애인 시무비 노래하던 마을에 이런 봄이 있었다
송군비장군 입암산성 전투는 고종 43년(1256) 정월 장성의 입암산성에서 벌어졌는데, 다른 지역의 전투와는 달리 고려관군이 주도하였다. 몽고병이 여러 섬을 공격하려고 모의한다는 말을 듣고 장군 이광. 송군비를 보내어 선사 300명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영광에 도착한 이들은 길을 나누어 몽고군을 협공할 것을 약속하였지만 사전에 누설되어 시도하지 못하고 이광은 무서워서 다시 섬으로 들어가고 이곳출신 송군비는 입암산성에 입보하게 되었다.
당시 입암산성 내에는 장정들은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노인과 어린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내장산 북동쪽인 이곳에는 송나라에서 귀화하여 이자겸과 친분있는 송씨들이 태인허씨 세력지역 쌍치면과 산내면 요새지에서 부족으로 살면서 그송씨 송씨들이 송군비 장군의 입암산 전투에 참여하여 대승을 거두게되었다
상상도 못한 세계를 통일한 몽고군의 다수의 포로까지 수용한 지역이 쌍화점 삼장마을과 진삼동, 송감마을에 양성된 이자겸과 허씨 호족의 군사력이 협공하였기에 역전승리하였다
하루는 송군비가 짐직 약한 자 몇사람을 성밖으로 내어 보내니 몽고병이 성안의 식량이 다된 것으로 생각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성아래에 이르렀다. 이에 송군비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들이쳐 이를 격파하니, 살상이 심히 많았고 4명의 관인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송군비는 이곳 정읍 산내와 순창 쌍치면에 사는 호족 송씨 군사력의 호응으로 몽고군을 격퇴시키고 몽고관원을 포로로 잡아서 이곳에서
살게하고 몽고국과 전쟁에서 통역하고 화친하는 인질로 삼았다
그런 시간이 삼벌초군 전쟁등을 거치고 17년이 지나서 야 몽고와 화친하게 되니 이들이 귀화하거나 결혼도하여 몽고인이 살아서
이들이 몽고의 황제의 유모 며느리로 송인의 딸이 들어간다
입암산성 전투에서 포로가된 몽고관원이 17년세월에 거의 이곳 여자를 아내로 맞은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본다
몽고의 부마국이 되어 이들이 몽고인 회회아비가 이곳에 살았다
쌍화점 역사의 현지가 알려저서 관심이 많다 그곳에 가보니 봄이 와서 그 모습을 짝어보았다 .09.4.11
정읍시 옹동면 능향마을에 사는 태인 시씨 처녀가 이곳 암반 냇물에서 유상곡수 술잔을 물에 띠우기로 시를짓고 가무향연에 노래하다가 미모가 뛰어나서 궁녀로 들어가서 충열왕의 애첩이되어 고려국내파 세력의 거두가 되어 충열왕을 모셨다
1256년 부터 1273년 까지 17년간 몽고군 포로와 몽고 고급관원이 포로로 이곳에서 구속되어 통역하는 인질로 살았다
그들이 몽고화 화친한후에 고려에서 고급관료로 이곳 삼장마을 여인을 결혼하고 개성과 몽고로 나간 것으로 추정한다
쌍화점 시 '사룡'에서 "용의 꼬리를 물고 태산으로 넘어간다" 라고 풍자하는 노래가 유행되었다
몽고의 문란한 간통풍속이 이곳에서 정착하여 고려충열왕때 식민지 큰세력의 위치에 있는 몽고족들이 노래한 모양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이곳 삼장사에서 생긴 충열왕 애인 태인시씨 무비의 스켄달을 퍼트려서 세력가 시씨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몽고인이 이곤이 강간하여 더욱 추락시켰다
이곳 물가에서 몽고인 세력을 위한 자주벌어지는 가무향연이 있었다
왕희지의 42인 시짓고 노는 난정기 가무향연 공연하는 여인을 몽고인은 여기서 손목을 잡는다
그 소문이 쌍화점 사룡시에도 , "저 태산바위를 구렁이가 용의 꼬리를 물고 넘어 갔다 "
삼장 산골사람이 서울로 송인을 따라가 충열왕 왕비 충선왕비로 출세하였다는 사실이야기가 사룡이란 시로서 정읍 태산사람들의 노래가 분명하다
고려 현종이 나주피난 길에 태인에서 정박하는 기회에 현종에게 태인허씨 외손녀 미녀 2명이 현종왕비가 된다
백제가요 정읍사 악공을 소유한 태조왕건의 사위 가문이 태인 허씨 호족이다
고려궁중 장악세력 인천이씨 이자연 이자의 이자겸은 태인허씨 후손으로 정읍시 삼산동에 이런 연못을 만들어 정읍사노래 송나라 사신을 맞았다
쌍화점도 정읍사 노래 현재 아리랑 농부가 등 풍의 빠른 곡노래 였다
태인 허씨 후손 고려시대 이자겸이 향 부곡 장원에 사병을 양성하고 고려청자기 도요지를 사유재산으로 생산하여 강진, 부안, 정읍에 두고 있었다
그 자리를 태인 허씨 지역으로 송군비 장군의 몽고군격퇴 공로로 충열왕 시대 송씨들의 소유로 쌍치등면과 산내면의 집성지가 되었다
송인의 집앞 시냇가 암반에서 사신 또는 송인과 고관들이 가무미녀를 데리고 산정상의 바위에
송인을 추모하는 굴암자를 넘어서울로 갔다
고려사 기록은 '궁녀 무비(無比)는 본래 태산군(泰山郡)에 사는 시씨(柴氏)의 딸이었는데, 궁중에 뽑혀 들어가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왕이 도라산(都羅山)에 왕래할 때는 반드시 시종하였다. 후에 세자에게 죽임을 당했다.'(高麗史』충열왕25년 卷122 「列傳」 第35 '宦者')
그러나 충선왕이 페위되고 충열왕이 다시 복위하여 충열왕은 죽은 애인 시씨 무비를 그리워하여 이런 노래가 장안에 유행되어 고려사에 남은 것으로 본다
삼장(三藏)
삼장사 연등회가니
사주가 내 손을 잡네.
이 말이 절밖으로 퍼져 나가면
상좌 네가 소문냈다 말하겠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또 하나의 시 사룡(蛇龍)이 있다
사룡(蛇龍)
뱀이 용의 꼬리를 물고서 태산 기슭을 지나갔다고 들었다.
만 사람이 각각 한마디씩 하여도
두사람의 마음엔 짐작이 있었다네
시냇가 암반에서 사신 또는 송인과 고관들이 가무미녀를 데리고 서울로 갔다
기와집이 송인의 제실이며 저산을 님따라 넘어 가면 태산군청의 도시가 나온다
‘사룡’이란 구렁이, 이무기라는 뜻이다
순창군 쌍치등면에 삼장사 아래 곡골마을 골짜기에 구렁바위 바위 덩어리 굴이 있다
노래를 의미하는 곡골(曲골)마을이 ,삼장마을 냇가에서 국사봉 입구계곡에 있다
여기에 쌍구정이라는 이곳들이 선비들이 시를 읊는 시정 정자가 있었다
화가이며 태인현감 신잠이 여기서 매화도도 그렸다
구렁바위가 있는 골짜기는 신숙주 신말주 신잠의 유람지로도 알려지고 지금은 신씨의 소유 산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는 이무기 굴이라는 소가 있다
그리고 송인의 집 근처 유상곡수 바위 암반석 물가 곁에 조룡수(釣龍水)라는 물웅덩이 소가 있다
송인의 문전성시 벼슬아치가 전국에서 몰려들어 시가와 음악 춤으로 냇물가에서 악공 미인가무 여인이 이들 궁중고관대작의 눈에 들어 서울로 따라 간 이야기로 되어있다
그 중에서 태인 시씨 여인이 절색 미인 으로 가무기예가 뛰어나 충열왕의 후궁 같은 사랑을 받고 살았다
이것을 세상에서 풍자하여 지은노래가 ‘사룡’이다
삼장사는 산골이라서 산넘어 태산군청(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이 서울 같이 여기고 살았다 그래서 태산군청이 있는 곳으로 고관대작을 용으로 표현한 삼장사 산골촌민 다운노래 가사다
또는 충열왕을 용으로 태인 시씨 여인을 구렁이(蛇龍뱀)으로 표현하였다
쌍화점(삼장)시와 사룡의 시를 이어서 기록한 궁중 왕족의 기록문인 고려사에 기록 된다
고려시대 국사봉 삼장사 민요가 여기사람 송인장군의 정권장악으로 궁중음악이되어 고려사 정사에 삼장과 사룡으로 기록되어있다
권희덕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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