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마을(예담촌)
안동은 하회마을이요,
산청은 남사마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청 남사마을은 그 고풍스러운 토담길과 양반 고가들로 유명하다.
그래서 군내에서는 예담촌이라 이름짓고 새로 단장하기에 여념이 없다.
대진고속도로(대전~진주)가 뚫리면서 지리산 가는 길이 빨라졌다.
산청은 예전부터 오지중의 오지라 큰맘 먹지 못하면 갈 수 없는 곳이 었으나
이젠 서울에서 불과 3시간 반 거리다.
한 십년전 이 남사마을을 답사해본 적이 있으나
그때는 주마간산 격이라 한나절 머무르면서 겉만 훑고 지나쳤다.
하지만 그때가 늦여름철이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지만
높다란 담장 사이로 흙냄새와 함께 스쳐지나가는 소슬바람은 잊혀지지 않았다.
담장 너머로 감나무는 울창하고, 돌 담장 사이를 파고드는 담쟁이 넝쿨은
해묵은 전설을 얘기하는 듯 고고한 선비의 기품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높다란 골목길을 휘돌아 설때마다 옛선비들의 글읽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천왕봉에서 흘러와서 우뚝 멈춘
수려한 봉우리 니구산.
그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사수가 조화를 이루고,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친 천혜적 자연
승지로,
장엄한 용혈의 산이 품어 주는 곳에 남사마을이 있다.
쌍룡교구, 청룡과 황룡이 서로 꼬리를 물고 휘돌아 감고
실 개천이 반달 처럼 휘돌아 가는
곳이다.
남사와 상사가 합치니 두 마을이 배 형국이라
마을 안에 우물 파기를
금했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오고
성주이씨의 종가집과 최씨들의 사랑채 였다가 연일정씨의 소유로 된 사양정사가 있고,
도깨비가 보호했다고
하는 둘레가 2M 정도 높이는 13미터 정도 되는 590년된
전설같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 7세에 심었다는 감나무도
있다.
우리 일행이 민박한 곳은 고택 '사양정사' 였다.
원래는 이런 고택에서는 민박이 허용되지 않으며
현재는 민박시설을 새로 짓고 있던 중이었다.
하나 밤 늦게 도착한 우리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신 맘씨 좋은 주인 어르신 께서
민박을 허용하는 바람에 이 멋진 고택에서 이틀 밤을 잘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
행정구역상으로 볼 때 청계를 가운데 두고 남사는 진주에, 상사는 단성에 속하였는데 그때 두 마을의 명칭이 같은 사월리였다고 한다. 1906년에 와서 진주의 사월면이 산청군으로 편입되면서 남사도 단성군 사월면으로 산청에 속하게 되었다가 다시 1914년에 단성군이 단성면으로 격하되어 산청군에 통합될 때 두 마을은 단성면에 속한 남사마을과 상사마을로 분리되었다.
남사마을에서는 수많은 선비들이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하여 많은 수가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은 빛내던 학문의 고장으로, 공자가 탄생하였던
니구산과 사수를 이곳 지명에 비유할 만큼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마을로 유명하다. 그 이름의 변용은 사양정사, 니사재, 이동서당 등의
서재 명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의 주된 성씨는 성주 李씨(약 450년), 밀양 朴씨(약 350년), 진양 河씨(약 700년), 전주 崔씨(약 100 년), 연일 鄭씨(약 80 년), 재령 李씨등 육성(六性)이지만, 현재는 30여에 가까운 다성(多性)마을로 90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 속의 남사마을 인물들을 나열해보자면 고려시대에 윤(尹) 왕후(王后)가 태어났으며, 정당문학 강회백(姜淮百) 이 생장하였고 조선 세종때 영의정 하연(河演)도 이 마을의 출신이며 그밖에 대소과 문무백관이 속출하였으며 특히 구한말에 면우(?宇) 곽종석(郭鐘錫)선생이 태어나 한국 유림 독립운동인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조국 광복의 불씨를 지핀 것으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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