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세계유산 세계유산
2016. 4. 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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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세계유산을 알아봅니다.
창덕궁 [昌德宮]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 의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 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쓰게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 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 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되어있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세웠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원 부용정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 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 성되었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하였다.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 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Ⅳ)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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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華城]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城華籌略 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 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 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 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 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화성성역의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 (보물 제 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팔달문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 디자인,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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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石窟庵]
석굴암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서기 774 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로 칭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공간에는 본존 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 개의 판석으 로 원형 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이며, 석굴 암의 입구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신장을 두고 있으며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 석주를 세웠고 이곳을 지나면 평면원형의 주실로 본존은 중심에서 약간 뒤로 안치되어 있으며 입구 좌우로부터 천부상 이구, 보살상 이구, 나한상 십구로 주벽을 채우고 본존 정후면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 조각에 있어서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내의 보살 들의 유연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있는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 이라 할 것이다.
특히, 주실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 게 늘어진 귀 등 그 모든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 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 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 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에 이름이 높다.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공간에도 본존불을 중심으로 총 39체의 불상을 조 각하였다. 석굴암은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졌다. 신라역사박물관의 석굴암 모형도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는 좁은 통 로를 지나면 궁륭(Dome)천정으로 짜여진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주실의 중앙에는 석 가모니대불이 있고,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범천상(梵天像)과 제석천상(帝釋天像), 보현(普 賢)·문수(文殊)보살상, 그리고 십대제자상(十大弟子像)이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돼 있다. 일찍이 당나라의 현장(A.D602~664)이 17년간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풍물 지리지 성격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썼는데,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바로 그 자리에 대각사(大覺寺)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정각을 이룬 모습의 불상이 발을 괴어 오른발 위에 얹 고, 왼손은 샅 위에 뉘었으며 오른손을 늘어뜨리고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대좌의 높이는 당척 4척2촌이고 넓이는 1장2척5촌이며 상의 높이는 1장1척5촌, 양 무릎폭 이 8척8촌, 어깨폭이 6척2촌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 크기와 이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데, 현장이 보았던 대각사의 그 불상은 현존하지 않고 있어 석굴암에 역사적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과 보살및 제자상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 이르면 한가운데에 높이 350cm의 당당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지닌 석가모니 대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摩觸址印)으로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 기 때문에 성도상(成道像)이라고 한다.
감실은 주실에서의 위치로 보아 지상계와 천상계의 중간을 뜻한다. 이는 교리적인 면에서 보 면 보살이 각자(覺者)인 여래와 무명(無明)중생의 중자적인 존재라는 점과 잘 어울린다. 미륵 보살상의 오른쪽 어깨, 손목, 오른쪽 무릎으로 이어지는 직삼각형이 안정감을 주는 반면 세운 무릎, 비스듬히 얹은 팔, 숙인 얼굴이 그리는 곡선은 변화와 운동감을 주고 있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중상은 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가지 모 습의 신들이며,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 사라 칭했다. 십일면관음보살상 (十一面觀音普薩像) 석가모니 대불이 앉아 있는 곳인 둥근 주실 뒷벽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타나 는 십일면관음보살상 (十一面觀音普薩像)의 아름다운 자태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머리둘레에 열구의 얼굴이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끄는데, 약간의 미소를 머금 은 표정, 화려하게 전면을 장식한 영락(瓔珞:구슬이나 귀금속을 꿰어 만든 장신구) 장식, 유 려하게 흘러내린 천의(天衣), 손가락 발가락의 미묘한 움직임, 왼손은 한송이 연꽃이 꽂혀있 는 병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서 영락을 잡고 정면관의 자세로 서 있는 모습에서 화려함과 원숙 함을 느끼게 한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에 건립된 석굴암은 불교사상과 매우 발달한 수리적 원 리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건축 기술,뛰어난 조형감각으로 완성되었다. 우리가 석굴암에서 느 끼는 장엄미와 숭고미는 이러한 바탕과 그 속에 내재하는 조화율에 있다 하겠다. 석굴암 전각(殿閣). 석굴암의 훼손을 막기 위하여 석굴암 앞에 전각을 지어서 보호하고 있다. 석굴암은 석가모니가 정각 즉,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가시적인 건축과 조각으로 재현한 것이 며, 조각에 있어서도 인위적인 기교나 부자연스러움없이 생명력이 넘치며 원숙한 조법과 탁 월한 예술성이 돋보인다. 절대적인 경지인 정각을 통해 인간 석가모니는 형이상학적 존재인 석가여래가 되고, 속세는 법계라는 이상향이 된다. 석굴암은 신라시대 전성기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유산이며, 불국사는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Ⅰ), (Ⅳ) (Ⅰ) 독특한 예술적 혹은 미적인 업적, 즉 창조적인 재능의 걸작품을 대표하는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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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佛國寺]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 왕때 완공하였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의 건축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 자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볼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병화로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국사의 높이 8.2m의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으며, 높이 10.4m의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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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장경판전[海印寺藏經板殿]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 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장을 보존하 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뿐 장식적 의 장을 하지 않았으며,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 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 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 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 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자로 추정되 는데 이들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 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 (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재위)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 대장경판은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 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 (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 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법보전 내부. 팔만대장경은 동서간고와 수다라장 법보전안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
해인사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교 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 경판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고려각판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 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 이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 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있다. |


종묘 [宗廟]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 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 헌종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그 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향을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 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 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 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였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 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이며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 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나타난 의례 절차, 음악, 무용 등은 중국의 고대문명을 바탕으로 형 성된 하, 은, 주 시대의 의례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대문화의 특징과 의의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고대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때 처음짓고 세조때 다듬은 보태평과 정대업 22곡을 연주하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육일무 등의 춤을 춘다.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 전의 선율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크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 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 물 제821호),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가 있으 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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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 [慶州歷史遺蹟地區]
경주역사유적지구(Ky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지구인 대릉원과 멀리 경주남산역사지구가 보인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鮑石亭)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鷄林),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시설인 첨성대(瞻星臺)등이 있다.
대능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고분군, 노동리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유리잔,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1.남산지구(사적 제311호) 보리사 마애석불(지방유형문화재 제193호) 경주남산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경주남산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경주남산용장사곡 석불좌상(보물 제187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8호)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제909호) 남간사지 석정(지방문화재자료 제13호) 경주남산리 삼층석탑(보물 제124호) 경주배리 석불입상(보물 제63호) 경주남산 불곡 석불좌상(보물 제198호)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제200호)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경주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제666호) 남산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 호) 남산 삼릉계곡 선각 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 경주남산 입곡 석불두(지방유형문화재 제94호) 남산 침식곡 석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2호) 남산 열암곡 석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3호) 남산 약수계곡 마애입불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4호) 남산 삼릉계곡 마애 석가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 남산 삼릉계곡 선각 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9호) 경주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5호) 배리 삼릉(사적 제219호) 신라일성왕릉(사적 제173호) 신라정강왕릉(사적 제186호) 신라헌강왕릉(사적 제187호) 지마왕릉(사적 제221호) 경애왕릉(사적 제222호) 신라내물왕릉(사적 제188호)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성(사적 제22호) 서출지(사적 제138호) 경주나정(사적 제245호) 경주남산동 석조감실(지방문화재자료 제6호)
백운대 마애석불입상(지방유형문화재 제206호)
2.월성지구 경주 계림(사적 제19호) 경주월성(사적 제16호)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내물왕릉, 계림, 월성지대(사적및명승 제2호)
3. 대능원지구
신라 미추왕릉(사적 제175호) 경주황남리고분군(사적 제40호) 경주노동리고분군(사적 제38호) 경주노서리고분군(사적 제39호) 신라 오릉(사적 제172호) 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재매정(사적 제246호)
4.황룡사지구 황룡사지(사적 제6호) 분황사 석탑(국보 제30호)
5.산성지구 명활산성(사적 제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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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高敞和順江華-遺蹟]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의 일종으로 영어로는 돌멘(Dolmen)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거석기념물의 하나이며 피라미드(Pyramid), 오벨리스크(Obelisk)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등이 모두 거석문화의 산물이다. 우리나라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그 중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이번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은 밀집분포도,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유럽, 중국, 일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구조,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인 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 은 유적이다.
고창고인돌유적 고창고인돌유적은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일대에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0톤 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 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공존하고 있다.
화순고인돌유적
화순고인돌유적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견되어 보존 상태가 좋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강화 부근리고인돌유적
강화고인돌유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1.고창고인돌유적
고창지석묘군(사적 제391호)
2.화순고인돌유적 화순 효산리 및 대신리 지석묘군(사적 제410호)
3.강화고인돌유적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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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자연유산, 2007 )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제주도 화산지형의 빼어난 자연경관, 지질학적 중요성, 독특하고 풍부한 생태계가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핵심지역과 주변 의 완충지역을 합치면 총면적이 188.4㎢로 제주도 전체 면적의 10.3%에 달한다. 세분하면 한라 산 천연보호구역(164.40㎢),거문오름 용암동굴계(22.36㎢), 성산일출봉 응회환(1.68㎢) 세 지 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은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용암동굴계등 3개이다. 한라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서 화산 활동에 의해 생성된 순상화산체이다. 성산일출봉은 제주 도에 분포하는 360개의 단성화산체(cinder cones: 제주방언으로는 오름이라 함)중의 하나이 며, 수성화산체로서 해안선 근처에 뛰어난 경관을 제공하는 응회구이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지금으로부터 약 10~30 만 년 전에 거문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으로부 터 여러 개의 용암동굴이 만들어 진 것이며, 이 동굴계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신청된 동굴은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그리고 당처물동굴이다.
제주도는 약 180만 년 전부터 역사시대에 걸쳐 일어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졌다. 한라산 정 상부에는 한라산 조면암과 백록담현무암이 분포하며 한라산조면암은 높은 점성을 갖고 돔 상으로 솟아 한라산을 더 웅장하게 만들고 있다.
해뜨는 오름으로도 불리는 성산일출봉은 약 4만에서 12만년 전 얕은 수심의 해저에서 수성화산 분출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응회구이다. 높이 182m로 제주도 동쪽 해안에서 거대한 고성처럼 자리잡고 있는 이 응회구는 사발 모양의 분화구를 잘 간직하고 있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용암동굴은 만장굴로서 이 동굴의 길이와 규모는 세계적이다. 만장굴과 김녕굴은 길이뿐만 아니라 통로의 규모면에서도 세계적이다. 또한 벵 뒤굴은 미로형 동굴로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통로의 형태를 보인다. 대부분의 용암동굴은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다양한 규모와 형태, 미지형, 그리고 동굴생성물을 보여준다.
세계적인 경관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동굴은 제주도 해안 저지대의 용천동굴과 당처 물동굴이다. 이들 동굴 내에는 용암동굴 내에서는 흔히 볼수 없는 석회질 동굴생성물이 성장 하고 있으며, 이들 동굴생성물의 규모, 형태, 분포 및 밀도는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라 평가된다. 특히 종유관, 종유석, 석순, 석주,휴석, 커튼, 동굴산호 등, 아주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잘 보존 된 이 동굴들은 전 세계적으로 용암동굴 내의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2차 동굴생성물이 가장 발달된 동굴로 평가된다.
당처물동굴은 규모가 매우 작은 동굴이지만, 이 동굴 내에서 발견되는 석회질 동굴생성물은 세 계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용천동굴의 큰 규모와 석회질 동굴생성물은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장관을 이룬다. 이처럼 제주도의 동굴은 학술, 문화, 산업 및 관광 자원의 면에 서 매우 중요하고, 수많은 측화산 및 용암동굴은 지구의 화산 생성과정 연구에 있어 큰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주도는 생물다양성보전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산 관속식물의 약 절반이 제주도에 자생하며 약 200여종의 한국 특산종이 분포한다. 또한 한국의 멸종위기종 및 보호야생종의 약 1/2이 제주도에 분포한다. 제주도의 정상부에는 빙하시대에 남하했던 한대성 식물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저지대와 섬의 난림대에도 많은 고유종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한라산은 생태계의 보고로서 식물 총 1,565종과 동물 1,179종이 자생하고 있다.
2007.6.27(수)일, 뉴질랜드 크아이스트처치에서 열린 제3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제주화산 섬과 용암동굴(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 재되었다.
제주도는 수많은 측화산과 세계적인 규모의 용암동굴, 다양한 희귀생물 및 멸종위기종의 서식지가 분포하고 있어 지구의 화산 생성과정 연구와 생태계 연구의 중요한 학술적 가치 가 있으며,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의 아름다운 경관과 생물· 지질 등은 세계적인 자연유산으 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자연유산기준 (vii), (viii)
(vii) 최상의 자연현상이나 뛰어난 자연미와 미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을 포함하여야 한다.
(viii) 생명의 기록, 지형의 발달에 있어 중요한 지질학적 진행 과정, 또는 지형학이나 자연지리 학적측면의 중요 특징을 포함하여 지구 역사상의 주요 단계를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이어야 한다.
1. 한라산(漢拏山) 천연보호구역
제주도 중심부에 위치한 한라산의 해발 600∼1300미터 이상의 산악 지역과 일부 하천을 아우르 는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은 196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1950m의 한라산은 360여 개 의 기생화산(제주도에서는 오름이라 부른다)을 거느리고 있다. 정상에는 깊이 108m, 둘레 1720m의 화구호(火口湖) 백록담이 있으며, 이외에도 물장올, 소백록담, 어승생악 등 여러 호수가 있다.
한라산은 특히 생태계의 보고로서 식물 1900여 종, 동물 1200여 종이 분포한다. 정상 부근에는 한국고유종인 구상나무가 자라며, 초원이나 암벽에는 암매, 구름떡쑥 등의 희귀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이외에도 노루, 오소리 등의 포유동물, 황초롱이, 새매, 소쩍새 등의 조류가 관찰되고 있다.
2. 성산일출봉 응회환 [城山日出峰 凝灰環]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에 위치하는 성산일출봉은 수중화산 폭발로 형성된 전형적인 응회환 (tuff ring)으로, 파도의 침식으로 지층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이채롭다. 해발 182m로 정상에는 지름이 600m에 달하는 거대한 분화구가 있다. 고운 화산재가 분화구 둘레에 원뿔형으로쌓여 경관이 매우 수려하며,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해 뜨는 광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주변 해역에는 127종의 해조류와 177종의 바다동물이 서식하는데, 한국 고유종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 응회환
식지 않은 응회암층에 돌이나 화산탄들이 날아와 박혀 응회암층을 찢어 생기는 구조로 이것 을 토대로 큰 분출이 몇 번 있었는가와 화산이 분출한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3.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거문오름은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있는 말굽형 분화구로 해발 456미터이며, 거문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이 경사면을 따라 북동쪽으로 흘러가면서 제주도의 명물인 20여개의 용암동굴을 만들어 내고 있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의 동굴들은 특이하고 복잡한 구조와 미적인 아름다움, 규모와 길이는 물 론,용암지형의 보존수준과 접근성 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제주도화산지 형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고 있다. 총 길이 7420m, 최대 폭 23m, 최대 높이 30m인 만장굴은 크고 화려할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아 오래 전부터 관광지로 각광을 받아왔던 곳이다.
세계자연유산등재 노력이 한창이던 2005년 발견된 용천동굴은 용암동굴인데도 석회동굴의 특 성을 지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뱀이 기어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해서 ‘사굴’이라고도 불 리는 김녕굴,내부 구조가 복잡하기로 유명한 벵뒤굴, 길이는 짧지만 탄산염 동굴 생성물이 발달 되어 볼거리가 많은 당처물동굴 등이 특히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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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하회마을은 조선 중기인 1600년대부터 풍산류씨들이 모여 주택과 서원 등을 건축하고 마을 을 조성한 풍산류씨의 집성촌이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집성촌은 전국 여러곳에 형성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소멸되거나 변형되어 그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안동하회마을은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반의 주거문화를 대표 하는 양진당과 충효당, 북촌댁과 서원건축의 백미인 병산서원과 같 은 옛 건축물들은 빼어난 건 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하회마을은 주변 자연경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 남·서 방향으로 감싸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부수형' 또는 '태극형'이라는 명국으로 알려 져 있다. 이곳에는 풍산류씨 겸암파(풍산류씨 14대손인 겸암 류운룡의 대종가 계열)와 서애파 (조선 선조때 명재상 서애 류성룡의 지파)가 살고 있다.
마을은 중앙 길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는데, 북촌의 대표적인 주택으로 는 양진당(보물 제306호)과 북촌댁 (중요민속자료 제84호)이, 남촌의 대표적인 주택은 충효당 (보물 제414호)과 남촌댁(중요민속자료 제90호)이 있다.
같은 독특한 건축들이 자연친화적인 마을구성과 건축배치를 이루면서 산재해 있고, 별신굿과 별신굿때 쓰이던 하회탈,부용대에서 벌어지는 줄불놀이 같은 독특한 민간놀이가 전승되고 있 다. 또한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군문등록(軍門謄錄, 보물 제160호) 등을 비롯하여 서애 선생의 수많은 전적과 교지들이 영모각과 충효당에 소장되어 있다.
양동마을은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에서 형상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16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요 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된 민속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한 이래 지금까지세거(世居)해온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양대문벌을 이루고 있다.
양동마을에는 월성손씨의 종가인 서백당과 여강이씨의 종가인 무첨당을 비롯하여 관가정, 향단 등 조선시대 양반주택들과 하인들이 살았던 초가집들, 그리고 이향정,심수정 등의 정자와 서당인 강학당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옛 건물들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민속과 함께 잘 보존되고 있다.
▲ 양동마을 무첨당(無添堂)
양동마을의 지세는 산등성이와 골짜기의 구성이 勿자형으로 작은 산등성이와 골짜기에는 반가 (班家)들이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그 아래에는 가랍집들이 위치하고 있어 조선시대 신 분제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공간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양동마을은 번성 당시의 마을 구성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위치(穴자 형상의 위치)에 배치된 주요 건물들은 모두 보물(무첨당 등 3건)과 중요민속자료(수졸당 등 11건) 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이곳은 중요민속마을 지정 이후 엄격한 고증에 의해 보수·관리되고 있어 본래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 세계유산적 가치 -
14-15세기 조성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마을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 사상을 잘 반영한 경관 속에 전통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음. 또한 조선시대 유교 교육의 중심지답게 유교적 삶의 양식과 전통문화를 현재까지 잘 계승하고 있음.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III), (lV)
(III)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IV)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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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築城)하였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沈器遠)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 하여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賦役)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堞)이고, 4문(門)과 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다만 성의 둘레가 6,297보(步), 성가퀴는 1,897보라고 하는 등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설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간(間) 반, 하궐(下闕) 154간이었다. 재덕당(在德堂)은 1688년(숙종 l4)에 세웠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을 옮길 우실(右室)도 세웠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客館: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관아로는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 등이,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練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鐘閣)·마랑(馬廊)·뇌옥(牢獄),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溫祚王廟), 서낭당·여단(厲壇) 등이 들어서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僧軍)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聖軍)으로서의 불도(佛徒)의 힘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도 승려 각성(覺性)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옥정사(玉井寺) 외에 개원(開元)·한흥(漢興)·국청(國淸)·장경(長慶)·천주(天柱)·동림(東林)·동단(東壇)의 7사(寺)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 고, 여기에는 전(前)·좌·중·우·후의 5영(營)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 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陣)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守禦將臺라고도 함) 하나만이 남아 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 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八作)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板門)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 있다. 성문은 홍예문(虹霓門) 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單層) 문루(門樓)를 올려 세웠는데,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和議)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役事)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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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역사유적지구
[출처]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작성자 권영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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