孤雲 崔致遠선생이 泰山郡 태수 在任시 만든
백귀(白龜) 전설을 追跡하다
2017년 10월 12일.
井邑市 七寶面 銀石洞 (泰山,吳元根)
孤雲 崔致遠선생이 태산군 태수 재임 시 만든
백구(白龜) 전설을 追跡하다
머리말 : 정읍시 칠보면(태인현 고현내면)에는 고운 최치원선생이 태산군 태수로 재임 시 만든 2개의 유적이 있는데 하나는 유상대이고 또 하나는 성황산 아래에 비보풍수로 살을 제거하려고 백귀(白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石龜는 2개가 전해져 왔는데 백귀(白龜)와 청귀(靑龜)로 청귀(靑龜)는 유상대 인근에 있었나 어느 해인가 홍수로 유상대와 두 개의 석귀가 사라진 사실을 문헌적 자료를 통하여 위치를 확인 전설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한다.
목차
(1) 1993년 칠보면지에 기록된 백귀(白龜)이야기
(2) 校印 桂苑筆耕集序 서유구(徐有榘)
(3) 동학당 수계안 기록
(4) 동학당 전답안 기록
(5)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선생이 그린 칠광도(七狂圖)
(6) 김균(金均)의 염재집중 태산고적 22首 詩 中 二石龜
(7) 유상대와 석귀는 언제 사라졌나?
(8) 칠광도에 그려진 백귀(白龜)에 위치 추정
(9) 칠광도에 그려진 후송정과 태산사(칠보초등학교 자리)
(10) 대홍수에 사라진 두 개의 석귀에 현재 위치는?
(11) 결론
(1) 1993년 칠보면지에 기록된 백귀(白龜) 이야기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 기슭에 송정이 있고 송정 아래에는 지금에 칠보천 냇물이 부딪쳐 흐르기 때문에 패여서 소를 이루고 있다 소가 있는 냇가에 거북이 모양의 하얀 바위가 있어 이것을 백구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좀 더 내려가서 지금 칠보장터 쯤 되는 거리에 파란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어 이것을 푸른 거북이라는 뜻으로 청구라 했다. 백구의 바위에서는 여름철이면 술상을 차려놓고 천렵(川獵) 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거북이 바위는 천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신라 말 최치원 선생이 태산군수를 재임하여 산의 살(殺)을 제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그동안 병란이나 천재가 없었다 한다.
지금 송정 아래로 흐르는 "자라내" "자랏내" 흔히 부르는데 이는 "거북이"(자라와 비슷함) 바위로 말미암아 생긴 이름인 것이다.
"자라내"(鰲川)병신년(1830년경) 홍수로 물길이 밖으로 돌아 빠지는 바람에 거북이 바위는 흘러 내려온 모래에 묻혀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거북이 바위의 위치가 어느 곳인지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에 칠보천은 1930년대 섬진강 칠보발전소 완공과 동시에 이루어진 소로 공사로 물길이 새로 형성된 것이다.
(2) 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서유구(徐有榘)]
계사년(1833, 순조33) 가을에 내가 호남을 안찰하며 순시하다가 무성(武城)에 이르러 공의 서원을 배알(拜謁)하고는 석귀(石龜)와 유상대(流觴臺) 사이를 배회하면서 유적을 둘러보노라니 감개가 새로웠다.
그때 마침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홍공(洪公)이 이 문집을 부쳐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 년 가까이 끊어지지 않고 실처럼 이어져 온 문헌이다. 그대는 옛글을 유통시킬 생각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기쁜 한편으로,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커질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얼른 교정을 하여 취진자(聚珍字)로 인쇄한 뒤에 태인현(泰仁縣)의 무성서원(武城書院)과 합천군(陝川郡)의 가야사(伽倻寺)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갑오년(1834, 순조34) 7월 보름날에
達城 서유구(徐有榘)는 湖南布政司의 관풍헌(觀風軒)에서 쓰다.
➊ 서유구(1764~1845) 선생은 1833년 2개의 석귀와 유상대를 보고 1834년 7월에 글을 쓰셨기 때문에 1833년까지는 석귀와 유상대가 확실하게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3) 동학당 수계안 기록
생략~
동강 조상공(東崗 趙相公)과 모주(慕洲/김시보) 김선생이 이 땅의 수령으로 있어서 변권(弁券)의 글이 있게 되어 지난 자취를 거스를 수 있으니 다시 어찌 번거롭게 하리오. 불행하게 중년에 재사(齋舍)는 퇴폐되고, 재화(財貨)가 흩어지니 강마(講磨)하던 장소가 곧 빈터가 되었다. 대방(呂大防)의 남전(藍田)의 향약은 어느 곳에서 가히 꾀하며, 주자의 남강(南康)의 규범은 훗날 불일간에 회복하기는 어려우리라, 나는 탄식한지 오래되었다.
지난 갑진(1844)년 간에 부로(父老)들에게 통고하고, 동원들을 두루 깨우쳐 재사와 장토(莊土)와 남은 물건을 방매하여 돈을 기르자하니 모두 의견이 일치되었다. 7,8년간에 마침내 실효를 거두었다. 나는 조그마한 도움이 있었을 뿐 실로 동간(東幹) 김륵(金玏)과 김귀흠(金龜欽) 양사문(兩斯文)의 근로한 지극함의 공이다.
생략
금상 5년 甲寅(1854) 7월 눌암선생 10대손 宋彦浩 謹識
(東崗 趙相公) : 조상우(趙相愚.1640.인조 18∼1718.숙종 44)
태인현 현감 재직 기간 1682, 8월 ~ 1683, 11월
모주(慕洲) 김선생(金先生) : 金時保(1658~1734)
태인현 현감 재직 기간 1704(갑신)년 2월 ~ 1706(병술)년 4월
(4) 동학당 전답안 기록
옛적에 신영천(申靈川)이 이 현을 다스릴 때 4학(四學)이 있었으니 본면(本面)의 동학당(東學堂)이 곧 4학중 남학(南學)이다
성화(成化) 연간에 정불우헌(丁不憂軒)은 성조(聖朝)의 명신으로 늙어 이 마을에 은퇴하였다. 송려원군(宋礪原君), 김성재(金誠齋), 김구례(金求禮)제현과 함께 동학당을 창설하니 규모는 한결같이 여대방(呂大防)의 남전 향약에 의하여 과실상규(過失相規) 환난상구(患難上規)요, 한결같이 주자(朱子) 녹동강규(鹿洞講規)에 의하여 박학 심사(博學 審思) 명변 독행(明辯 篤行)이다.
그 후 송눌암(宋訥菴), 김월봉(金月峯), 김원모당(金遠慕堂), 김췌세(金贅世), 정묵재(鄭黙齋), 김세마(金洗馬), 같은 현인들이 고규(古規)를 윤색(潤色)하고 후생을 인도하여 도우니 문학이 빈빈(彬彬)하고 풍속이 순순(淳淳)하여 5성씨 대동계(五姓氏大同契)모임이라 칭하였다.
동강 조상공이 그 서(序)를 기술하고 모주 김공(慕洲 金公)이 그 발문을 찬하였다. 기갑(己甲)의 대침(大侵)으로부터 당우(堂宇)는 퇴패하고, 재력은 쇠잔하여 강석(講席)은 문득 채소밭이 되고, 고례(古禮)는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게 되었다. 고로(古老)들은 다만 전일의 미규(美規)를 말하고, 후인들은 금일에 행하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탄식할 뿐이다.
다행히 눌암의 10대손인 언호(彦浩)씨와 김한정(金閑亭)의 9대손 륵(玏)씨, 김췌세의 7대손 귀흠(龜欽)씨가 학당이 잔폐(殘廢)함에 개연히 당와(唐瓦)를 거두어 팔고 기지(基址)를 싼값으로 판즉 재산이 25꿰미에 불과하였다. 길거(拮据)한 후 십여 년에 학우(學宇)를 세우고 널리 장전(莊田)을 두게 되니 많은 선비들의 수요로 이바지하기에 족하니 거의 전인의 규모를 회복하였다.
생략~
기미(1859년) 11월 上澣 後學 金陵後人(도강김씨)
김인흠(金麟欽)謹序, 김용흠(金用欽)謹書
➊ 1833년부터 1843년까지의 간지이다.
1833(癸巳)1834(甲午) 1835(乙未) 1836(丙申) 1837(丁酉) 1838(戊戌)
1839(己亥) 1840(庚子) 1841(辛丑) 1842(壬寅) 1843(癸卯)
(5)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1848~1941)선생이 그린 칠광도(七狂圖)
성황산 아래 원촌마을과 가운데 동편마을, 앞에 송산마을이다
(6) 김균(金均 : 1888~1978) 염재집중 태산고적 22首 詩中 二石龜
二石龜
二石象龜靑與白 隨波隱見幾多詩
如非神物經彫琢 文仲作虛從可知
(7) 유상대와 석귀는 언제 사라졌나?
➊ 서유구선생이 계원필경집 서문에 1833년에 유상대와 석귀를 보았다고 기록하였으니 1833년까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➋ 고현내면에 동각 수계안과 동학당 전답안 기록을 보면 모든 건물이 무너져 빈터가 되는 피해를 당하고 몇 년이 지난 후 1844년 눌암공(송세림) 10대손 송언호(宋彦浩)가 추진하여 김귀흠(도강김씨), 김용 등이 노력하여 10년 후인 1854년에 완공을 이루게 되면서 남학당에서 동각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편액은 남학당이라 하였다.
➌ 동학당 전답안에 기갑(己甲)의 대침(大侵)호로부터 당우(堂宇)는 퇴패하였다. 이는 남학당이 1834년 홍수로 크게 훼손되어 1844년에 가서야 복구를 논의하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54에 가서야 중수되었다.
여기서 기갑(己甲)의 대침(大浸)이란 1834년 갑오년에 대홍수가 있어 곡식을 수확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홍수로 남학당이 훼손되었는데 20년이 지난 1854년에 중수하였으니 실로 엄청난 홍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➍ 대홍수의 피해는 1789년 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는 嘉陽里와 진종리 2개의 마을이 사라졌다. 가양리는 남전에 서쪽에 있었던 마을로 礪山宋氏로 高麗末期에 수은공(송교)이 산내면 매죽리로 낙향한 이후 손자인 宋繼性이 다시 태산군 군내방 가양리에 入鄕하었다.
嘉陽里가 홍수로 마을이 없어진 관계로 가양리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졌지만 1993년 칠보면지 54면에 송계생의 증손인 정순왕후가 가양촌에 살으셨다고 기록이 있고, 송세림이 무술 연마하던 곳이라는 구전도 있지만, 현재 宋繼性 유허비는 동편과 남전마을 중간에 동편쪽에 세워져 있다.
➎ 道康金氏 장파 김경흠(성은공:1815~1880)은 춘우정(金永相:1836~1911)에 아버지로 당시 송산 마을에 살았는데 폭우로 강가에 있던 전답이 자갈 밭이 되는 피해로 고부(정우면 산북리) 처갓집으로 이사하였다. 김영상 1836年에 태어나서 1851년에 아버지를 따라 원촌마을로 돌아왔는데 이때 춘우정에 나이 16살이었으며 성은공과 춘우정에 문집이 전한다.
➏ 1834년 홍수는 古縣內面에 물길도 바꾸었다.
조선시대 고현내면에 물길은 3길로 추정되는데 산외면 화죽리에서 내려오는
강물이 고당산(칠보산)이서 발원한 물줄기가 반곡리를 거쳐 남전, 송산마을 유상대를 지나 두 물줄기가 합해져서 후송정 아래로 모인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반곡리에서 물줄기가 갈라져 장구동 아랫 쪽으로 흘러 은석동과 원촌 향도동에서 내려오는 물과 만나 원촌마을 앞을 지나 후송정 아래로 모였다가 묵동과 태인으로 내려갔다
1834년 홍수 이 후 반곡리에서 장구동으로 내려오는 물길이 막혔고 1929년 12월에 수력전기발전소 착공되어 1931년에 준공되었고 導水路 또한 같이 건설되어 현재와 같은 물길이 만들어졌다.
(8) 칠광도에 그려진 白龜(거북바위)에 위치
➊ 사진은 채용신선생이 1910년에 그린 칠광도에 부분으로 후송정 아래 작은 소가 있고 원촌마을 큰 왕버들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왕버들나무 아래에 초가집은 도강김씨 국헌 김기술(1849~1929)이 태어난 집으로 추정되며 국헌에 후손이 살고 있었는데 1980년대에 없어진 듯하다.
➋ 백귀(흰거북)에 위치는 현재 원촌마을 입구이다.
➌ 청귀에 위치는 1970년 무렵에도 강가에 몇 가구가 살았던 부근으로 현재 태산선비문화관 앞으로 추정된다,
➍ 채용신선생은 태인에 낙향하여 아들과 함께 사진관을 운영하며 초상화를 그렸는데 1910년에 은석동 김직술(1850~1920) 집에 머물면서 초상화와 칠광도 등을 그렸는데, 당시에는 유상대와 석귀가 없었는데, 조언으로 석귀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석지 채용신(1848~1941)은 은석마을 소지동에 사시던 김균(念齋)선생 집에 머무르면서 김균에 조부인 춘우정(金永相:1836~1911) 초상화와 만경강투수도를 그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9) 칠광도에 그려진 후송정과 태산사(칠보초등학교 자리)
➊ 후송정은 화개헌 김직술(金直述)선생의 주도로 1899년에 건립되었는데 현재에도 후송정과 왕버들나무와 느티나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➋ 태산사는 1907년에 김직술 등 유림들이 면암 최익현선생을 기리기 위해 古縣內面(칠보면) 대주평(大舟坪)에 태산사 건립하였는데 어느 해인가 훼철되고, 1919년에 현 칠보초등학교에 전신인 무성공립보통학교가 개교되었다.
➌ 현재와 같은 물길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현재 학교다리 위치에 징검다리가 그려져 있는 것과 후송정 아래 소와 두 개의 석귀가 칠광도에 그려진 것을 확인할수 있다.
(10) 1834년 대홍수에 사라진 두 개의 석귀에 현재 위치는?
➊ 위와 같이 살편본 바 고현내면(칠보면)에 대홍수는 1834년에 발생하였고, 이 때 홍수로 유상대와 두 개의 석귀가 현재까지 땅속에 파묻혔있다.
➋ 백귀(白龜)가 있었던 자리는 원촌마을 입구 영성정 느티나무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➌ 청귀(靑龜)가 있었던 장소로 추정되는 태산선비문화관 앞이다.
(11)결론
지금까지 자료를 살펴본 바와 같이 태인현 고현내면(정읍시 칠보면)에 1,000년 넘게 전해져오는 백귀에 전설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청귀에 위치도 대략적으로 파악이 되었다.
백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인근에 사시는 姜先生께서는 적극 협조하시겠다는 뜻도 피력하였지만, 현재 발굴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임으로 백귀와 청귀의 추정 위치에 먼저 기록이라도 남겨놓는다면, 전설로만 내려오는 최치원 선생의 전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천년에 전설이 오늘 되살아나는 감개무량한 일이다.
또한 기록이 있는 시대부터 군 현의 중심이 었던 고현내면에 역사가 한층 깊이를 더해 줄 것이며 칠보면 문화적 콘텐츠에 다양성을 더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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