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고운 최치원 선생은 언제 태산군 태수로 부임하였나?

도심안 2018. 8. 23. 23:24

고운 최치원 선생


(1)고운 최치원선생은 언제 태산군 태수로 부임하였나??

 

857-태어 나셨다

868-12-당나라 유학

874-18-빈공과 급제

884-28-겨울에 귀국준비

885-29-3월 귀국-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886-30-

887-31세정강왕 886,07,06~887,07,05

893-37-부성군 태수(현재 서산군)

894-38-시무 10조 올리다

 

삼국사 본전三國史本傳

헌강왕(憲康王)이 공을 그대로 머물게 하고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를 제수하였다. 공 자신도 중국에서 배워 얻은 것이 많았으므로 귀국해서 가슴에 쌓인 포부를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쇠퇴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太山郡) -(필자:지금의 정읍시 칠보면 원촌마을에 관아가 있었다) - 태수(太守)가 되었다.

 

당 소종(唐昭宗) 경복(景福) 2(893)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7년에 해당한다. 공이 그때에 부성군(富城郡) - 지금의 서산(瑞山)이다.


(헌강왕 875,07,09~886,07,05)


(정강왕 886,07,06~887,07,05)


(진성여왕 887~897)


  888년 위홍 사후 진성여왕


최치원 선생이 태산군에 태수로 부임한 연도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삼국사기 기록와, 서유구 선생의 계원필경집 서문을 참고하여 대략 헌강왕 사후로 추정할수있다

  

헌강왕이 당나라 사신으로 왔던 최치원 선생을 신라 관직을 내려 중용하였으나, 불과 1년이 지날무렵 헌강왕이 卒하였고, 다음 정강왕  1년에 짧은 재위 기간중 병사하여 진성여왕이 보위를 이어갔다.

  

당시 헌강왕이나 정강왕 진성여왕 모두 최치원 선생을 가까이 두고 당나라와 외교를 생각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최치원선생은 기존 골품제에  한계가 있어  정치적 신분이 다른 이들속에서 자신에 꿈을 펼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계원필경집 서문-1834년 7월 서유구 씀

그 로부터 4년 뒤에 국신사(國信使)에 충원되어 동방으로 돌아와서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을 섬기며 한림 학사(翰林學士)와 병부 시랑(兵部侍郞)이 되고 외방으로 나가 무성 태수(武城太守)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가족을 이끌고 강양군(江陽郡)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는데, 그의 묘소는 호서(湖西)의 홍산(鴻山)에 있다. 어떤 이는 공이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나, 이는 허망한 말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885년에 귀국하여  3년에 짧은 기간동안 3명에 왕이 바뀌고 진성여왕에 타락등으로 중앙정치에 한계를 느꼈을 것으로 추정되며  외직에 나간 연대를 추정해본다.

(1) 정강왕 사후 진성여왕 즉위 후 숙부이자 남편인 위홍(魏弘)이 정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자 정치에 한계를 느끼고  정강왕 사후인 887년 7월 이후에 태산군 태수로 나갔을 것이라 추정해볼수 있다


(2) 진성여왕이 즉위 후 위홍이 정치 실세로 정국이 안정되었으나 위홍에 사후 진성여왕에 실망을 느껴 888년에 외직을 나갔을 수도 있다.. 

 

선생도 귀국하여 짧은 기간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당시 신라는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혼란했던 시기였고 선생은 신라를 개혁하고자 894년에 시무십조를 올린것으로 보아 신라에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누구보다 더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891년 원주에서 양길과 궁예의 반란

892년 완산주(전주)에서 견휜의 반란

 

(2) 태산군(太山郡)은 현제 어디인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4권 전라도(全羅道) 태인현(泰仁縣)

 

건치연혁태산군(太山郡)은 본래 백제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는데,

신라 때 태산으로 고쳤다. ()는 태()로도 통한다. 고려 때 고부군에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고, 공민왕 3년에 현사람으로서 원 나라 사신인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나라에 공이 있다 하여 군으로 승격시켰다.

 

인의현(仁義縣)은 본래 백제 빈굴현(賓屈縣) 부성(賦城)이라고도 한다. 이었는데,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치어 태산군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인의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태산감무에게 와서 겸하게 하였으며, 현종 10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9년에 또 합치어 한 고을로 만들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을 거산역(居山驛)에 옮겼다.

 

조선 태종9(기축년) 118일 태산군과 인의현 합하여 태인현(泰仁縣)이 되었다

 

백제시대에는 대산군(大山) 신라시대에는 태산(太山, 泰山)군 태산현 지명으로 변천되어 오다 1409년에 태산군과 인의현이 합하여 태인현이 되었다. 태산군에 관청 터는 현제 지명으로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성황산 앞에 있는 무성서원으로 추정된다 .

 

지금까지에 자료는 1936년 정읍군지에 칠보초등학교 자리로 추정된다 하였으나, 칠보초등학교 자리는 평야(대주평)로 수해가 많은 논가운데 관청을 세운다는것은 누구나 이해하기 어려울것이다.

 

태인현은 19143월 정읍군으로 합병되었다

대시산군(大尸山郡)-대산군(大山郡)-태산군 태산현-태인현-정읍군 -정읍시 칠보면 인근 면


고운 최치원 선생을 모시는 정읍시 칠보면 원촌마을 무성서원 내 태산사 (泰山祠)

 

 

http://blog.daum.net/pop226/877

(정읍시 칠보면  태산군 관아 터를  무성서원 자리로 추정한다.)


출처 : 정읍시 칠보면 향토사
글쓴이 : 태산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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