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여산송씨 고현내면 입향조는 고려말 송계성

도심안 2018. 7. 19. 04:22


송분--송린--송교(태산군 산내면 입향조)--송희--송계성--송복원--송현수--정순왕후


여산송씨 칠보면 입향조는??


여산송씨 지신공파  족보(1975년 7책 발행)


여산송씨 수은공(송교)께서 처음으로 고려 1300년 초에  터를 잡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송계성의 손자인 송연손에 비문을 보면 고부에 별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부에 전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송계성이  1376년 9월에 고부 별장의 산방에서 공부하는 중에 어린나이에 왜적에 피랍되어 3년을 고생하다 천우신조로  탈출하여 언제인지 알수없지만 고려말 산내면 운주산 아래에서 고현내면(칠보면) 가양리에 터를 잡으신것으로 보이고 동생인 송계양은 고부에 세거지를 이루게 된다.  


 송분--송린--송교--송희--송계성--송복원--송현수--정순왕후



 송분--송린--송교--송희--송계성--송복원--송현수--정순왕후


송계성의 큰 아들인 송복원의 3째 아들은 송현수가 국구가 되었으나 역모에 몰려 후손들은 대부분 경상도와 경기도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태인현 인근에 고을에 살았다


둘째인 송복형의 아들들은 고현내면 인근에 살았으며  복형의 둘째 아들인 송위의 아들 송인지의 효행정려각이 동편마을에 현존한다.


3째 아들인 송복리의 아들 송연손은 중종이 잠저시 스승이었던 관계로 이후 후손들이 번창하였는데 둘째아들인 송세림은 문과급제하였고 어면순이라는 패관문학을 남겼으며 무성서원에서 후학지조를 하였여 무성서우너에 배향되었고, 원촌 향도동에 무너진 삼층석탑을 중수하기도 하였다. 3째 아들 송세형도 문과 급제하여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송세형의 손자인 송여종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낙안군수, 전라좌수사 신호장군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우며, 이순신 장군과 함께 100여번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전쟁중에 실시한 무과에 급제한 명장이었다  


송계성의 여동생은 세종대왕의 8째 왕자인 영응대군과 결혼하여 막대한 권력과 부를 이루었고 조카인 송현수가 반역죄로 죽었으나, 세조의 막내동생인 영응대군의 부인이었던 관계로 이후 성종 연산군과 관계가 좋아 송현수의 아들들이 사사되지 않고 관직에도 오르는 버팀목이 되는 든든한 고모가 였다.


정순왕후입장에서 남편을 죽인 세조가 하사한 부를 받아드릴수 없는 입장이었으며 남편인 단종을 죽인 세조에게 자신이 할수있는 최대한에 항의와 절개를 지킨 강인한 성격을 소유하신 왕비였던 것이다.


단종비인 정순왕후와 세종의 8왕자인영응대군과의 관계. 

영응대군은 세종임금에 막내아들로 세종이 가장 사랑한 왕자였다

단종의 국구인 송현수의 여동생의 남편이 세종의 막내 왕자인것이다.

당대에 조선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던 고모부인 영응대군과 고모가 있는데, 정순왕후가 집이 없어서 쌀이 없어서 어렵게 살았겠는가?



여산송씨 족보에서 여산송씨 입향지를 가양리 위치를 東仙과 西仙 兩峯之間이라 하였다

출처 : 정읍시 칠보면 향토사
글쓴이 : 태산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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