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춘우정 김영상 선생의 각금일기(却金日記: 한일합방후 은사금 거절로 義를 행하시다 순국하신 기록)

도심안 2018. 7. 19. 04:14




각금일기는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에 사셨던 한말학자  춘우정 김영상 선생이 한일합방후 조선내 지도층 인사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을 주는데 선생께서는 받지 않고 義를 행하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이다.  



춘우정 김영상(1836~1911) 선생

조선시대 주소 : 태인현 고현내면 성저리(원촌)

1914년 행정개편 이후 주소 :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 


순종純宗 융희隆熙 4(1910) 경술 1024.

조카 명술命述이 저 은사금의 일로서 선생에게 아뢰니 선생은 말하기를 유자로서 원수의 돈을 받겠느냐, 이미 받아서는 아니 된 즉 의리상 가는 것이 옳지 않다.”하였다.

명술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합방의 가부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요.”하니, 말하기를 우리나라 국민은 너희와 더불어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니 옳고 그름을 물을 바가 아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외에는 무엇이 있겠느냐.”하였다.

명술이 읍에 다녀와서 말하기를 저희 집에서는 사사로이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말하기를 면장과 여러 사람들이 모두 화와 복으로서 권유함으로 두려워서 사령서를 받았는데, 만약에 백부께서 이것을 아시면 반드시 죽음으로 자처自處할 것이므로 (제가)비밀로 하여 아뢰지 않으려고 드디어 사령서를 면장 김병용金炳庸의 집에 두었습니다.”하였다.

 

1910년 1028,

김직술金直述이 와서 말하기를 소위 은사금을 받을 것인가요, 받지 않을 것인가요, 받으면 욕이 되고 받지 않으면 화가 되니 어떻게 할 것인가요?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 욕을 받기 보다는 화를 받아 의에 편안한 편이 낫다. 만약에 이를 받는다면 이는 소위 천세千歲토록 청사靑史를 더럽힌 것이 될 것이다.” 하였다.

김직술 (金直述) (1850 ~ 1920)  칠보면 은석동 거주 도강김씨 중파 

 

1910년118

차손 환각煥珏이 비로소 사령서가 면장의 집에 있음을 듣고서 선생에게 아뢰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 물건을 누가 받아서 감추어 어린애처럼 이 같이 일을 그르치도록 하겠느냐, 이 돈을 나는 맹세코 죽어도 받지 않겠다.” 하였다.

(차손 환각: 김영상-2子김병술-孫,김환각(김균)) 


1910년 119

 선생이 환각에게 명하여 각금서를 써서 원수의 돈은 받지 않겠다고 면장에게 전하고자 하였으나 면장이 집에 없어서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1110

 명술이 환각에게 말하기를 백부의 명에 따라 읍에 들어가지 않으려하니 면장이 말하기를 읍에 들어가서 일인을 보고 받지 않는 까닭을 말함이 옳다고 하여 읍에 들어갔는데 또 권유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종이이지 돈이 아니니 받고 안 받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였음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백부께서 이를 아시면 반드시 세상에 있지 않으실 것임으로 이를 숨기어 망설이다가 각금서를 면장에게 보내면서 아울러 사령서도 도로 퇴송하였습니다.” 하였다.

 

1910년 1111

면장이 되돌려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 일은 면장이 맡아 할 것이 아니므로 선생의 자손 중 1인이 읍에 들어가서 물리치는 것이 옳다.”하였다.

선생이 사령서를 보고서 크게 놀라 말하기를 원래 내가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서 아래 아이가 들어가 화가 두려워서 받은 것으로 어찌된 일이냐, 내 뜻은 이미 정해져서 이를 절대로 받지 않는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각금서에 수자 쓴 것을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수자가 눈에 못이 되니 다른 글자로 대신함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한 몸의 화만을 생각하여 만세의 수치를 무릅쓸 것이냐?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은 지가 오래다. 가까운 일로 말하면 을미, 을사의 변과 금년(1910) 7월의 변은 우리나라 신민과는 함께 하늘을 일수 없는 원수이다. 그러나 초야의 백성으로 스스로 목매어 죽거나 개울에 빠져 죽지 못하였으나 죽고자 하는 마음은 잠시도 잊지 않고 가슴에 품어 왔는데 아직껏 이것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은 특별히 그 죽을 곳을 살피고 있었다. 이제 이 원수의 돈이 나를 핍박한다. 문천상(文天祥: 宋末의 충신)의 시에 이르기를 곰의 발바닥과 물고기는 예로부터 쌍으로 얻을 수 없다하였으니 내가 얻고자하는 바는 곰의 발바닥이다 하고 취사取捨를 이미 분별하였다. 종이에 이름을 썼으니 돌려보냄도 이미 늦었다.” 하였다.

 

1910년 1115

 명술이 읍에 들어가 수령서를 되돌려 주려하였으나 유종규柳鍾奎가 힘써 말리므로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이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이 일이 어떤 일이기에 다른 사람과 상의하느냐? 이는 무슨 뜻으로 나의 말을 따르지 않았느냐라고 꾸짖었다. 밥을 먹지 아니함에 이르니 문인 김환규金煥圭와 안항섭安恒燮이 억지로 몇 수제를 들도록 권하니 선생은 다시 각금서를 썼다.

 

주역周易의 소과구삼小過九三에 이르기를 강직한 군지君子가 겸손한 마음으로 낮은 사람을 상대해 주었다가 그것의 해를 받을지 모른다 하였으니 내가 지금 그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나는 대한의 신민으로서 어찌 원수의 나라의 돈을 받으리요, 너희들도 터를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면 원수나라의 돈을 받지 않을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을미(1895) 820일 국모를 해친 원수, 을사(1905) 1021일의 늑약지변(勒約之變:을사보호조약), 금년 725일의 합방지사合邦之事의 일을 너희들이 만약 당하였다면 과연 이 돈을 받았겠느냐? 이러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맹세하고 이 돈은 받을 수 없는 것이다.

 

1910년 1119

 재종손 환진煥珍과 종손 환종煥琮이 읍으로 들어가 다시 돌려주었다. 환종이 밖에서 동정을 살폈는데 김사겸金思謙이 마침 관아에서 나와 말하기를 저들의 이른바 소장이 각금서를 가지고 와서 군수 조갑식趙甲植에게 묻자 군수가 선생의 행업行業을 자세하게 묻는 고로 답하였더니 군수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엄준 정대한 말은 보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다만 한 고을의 빛깔과 광택일 뿐만 아니라 장차 일국의 광영이 된다.’고 말하였다.” 하였다.


 

1910년 1120

환진이 나와서 말하기를 군청에 들어가서 각금서를 되돌려 주었더니 저 왜놈과 보조병 10여 명이 다수 치고 차니 피 흘린 흔적이 옷에 비치자 옷을 벗기고 판자 집에 가두어 두었다. 밤중에 면장을 불러서 조사를 하고는 곧 방면하고 사령서는 면장에게 되돌려 주면서 말하기를 당사자를 보고 만단으로 타일러 다시 받도록 할 것이며 만약 또 받지 않는다면 보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질 무렵에 면장이 선생의 자손에게 사령서를 보냈다. 자손이 이를 고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당초에 이와 같은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받지 않고 물리쳤겠느냐? 명일 다시 바로 되돌려 주어라.” 하였다. 밤에 선생은 유서 몇 편을 지었다.

 

1910년 1122

 환진이 또 들어가 되돌려 주니 저들은 또 받지 않았다. 밤에 선생이 고유문告由文을 지었다.

 

1910년 1129

환진과 환각이 읍으로 들어가 사령서를 물리치니 저들의 말은 종전에 사령서를 줄 때 군수와 면장이 참석한 가운데 주었으니 지금 군수와 면장이 함께 와서 말하여야 도로 받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옥신각신하다가 정오에 돌아왔다.

선생이 크게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당당한 대한 신민의 이름으로 오랑캐 원수가 돈을 주는 문적에 이름을 둘 수 없다.” 하고서 드디어 성명 3자를 찢어내어 버렸다.


1911417

면장이 와서 말하기를 동곡리(東谷里) 병참소兵站所에서 돈을 준다하니 이 일을 어떻게 조처 할까요?”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소위 사령서에 있는 나의 이름은 내가 이미 찢었고 또한 나의 본뜻은 이미 각금서로 판단하였다.”하였다. 오후에 면장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 유독 선생만이 오지 않았으므로 일인日人이 조사한다고 하니 그가 오거든 먼저 경례를 하고 또 술과 계란으로 대접하시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원수인 오랑캐가 오는데 어찌 경례가 있느냐하였다. 조금 잇다가 왜추 악미선사랑(渥美善四郞/아츠미젠시로:병참소장)이 통역 박정호朴正皓를 대동하고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일찍이 명성을 익히 들었기에 뵙고 싶은지 오래였는데 공무가 많이 번잡하여 이제야 겨우 틈을 탔습니다.”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군자는 친한 것을 친하게 하는 것이지, 원수의 나라 사람과 나와 어떻게 친하라는 말인가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어찌 원수의 나라라고 하십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끄대는 나의 각금서를 보지 않았는가?” 하고 그것을 내서 보이니

그가 말하기를 어찌 받지 않았습니까.”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 한국의 선비는 받음이 옳지 않다.”

그가 말하기를 합방이후에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글로 써서 보여주시오.”

선생이 곧 써서 보이기를, 합방이후合邦以後 욕사무지欲死無地 금득사소今得死所 서사이이誓死而已 합방이후에 죽자고 할 뿐이었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죽음을 맹세할 뿐이다.라고 16자를 써서 던졌다.

저들이 온갖 이해利害로 말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한이 됨은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없어진 것인데 너희가 비록 혀가 닳도록 이야기 한다 할지라도 나의 뜻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은 밥을 먹지 않아서 자손이 억지로 미음을 권하여 반 그릇을 드셨다.

동곡리 병참소는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동학장군 김개남 출생마을)에 있었다 



1911년 429

 동곡의 왜추가 호출장을 보내 내일 오전에 나오시오, 오지 않으면 내가 장차 구인하겠소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나갈 뜻이 없다.” 하니 면장이 그대로 보고 하였다.


1911년 52

왜추 장전長田이 보조원 2명을 데리고 동곡에서 와서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유인誘引하였다. 선생은 한결같이 굳게 물리치고 사령서辭令書를 던지니 저들이 이름을 찢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천황이 주는 바는 지중한데 감히 마음대로 찢을 수 있느냐하였다.

선생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 주인은 우리를 노예로 보는데 어찌 존중하겠느냐? 물리쳐서 보냈는데도 또 보냄으로 나는 나의 이름을 찢었다.” 하였다.

저들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청서로 전후 사실을 글로 써서 보임이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지난 겨울의 각금서와 악미선사랑에게 한 말을 써 보이며 말하기를 이 두 가지는 모두 말했는데 어찌 다시 말하겠는가.”

저들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처음에는 받고서 나중에는 물리쳤느냐

선생이 또 써서 보이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받았겠느냐?면장이 자질을 꾀여서 몰래 받았다. 나는 그때 병으로 알지 못하였다. 늦게 비로소 알고서 물리친 것이다. 어찌 받았겠느냐.”

저들이 말하기를 소중한 사령서를 손으로 범하였으니 법으로 처리함이 옳다,” 하며 드디어 구속하려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왜적의 종이 감히 나를 묶으러 하느냐

이것은 우리들의 소위가 아니라 죄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요.”

선생이 크게 성내어 장전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말하기를 죽일 테면 죽이라, 감히 포승으로 얽매려 하느냐하니 저들이 놀라서 서로 돌아보고 그냥 가버렸다. 큰 비가 내리는데 환각에게 명하여 사당에 고유告由하고 동곡에 이르니 악미가 또 조사하여 따져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앞의 말에 이미 모두 말하였으니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죽이려면 나를 죽여라,” 하니 저들이 선생의 관을 벗기려 하였다.

선생이 또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군자는 죽어도 관을 벗지 아니한다.” 하니 그 큰 소리가 집이 무너질 듯하였다. 곧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도 선생은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입에 곡기穀氣를 넣지 아니 하고 주역周易과 효경孝經을 외울 뿐이었다.

 

1911년 53

왜적이 선생의 다리를 풀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절의가 전영감(田令監:艮齋 田愚)과 같다하였다. 환각이 밖에 있으며 선생의 안후安候를 살피고 있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너는 곧 내려가서 서책을 정돈하라하고 다시는 말이 가사家事에 미치지 않았다.

 

1911년 56

오전에 비가 내리고 오후에는 흐렸다.

악미가 말하기를 이 일은 우리가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니 군산 감옥으로 옮긴다.”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 주인(明治)이 아비를 죽인 죄 다스리는 것을 보고서 죽을 것이다.” 하였다. 왜인 신정新井과 보조병 박정호와 이칠만李七萬이 따랐다. 자손과 문인 등 수십 명이 배행하였다. 일행이 두곡점斗谷店에 이르러 교자轎子가 잠깐 머물었다. 때에 선생의 자부子婦와 측실側室이 미리 길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은 태연자약하였다.

측실 유씨가 말하기를 만사를 잊어버리고 평안히 세상을 떠나시오하였다. 저들 중에 우리말을 좀 알아듣는 자는 경탄하였다. 길 가는 살마도 또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사람은 망하지 않았다.” 하였다.

태인의 거산居山에 도착하니 이종렬李宗烈과 유홍렬劉洪烈이 와서 절하고 말하기를 선생의 이 행차는 매우 높은 광영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죽음에는 한이 없지만 다만 친산親山 끝에 안장安葬되지 못함이 한이 된다.” 하였다.

진사進仕 최영대崔永大가 이날 아들의 관례를 치렀는데 가마가 여기를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서 술과 안주를 내놓고 대접하였다.

한참 술상을 들고 있는데 헌병대에 들어온 왜적 심곡(深谷 : ふかたに : 후카타니)이 선생의 옥에 가두려 하였다.


선생이 큰소리를 내어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 짐승같은 무리들이 어찌 감히 나를 가두려하느냐,” 하였다. 심곡이 선생의 뺌을 주먹으로 몇 대 치고 왼눈 광대뼈 옆을 때리니 감과 같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너의 주인(임금)의 간을 씹고자 한지 오래다. 이름 없는 작은 졸개와 결판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만 너의 고기 한 점이라도 씹고자 한다.” 하고 마침내 심곡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여러 왜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분은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다하였으니 저들이 비록 이류異類라 할지라도 또한 짐승 중에 사람이 있다 할만하다.

57, 흐리다가 비가 내리는 가운데 태인을 출발하니 족질 김기술金箕述과 문인 권영모權寧謨, 김환규金煥圭와 조카 한술漢術과 차손 환각煥珏이 배행하였다. 장자 평술坪述은 곡기를 끊어서 모시고 가지 못하였다. 왜 헌병 삼천森川과 통역 최봉한崔鳳翰이 교대되었다. 비를 무릅쓰고 김제에 이르렀다.


생년 1849(헌종 15) ~ 1929) 태인현 고현내면 성저리 출생 ~산내면 이사~고현내면 장구동 이사  



1911년 58

비가 내리고 또 번개를 쳤다. 김제를 출발하는데 왜 헌병齊滕과 보조병 이완필李完必이 교대되었다. 만경의 사진(沙津: 구멍 新倉津)에 도착하였다. 강가에서 무이도가(武夷櫂歌: 朱子武夷九曲) 3편을 외고 있었다. 여러 날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지냈는데도 그 음성이 하늘까지 통하여 평화스런 소리로 들림을 보였다. 얼마 뒤 나룻배에 올라 중류에서 뱃전을 잡고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아름답도다, 경치여!” 하였다.

마침내 태연히 몸을 물에 던지니 왜 헌병 제등이 순간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선생을 구출해냈다. 의관은 모두 물에 젖어서 뱃머리에 누이고 단단히 지키었다.

선생이 정신을 집중하여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나는 굴원대부(屈原大夫: 물에 빠져 죽었던 나라 충신 굴윈)를 만나보려 가는데 너희들이 어찌 내 가는 길을 막느냐하였다. 힘을 다하여 몸을 배에서 물속으로 던지려 했으나 저들의 잡음이 단단하여 드디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환각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지은 절명사絶命詞를 의대衣帶에 써 놓았다.” 하였다. 물가에 내리어 임피臨陂 차상리次上里에 이르렀다. 忿은 여전히 불길처럼 매우 거세었으나 기운은 더욱 가라앉아 가마 속에서 다리를 쭉 뻗고 있는데 목에서는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비를 무릅쓰고 군산항의 감옥에 도착하였다. 기술箕述이 흔들어서 깨우자 선생이 번연히 눈을 뜨고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냐?” 하였다.

군산입니다.”

졸면서 또 말하기를 이 곳이 참으로 내가 죽을 땅이다.” 하고 다시는 말이 없었다. 선생을 업고 옥중으로 들여보내고 기술 등은 여관으로 나와서 의대를 검사하니 의대 속에 절명사가 있었다.

 

옛날 굴원屈原의 충성은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일기一期로 삼았는데

이제 나는 양구(陽九:災難)의 운을 당하였으니

사진沙津으로 좇아 가노라

3三杯로 어복御服의 충혼을 위로하고

노중련(魯仲連:나라의 명신)의 도해蹈海를 따라

영원히 물가에 오르 내리라

신해 辛亥 58일 미시


석지 채용신 선생이 그린 투강순절도


대게 맹세함이 이날 미시로써 판명된다. 기술이 동행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수맥手脈을 짚어보니 맥은 차가워져 혼은 이미 사진에 던졌고, 혼백은 군산항에 있을 뿐이다. 띠를 받들고 삼복三復하니 깨닫지 못한 사이 목이 메었다.” 하였다. 윤판사尹判事 이병履炳이 말하기를 의롭게 죽었으니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며 불의不義로 살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니 살아서 욕된 것 보다 죽은 것이 오히려 영광이란 것이 선생을 말한 것인가?” 하였다.

김기술 선생은 도강김씨 중파로 원촌마을에서 태어나서 산내면 이화동에 살다 당시는 고현내면 장구동에 사셨다   


이때 같이 따라간 사람은 6명으로 장남 평술은 단식중이었고 차남은 춘우정보다 먼저 병사하었다.

김기술 권영모, 김한술, 김환각,  김직술, 김환규

김기술(1849~1926) : 도강김씨 중파로 장구동 거주

權寧謨(1870~ 1944) : 字:昌彦, 號:돈재 매헌 권우 후손(옹동면 옻밭골 거주)

김한술 : 조카(김영상의 사촌인 김영구의 아들로 보임)

김환각(1888~1978) : 춘우정 김영상의 둘째 아들인 병술의 유복자인 김균이다 

김직술(1850~1920) : 도강김씨 중파로 은석동 거주

김환규(1870~1952) : 도감김씨 중파로 김직술에 장자로 진사였다. 

 

1911년 59

하늘에 구름이 개이지 않았다. 점심때 한술이 면회서를 가지고 감옥으로 가서 면회를 신청하니 왜추가 말하기를 이미 사시(巳時: 10~11)에 세상을 떠났다.” 하였다.

한술이 드디어 통곡하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반구返柩하여야 한다.” 하였다.

명일에 운구運柩하라. 나도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길은 멀고 날은 더우니 조금도 시간을 늦출 수 없다.”

그렇다면 미리 운구를 준비하라.”

알았다.”

며칠 동안 절곡하였는가?”

“6일 간에 미음을 드렸으니 두 번에 그쳤다.”

밤중에 잠시 일어나서 미음을 드렸더니 입을 다물고 받지 않았다. 신시(申時:오후3-5시경)에 옥에 들어가 운구하여 발행發行하니 하늘의 해도 매우 슬퍼하며 항구에도 슬픔이 가득하고 왜인들까지도 모두 슬퍼한데 하물며 우리 한국의 사녀士女들이야 어떠하겠는가?

항구로 나오니 사인士人 유병심柳秉心, 병철秉哲의 형제가 자리를 마련하여 제사를 드리고, 옥구沃溝 회안동回雁洞에 이르러 수족을 거두는 소렴예小斂禮를 하였다. 마을 사람 권종일權悰日이 눈물을 닦으며 일을 처리 하고, 객점 부인도 눈물을 흘렸다.

옥구 지경地境 저자에 이르렀다. 선생의 장자 평술과 김일술金日述이 오고 가난한 선비들이 문득 이르니 진실로 천륜天倫이 상응相應하였다. 조카 명술도 함께 왔다.

만경읍에 이르니 부고를 전한 사람이 고향에 갔다가 염습하여 입관 안치할 준비된 물품을 가지고 와서 만났다. 대체로 갖추어 여사旅舍의 방 가운데에 모신 영구의 동쪽에 술과 과실을 진설하였다. 임피臨陂 옥흥리玉興里의 최경준崔京俊 모자母子가 듣고서, 선생이 순의殉義의 하신 일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프도다. 진실로 의사로다, 진실로 의사로다. 하고 곧 한쌍의 촛불을 키고 전을 올렸다.

 

1911년 510

평술이 괄발括髮하고 포건布巾을 썼다. 이것은 분상奔喪 사각건四角巾의 대용代用이다. 또한 소렴 백포건小斂 白布巾의 예이다. 한술과 환각은 나란히 포건을 썼다. 또한 재최齊衰에 의함이니 이하는 모자를 벗고 건포를 씀이 예이다.

사시巳時에 신창진新倉津에 도착하였다. 기술이 배에 올라서 초혼招魂을 하였다. 오후에 김제 입석점立石店에 도착하였다. 몇 고을의 인사가 모였다. 문인 안요묵安堯黙과 안항섭安恒燮 등이 상여 군을 거느리고 도착하였다. 곧 여를 버리고 상여를 썼다. 명정明旌에 춘우정선생김공지구春雨亭金公之柩라 썼다.

 

태인 연동점蓮洞店에 이르렀다. 동네 사람들이 전을 올리고 부의하며 밤을 새워 관을 보호하였다. 객점 부인이 닭을 지성으로 공궤하였다.

 

1911년 511

길을 떠나니 사녀士女들이 길을 막고 곡을 하여 상여가 나가지 못하였다. 흥천면興天面에 이르렀다. 마을 마다 술을 올리는데 모두 기록할 수 없다. 피향정披香亭에 도착하였다. 읍의 인사들이 자리를 마련하여 전을 올리고, 남녀노소가 구름같이 모여서 감읍感泣함을 그치지 아니 하였다. 고현古縣의 경계에 이르니 문인과 빈객賓客과 친척으로 배행하는 사람이 수 천백이었다. 부인과 어린아이들 지나가는 나그네들까지도 서로 슬퍼한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귀계龜溪의 동서에 자리를 마련하여 영구靈柩을 머물고 전을 올리었다. 신시申時에 본제本第에 도착하였다.

평술은 다시 피발被髮하고 곡하여 몸부림침이 처음과 같았다. 당일 소렴小斂 단괄袒括 백건白巾하고, 조금 지나 대렴大斂 입관入館하고 칠을 더하였다. 대개 정은 박절迫切하고 날은 오래되고 때가 더워 혹 헤아리지 못함이 있을까 하는 까닭이다.

 

1911년 512

각 고을에 부고하였다. 시금재時琴齋곁에 빈소를 차림은 평일의 유명이었다. 문인 권태훈權泰勳이 그 일을 감독하였다.

 

1911년 513

빈소를 만들어 영좌靈坐를 시금재에 설치하였다. 성복成服한 문인과 가마加麻한 사람이 5~60인이 되었다.

 

1911년 515

면장이 평술에게 한 종이를 보냈다. 대개 군산에서 온 것으로 그 글에 돌려보낼 물건이 있으니 17일에 오라, 만약 대리인을 보내면 위임장을 가지고 오라하였다.

 

1911년 516

명술과 환진을 대신 보냈다.

 

1911년 518

와서 말하기를, 군산 재판소에 들어갔더니 왜추가 선생의 친필서親筆書를 내주었다.(이달 2일에 써서 왜추에게 보여준 것) 받지 않으려 하니 저들이 말하기를, 이는 친필이니 내가 설사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손이 된 도리 상 당연히 요구하여 가져다가 보관하여야하는데 어찌하여 반대로 머뭇거리는가? 하여 받았으며, 또 빈장殯葬의 절차를 물아서 이미 빈소를 차렸다 하였습니다. 또 아들과 자손도 또한 돈을 받을 마음이 없는가 하고 물어, 말하기를 선생이 이 돈 때문에 죽었으니 자손도 죽어도 결코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송산松山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이 돌아가시는 저녁에 서기瑞氣가 무지개처럼 선생 집 뒤 서북쪽으로 뻗었다.’ 하였다.

 

1911년 92

선생을 태인 남촌편南村面 덕가리德加里 서록西麓 유좌酉坐에 장사하였다. 발인할 때 길에서 치전致奠과 통곡함은 반구返柩 때와 같았다.

신주神主에 현고처사부군신주顯考處士府君神主라 하고 신주 뒤 함중에 고춘우정김공휘영상자승여신주故春雨亭金公諱永相字昇如神主라 하였다. 문인 안요묵이 묘지명墓誌銘을 찬하였다. 후에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이 묘갈명은 찬하였다.

 

1911년 96

왜적 장전長田이 통역 김정호金正浩와 같이 청결검사라 빙자하여 영좌에 들어와 문고文稿와 일기와 제문, 만장 등 책자를 가지고 갔다.

 

1911년 911

왜추 삼천森川과 장전長田이 보조 이칠만李七万을 대동하고 본 읍으로부터 말을 타고 와서 갑자기 집에 돌입하여 간재艮齋 전공田公의 언장唁將을 찾아갔다. 또 평술과 환각을 잡아 가니 읍에 이렀을 때 해가 이미 저물었다.

 

1911년 912

왜적 산본山本이 묻기를 김모金某5월에 이미 장사하였다 하였는데 어찌 개장改葬하였느냐?” 하였다.

먼저는 빈하고 뒤에는 장사를 모셨다.”

이 사람은 은사금을 받지 아니한 결과와 사령서를 말소한 이유의 법을 어겨서 압송하다가 사망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심히 미안하게 여긴다. 더욱더 그 자손은 응당 원구冤仇의 마음이 있으리라.”

조부께서 집에서 편안하게 돌아가셔도 오히려 지극한 아픔을 머금거늘 하물며 이같이 옥중에서 돌아가가심에랴?”

이는 미워함이 아니라 법률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다. 우리 무리들도 오히려 미안함이 있거늘 자손들이 맺은 원한은 굳으리라.”

이 원한은 뼈에 새기니 어찌 능히 잊으리오?”

이 원통함을 잊지 못한즉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을 마음이 있는가?”

세력을 능히 당할 수 없다.”

동곡에서 온 문자 중에 많은 불온不穩한 말이 있다. 하물며 묘명墓銘에 늑약勒約 수왜讎倭등의 글구는 상부의 명령을 어겼으며 우리의 정치에 방해되니 돌려 줄수 없다.”

이 모든 기실記實이 어찌 방해가 되리오?”

산본山本이 간재의 조장弔狀을 들추어 내어 수금讎金 순절殉節 순의殉義 등의 말을 보고서 말하기를 옛 관슴으로 생각한즉 이 또한 옳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뜻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대개 다른 나라 사람이 나라를 삼키고 임금을 죽이면 이로써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의에 합당할 수 있으나 지금 이 합방은 한왕韓王이 스스로 원하였으니 어찌 가히 억지로 하였다 하느냐, 지금 이 사망한 것은 임금의 명을 준수하지 않음인데도 또한 가히 절의라 할 수 있느냐?”

군부가 잘못이 있으면 신하가 어찌 그릇됨을 쫓아 불의에 깊이 빠질까. 이 모두는 선왕에 대한 순절이다. 옛 한의 후주後主가 위에 항복하니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은 사직社稷에 순절하였으니 어찌 가히 군부君父를 어김이있다하여 순절이라 하지 않을까?” 말을 마치자 저들이 쫓아내었다.

왜추가 묘지사墓誌事로써 안요묵을 억류하고 질책하였다 한다.


 

1972년 문인들의 발의로 무성리 원촌에 사우를 세웠으나 왜정의 시국 때 문에 신패를 봉안하지 못하고 있다가 광복 후 19451026일에야 문인 김환풍, 안항섭 등이 진력으로 신패를 봉안하고 필양사라 일컬었다.


필양사


<오적 = 대한제국 때 을사5조약에 찬동한 5인의 역적으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출처 : 정읍시 칠보면 향토사
글쓴이 : 태산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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