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의 고향 - 조선의 유학자 강항 1
姜沆은 1567년 5월 17일 전라도 영광군 유봉리(지금의 불갑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号는 睡隱, 字는 太初이다. 또 본관이 경남 진주이므로 ‘진주의 강항’이라고 불렸다. 그는 조선 초기의 유학자 姜希孟의 5대손이다. 그 강희맹이 쓴 글 중에 ‘일본인을 경계하라’ 라는 것이 있다. 後年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그리고 다시 3백년 후의 한일병합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불행하게도 이 예언은 옳았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도 강희맹이 이 글을 쓸 때 백년 후에 자신의 후손이 일본으로 인하여 엄청난 재난을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강항은 姜克儉의 4남이다. 큰형은 姜瀣(강해), 둘째형은 姜濬, 셋째형은 姜渙이라고 한다. 모두 유학자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큰형 강해는 임진왜란 당시 이미 죽었으며 그의 처가 강항 등 형제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강항은 어렸을 때부터 드물게 보는 수재로, 7세에 맹자7권1질을 한번보고 암기했다고 한다. 16세에 鄕試에 합격, 22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퇴계학파 成渾(성혼)의 門下에서 학문을 쌓았다. 그리고 그해 진주의 김씨와 결혼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강항은 26세였다. 그는 일족과 함께 식량. 무기를 모아 齊峰에 있던 高敬命의 의병소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성을 함락하고 국경부근까지 진격했지만 전라도만은 일본군에게 끝내 공략당하지 않았다. 도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일본군과 싸워 그 침입을 막았던 것이다.
그 후 和議가 열려 잠시 동안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 사이 강항은 29세에 박사가 되고 이듬해 봄에 성균관의 典籍, 가을에는 工曹의 佐郞, 겨울에는 刑曹의 좌랑이 된다. 전부터 고향에서 후학을 교육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던 강항은 31세의 봄 휴직을 하고 귀향하지만 時流는 그에게 평온한 생활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낙향한지 4개월 만에 명과 일본. 조선의 화의가 결렬되어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 것이다.
남원성의 李光庭은 조정에 上申하여 강항을 郎官으로 임명하였다. 강항은 남원성에 부임하여 근처 마을로부터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7월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대패하고 일본군 5만이 남원에 맹공을 퍼부었다. 성은 끝내 함락되었다. 강항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했다. 5백 명 가량 모였지만 일본군이 지나간 마을의 참상을 보자 모두 부들부들 떨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9월14일 밤, 강항 일족은 2척의 배에 나누어 탔다. 피난길에 나선 것이다. 강항의 부친은 뱃멀미를 하여 숙부의 큰 배에 탔다. 강항과 형, 그 가족 등은 작은 배에 탔다. 두 척 다 정원을 초과하여 속도가 매우 느렸다. 한반 중에 부친이 탄 배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강항은 부친의 배를 찾으러 나섰지만 북풍이 강하게 불어 배를 서쪽으로 돌릴 수 없었다. 오전 10시경 배를 다시 논잠포 쪽으로 돌렸다. 그때 해상의 안개 속에서 돌연 한척의 낯선 배가 나타나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왜선이었다.
해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 강항의 딸 애생과 아들 용이 물에 빠져 죽었다. 강항 일족은 모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왜선은 왜 수군대장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의 家臣 신시치로(信七郞)가 지휘하는 兵船이었다. 일본군은 강항일행이 삿갓을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고급관리라고 생각하고 일본으로 연행하기로 결정했다. 강항의 장인이 몰래 포승을 풀고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곧 일본군에게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군의 배는 무리를 지어 영산창, 우수영을 지나 순천의 倭城을 지났다.
‘붙잡혀 여기에 오기까지 9일간 물과 음식을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직 죽지않는구나. 목숨은 이렇게 질긴 것일까’ 라고 강항은『看羊錄』에서 썼다. 밤중에 옆의 배에서 울고 있던 여자애가 울음을 그치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옥을 깨는 것 같았다. ‘일가가 몰락한 이래 두 눈의 눈물은 말라버렸지만 이날 밤은 다시 눈물이 옷소매를 적시누나’ 라고 강항은 읊었다. 다음날 賊船 한척이 지나갈 때 여자의 목소리가 ‘영광사람, 영광사람’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형수가 나가서 물어보니 애생의 어미였다고 한다. 왜군에 붙잡힌 후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살아있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녀는 이날 밤부터 매일 통곡을 하여 왜놈에게 두들겨 맞았고 끝내 굶어죽었다고 한다. 강항은 슬픔을 견딜 수 없어 견우직녀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그녀와의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시를 읊었다.
물도 음식도 없는 항해는 계속되었다. 어른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둘째형의 아들 가련은 여덟 살인데 목이 말라 바닷물을 먹은 후 토하고 설사를 했다. 왜놈이 오더니 그 애를 번쩍 들어 바다에 던져버렸다.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언제까지나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강항 일가는 큰 배로 옮겨졌다. 배는 安骨浦를 출항했다. 방향을 남으로 동으로 향하면서 대해를 밤낮없이 항해했다. 돌연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안개 속에 멀리 가로놓인 육지가 보였다. 대마도였다.
폭풍우로 대마도에서 이틀 머문 뒤 다시 대해를 건너 이키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항해를 계속하여 규슈의 사가현을 경유하여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계속하여 세토내해로 나아갔다. ‘바다와 산이 그림 같고 감귤이 햇빛에 빛나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은 鬼窟이다’ 라고 강항은 썼다.
이윽고 10월 15일경 시코쿠의 나가하마(長浜)에 도착한 이들은 여기서부터 도보로 오즈시(大州市)로 끌려갔다. 15km의 거리로 기껏해야 반나절의 코스였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장기간의 배 여행에 시달린 그들에게는 그것은 마치 죽음의 행진이었다. 한 하천을 건너게 되었는데 나가하마에서부터 몇 번이고 쓰러지면서 걸어온 이들에게는 그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일행 중에는 노인도 있고 어린애도 있었다. 일행은 끝내 힘이 다하여 강 한복판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한번 쓰러지니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강 언덕에서 이를 본 한 왜인이 달려와 이들을 둑 위로 끌어올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태합(도요토미히데요시에 대한 존칭)은 참혹한 일을 하는구나. 이 사람들을 잡아다 뭘 하려는 것인가.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라고 말하면서 집으로 뛰어가 먹을 것과 뜨거운 물을 갖다 주었다. ‘겨우 귀가 들리고 눈이 보이게 되었다. 왜놈 중에도 이런 至誠의 사람이 있구나’ 라고 강항은 썼다.
다시 4km를 걸어 오즈성(大津城, 大州의 당시이름)에 도착했다. 강항 일행을 포로로 한 수군대장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의 본거지였다. 오즈성내에서 조선인포로는 한 집에 수용되었다. 왜졸과 왜녀가 아침저녁으로 밥과 국, 생선 한 마리를 공급했다. 일본인이 하루 세끼를 먹게 되는 것은 메이지유신 전후부터라고 한다. 강항은 ‘蠻夷絶域에서 형제가 함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다.’ 라고 썼다.
강항 일족은 정유재란 때 오즈(大津)에 연행되어온 최초의 포로였다. 그 이듬해 성주 다카토라가 조선에서 귀국할 때까지 오즈에는 계속하여 조선인포로가 잡혀왔다. ‘포로가 되어 오는 우리나라사람들이 무려 천여 명. 새로 온 사람들은 아침저녁 무리를 지어 울부짖는다.’ 라고 강항은 썼다.
이듬해 정월 5일 셋째형의 딸 예원이 병사하고 4일후에는 둘째형의 아들 가희도 병사했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 아이들이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형제가 업어다 물가에 묻었다. 우리형제는 전부 6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조선의 바다에서 3명이 죽고 일본에서 2명이 죽어서 남은 것은 여자애 하나이다.’ 라고 강항은 비통한 마음을 글로 남겼다.
1598년 4월말 임진왜란 때 붙잡혀와 교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한 남자가 오즈(大津)에 도망쳐와 강항에게 함께 탈주하자고 말을 꺼냈다. 강항은 즉시 찬성했다. 5월 25일 이들은 통역 한사람을 대동하고 야음을 틈타 성을 빠져나와 80리길을 걸었다. 두 발에서 피가 흘렀다. 낮에는 대나무 숲에 숨어있다 밤이 되면 걸었다. 다음날 밤 우와지마(宇和島)에 도착했다. 강항은 성문에 미리 준비해온 대자보를 붙였다.
‘너희 일본의 君臣은 이유 없이 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죄 없는 남녀노소를 참살하고 가축. 곤충. 초목에 이르기까지 큰 고통을 주고 있다. 고금에 이런 참화는 없었다. 너희는 하늘을 제사하여 吉祥을 구하고 석가를 받들어 福利를 구한다. 하늘은 선악을 구별하여 화복을 주고 석가는 인간의 師表로서 살상을 금하고 사람의 살아갈 길을 가르치고 있다. 조선의 백성도 이를 따른다. 하지만 너희는 이를 멸하고 깊은 상처를 입혔다. 하늘이 어찌 이를 그대로 지나치랴. 석가가 어찌 이를 용서하랴....지금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너희에게 고한다. 너희 이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면 큰 해를 당하리라. 후회하지 말기를.’
강항일행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멀리 못가 3명의 무사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아침에 성문에 붙여놓은 글을 보고 성내가 발칵 뒤집혔고 체포조가 사방팔방으로 퍼졌던 것이다. 체포된 강항일행은 성 밖으로 끌려 나갔다. 형장이었다. 10여 그루의 나무에는 죽은 사람들의 목이 걸려있었다. 금방이라도 목이 날아갈 찰나였다. 어떤 한 왜인이 검을 뽑아들고 뛰어 들어와 형의 집행을 저지했다. 오즈성에서 달려온 무사였다. 강항은 오즈에 억류되어있는 동안 부근 出石寺의 승 快慶과 交遊를 했었다. 성주 도도다카토라가 깊이 귀의하고 있던 승 快慶의 위광도 있고 해서 강항에 대한 오즈성내의 평가도 특별했던 것이다. 때문에 오즈성내에서도 강항의 탈주는 중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급히 무사를 보낸 것이었는데 그 무사는 다름 아닌 처음 영광 앞바다에서 강항 일족을 붙잡았던 신시치로(信七郞)였다. 신시치로는 강항을 자택에 데려가 술과 식사를 대접했다. 이제는 포로가 아니라 빈객대우였다.
강항은 오즈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出石寺의 승 快慶과의 交遊도 계속되었다. 강항은 快慶으로부터 일본의 지리. 직관 등 서류를 빌려 이를 열심히 필사했다. 또 일본의 지도도 복사했다. 그 무렵 강항은 붓도 종이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일본의 지리나 다이묘(大名) 등의 분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자료들을 조선에 보내어 이후 대일정책에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강항은 이렇게 작성한 문서를 세 차례 고국에 보냈다. 이들 중 한통은 제대로 고국에 전달되었지만 한통은 강항보다 늦게 도착했고 나머지 한통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가 조선에서 귀국한 것은 1598년 6월이었다. 그는 귀국 후 곧바로 강항 일행을 교토로 이송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은 교토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시 나가하마(長浜)에서 배를 타고 세토내해를 지나 오사카만(大阪灣)에서 요도가와(淀川)를 거슬러 올라가 교토 후시미(伏見)에 도착했다.
후시미에서 강항일행은 커다란 창고에 수용되어 이치무라(市村)라는 노인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 노인은 조선인에 대하여 매우 친절하여 ‘우리 집에 와 있는 자 어찌 남일 수 있으랴’ 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동생이 있으면 형의 외출을 허가하고 외숙이 있으면 생질의 외출을 인정한다.’라는 식의 상당히 관대한 취급을 하였다. 더 이상 유폐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은 생활이다. 이리하여 강항은 교토의 최고급 지식인들과 交遊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일을 강항은 다음과 같이 썼다.
‘..... 의사 理安과 그의 스승 意安이라는 사람이 때때로 나를 찾아왔다. 또 妙壽院의 僧 舜首座라는 사람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유명한 藤原定家의 자손으로, 但馬守 赤松廣通(아카마쯔히로미치)의 스승이다. 매우 총명하고 古文을 잘 해독하고 書에 능하다. 성격도 엄격하다.’
강항이 舜首座 즉 藤原惺窩(후지와라세이카)와 알게 된 계기는 의사 理安과 그의 스승 意安을 통해서였다. 강항은 의사 理安으로부터 자신이 찬술한『歷代名醫略伝』의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강항은 이 제의를 받고 뛸 뜻이 기뻐했다. ‘아아, 나는 日東에 온 이후 아직 한편의 문자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再拜하고 굳이 졸필을 사양하지 않았다.’ 라고 강항은 썼다. 강항의 흥분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그의 소개로 藤原惺窩(후지와라세이카). 赤松廣通(아카마쯔히로미치)와의 교유가 시작되었다.
藤原惺窩(후지와라세이카)는 일본 최고명문가인 藤原家 출신으로, 유명한 古代의 文人 藤原定家(후지와라데이카)의 12세손이다. 그는 어려서 모친을 잃었으며 8세에 龍野(다쯔노)에 있는 景雲寺에 출가하여 학문을 시작하였다.
당시는 戰國亂世였다. 그가 17세 때 豊臣秀吉은 但馬(다지마)를 공격하였고 이에 但馬의 龍野(다쯔노)城主 赤松廣通(아카마쯔히로미치)는 일단 景雲寺 근처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세이카는 다쯔노의 성주 히로미치를 알게 되었다. 성주 히로미치는 세이카의 외가 먼 친척이기도 하고 나이도 비슷하여 둘은 금새 친해졌다. 하지만 이듬해 세이카도 적의 급습을 받아 부친을 잃고 조상 전래의 전답 및 가보를 빼앗기는 불행을 당한다. 승적에 있었기 때문에 겨우 목숨만을 구한 그는 비통한 마음으로 계모와 함께 고향을 떠나 교토로 망명했다. 교토에 있는 숙부 壽泉를 의지하기 위해서였다. 숙부는 相國寺의 住持職을 맡고 있었다. 세이카는 相國寺의 중이 되었다.
숙부 壽泉은 박학다식으로 五山(학문의 중심지였던 다섯 개의 절)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세이카는 이 숙부 밑에서 열심히 국내외의 典籍을 섭렵하여 점차 文名을 날리게 되었다. 10년 후 그는 舜이라고 号를 하였으며 首座라고 하는 절의 고위직에 올랐다. 강항이 그를 순수좌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동안에도 세이카와 성주 赤松廣通(아카마쯔히로미치)와의 교유는 계속되었고 둘 사이의 교분은 점점 더 두터워졌다. 이에 대하여 숙부 壽泉가 赤松廣通에게 그 교유를 감사하는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赤松廣通은 一國의 國主이고 통치자였다. 그는 豊臣秀吉과 동급의 다이묘(大名)로,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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