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간신’ 하면 떠올려지는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도 유자광이나 한명회, 임사홍 등을 떠올리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실제 네이버나 다음에 ‘간신’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이들 인물이 맨 먼저 뜬다. 그 중에서도 유자광(?~1512)은 간신의 대표명사로 각인돼 있다. 아마도 드라마나 역사소설의 영향이 클 것이다. <왕의 남자>가 대박을 터뜨리는 지금 연산군 대의 대표적 간신으로 유자광은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이런 세간의 인식 말고도 가치중립적 서술이 기본이라 할 백과사전에서조차 유자광은 형편없는 소인배로 기록돼 있다.
“유자광은 자기보다 뛰어난 남이(南怡)를 전부터 질투해오다가 1468년 왕위에 오른 예종이 남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남이의 언행과 시에서 꼬투리를 잡아 그가 반역의 뜻을 품었다고 왕에게 밀고하였다. 당시 영의정이던 강순(康純) 등을 연루시켜 죄목을 조작, 남이·강순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를 처형하게 하였고, 유자광은 이들을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그는 이때부터 자기보다 뛰어난 자를 모함하였는데, 1476년(성종 7)에는 한명회(韓明澮)를 모함하다가 도리어 관직에서 쫓겨났다.“(<두산세계대백과> 유자광 항목에서)
유자광은 5백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여전히 간신의 대명사로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유자광이 어떤 인물이길래 그런 것일까? 유자광의 출생은 비천했다. 서자였던 것이다. 이긍익이 엮은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그는 부윤 규(規)의 서자로 건장하고 날래며 힘이 셌다고 한다. 어릴 때 무뢰배가 되어 장기와 바둑이나 두고 활쏘기로 내기나 하고 새벽이나 밤길에 돌아다니다가 여자를 만나면 낚아채어 간음하였다고 하니 어지간한 한량이었던 셈이다. 그런 서자를 부친 규는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서자로서 공식적인 출셋길이 닫혀 있으니 혈기왕성한 유자광으로서는 한량짓으로 세월을 달랬을 것이다. 그러나 유자광에게는 야심이 있었다. ‘세상 밖으로(出世)’ 높이 비상하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때가 무르익은 것은 바로 이시애의 난으로 세조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였다. 1467년 5월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길주지역의 호족이었던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세조는 초기 진압에 실패해 곤혹스러워했다. 4도병마도총사로 왕족인 귀성군 이준을 임명해 진압에 나서게 했지만 행군 열흘 만에 겨우 철원에 이르는 더딘 행군에 마음을 졸였던 것이다. 이때 유자광이 글을 올려 진압의 계책을 밝히고 선봉에 서겠다고 하자, 세조는 그를 기특하게 여기며 궁궐 뜰에서 시험을 보게 했다. 무술에 뛰어났던 유자광은 세조의 눈에 들었고, 진압군에 종군해 공을 세우게 됐다. 세조는 이런 유자광을 정5품 병조정랑이란 요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공식적인 출셋길을 열어주기 위해 문과시험까지 보게 했다. 여기서 유자광은 장원급제한다. 격변기에 과감한 승부수로 출셋길을 연 것이다. 이듬해 세조는 죽음을 맞았고, 예종이 즉위했다. 한때로 끝날 것 같던 유자광의 성공시대는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 때도 계속됐다.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남이 장군의 역모를 고변한 공으로 익대공신 1등에 책록된 것이다.
희대의 간신으로 남게 된 ‘남이 역모 조작설’
남이는 태종의 넷째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과를 통해 등용된 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고 공조판서,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왕가의 일원이란 후광도 있었지만 출중한 무예실력에 명석했던 그를 세조가 총애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한명회, 신숙주 등 공신세력의 견제와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던 예종의 심사가 맞물려 남이는 병조판서에서 밀려나 겸사복장직이란 한직으로 임명됐다. 인사에서 ‘물먹은’ 것이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뒷세상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요”라고 읊을 정도로 기상이 장대했던 남이로서는 삼십도 안 된 나이에 한직에 떨어졌다면 분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이가 역모를 일으킨다고 유자광이 고변한 것이었다. 남이가 공신세력인 김국광, 노사신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왕이 되려 한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남이가 예종이 즉위한 날 대궐에서 숙직을 하다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이 자리를 차지하는 형상이다”란 말을 했다는 증언도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결국 남이와 강순 등의 세력은 죽음을 맞아야 했다. 남이의 불행한 죽음은 민간에 유포돼 하나의 전설처럼 되살아났고, 그를 죽음에 몰아넣은 유자광은 대표적 간신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유자광의 고변이 무고였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유자광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나 그가 죽은 뒤에도 ‘무고죄’는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다만 야사 속에서만 누명을 씌워죽인 인물로 기록되었다.
사림의 철천지원수로 남게 된 무오사화
정작 유자광이 조선의 대표 간신으로 떠오른 것은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사림 학살의 첫 번째 사건인 무오사화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유자광은 중종조 이후 천하의 둘도 없는 간신으로 치부되었다. 무오사화란 무오년에 사초 때문에 일어난 대규모의 숙청사건을 말한다. 통상 사화(士禍)란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하는데 무오년의 사화는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났다 해서 사화(史禍)라 부른다. 사건은 단순했다. 사림의 영수인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김종직이 예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올린 것을 당상관 이극돈이 발견하고, 이를 유자광에게 보인 뒤 크게 문제삼아 김일손, 이목 등을 처형했다. 또 이미 죽은 김종직은 관에서 꺼내져 목이 베어지는 부관참시형에, 김굉필 등의 숱한 사림들은 귀양에 처해졌다. 한낱 제문의 수록이 이토록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국기를 흔드는 예민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의제(義帝)를 추모하는 글이었지만, 사실 내포된 뜻은 의제를 단종에, 항우를 세조에 비겨 세종의 찬탈을 비난하는 글이었다. 따라서 세조의 자손으로서 왕위에 오른 연산군의 재위를 부정하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당상관으로서 사초를 발견한 이극돈이 이를 문제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이 사실을 전해들은 유자광이 대대적으로 문제시한 것 역시 국기를 지킨다는 입장에서 보면 정당성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세조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던 김종직은 세조에 충성했던 인물이었다. 세조 5년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세조를 받들었다. 세조의 아들인 성종조에서는 형조판서에 오르기까지 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성리학적 이념에 투철하고자 한다면 과거조차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 밑에서 벼슬살이를 했던 김종직이 세조의 집권을 비판하는 글을 남긴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위선적이었던 것이다. 김종직이 이런 글을 쓰고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올린 것은 당시 주류를 이뤄가던 사림들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사림은 왕권 중심의 패도정치보다는 성리학적 이념에 기초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신봉했던 것이다. 이들 사림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얻기 위해 김종직은 세조 밑에서 벼슬살이를 했음에도 쿠데타를 비판하는 듯한 글을 남긴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김일손이 사초에 올린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편 역사는 유자광이나 이극돈 등 갑자사화의 주도자를 비판하는 삽화를 집어넣고 있다. 바로 이 두 사람이 김종직, 김일손과의 개인적인 원한 관계 때문에 사화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유자광이 일찍이 함양군에 놀러갔다가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판에 새겨 벽에 달아두었다고 한다. 함양은 유자광의 처가가 있던 곳이고, 장인은 그 고을의 향리였다. 그런데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와서는 이것을 보고는 현판을 떼어 불태워버리면서, “자광이 어떤 놈이기에 이럴 수 있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글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조선시대 양반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유자광은 몹시 분하여 이를 갈았으나 김종직이 임금의 신임을 두터이 받고 있을 때였으므로 오히려 교분을 맺었다고 한다. 김종직이 죽었을 때는 제문을 지어 울면서 중국의 거유인 왕통과 한유에 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동시대의 인물인 남곤이 기록한 <유자광전>을 옮긴 것이므로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사림의 영수 김종직은 첩의 아들이자 일개 향리의 사위인 유자광을 멸시했던 것이다. 유자광이 이를 악물고 참아가며 김종직과 교유한 사실을 보면 그의 처세가 무섭지 않을 수 없다. 치욕 속에 칼을 갈고 있던 것이다. 첩의 아들이란 출생의 한계는 신분제 사회 조선에서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조차 어머니가 천한 출신이란 점 때문에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를 공격한 것 역시 그가 전라감사로 있을 때 성종의 초상을 맞아 기생과 놀아나고, 또 뇌물 먹은 일을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극돈이 상관으로서 조용히 고쳐줄 것을 청했지만 김일손이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세조를 비판하는 사초를 올린 것은 분명 국기를 흔든 사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신진 사림세력과 훈구세력, 그리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연산군과의 세력 관계가 대규모 공안사건으로 비화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유자광의 끈질긴 생명력
연산군 때 유자광과 함께 권세를 누렸으며, 뒷날 간신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임사홍은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날 때 맞아죽었다. 그러나 유자광은 오히려 중종반정 당시 공신으로 책봉됐다. 연산군 말기 학정(虐政)이 극에 달할 때는 유자광 같이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인물도 감히 나서질 못했다. 폭정이 극에 달했을 때 유자광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리고는 중종반정 당시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 반정 3대장이라 불리는 반정 주도 세력에 줄을 댔다. 새임금으로 추대된 진성대군이 연(輦, 가마)을 타고 궁으로 들어오자 재빨리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 한나라 곽광이 창읍왕을 폐한 것처럼 현 임금을 폐해 대궐 안에 가두고 대비께 폐주한 연고를 고해야 합니다.” 한의 창읍왕이 황제로 추대됐지만 폭정을 자행하자 선제를 새로 추대한 것처럼 연산군을 폐하라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무서운 변신이 아닐 수 없었다. 반정세력으로서는 유력자였던 유자광이 재빨리 붙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자광은 성희안과는 업무관계로 개인적 인연도 있던 터라 줄 대기도 쉬었다. 그러나 1등 공신에 책봉된 유자광의 득세에 그와 대척관계에 있던 사림세력은 불만이 컸다. 반정이 있은 지 1년도 안 돼 유자광을 죄주라는 주장이 비등했다. 공신세력은 그를 비호했지만 여론 앞에 어쩔 수 없었다. 유자광은 귀양에 처해졌고, 귀양 5년 만에 죽음을 맞았다. 천출이란 한계를 딛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 세조부터 중종까지의 다섯 임금 밑에서 유자광은 영화라면 영화를 누렸다. 물론 유자광이 남이 고변사건이나 연산군대의 무오사화 등 그를 간신배로 인식하게 했던 결정적인 사건에서 절대 악인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대를 부침했던 많은 인물들과 비교해봐도 유자광만이 절대 악인은 아니었다. 권력을 쥐기 위한 지배세력 내 투쟁은 어느 때나 있기 마련이다. 다만 유자광에겐 어떤 정치적 원칙이나 비전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출세욕을 가진 자는 어느 시대나 있기 마련이고, 그들 중 상당수는 권력의 맛을 보기도 했다. 유자광이 과에 비해 지나치게 간신이자 악인으로 낙인찍혔던 것은 그의 정적이었던 사림세력이 조선이 망하는 날까지 권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는 승리한 자가 기록하기 때문이다. 최용범/ 역사작가 gaji15 hanmail.net/ 한겨레2006년 03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