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출의 '大政客' 강감찬
고려 초인 1018년(현종9년) 거란의 제3차 침입을 좌절시켜 고려 최고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아 거둔 승리가 아니다.
더욱이 '강감찬 장군 강감찬 장군' 하는 데 강감찬은 무신(武臣)이 아니라 문신(文臣)이다. 그것도 문과 장원급제 출신의 전형적인 문신이다.
강감찬(姜邯贊 948년~1031년)은 지금의 서울 봉천동(당시 시흥군)에서 태어났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의 탄생과정은 예수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송나라 사신이 한양을 방문하던 중에 시흥군 쪽으로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집을 찾아갔더니 그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 강감찬 (姜邯贊, 강은천 고려 장군) 948(정종 3)~1031(현종 22).고려 현종 때의 장군.
[개요]
1010년과 1018년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특히 우리나라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구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초년]
본관은 금천(衿川).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헌복시(任軒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그뒤 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고, 1018년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했다.
▲ 강감찬 장군 영정
[거란의 침입과 격퇴]
1010년(현종 1) 거란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조정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이에 놀란 조정의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했으나, 강감찬은 이를 반대하고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왕을 나주로 피신하게 했다. 왕의 피신중에 양규(楊規)가 곽주(郭州)에서 적을 무찌르고, 하공진(河拱辰)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고려는 항복의 치욕을 면하게 되었다.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현종이 친히 조회(朝會)하지 않은 것과 강동(江東) 6성을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 : 지금의 평안남도 자산)와 신은현(新恩縣 : 지금의 황해도 신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다. 침략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니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그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했다. 거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만년]
1020년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검교태사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현재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文宗)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구주대첩
▲ 강감찬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안국사(安國社)
문과 장원급제한 전형적인 문신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더니 소스라치게 뒤로 물러서며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 있구나!"라고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 별 점을 칠 때 문곡성은 큰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별로 전해진다.
그러나 '고려사'는 그의 용모에 대해 "체격이 작고 용모가 보잘 것 없었다"고 적고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이기도 했던 아버지 강궁진으로부터 학문과 무예를 익힌 강감찬은 남들보다 늦은 고려 성종2년(983년)인 36살 때 문과에 장원급제해 탄탄대로를 달려 거란의 2차 침입이 있던 1010년 현종1년 예부시랑으로 있었다.
예부는 조선의 예조에 해당하며 시랑은 참판(차관) 내지 참의(차관보)의 고위직이었다.
993년(고려성종12년) 거란의 1차 침입은 서희의 탁월한 외교술로 거란병을 되돌렸지만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강조(康兆)를 단죄한다는 명분으로 침략한 제2차 거란 침입 때 조정 관리들은 하나같이 현종에게 항복을 건의했다.
※ 강조 (康兆 고려 무신) ?~1010(현종 1).고려초의 무신.
[개요]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정변을 일으켰다. 황해도의 토성(土姓)이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정변과 개혁정치]
고려 제6대 왕인 성종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죽고 목종(穆宗 : 경종의 아들)이 왕이 되자, 이때 왕의 나이가 18세임에도 불구하고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하게 됨에 따라 외척이 다시 등장했다. 앞서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켜 유배되었던 김치양(金致陽)도 다시 불려와 중용되었다. 김치양은 마음대로 정치를 하면서 1003년(목종 6)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목종은 대량원군 순(大良院君詢 : 현종)을 후계자로 삼고, 궁궐 수비를 위해 서북면도순검사로 있던 강조에게 돌아와 지키도록 했다. 이때 세간에서는 왕이 위독하여 이 틈에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하여 인심이 매우 흉흉했다. 이윽고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강조는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오던 도중,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도 평산)에서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한때 주저했으나 부하 장수들과 회의한 뒤 개경(開京)으로 가 목종을 퇴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태후와 그 무리들을 귀양보냈으며, 양국공(讓國公)으로 폐했던 목종을 죽였다. 이어 왕실의 부패를 척결하고 새로이 관제개혁을 실시하여 국왕의 측근 보좌기구인 은대(銀臺)와 중추(中樞) 남북원(南北院)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했다. 이때 중대사(中臺使)에 올랐으며, 1009년(현종 즉위)에는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어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
[거란의 침입]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1010년 거란의 성종이 그 죄를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40만 대군를 이끌고 침입했다. 그러나 근본 이유는 지난 993년(성종 12) 제1차 침입 때 강동6주(江東六州)의 영유권을 고려에 넘겨주었다는 것과 고려가 송나라와 화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통주(通州 : 지금의 평북 선천)에서 맞서 싸웠으나 지고 말았다. 거란군에 포로가 된 강조에게 거란 성종이 자기의 신하가 되어 달라고 권유했으나 강조는 단호히 거절했으며, 성종의 신하가 되겠다고 한 이현운을 몹시 나무라고는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거란은 1018년 다시 침입해왔으나 강감찬에게 대패했다.
이 때 유일하게 항복을 반대한 인물이 예부시랑 강감찬이었다.
"적의 예봉을 피했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현종은 결국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라도로 몽진했고 얼마 후 국권을 다시 회복됐다.
현종은 무한한 총애로 강감찬의 지략에 보답했다.
훗날(현종9년) 현종이 강감찬을 서경유수(평양시장)로 제수하면서 내린 임명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경술년(1010년)에 오랑캐의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이 침입한 전란이 있었다. 그때 만약 강(姜)공의 전략을 채용하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 옷(左袵)을 입을 뻔했다."
그는 전장의 장수가 아니라 불세출의 전략가였다.
귀주대첩후 영웅됐지만 공직서 물러나
이후 강감찬은 이조판서에 해당하는 이부상서에 오른다.
문신의 인사권을 다루는 핵심요직이었다.
1018년 거란이 10만의 병력을 보내 세 번째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자 현종이 강감찬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거란군 침입 소식을 접한 현종은 강감찬을 최고사령관인 상원수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20만8300명의 병력을 인솔케 했다.
압록강 쪽으로 나아간 고려군은 흥화진 인근 대천(大川)에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물을 막은 다음 거란군이 대천을 건너려 할 때 1만2000여명의 기병이 돌격해 거란군의 기세를 꺾어버렸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귀주대첩은 해가 바뀌어 거란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다.
※ 귀주 대첩(龜州大捷) 귀주 대첩은 1018년 고려 현종 때 요나라(거란) 침략군을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전투이다.
[전쟁의 배경]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993년(성종 12) 1차 침입에서는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에게 승리한 뒤 서희가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1010년(현종 1) 2차 침입에서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 소득없이 돌아갔고, 1018년(현종 9년) 3차 침입에서 강감찬이 귀주대첩을 이루었다. 이때 거란은 고려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게 하였다.
[경과]
이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봉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을 막도록 하였다. 고려군은 압록강 유역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워 대승하였으나, 거란군은 수도인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계속 남하하였다. 남하하던 거란군은 자주(慈州)에서 다시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계속 남하하여 개경 근방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귀주에서 매복하고 있던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다. 이것을 귀주에서 크게 이겼다고 해서 귀주대첩(龜州大捷)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결과]
그 결과 요나라는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도주하는 거란군에 맞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대항했으나 승부를 보지 못한 채 대치상태가 오래 가고 있었다.
"때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녘으로부터 휩쓸려와서 깃발이 북으로 나부껴 고려군이 이 기세를 타고 맹렬히 공격해 거란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란군 병사 중에서 살아돌아간 이는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0만 가까운 거란병사가 한반도에 들어와 다 죽었다는 말이다.
'장군'칭호, 그의 다양한 면모 덮을 수도
강감찬은 고려 최고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조선 때도 강감찬은 마치 우리가 이순신을 기리듯이 최고의 충신으로 받들었다.
삼군을 거느리고 개선하는 상원수 강감찬을 현종은 교외까지 친히 나가 맞이했다.
여기서부터 강감찬의 행보는 눈길을 끈다.
개경으로 돌아온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현종은 만류했고 강감찬은 거듭 사의를 밝혀 마침내 1년후인 현종11년 공직에서 물러난다.
물론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030년 잠시나마 문하시중(조선의 영의정)을 맡기는 하지만 그는 사실상 10년 동안 야인(野人)으로 살았다.
아마 나라를 구한 영웅이 계속 조정에 남아 있었다면 어떤 명목으로 비명횡사(非命橫死)를 당했을지 모른다.
강감찬은 대전략가임과 동시에 정치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던 대정객(大政客)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칫 '강감찬 장군'은 이런 강감찬의 다양한 면모를 덮을 수 있다.[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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