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는 통일신라시대 금성군이라고 했으며, 나주란 이름은 903년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982년 성종 때 나주목으로 1896년 전남도청을 광주에 설치하기 이전까지 천 여년 동안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 매김해왔다. 신라를 대표하는 도시가 경주라고 하면, 전라도를 대표하는 도시는 어디 일까? 아마도 전주와 나주로 본다. 전주는 예전에는 전주목이었고, 지금도 도청 소재지로 전북을 대표하는 도시로 남아 있지만, 나주는 그 자리를 일제가 들어오면서 광주에 빼았기고 말았다. 그리고 일제는 우리 문화 말살 정책으로 나주의 역사는 많이 사라졌다. 최근 나주의 역사 복원이 이뤄지고 있다.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광주에서 나주 시내로 들어서면 영산강을 건너는 다리에 이목을 끄는 조형물이 보인다. 차를 운전하면서 촬영한 관계로 그림자가 있어 흠이지만 쉽지 않은 곳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영산강 다리를 건너면서 우측편에 바로 보이는 동문이다. 일제 때 없어진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동점문란 뜻은 차츰 동쪽에 있는 문이라고 직역하면 동쪽에 가까운 문이란 뜻인가?
남문이다. 남고문이라고 하여 남쪽을 둘러보는 문이라고 해석해 본다. 남문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화성의 남문도 서울의 숭례문인 남문도 다 남아 있다.
1872년 작성한 지도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예전의 그 모습 대로 24개의 건물이 남아 있었다. 주요 건물은 나주목 동헌, 금성관, 목사내야(지금의 도시사 관사), 당간지주 등이 주요 건물이다.
위 지도의 나주성 안에 있는 24개 건물의 내역을 표하였다. 글씨를 접사해서 촬영했으면 잘 보였을 텐데 아쉽다.
금성관의 앞에 있는 망화루다. 지금 시대로 보면 전남 도청 건물 대문이다.
이곳이 금성관이다. 금성관에서는 한 달에 두번씩 임금이 계신 곳에서 절을 했다고 한다. 이곳이 전라도의 권력 중심이었다고 한다. 임란 때 김천일 의병장군이 이곳에서 출병식을 하였다고 하고, 광주학생운동의 진원지가 이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5.18 때도 시위대가 이곳에 집결했다고 한다.
5.18 민중항쟁 안내가 왜 여기 금성관 앞에 있을 가? 그 뿌리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정수루이다. 이 루각에서 매 시간 북을 쳐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현재의 북은 최근에 만든 북이다.
정수루의 북
나주목의 내아, 지금으로 보면 전라남도 도지사 관사이다.
목사내야의 담장에 500살을 넘게 살은 느티나무가 있다.
나는 지난 2월1일 광주에서 숙박을 하고, 함평군농업기술센터에 한국곤충학회 사무국 개소식 참석 전 함평가는 도중에 나주를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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