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의 어린 목종이 집권하자 왕권은 그의 모후 헌애왕후 차지가 된다. 유난히 정권욕이 강했던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부부연을 맺고 그들의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왕권을 상실한 목종은 도탄에 빠진 나머지 남색을 즐기며 정치를 외면한다.
이에 따라 조정이 일부 척족과 권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면서 고려는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목종은 경종의 맏아들로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 소생이며 이름은 송, 자는 효신이다, 980년에 태어난 그는 경종이 사망할 당시 불과 두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는 성종에게로 이어졌다.
하지만 아들이 없던 성종은 송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990년에 개령군에 봉했다. 그리고 송은 997년 병으로 누워 임종을 앞둔 성종의 내선으로 왕위에 오른다.
그가 곧 고려 제7대 왕 목종이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빌미삼아 친모 헌애왕후가 섭정을 실시한다. 정권을 거머쥔 헌애왕후는 곧 자신의 정부 김치양을 불러들인다.
김치양은 성종대에 천추궁을 출입하면서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다가 이일이 발각되어 장형을 당하고 귀양 중에 있던 상태였다. 김치양을 불러들인 헌애왕후는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부르도록 하고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른다.
또한 김치양파 버젓이 부부행세를 하며 간통을 하고 아이까지 출산하게 된다.
김치양은 등용된 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우복야 겸 삼사사에 오르고 인사권을 장악하여 백관의 임면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렇게 되자 전국에서 벼슬을 원하는 자들이 뇌물을 가지고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으며, 그는 거둬들인 뇌물로 3백여 간이나 되는 집을 짓고 정원에 정자와 연못을 꾸며 밤낮으로 헌애왕후와 놀아났다.
또한 김치양은 자신의 사당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갔다. 김치양의 권력독점으로 조정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목종은 그를 내쫓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지만 헌애왕후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다.
이렇듯 왕권을 완전히 빼앗긴 목종은 절망한 나머지 정사를 소홀히 하고 엉뚱하게도 남색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의 동성연애 대상은 유행간이라는 인물이었다.
유행간은 용모가 남달리 아름다웠는데, 목종은 그의 용모에 반하여 남색을 즐기게 된다. 목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유행간은 곧 합문사인의 벼슬에 오르게 되고 항상 목종 곁에서 정사를 농단하기 시작한다.
목종은 정사에 관한 한 유행간에게 묻지 않는 것이 없었고 이에 따라 유행간은 마음먹은 일이면 언제든지 왕을 조정하여 이룰 수 있었다.
왕을 마음대로 조정하게 된 유행간 역시 김치양과 마찬가지로 오만하고 방자한 행동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백관들을 경멸하여 그들에게 턱과 눈빛으로 지시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의 측근 신하들은 마치 유행간을 왕처럼 떠받들었다.
유행간은 힘이 강해지면서 유충정이라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목종에게 소개해주었다. 발해 출신인 유충정 역시 외모가 미려하고 신체가 뛰어난 덕택으로 목종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조정은 점차 유행간과 유충정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그들 두 사람은 항상 목종 곁에서 왕명을 핑계하여 인사를 좌우하였으며, 때로는 자신들이 마치 왕인 것처럼 많은 궁인들을 이끌고 다니기도 하였다. 조정이 이처럼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1001년 그동안 김치양과 놀아나던 헌애왕후는 아들을 출산했다.
이때부터 김치양과 헌애왕후는 자신들의 아들을 차기 왕으로 앉히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 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뿐이었다.
헌애왕후의 친동생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후에 사가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를 알게 된 성종은 왕욱을 귀양보냈다. 그후 헌정왕후는 혼자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에 의해 대궐에서 양육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었다.
헌애왕후는 자신의 이종 조카인 대량원군을 없애면 김치양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세자로 책봉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대량원군을 강제로 머리를 깎여 숭교사로 출가시킨 뒤 다시 양주로 내쫓아 삼각산 신혈사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누차에 걸쳐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량원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김치양과 헌애왕후의 왕위를 노린 음모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목종은 병을 얻고 말았다.
원래부터 겁이 많던 그는 1009년 봄에 숭교사를 다녀오다가 폭풍을 만난 다음부터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연등회 도중에 기름 창고에 불이 붙어 천추전이 불타고 궁궐 일부와 창고마저 소실되자 슬픔에 잠겨 정사를 돌보지 않고 드러누웠다.
목종이 병으로 눕자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고, 조정은 더욱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왕 곁에는 항상 유행간과 유충정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으며, 그들의 측근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은 왕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병으로 누운 목종은 좀처럼 편전에 나가지 않았으며, 만나기를 청하는 신하가 있어도 결코 만나주지 않았다. 따라서 유행간과 유충청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모두 왕명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그러는 사이 목종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스스로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한시 바삐 후계자를 결정하고자 하였다. 후계자 자격을 갖춘 유일한 혈통은 대량원군 왕순뿐이었다.
하지만 유행간이 왕순에게 선위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목종은 은밀히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 차기 왕에 대해 의논하고 황보유의를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전중감 이주정이 김치양 일파이기 때문에 그를 서북면 순검부사로 파견하고 동시에 서경도순검사 강조를 불러들였다. 강조가 왕명을 받고 서경을 출발하여 동주 용천역에 도착했을 때 내사주서위종정과 안북도호장서기 최창이 찾아왔다.
그들은 왕의 병세가 악화되어 이미 위독한 상태이기 때문에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왕명을 날조하여 북방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강조를 소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백성들 사이에선 왕이 김치양 일파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에 강조는 그들의 말을 사실로 믿고 다시 서경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때 헌애왕후는 강조가 개경으로 돌아오면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생각에 도중에서 그를 생포하기로 결정하고 군사를 배치해둔 상태였다. 그 사실은 곧 강조의 아버지에게 전해졌고 그는 아들이 염려되어 급히 사람을 시켜,왕이 이미 죽고 없으니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국난을 평정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본 강조는 병력 5천 명을 인솔하고 개경으로 진출했는데, 평주(평산)에 도착해서야 왕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조는 병사를 이끌고 온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고 결국 부하 장수들의 건의에 목종을 폐립할 것을 결정했다.
폐립을 결정한 강조는 사람을 시켜 왕이 잠시만 귀법사로 몸을 피했으면 한다는 내용의 서찰을 궁궐로 보냈다. 귀법사로 피해 있으면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 다음 다시 데리러 가겠다는 뜻이었다.
강조는 그렇게 목종을 안심시킨 다음 군대를 몰아 왕성으로 진군했다. 병사들이 궁 안으로 밀려들자 목종은 폐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모후와 함께 궁인들과 유충정을 데리고 법왕사로 몸을 피했다.
목종이 궁궐을 빠져나가자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그 도당과 헌애왕후의 친속 이주정 등 30명을 귀양 보냈다.
한편 법왕사로 떠난 목종은 최항을 시켜 강조에게 말을 내어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강조가 말 한 필을 보내주자 충주로 말을 몰았다. 하지만 강조는 뒷일을 염려하여 목종을 죽이기로 결심하고는 사람을 시켜 사약을 먹도록 강요했는데, 목종이 이를 거부하자 결국 강조의 수하들이 목종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처럼 꾸였다.
목종은 결국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목종이 죽자 강조의 수하들은 문짝으로 관을 삼아 시체를 보관하고 강조에게 보고하니, 강조는 적성현 창고에서 쌀을 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009년 2윌에 일어난 이 같은 강조의 역모사건으로 I1년 4개월 동안의 목종 시대는 끝이 났다. 또한 이 사건은 현종 즉위 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목종의 치세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경부는 노나라의 예법을 위반하였고 불위는 진나라의 화근을 빚어냈으며 제나라 환공은 자기 시체에서 벌레가 생기도록 거두는 자가 없었고 진시황은 모래톱에서 객사하였으니 이런 사람들이 어찌 만대의 치욕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목종은 이런 사람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하여 일의 시초부터 마땅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 결국 모자가 함께 화를 입고 왕실을 거의 망칠 뻔하였던 것이다. 아아! 목종의 불행은 오히려 불행이 아니로다.'
목종은 생을 마감한 지 한 달 후에 적성현 남쪽에서 화장되었으며 능호는 공릉이다. 목종은 선정왕후 유씨 이외에 다른 부인을 두지 않았으며, 소생은 없었다. 그가 소생이 없었던 것은 아마 남색을 즐겼기 때문일 것이다. 선정왕후 유씨는 태조의 아들 수명태자 소생 흥덕원군 왕규의 딸이다. 죽은 후에는 목종 사당에 합사되었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
출처 : 山寺愛人
글쓴이 : 山寺愛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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