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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원의 성립과 변천

도심안 2009. 5. 29. 21:33

                                 서원의 성립과 변천

 

조선시대 서원은 한 시대를 주도하던 사림(士林)의 본거지였다. 이곳에서는 강학(講學)과 장수(藏修)를 통해 온유한 덕성과 불의를 배격하는 굳센 기상을 겸비한 사림이 태어났고, 국가 경영과 사회 운영을 논하는 대경륜이 창출되기도 했다. 판소리, 사물놀이와 같은 민중문화는 찾을 수 없다 해도 유가(儒家) 최상승의 경지에서 창조된 형이상의 사림문화가 또한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사회는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성종 때 김종직의 문하에서 비롯된 사림이라는 이념집단으로서의 사회세력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몇 차례의 사화와 같은 시련을 겪기는 했으나 마침내 16세기 후반 훈척을 누르고 집권을 실현, 18세기 전반기의 탕평책으로 그들의 존재가 부정될 때까지 이른바 ‘사림의 시대’를 이끌었다.

종전까지는 사림의 집권과 함께 망국적인 당쟁이 출현했다고 하여 사림의 역사적 존재를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우선 사림은 정치적인 면에서 패도적인 부국강병보다 의리명분에 토대한 민심수습과 안정을 우선시했으며, 소수 권력집단에 의한 정책결정보다는 가능한 한 지배층 전체가 참여한 토론에서 도출된 공론을 통해 정국을 운영했다. 비록 명분을 높임으로 인해 의견을 같이하는 붕당(朋黨)을 형성하고 정쟁을 격화시키기도 했지만,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자 한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서원은 바로 조선의 사상을 이끌어 간 사림의 양성소였으며 그 활동의 기반이자 근거지였다. 이렇듯 서원은 사림의 대두와 함께 출현했고 퇴조와 함께 쇠퇴하는 운명을 공유하는 동반자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

 

우리 나라 서원은 중종 38년(1543) 풍기 군수 주세붕이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을 그 효시로 삼는다. 그것이 창건된 시점은 마침 사림세력이 대두하던 기간이었다. 향촌사회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15세기 이래 사림은 향촌질서를 그들 중심으로 구축하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육과 교화를 표방함으로써 사림의 향촌활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구심처로서의 서원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서원이 중종 말기에 성립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조광조 등 신진 사류들이 추진하던 정몽주ㆍ김굉필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새로운 교학체제의 모색이었다. 물론 그들이 곧 실각함으로써 이런 운동은 중단되었지만, 사림계 인물의 제향과 강학 및 장수를 겸하는 서원의 선구적 형태는 여기서 마련되었다.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은 이 시기 사림의 대표이던 퇴계 이황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의 정치목표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모델인 삼대의 지치(至治) 재현에 있었다. 그것은 인심을 바로잡는 데서부터 비롯되고 교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군주의 수기(修己)와 함께 교화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을 양성하고 훈련시켜야 했다. 퇴계는 그 구체적인 실천도장을 바로 서원에서 구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근거 위에서 그는 마침 풍기 군수에 임명됨을 기회로 우선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 안에 그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했다. 이후에도 그는 10여 곳의 서원 건립에 직접 참여하거나 문인을 파견해 지원하는 등 그 보급에 주력했다. 뿐만 아니라 사림 간에 강학하고 덕을 닦는 내적 수양공간으로서의 강당 서재와, 사림의 사표가 되는 인물에 대한 제향공간인 사묘(祠廟)를 서원의 기본체제로 정식화하고, 원규(院規)를 지어 서원에서의 학습활동과 운영방안을 규정했다. 서원은 마침내 이황에 의해 이상사회를 건설할 주역으로서의 사림을 양성하는 강학과 장수, 제향을 겸한 학교 형태로 정착, 보급된 것이다.

사림세력은 명종 말 문정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윤원형 등 척신세력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고 선조의 옹립에 적극 참여했다. 이제 그들은 출신 기반이었던 향촌사회의 운영은 물론 정치의 실권까지 장악, 사회 전반을 이끌어 가는 명실상부한 주도세력이 되었다. ‘사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를 예측한 퇴계에 의해 미리 준비되고, 실제로 그동안 다수의 사림을 양성하여 사림계 관료층 형성에 기여해 온 서원이 사림의 시대를 맞아 널리 보급되고 크게 발전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우선 양적으로 볼 때, 서원은 선조에서 현종 말까지 106년 간 약 200여 개소가 설립되었으며 사액된 곳은 91개소였다. 초창기인 명종까지 20여 개소였던 데 비하면 상당한 증가다. 지역별로도 경상도 일변도에서 점차 벗어나 전라ㆍ충청ㆍ경기도는 물론 한강 이북지역에까지 확산되었다. 서원 발전의 양상은 질적으로도 확인된다. 퇴계, 남명 조식과 율곡, 우계 성혼 등 저명한 유학자의 학통을 각기 계승한 문인과 학자들이 그들을 제향하는 서원을 세우거나, 아니면 이미 세워진 곳을 근거지로 하여 강학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 시기의 학계를 양분하는 ‘영남학파’ 또는 ‘기호학파’라고 하는, 학통과 사승(師承) 관계에 따른 학파의 형성은 이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림 집권 후 얼마 안 되어 발생한 붕당은 대체로 학연을 매개로 학파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강했다. 퇴계 문인이 중심이 된 영남학파가 남인으로 변모하고, 화담이나 남명의 학맥은 북인, 그리고 율곡ㆍ우계의 문인들인 기호학파가 서인이 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이렇게 본다면 학파 형성의 거점으로서의 서원은 곧 붕당 결성의 토대였다.

뿐만 아니라 서원은 의리ㆍ명분 문제와 관련된 사안을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토론이나 논쟁에 대해 향촌별 사림들의 견해를 조율하고 수렴하며, 나아가 자기들이 지지하는 붕당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율곡ㆍ우계의 문묘종사 찬반논쟁이나 복제(服制)문제의 논란인 예송(禮訟)을 둘러싸고 서원을 근거로 한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제 서원은 그 본래의 기능 이외에 사림의 정치활동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더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하나 덧붙일 것은 서원에서의 사림활동이 중앙정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림이 향촌에 기반을 둔 사회세력이었으므로 정치 이전에 당연히 향촌문제가 먼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원의 성립 전부터 훈척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향촌활동의 기반이 될 적절한 기구를 모색하는 데 부심했었다. 이제 그런 방해나 제한이 없어진 마당에 서원이 향촌활동의 근거지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림의 시대에 있어서 바로 그 사림을 양성하고, 그들에 의해 운영되며, 그 활동의 근거지였던 서원이 양적으로나 내용 면에서 확대되고 발전한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서원도 숙종 이후 급격히 증가되어 남설(濫設) 경향을 보인다. 숙종 일대 46년 간 건립된 서원은 모두 170여 개소를 헤아릴 정도다. 여기에 이때 와서 서원과 별다른 구분이 없어지게 된 사우(祠宇)의 수(180여 개소)까지 합하면 350여 개소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제향 인물마저도 유학자여야 한다는 원칙이 무너지고, 정쟁에 희생된 인물이나 행의(行誼) 있는 유생, 심지어는 단지 자손이 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제향되는, 남향(濫享)과 외향(猥享)의 경향이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이제 서원이 그 발전기를 지나 폐단을 나타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서원의 이런 변화는 붕당 간의 정쟁이 격화되고 경제력 발전에 따른 사회 변동으로 사림의 위상이 크게 흔들린 데서 유래했다. 정쟁에 희생된 자파계 인물을 제향함으로써 자파 당론의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한 데서 비롯된 제향 위주의 기능 전환이 남설과 외향을 불러왔으며 사우와의 혼동을 초래한 것이다. 이런 서원에서 강학과 장수의 모습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묘만 덩그렇게 있고 강당과 동ㆍ서재는 함께 합쳐져 소규모로 되는 서원의 건물구조 양식은 이 시기부터 비롯된다. 서원 수는 날로 증가하지만 사문(斯文)은 더욱 침체하고 의리 또한 어두워질 뿐이라는 서원 무용론이 대두하게 되고, 이것이 뒷날 서원 철폐의 한 명분이 되었다.

 

서원에 대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일찍이 선조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숙종 말까지의 국가 시책은 서원을 장려하는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통제책이 본격화된 것은 전국적으로 173개소의 서원을 훼철(毁撤)하는 강경책을 취한 영조 때부터였다.

이런 강경책의 이면에는 제향 위주로 인한 서원 무용론의 대두와 함께 영조가 실시한 탕평책이 놓여 있다. 탕평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영조는 정치의 모든 폐해가 당론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붕당은 당연히 타파되어야 하고 그 모집단인 사림은 정리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영조 이후 사림과 사림적 요소는 정치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경제적 변화 속에서 신분적 위기를 맞고 있던 사림의 사회적 존재는 점차 퇴락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탕평파에 의해 당론 유발요인으로 간주된 서원에 대한 훼철의 단행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된다.

영조의 훼철책으로 서원 남설의 경향은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원에 대한 통제책은 정조와 철종 연간에 다시 몇 차례씩 취해지고, 적지 않은 서원들이 금령에 저촉되어 철폐되었다. 그것은 사림의 전반적인 퇴조 속에 이 시기 서원이 지녔던 두 가지 폐단 때문이었다.

하나는 서원이 미치는 사회적 폐단이었다. 금령의 강화는 지방관의 서원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거의 단절시킴으로써 서원의 재정을 악화시켰고, 끝내는 대민(對民) 작폐를 불러왔다. 화양동서원의 횡포는 그 대표적 사례다. 다른 하나는 이제 서원이 제향자의 후손에 의해 운용됨으로써, 사림의 공적인 기구로서의 성격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점이었다. 18세기 이후 사림이 퇴조하면서 사족 지배체제가 무너지자 이제 혈연적으로 보다 가까운 족적 결속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 시기에 현저해지는 족보의 성행과 문중계ㆍ동성촌락의 발달 등이 이를 말해 준다. 서원에 문중적 성격이 강화된 것은 이런 사정에서였다.

실추된 왕권의 회복과 강력한 중앙집권하의 국가체제 정비를 꾀하던 흥선대원군에 의한 대대적인 서원 훼철과 정리도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라는 정책적 고려 아래 이런 폐단의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워 단행된 것이다.

 

답사라는 이름으로 문화유적지를 찾는다면 그 대상은 십중팔구 사찰이다. 그만큼 사찰에는 전해 오는 문화재도 많고, 세속의 번뇌를 피어오르는 향연(香煙) 속에 띄워보낼 경건함이 우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서원은 어떠한가. 도포 입은 유생의 모습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거니와, 몇몇 유수한 서원에서나 관광객이 서성일 뿐이다. 이미 600여 년 전인 고려 말, 유학의 쇠퇴를 한탄하던 회헌 안향(安珦)의 “만정춘초적무인(滿庭春草寂無人, 뜰 가득히 봄풀만 무성할 뿐 인기척마저 없구나)”이란 시구가 오늘날에 비하면 오히려 무색할 정도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식이 변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서원이 정녕 구시대의 산물이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기 때문인가.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서원은 청산되어야 할 유산이 아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극기로 인간본성의 착함을 지키며, 겸양의 미덕을 길러 완전한 인격체의 완성을 도모하던 사림의 이상이 잠들어 있다. 자신의 신념과 정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관철하려던 조선 선비의 기개와 의지가 서려 있기도 하다.

서원 속에는 이렇게 한때 외면되고 잊혀졌던 양반사회와 그 정신문화가 조용히 우리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다. 거짓과 사기가 일상사처럼 되어 버린 오늘날, 도덕률은 고사하고 가치관마저 극도로 혼란해진 불확실성의 시대에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기개는 만인의 심폐가 갈구하는 신선한 산소와 같다. 서원에 새삼 주목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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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조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저서『조선시대 서원연구』,『한국사상의 정치형태』등과 정치사.사회사관련 논문이 다수 있다.

 

글 출처 : 문화와 나/2002 봄

출처 : 나무과자
글쓴이 : 순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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