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목종은 고려 제7대왕(경종의 장자)으로 성종 17년(997)에 왕위에 올라 문식

도심안 2009. 6. 13. 23:54

목종은 고려 제7대왕(경종의 장자)으로 성종 17년(997)에 왕위에 올라 문식 양반 및 군인의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민간문역으로 주철(鑄鐵)사용을 완화시켰으며 도성에 육위군영을 세우는 한편 12절도를 4도호와 동서북 방어 진사, 현령, 진장 등을 두었다. 그리고 군현에 말단종사하는 호장을 우대 은여를 베풀었으며 삼경십도에 박사 사장(博士師長)에게 명하여 인재를 양성케하고 재능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또한 불교 신앙을 국교로 삼고 생모인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원당(願堂)으로 도성내 진관사와 숭교사를 창건하였으며 거란과 여진에 침입 방어시설도 튼튼히 구축 경비를 강화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었다. 목종은 부왕인 경종이 두 왕후를 두었는데 헌애왕후(천추태후)와 헌정왕후(獻貞王后)로서 모두 태조의 7자 욱(旭) 딸이며(성종과 자매) 외가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하였다.

그러나 경종이 돌아간 뒤 천추태후와 외척되는 김치양 사이에 추문이 생겨 성종이 김치양을 먼곳으로 보냈으나 성종이 붕(崩)하고 목종이 18세에 즉위한후 김치양을 소환 우복야 삼사사에 임명되니 백관 모두가 그의 손에 움직이게 되었다. 또한 목종 6년에 이르러 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들이 생기어 그에게 왕위를 계승하려고 음모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 목종에게도 자손이 없으며 태조 후손이 끊어져 오직 헌정왕후에게 태어난 대양원군(詢)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태후는 대양원군을 꺼려하던 나머지 12세시 삼각산 신혈사에 이우(移寓)시킨 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사살하고자 하였으나 그 절의 노승이 내실 자리 밑에 구멍을 뚫어 놓고 위급할 때 그를 그 속에 숨겨 화를 면하게 하였다 한다.

이러던 중 목종 12년 1월 16일 갑자기 대부에 있는 유거에서 불이나 천추전까지 연소되어 목종은 비탄한 나머지 병이 생겨 위중하게 되자 중추원부사 채충순을 불러 경은 중추원사 최항과 힘을 다하여 대양원군을 후계자로 삼고 사직을 지키도록 하명하는 한편 서경도순검사 강조를 불러 입위케하자 부사 이현운과 더불어 5천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와 목종 12년(1009) 2월 2일 글을 올려 왕께 아뢰기를 간당이 틈을 엿보고 있으니 황주 귀법사에 출어하시기를 청한 후 대초문을 들어오니 목종은 태후와 같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궁인 내시와 채충순, 유충정 등을 데리고 법왕사로 은신하게 되었다. 강조는 대양원군을 연총전에서 제8대왕으로 현종을 즉위시키고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인을 사살하고 당류와 태후 친속 30여명을 해도로 귀향보냈다.

또한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파수케하는 한편 귀법사를 거쳐 충주로 방출케 되니 목종과 태후는 삼필의 말을 얻어 타고 그곳을 행하여 가는 도중 목종은 어의를 벗어주고 식물과 바꾸어 태후에게 드리는 한편 식사시에 소반과 그릇을 받들었으며 태후가 말을 탈 때에는 고삐를 잡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다. 강조는 몹시 불안을 느껴 적성에 이르렀을 때 현종 1년 3월 1일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죽이고 문비(門扉)로서 관(棺)을 삼아 현관에 안치하였다가 익월 현남(?)에 화장한 후 공능이라 하였으며 태후는 그곳을 도망하여 황주로 가서 현종 20년 여생을 마치었다 한다. 튀골 뒤 산기슭(현 적성면 마지리)은 감악산 서맥 월출봉하 폭포가 흐르고 경관이 아름다운 산골짜기로 고려 제7대왕 목종이 처절하게 사라져간 유일한 고려 문화재이다. 그리하여 파주문화원에서는 이를 추모하고저 지난 91년 5월 공능 유적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연안이씨 종중 소유로 있는 임야 100여평을 기증 받아 유적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