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의 문화재로 현재 남아있는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의 문화재)
1.김회련 개국원종공신녹권
종 목 보물 제437호
지 정 일 1966.02.28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남전길 18-13 (시산리 886)
시 대 조선시대
공신록권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로, 개국공신록권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한 신하들에게 내린 것이다. 개국원종공신 제도는 조선시대에 개국공신을 늘리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새로운 포상제도로, 1392년부터 1397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1,400여 명에게 봉해졌다.
김회련은 도강 김씨이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창업을 도와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그 후 홍주(현재의 홍성), 공주, 해주목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민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창업하는데 공로가 있는 신하들에게 1392년 9월에 1 ·2 ·3등으로 나누어 개국공신에 임명하였고, 그 후에도 공신에 준하는 신하를 선발하여 개국공신으로 추가하여 임명하였다. 이 공신록권은 태조 4년(1395) 윤 9월에 김회련에게 임명한 「원종공신록권」으로 길이 9.25m, 폭 3.03m의 긴 종이에 기록된 원본이다. 그 내용을 보면 태조 원년(1392) 10월부터 태조 4년(1395)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임명된 공신들의 선정경위가 열거되어 있으며, 특히 공신의 직명단자가 여기서만 기록되어 있다.
이 녹권을 통해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참여한 세력들을 파악할 수 있으며, 공신록권을 발행한 공신도감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2.김회련 고신왕지
종 목 보물 제438호
지 정 일 1966.02.28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남전길 18-13 (시산리 886)
시 대 조선시대
이 왕지는 사령서로 뒤에 교지라 일컫던 것이다. 태조 4년(1395)의 왕지는 공주목사 겸 관내권농방어사를 제수한 것이며, 행서체로 쓰여있다. 태조 6년(1397)의 왕지는 해주목사 겸 권농병마단련사 염장관을 제수한 것으로 초서체로 쓰여있다. 보인(왕의 도장)은 ‘조선지보’이다. 이들 왕지는 희귀한 고문서 자료들이며 공신록권과 함께 연시각에 보존되어 있다.

3.태인 고현동향악
종 목 보물 제1181호
지 정 일 1993.11.05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남전길 90 (시산리 930-2)
시 대 조선시대
향약은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한 것을 경계하며 어렵고 구차한 때에 서로 돕고 구하기를 목적으로 하여 마련된 향촌의 자치규약이다. 이 문헌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선조년간에 시작하여 1977년 최근에 이르기까지 약 400여년 동안 전라도 태인현 고현동에서 결성하고, 시행한 향약에 관한 자료이다.
원본을 보고 옮겨쓴 것으로 총 29책인데, 명칭은 다소 다르기는 하나 내용이 향약자료로 분류되는 문헌이 24책이며, 나머지 5책은 향약 관련자료들이다. 책의 형태와 체제는 각각 약간씩 다른데 머리말과 맺음말 그리고 좌목(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과 규약 등이 갖추어진 책도 있고, 단순히 좌목만 있는 책도 있다. 이 향약은 정극인(1401∼1481)의 『향음서』를 기준으로 하며, 성종 6년(1475)이 그 시행시초가 된다. 이 향약안들은 그 중간중간 빠진 본들이 많으며, 또한 구한말 이후의 것도 6책이나 포함되어 있다.
현재 이 문헌은 영광 정씨, 여산 송씨, 경주 정씨, 청도 김씨, 도강 김씨 등 최초 회원 오대문중의 자손들이 돌아가며 총무격인 유사를 뽑아 보존· 관리하고 있다. 현존하는 향약 문헌으로 양적으로나, 내용면에 있어 가장 많고 충실하며 향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4.정읍 무성서원
종 목 사적 제166호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 (무성리 500)
시 대 조선시대
신라후기의 학자였던 최치원(857∼?)과 조선 중종(재위 1506∼1544)때 관리였던 신잠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으로, 교육기능과 제사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임금으로 부터 이름을 받아 무성서원이라 하게 되었다.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사당, 현가루, 동·서재, 비각, 명륜당 등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성종 15년(1484)에 세웠고, 문루인 현가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2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이곳에는 성종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 등의 귀중한 서원자료가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5.무성리 석불입상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지 정 일 1998.01.09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96 (무성리 434-1)
시 대 고려시대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의 작은 암자 안의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다. 무릎 아래는 땅에 묻혀 있으며 땅 위로 드러난 부분도 불단에 의해 상당 부분이 가려져 있다.
불상은 민머리이며 머리에 마치 두건을 쓴 것처럼 보인다. 얼굴은 긴 타원형이며 입은 불룩하게 튀어나오게 조각되었다. 귀는 길어 목부분까지 이어지며, 목은 짧게 표현되어 있다.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는 가슴 부분에 표현되어 있으며, 양 어깨에 걸쳐진 옷자락은 U자형의 주름을 만든다. 왼손은 손등을 보이며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대고 있는데 손모양이 분명하지 않다.
불상의 드러난 높이는 2.4m이고 하복부의 폭은 1.15m이며,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6.무성리 삼층석탑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지 정 일 1998.01.09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96 (무성리 434-1)
시 대 고려시대
무성리 마을의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높게 마련된 축대 위에 서 있다.
바닥돌 위로 1층 기단과 3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탑신의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크다. 기단과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르고 있다. 얇아 보이는 지붕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 앙화(활짝 핀 연꽃모양 장식), 보주(구슬모양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너비에 비하여 길쭉해 보이며, 기단보다 높은 탑신의 1층 몸돌 탓에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들고 있다. 1층으로 줄어든 기단, 3단의 지붕돌 받침, 형식적인 기둥조각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곳이 옛 백제지역이었던 만큼, 지붕돌의 곡선에서 백제탑의 양식이 살짝 보이고 있어 지역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

7.도강김씨 훈도공파 종중 고문서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지 정 일 2007.09.21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은석길 18-41 (무성리 781)
시 대 조선시대
이 고문서는 교지 4점, 교첩 3점, 그리고 분재기 1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지와 교첩을 받은 이들은 태인현 고현내(현 정읍시 칠보면) 일대에 세거한 도강 김씨가의 조상으로 조선개국원종공신 충민공 김회련의 후손 5대에 걸친 문중 문서로 시대적으로 보아 510~390년전의 문서이다.
이 문건들은 태산선비문화권역에 보존 전래되어 이곳이 선비문화의 중심지로 자리하는데 정신적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8.남근석
종 목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3호
지 정 일 1977.12.31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1095
시 대 조선시대
남근석은 남자의 성기모양을 한 자연암석이나, 암석을 조각하여 세운 것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섬기는 민간신앙 중 성기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흰바위 마을 입구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남근석은 이 마을에 있는 12당산 중의 하나로, 일명 ‘자지바우’라고도 불리운다.
높이는 1.35m로, 네모난 단 위로 길고도 곧게 뻗어 있다. 꼭대기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깎은 후 둥글게 처리하였다. 300년 전에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주던 ‘박잉걸’이라는 사람이 이 남근석을 세웠다고 전한다. 음력 정월 초사흘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농사의 풍요와 액을 막기 위한 제사를 올리는데, 아이낳기를 소망하는 여인이 기도를 하면 아들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농경사회에서 풍부한 생산력의 바탕이 되었던 성(性)이 남근석으로 만들어지고 신성시되어, 이처럼 민족의 고유신앙이 되고 있다.

9.송정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지 정 일 1990.06.30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4
시 대 조선시대
성황산 동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송정은 7광, 10현들이 모여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지어 읊으며 즐기던 곳이다.
광해군(재위 1608∼1623) 시절 왕의 폭정이 극에 이르러 세상이 어지러웠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송정에 모여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는 이들을 가르켜 7광·10현이라 일컬었다.
7광은 김대립·김응창·김감·안치중·송민고·이상향·이탁을 가리키며 10현은 깅응찬·김광·안치중·송민고·이탁·김관·김렴·김급·김우직·양몽우를 가리킨다.

10.남천사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4호
지 정 일 2000.06.23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남전길 34-3 (시산리 844)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문신인 손홍록과 안의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0일 만에 평양, 서울, 경주가 함락되는 등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 때 두 분은 머뭇거리던 관아 사람들을 설득하여 당시 전주사고에서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에 모시고 있던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내장산의 동굴로 옮겨 놓았다. 그 후 강화를 거쳐 묘향산까지 옮겨가며 전쟁 기간인 7년동안 이것들을 지켰다. 후대 조병희 선생은 이들의 이런 노력은 10만 대군을 물리친 공에 버금가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당시 실록은 서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4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3곳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은 역사의 단절을 막고 조선 전기 방대한 역사의 맥을 다시 이어나갈 수 있게 하였다.
이곳은 숙종 2년(1676) 세워 손홍록·안의 두 사람과 함께 김후진·김만연의 위패도 함께 모셨으며, 그 뒤 흥선대원군 때 훼손되었다가 1926년 김두헌을 추가로 모셔 다시 고쳐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11.정읍 백암리 당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1069-1
시 대 조선시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마을 어귀의 남근석(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3호)을 지나면 개울 양측에 돌장승 형태의 입석(立石) 2기가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입석을 돌당산으로서 보호하고 있는데 왼쪽 입석은 남장군석, 오른쪽 입석은 여장군석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영조 때 백암리에 거주했던 자선사업가 모은 박잉걸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백암리 주변에는 남근석을 포함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겼던 노거수·암석·입석이 24개 있다. 해마다 2월 3일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

12.영천군 묘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왕임마을
시 대 조선시대
효령대군(조선 태종의 둘째아들)의 다섯째 아들인 영천군(1422~?)의 묘이다. 원래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상초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었다가 1969년 음력 2월 1일 현 위치(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왕임마을)로 이장되었다. 묘역은 2단의 석축을 쌓아 조성하였는데 상단에 호석을 두른 커다란 봉분의 무덤이 있고, 무덤 바로 옆에 신도비가 서 있다.
영천군의 이름은 이정, 자는 안지이다. 1440년(세종 22) 정의대부 영천군에 봉해지고, 4년 후 중의대부로 오르면서 영천윤이라 하였으며, 1460년(세조 6) 영천경에 봉해졌다. 1468년(세조 14)에는 영천군으로 환봉되었다.

13.불우헌 정극인 묘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마을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가사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상춘곡’을 비롯하여 ‘불우헌가’, ‘불우헌곡’ 등을 지은 불우헌 정극인(1401~1481)의 묘이다.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마을 뒷산 산비탈에 있다. 묘의 뒤쪽에는 부인인 구고임씨의 묘가 있다. 정극인은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 부인의 고향인 태인현 고현동에 낙향하여 살았다. 묘역에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며 묘 앞으로는 상석·묘비·문인석·망주석·장명등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단종 때 사간원정언을 지낸 정극인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관직에서 물러나 정읍 칠보 지역으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며 가사와 단가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마을의 자치규약인 고현향약(태인 고현동 향약, 보물 제1181호)을 만들었다. 묘지 인근의 무성리 원촌마을에 정극인과 최치원, 송세림, 김약묵 등을 배향하는 무성서원(사적 제166호)이 있고, 원촌마을 입구의 태산선비문화사료관 앞에는 정극인의 동상과 상춘곡가사비가 세워져 있다.

14.송산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산4
시 대 조선시대
1788년(정조 12) 창건하여 김대립(1550∼?), 김응빈(1553∼1632), 김정(1587∼1632), 김감(?~?), 김급(1591∼1643), 송치중(?~?) 등 6인의 조선 중기 인물을 향사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렸다가 1954년 성황산 동쪽 기슭에 중건하였다.
송산사에 모셔져 있는 인물들은 거의 광해군(재위 1608~1623) 때의 어지러운 정치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거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자연을 벗삼으며 세월을 보내던 이들이다.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된 ‘송정’이라는 정자에서 음풍영월하던 이들을 ‘7광 10현’이라 불렀는데 송산사에 모신 김대립과 김감은 7광, 김감과 김급은 10현에 속했던 인물이다.

15.시산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12-3 (무성리 310)
시 대 조선시대
1906년(광무 10) 을사조약 후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1832∼1906)과 고현동 출신의 문인 김기술(1849∼1929), 김직술의 충의정신을 기려 1907년 태산사라고 이름 붙여 건립하였다. 그 뒤 일제의 탄압으로 철거되었다가 1975년 다시 시산사로 이름을 바꾸어 세우고 최익현 외 김기술, 김직술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경내에는 단청으로 단장한 사당 건물과 비석, 외삼문 등이 세워져 있다.
향사인물 중 최익현은 본관 경주, 자 찬겸, 호 면암이다. 이항노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판서를 지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항소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의병을 일으킨 죄로 대마도에 끌려가 순절하였다.

16.도봉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남전길 18-13 (시산리 886)
시 대 조선시대
조선의 개국원종공신 김회련(?~?)을 향사하는 사당이다. 도강김씨 종중에서 1945년 가묘로서 건립하였다. 김회련은 배극렴, 김사형 등과 함께 태조 이성계의 개국을 도와 1395년(태조 4)에 개국 원종 일등공신의 록을 받은 인물이다. 홍주(현재의 홍성)목사를 지냈으며 공주목사를 지낼 때에는 향교를 세우고 학전을 마련하였고, 해주목사로 재임할 때에는 객사와 동헌을 세웠고, 한성판윤에 이르러서는 도성을 축조하는 등 공이 많았다. 사후에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고, 1872년(고종 9)에 충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당은 사우, 연시각, 향양재 등의 건물과 외삼문, 내삼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시각에는 보물 제437호로 지정된 ‘김회련공신녹권’과 보물 제438호로 지정된 ‘이태조 사년 및 육년 왕지’가 보관되어 있다.
김회련공신녹권은 1395년(태조 4년) 윤 9월에 김회련에게 내린 ‘원종공신녹권’으로 길이 9.25m, 폭 3.03m의 종이에 기록된 원본이다. 이태조 사년 및 육년 왕지는 김회련에게 내린 왕지(王旨;사령서로 뒤에 교지라 했다)로 태조 4년에 김회련을 공주목사 겸 관내권농방어사로 제수하고, 태조 6년에 해주목사 겸 권농병마단련사 염장관에 제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시각에는 김회련의 부인 풍천이씨의 원삼도 보관되어 있다. 풍천이씨는 왕자의 난 때 남편을 잃고 그 화가 외아들 덕방에게 미칠까 염려되어 공신록권과 원삼을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 지역에 안착했다고 한다.
연시각은 1932년에 세운 정면 3칸·측면 4칸 규모의 건물로 전면에 툇마루가 놓여 있고, 측면에 돌주(突柱)가 두 개씩 서 있다. 향양재는 도강김씨 도종회의 회의 장소로 쓰이며 도봉사에서 시제를 지낼 때 문중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도봉사의 향사일은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이다.

17.필양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 313
시 대 현대
1910년 일본 황제의 은사금을 거절하고 그것 때문에 군산감옥에서 순절한 춘우정 김영상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45년 김환풍,안항섭 등이 유림의 발의로 창건하여 향사하였다.
김영상은 도강인 자는 승여, 호는 춘우정이니 1836년(헌종 2년) 3월 고부군 수금면 산북리(지금 정읍시 정우면)에서 출생하여 1851년(철종 2년16세)에 칠보면 무성리의 옛집으로 이사했다.
김경흠의 아들로 소휘면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고 당대의 거유 기정진 전간제 송병준과도 교유했다.
최익현의 창의에 참여했고 한일합병후 은사금을 거절한 것이 화가 되어 군산감옥으로 호송하던 중 사창진에서 의대에 절명사를 써서 전하고 몸을 강물에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단식하고 순절하였다.
1978년 6월 30일 지방인사들의 발의로 창사진 나루터인 김제군 청하면 동지산리에 춘우정 투수 순절 추모비가 세워졌다.

18.용계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동편길 39 (시산리 688)
시 대 조선시대
1701년(숙종 27) 향현사의 서원으로 창건되어 관곡 최서림(1632∼1698)을 향사하였다. 최서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집(1574~1656)의 문인으로 166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94년 공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진 교육에 힘쓴 선비이다.
1750년(영조 26) 최서림의 문인인 동곡 김정호(1673∼1742)와 백계 은정화(1650∼1724)를 모셨으며, 1757년 오천 한백유(1675∼1742)와 안식와 김습(?~1638), 월곡 유종흥을 추배하였다.
용계서원에 향사되어 있는 인물들은 거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양성하였던 이들이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10년 다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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