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개회되었으나 초반부터 경기노회 총대 문제로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임원 선출도 못한 체 총회 마지막 날(1959년 9월 28일)까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회되었다.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11월 24일까지 경기노회 문제를 해결해 올 것을 선언하고 정회를 선언하자 총대들은 산회하기 시작했다. 그때 총회 회의록서기를 역임했던 군산노회 총대 안광국 목사가 기습적으로 나와 임원 불신임안(아래 사진)을 낭독했다.
그러자 직전총회장 전필순 목사가 가부를 물은 후 회의를 강행하려 했다. 그때 대전중앙교회 당회장 양회석 목사가 퇴장을 요구하자 WCC진영은 대전 시내 미락식당에 모여 총회속개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필순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들은 그날 밤 상경하여 다음 날(9월 29일) 오전 10시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통합총회를 태동시켰다.

이처럼 WCC진영의 이탈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아픔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한경직 목사와 전필순 목사는 증경총회장 회의에서 11월 24일까지 정회하기로 결의한 장본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필순 목사는 이탈측을 이끌고 나가서 속개준비위원회를 이끌었으며, 한경직 목사는 불법속개시 사회를 맡아 장로교총회 분열의 불씨를 제공했다.
이같은 혼란 중에서도 총회는 11월 24일 승동교회에서 모여 합법적으로 속회한 후 임원 선출 및 기타 회무를 처리했다. 이때 총회는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WCC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기로 가결”했다. 또한 이 결의안을 변경하고자 할 때는 각 노회에 수의하여 총 노회수 및 투표수 2/3 이상의 찬성을 얻도록 가결“했다.
이로써 합동총회는 칼빈주의 신앙과 정통보수신학을 신학정체성으로 굳게 세웠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정통성을 계승하게 되었다.
통합총회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 사건을 총회 분열의 원인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이는 명백하게 왜곡된 역사다. 제44회 총회를 깃점으로 분열된 것은 WCC 진영에서 불법 이탈로 인한 분열이었다는 것은 위 역사가 생생하게 증명한다.
총회의 분열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총신이었다. 연동측은 총회를 분립해 나간 후 해외 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1960년 12월 1억원을 들여 광장동에 부지 1만6,946평을 구입해서 신학교 본관 720평을 건축했다.
하지만 총회는 정부 시책에 의해 남산에 위치한 장로교신학교(아래 사진)를 이전해야 할 처지에 이르러 대한신학교 건물을 임시로 이용했다. 당시 500명의 신학생 중 300명이 WCC진영으로 나간 가운데서 200명이 남아 어려운 환경에서 수업을 이어갔다.

이처럼 열악한 가운데 있던 신학교를 회복하기 위해 제45회 총회는 다시 박형룡 박사의 교장직을 복귀시켰다. 이때 박형룡 박사는 박윤선 박사, 명신홍 박사 등과 힘을 합하여 총회의 정통보수신학을 유지 계승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후 총회는 1960년 12월 13일 고려파와 합동총회를 갖고 합동을 시도했으나 34개월만에 고려파는 다시 환원하고 말았다. 이처럼 총회는 연동측의 이탈, 고려측의 환원 등으로 풍파를 겪으면서도 성장을 거듭했다. 해외 선교회의 지원이 전무한 가운데서 총신은 전국교회의 지원을 힘입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총신은 용산의 열악한 교사 환경에서도 5년간 칼빈주의 신앙과 정통보수신학에 힘을 쏟았다. 이때 총신의 현황을 직시한 총회는 1965년 신학교 건립, 선교사 파송, 총회 회관 건립 등 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여 전국교회가 협력한 것은 총신이 총회의 신학교임을 입증해 주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총신은 총회 산하 전국교회와 총신교수들, 그리고 신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날이 갈수록 크게 성장했다. 이같은 총신 발전은 총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총신이 발전하자 총회와 총신의 지도자들은 캠퍼스 이전을 생각하면서 여러 곳의 자리를 찾았다. 당시 총신의 교사 자리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지 후일 사당동 교사 기공식 예배에서 박형룡 박사는 다음과 같은 감격을 표했다.
“그 동안 42처의 명구승지, 경치좋고 전망 좋은 산곡 구승원야를 답사하였으나 그 중에 한 곳도 우리의 기지로 되지 못하고 제43차로 발견된 이 영등포구 사당동 31번지가 우리의 기지가 되었다”

그 무렵 총신 사당동 캠퍼스로 이전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명신홍 박사가 1963년 직장암 4차 수술을 받고 투병중에 도미하여 5만달러를 모금한 일이었다.
총신을 위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한 명 박사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한 전국교회가 헌금에 동참했다. 1966년까지 헌금에 동참한 인원이 20만명이었고, 백남조 장로는 자신의 집을 건축하기 위해 모아둔 돈 2천만원까지 신학교 건축헌금으로 내놓았다.
백 장로의 헌금으로 사당동 캠퍼스 부지 1만 8천평을 마련하여 총신의 사당동 시대가 열렸다. 1965년 3월 22일에는 500여명의 하객이 모인 가운데서 총신 사당동 캠퍼스 기공예배를 드렸다.
박형룡 박사는 총신 캠퍼스 기공예배 설교에서 “우리 선지학교는 유능하고 진실한 교역자를 많이 양성하여 이 백성의 복음화에 과거 80년 동안 힘쓴 것 보다 몇배의 더 큰 노력으로 용왕매진하시하는 뜻이 아닐까”라고 감격했다.
또한 박 박사는 “금후 전국교회는 더욱 일치단결하여 물심양면에서 인화를 더욱 공고케 하여 금일 기공하는 이 집을 기한 내에 완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신학교 시절 5개년 계획을 하나하나 다 완성하는 것이 신부의 의미라고 느껴진다”면서 감격적인 말씀을 전했다.

그후 총신은 1967년 5월 4일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 인가를 받았다 그해 6월 3일에는 문교부로부터 대학령에 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사회가 구성되어 백남조 장로가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고, 초대 이사들은 총회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백남조, 김인득, 노진현, 김윤찬, 이환수, 김창인, 정규오, 정순국, 양화석, 양재열, 고성훈, 정태성, 김장호, 김치호 곽창후 등 15명, 감사 정봉조, 이성헌 2명).
그후 총신은 발전을 거듭하여 1969년 12월 24일에는 정식 대학 인가를 받았다. 이로써 총신은 전국교회의 뜨거운 기도와 성원으로 건립되어 총회의 신학교로 견고하게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총신은 한국과 세계 속의 대학으로 성장하려는 원대한 비전으로 대학 인가를 받음으로써 법적으로 법인 이사회가 총신을 운영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총신이 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후부터는 경영과 운영에서 새로운 변화를 갖게 되었다.
총회의 신학교인 총신을 위해 기도하고, 전국교회가 백만기도후원금을 후원하기도하고, 또한 총회가 인재양성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인가가 없을 때처럼 총회가 총신을 직접 다스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총신에 대한 총회의 기도와 감독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법적으로는 총신은 법인 이사회의 관할 하에 있게 되었고, 사학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부터 46년에 조직 구성된 법인이사회는 총신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만약 법인이 구성되지 않고 총신이 아직 무인가 신학교로 남아 있었더라면 총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총신의 법인 이사회 조직과 구성은 총신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고, 그것은 곧 총회의 발전으로 이어져왔다. 예를들면, 총신은 국가로부터 법적 권한(사학법)을 위임받은 법인 이사회를 통한 경영으로 인해 지난 해(2014년) 국가로부터 41억의 장학금 및 각종 지원금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총회는 이같은 현실을 감안하여 총신을 지도 감독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또한 총회와 총신 간의 신뢰와 협력의 관계도 견고히 세워가야 한다. 그 길만이 총회를 발전시키는 길이요, 총신의 미래를 밝게하는 길이다.
송삼용 대표기자 brent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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