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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구 총회신학교와 보수신학의 힘 과시

도심안 2019. 7. 5. 04:27

[스크랩] 복구 총회신학교와 보수신학의 힘 과시| ♣기독교 자료 종합

다운 | 조회 34 |추천 0 | 2011.12.01. 12:57

복구 총회신학교와 보수신학의 힘 과시

 
Ⅱ. 보수신학은 죽지 않았다.
③ 한국전쟁의 정전과 환도후로부터 「전후시대」의 오랜 세월을 거쳐서 21세기의 「여명기」에 이르기까지 죽지 않았다.(계속)
필자는 아버님 박형룡 박사가 1978년 10월에 소천하신 뒤에 약 2년을 서울 방배동에 세워졌던 소위 “복구총신”에 나가서 학장으로서 또 교수로서 후진 교역자 양성에 힘쓰다가 다시 “사당동 본고장의 총신”으로 복귀하는 이벤트를 만들어 냈다.
필자는 이 2년 동안의 역사를 서술하기를 원치 않는다. 필자가 쓰고 있는 이 글이 역사적인 글이 아니라 회고록의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필자의 소신을 따라 내용적인 선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때에 방배동에서 2년간 참여하였던 역사의 사실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면 필자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가기 직전에 글로 적어서 우리 한국 교계에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필자는 필자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가운데서 1979년 초에 필자가 총신대학을 떠나서 방배동의 “복구총신”으로 갈 때에 가졌던 필자의 심경을 피력하고 또 총신대학으로 2년 후에 돌아가게 될 때에 필자에게 있었던 심경의 변화와 “복귀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경과를 설명하고자 한다.
 
“복구 총회신학교”는 1979년 1월에 서울 방배동에 있는 영광교회당에서 현판식을 가짐으로 본격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사당동 총신대학의 신학적인 좌경을 우려하면서 합동측 장로교회의 “박형룡파” 또는 “보수파”의 지도자들(이한수, 박찬목, 노진현, 정규오 목사 등)이 합동측 장로교회 안에서 “박형룡 스타일의 순수한 보수신학”을 계승하는 목적을 위하여 전국 교회에 산재해 있었던 보수파 세력들을 결집하여 이 “복구 총회신학교”를 세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국 교계에는 지금도 필자가 1979년서부터 1980년까지 방배동 “복구 총회신학교”의 학장으로 갔다가 학장을 겨우 1년을 하고 나서 “복구 총회신학교”가 분열하고 “비주류교회”가 사분오열하는 역사가운데 빠져들게 된 것은 필자가 총신대학을 떠나서 나간 것이 크게 경솔하고 잘못된 일이었음을 증명해 준다고 평가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
 
필자도 그와 같은 많은 분들의 평가에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고 박형룡 박사의 아들이다. 이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아버지의 마음의 아픔과 눈물이 곧 아들의 마음의 아픔이요 눈물이라는 뜻이다. 이는 아버지의 좌절과 한숨과 울분은 곧 아들의 좌절이요 한숨이요 울분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인 것이다.
필자가 그 시절 그 무렵에 크리스챤 신문에 연재중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신학 - 내가 본 아버지”라는 글(1979년 3월17일부)에서 총신대학을 떠나서 방배동 “복구 총회신학교”로 나가게 된 필자의 심경을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몇 군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귀국한 것은 1972년 여름이었다. 그때 아버님은 이미 총신대의 학장직을 사임하고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고독한 은퇴 생활로 들어가 계셨다. 아버님은 총신대가 좌경화된 것 같다고 걱정하시면서 눈물을 흘렸고 옆에 계시던 어머니도 총신대를 물러나던 때를 생각하시면서 마음 아파하셨다”.
 
“작년 12월8일(1978)에 총신대에 사표를 제출하고 내가 총신대학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버님께서 생전에 염려하고 걱정하신 총신대학의 좌경화가 가속화하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3년 전에 그 당시, 「신학지남」 편집인으로 있었던 필자의 권두언 「종의 신학과 횡의 신학」이 총신대 교수진에 의하여 너무나 보수적이라는 이유로서 「신학지남」에 실리는 것이 거절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눈물을 흘리면서 비통해 하였다”.
필자는 아버님 박형룡 박사가 1978년 10월에 갑작스럽게 소천하실 때에 마음에 받은 바 그 충격과 엄청난 슬픔이 필자로 하여금 아버님이 평생을 바쳐서 한국 교회에 든든히 세우기를 원하셨던 「보수신학」을 아들인 필자가 어떻게 해서든지 “파수”하며 계승하는 일에 몸을 바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휘몰아쳐 가게하였던 것이었다. 아버님이 생전에 「보수신학」을 세우고 또 「보수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당하고 겪은 고생과 고난과 박해 그리고 “성취의 기쁨”과 “실패와 좌절의 한숨과 눈물”이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그것들이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한편의 영상들이 되어서 머리와 마음을 압박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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