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리산성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 있는 산성의 평면 형태는 삼태기 형으로 둘레는 323m이다. 강 정리 산성에서 북서쪽으로 1㎞ 지점에는 합미산성이 있는데 전초 기지인 자성(子城)의 역할을 하였 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은 두 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좌우 남쪽 능선을 따라 축성된 편축한 포곡식의 석성으로 북동 벽 은 급경사를 이룬다.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 의하면 ‘주위 약 170 간의 석축이었으나 대부분 폐퇴하여 원형을 추측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하였다. 이처럼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북벽에는 토루가 남아 있고, 문지는 서벽과 북벽 사이의 능선에 위치하며, 수구 터는 남벽의 서쪽에 치우쳐 있다. 산성의 축조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북쪽 섬진강 동안에 있는 합미산성의 자성으로 추정된 다. 강정리 산성은 합미산성에서 관망 되지 않는 동쪽 지역, 즉 동에서 서로 흐르는 은천천의 길목에 있다. 합미산성의 취약한 곳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된 전초 기지로 보이고 축성 시기는 삼국 시대로 추정된다. 1967년 전영래에 의하면 능선을 따라 축성된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북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그 위에는 토루 또는 회랑도가 양호하게 남아 있다고 하였다. 현재는 수풀이 우거져 토루 등은 관찰되지 않으며 무너진 성벽만 일부 확인되고 있다. 강정리 산성은 합미산성의 자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본성인 합미산성의 취약 부분인 동쪽 방면 을 감시하기 위해 축성된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거녕산성, 성시리산성 (남원시) 
<성시리 들판>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과 장수군 산서면에 걸쳐 있는 성산에 축조한 산성이다. 백제 때 축조한 산성으로 추정되며, 거녕산성(居寧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성시리와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약 400m의 성산에 있다. 전체적으로 많이 붕괴된 상태이지만 서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 높이는 6m 내외인데 높은 곳은 8.8m에 이른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350m이다. 판상할석(板狀割石)을 이용 하여 내탁법(외부 성벽만 돌로 쌓고, 내부 성벽은 흙과 잡석으로 채우는 축조법)으로 축조하였다. 성문터와 우물터, 망대(望臺)와 암문(暗門) 등이 확인되었으며, 성터에서 삼국시대의 기와편과 토 기편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성 안쪽에는 영월암(映月庵)이 있다.
고사부리성 (정읍)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북쪽에 위치한 해발 133m의 성황산의 정상을 성곽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형태는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은 반달모양이다. 말안장과 같이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낮은 지형의 바깥쪽으로 성벽을 둘렀다. 이와 같은 형태의 백 제 산성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 다. 백제가 부여(사비)에 도읍을 두었던 6세기 무렵에 지방을 5개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릴 때 쌓은 5 방 중 하나인 중방으로 고사성이라고 불렀다. 전라북도 고부 지역의 정치 · 군사의 중심지로 활용하기 위해 처음 쌓았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 대를 거쳐 조선 영조 40년(1764)까지 고을을 다스리는 중심성곽(치소)으로 여러 차례 성벽을 고쳐 서 사용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1,055m, 긴 쪽의 길이가 418m, 짧은 쪽의 길이 200m이며 면적은 63,484m2이다. 부속시설물로는 백제~조선시대의 성문지 3개소와 돌로 쌓은 물을 저장하는 우물 1개소, 조선시대 의 건물지 12동 등의 건물 유적과 기와 · 토기 · 자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고창읍성 (고창군)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고창의 방장산(方丈山, 743m)을 둘러싸고 있다. 모양성 (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시대 때 고창 지역이 '모량부리'라 불렸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1 453년(조선 단종 원년)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계유년(癸酉年)에 호남의 여 러 고을 사람이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16만 5,858㎡이며, 동·서·북의 3문과 치(雉) 6곳, 옹성(甕城), 수 구문(水口門) 2곳 등이 남아 있다.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읍 성으로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관아를 비롯해 22개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전란에 모두 소실되어버렸고 현재 북문 공북루, 서문 진 서루, 동문 등양루와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업무를 처리하던 작청, 동헌, 객사, 풍화루, 내아, 관청, 향 청, 서청, 장청, 옥사 등 일부만 복원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성밟기놀이가 전해오는데, 여인들이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돈 다음 성 입구에 그 돌을 쌓아둔다. 이렇게 쌓인 돌은 유사시에 좋은 무기가 되기도 했 다고 한다. 성내에는 1871년에 세운 대원군 척화비가 서 있고 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 인 신재효의 생가가 있다. 조선시대 고창현의 읍성으로서, 장성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관기산성 (관기리) 전남 여수시 소라면 관기리는 있는데 산성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음 불명확 교룡산성 (남원시)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16-1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蛟龍山)의 의지하여 축조된 석축산성 (石築山城)으로 둘레가 3,120m이다. 현재 동문의 홍예(虹예)와 옹성(甕城) 그리고 산중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남원은 백제 때 고룡군(古龍郡)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사서에 보이는 교룡(蛟龍)·거 물(居勿)·기문(基汶) 등의 명칭이 모두 고룡의 전사(轉寫)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산성이 백제 시대 에 쌓았다고 확증할 수는 없다. 다만 조선 초기에 이미 군창(軍倉)이 있었다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 實錄地理志)의 기록을 보면 그 연혁은 조선 초기 이전으로 소급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남원부(南原府) 산천조(山川條)〉에도 교룡산성이 남원부 서쪽 7 리에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금구산성 (김제시)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월전리와 선암리에 걸쳐있는 백제시대의 성터로 금구면에서 동쪽으로 2k m쯤 떨어진 해발 250m 정도 되는 봉두산(鳳頭山)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으며, 이 봉두산이 옛 금 구현(金溝縣)의 진산이다. 남쪽으로는 벼락바위라는 암반이 험준하게 드러나 있고, 암벽이 3m 이상의 절벽을 이룬 정상을 따 라 외연(外緣)으로 토루상의 성벽이 있고, 동남으로 잘록한 안부(鞍部)로는 석축된 성벽이 3m의 높 이로 약 100여m가 잘 남아 있어서 본래 토축이었으나, 석축으로 개축된 듯하다. 북으로 향한 완경사를 이용하고, 동쪽의 완만한 평탄 대지에 우물이 있다. 정상에서 성벽 안쪽을 따라 내환도(內環道)처럼 성벽이 이어져 있으며, 백제시대에 축조되어 후대까지 금구의 읍 뒤에 있 는 산성이 남아있다. 금사동토성 (정읍시)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 있는 삼국 시대의 산성으로 문지(門址)·수구문(水口門)·건물지 (建物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동서로 뻗은 산릉의 북사면을 감은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는데, 외성은 북쪽 골짜기를 감은 포곡식(包谷式 :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산성)이며 내성은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이 다. 외성의 규모는 동서 710m, 남북 620m의 평면으로 성곽 둘레는 2,365m에 이른다. 남변은 석축인데, 중앙수구에 북문지가 있다. 수구 서편 성내는 너비 120m 정도의 평탄한 대지가 있는데, 건물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내성은 산릉선을 두른 외성 남변을 외곽으로 하고 동남우각에서 북으로 300m쯤 내려오다가 북사면 중턱을 감았다. 이 곳은 토루(土壘)를 쌓고 안에 회랑도를 설치하였다. 이른바 말달지기라는 것이다. 내성의 전체 둘레는 2,394m인데 외성보다 더 긴 것은 북변 굴곡이 심하기 때문이다. 내성은 동쪽에 해발 200m, 서쪽에 170m의 양 봉우리를 감고 있는데, 그 중간에 길이 427m, 너비 21∼36m의 평탄한 대지가 있다. 이 곳이 건물지로 생각되며, 그 남변 중앙에 남문지가 있다. 내성 동쪽 봉우리도 대지를 이루어 상성(上城) 구실을 하는데, 석축으로 견고하게 쌓았으며, 1980 년의 조사결과 기와편과 백제계 토기편 등이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의 중방고사부리성(中 方古沙夫里城)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고산성 (전주시)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완산구 동서학동의 고덕산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둘레 약 5,300m 의 성으로, 전주에서 남원, 순창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지를 좌우로 지키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성문과 장대 등의 방어시설터가 남아 있다. 이 성은 901년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곳에서 끝까지 대항하였다 한다.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李廷鸞)이 이곳에 근거하여 왜군을 막을 때 수축하 였다. 그 뒤 1811년(순조 11)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증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박윤수(朴崙 壽)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서쪽에는 암문이 하나 있었고,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있었다. 남아 있는 북문터는 석축만 있는데, 너비 3.4m, 높이 1.2m이며, 세 봉우리에는 각각 10㎡의 장대지가 있다. 현재 성 안에는 남 고사·관성묘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남원읍성 (남원시)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성으로 남원시 왕정동 관왕묘(關王廟)가 있는 사거 리에서 동쪽으로 지산학원까지의 남쪽 성벽, 여기서 북쪽으로 남원시 농협 창고가 있는 곳까지의 동 쪽 성벽, 그리고 서쪽으로 옛날 충열사가 있던 마을 뒤를 지나는 북쪽 성벽, 다시 여기서 휘어져 관 왕묘 사거리 동쪽 성벽의 서쪽 끝부분에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리적 위치는 북위 35° 24´ 39˝, 동 경 127° 22´ 44.7˝, 해발고도 93m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에는 지방 행정 중심인 소경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석성은 중국의 성을 모방하여 조선 초기에 중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원읍성의 축성은 판상 할석을 사용한 협축법을 이용하였으며, 규모는 둘레 2.5㎞ 정도, 높이 4m 정도이고 내부 부속 시설로는 문루·옹성·적대·우물·해자 등이 있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과 전라 선 철도 개설 등으로 인하여 대부분 허물어졌으며, 동충동의 옛날 충열사가 있었던 마을 뒤 약 180 m 만이, 그것도 헐린 채 기단부만 남아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성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남산산성 
<보석리의 남산 풍경>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보석리에 있는 남산[157m]의 정상부와 그 서쪽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500m 내외이며, 평면 형태는 부정형이다.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정확한 현황은 파악할 수 없으나, 남산 정상부의 남쪽에 일부 토단의 흔적 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곳에 삼국~고려 시대 기와가 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토성일 가능성이 높 다. 또한 남산의 정상부와 서쪽 봉우리를 이어주는 능선부에는 폭 5m 내외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으 며, 그 외곽으로 토단의 흔적이 확인된다. 유물은 등면에 선문과 격자문이 타날된 백제 시대 기와편과 어골문 등이 타날된 고려 시대 기와편 이 수습되었는데, 수습된 유물로 보아 남산산성은 백제 시대 후기에 초축되어 고려 시대 초까지 사 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낭산 산성 (익산시)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에 있는 옛 낭산현의 성터로 해발 160m의 낭산(郎山)에서 가장 높 은 봉우리인 선인봉에 서향의 경사면을 에워싼 석축 산성으로, 속칭 ‘마한성(馬韓城)’이라고도 하고, ‘구성(舊城)’이라고도 한다. 둘레가 약 870m로 남쪽의 미륵산성과 축조한 방식이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출토되는 토기와 기 와조각도 유사하여, 부근의 석천대가 마한기준왕(簊準王)이 놀던 곳이라는 전설과 함께 마한의 유적 으로 여기고 있다. 지리지에는 마한성(馬韓城)이 낭산 위에 있는데 석축이며, 둘레가 1,306척이고 높이가 9척쯤이라 하였다. 당치산성 (익산시)
 <여산리의 들판>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와 태성리에 걸쳐 당산위에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둘레 약 763m 의 성곽으로, 해발 190m인 마을의 당산(堂山) 위에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사형장으로 이용되었 으며, 산신제(山神祭)를 지낼 때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 안에 성황당의 흔적이 남아 있고, 신 라 말기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지리상으로 천호산과 미륵산 사이에 위치하여 북쪽에서 침입해오는 적을 막는 중요한 요충지 역할 을 하였다.
대모산성 (순창군)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에 있는 석축산성 높이 90m의 산을 두르고 있는 석성이다. 홀어머 니산성, 홀아비산성, 호미산성(虎尾山城)이라고도 하는데 호미산성이란 홀어머니의 약음을 취한 것 으로 추측된다. 백제시대의 도실현고지(道實縣古址)로서 그 뒤 고려·조선 초에 걸쳐 군창(軍倉)으로 사용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때인가 양씨부인(楊氏夫人)이 살고 있었는데 설씨(薛氏)라는 총각이 혼인할 것을 요구하자 양씨부인은 “내가 이 산에 성을 쌓는 동안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에 다녀오기로 하고 만약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혼인하겠다.”고 하였는데 총각이 먼저 돌아오자 부인은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시집 가는 신부의 신행길은 이곳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두승산성 (정읍시)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장문리·남복리·입석리 일대에 있는 두승산(斗升山, 443.6m)의 서쪽 골짜 기를 감싼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지정면적이1,216,392㎡, 둘레 50,524m로 현재 문지(門址)·수구문(水口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두승산에 옛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1만 812척으로 큰 골짜기에 걸쳐 있으며 영주(瀛州) 때의 옛 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삼한시대의 석축이라고 되어 있지만 산성 내에서 채집된 기왓조각·토기조각은 대부분이 고려 시대의 것이다. 영주라는 명칭은 936년(태조 19)에 개명한 것이므로 고려 초에 관찰사를 두면서 쌓은 것으로 여겨 진다. 그러나 성곽의 북서편에 있는 유선암(遊仙庵) 일대에서는 백제토기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어 백제 시대 중방고사부리성(中方古沙夫里城)의 남방을 막는 작은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구조는 수구에 서문을 설치하고, 동남면에 남문지(南門池)가 있다. 현재 석축의 대부분이 무너졌고 간혹 석벽원형이 남아 있다. 명금산성 
<명금산>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명금산(鳴琴山)의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쌓았던 테뫼식 토성(土城)으로, 둘레 284m로 실측되었다. 명금산은 높이 54.1m 밖에 안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평야지대에 솟아 있어 조망이 좋다. 또 저수지 벽골제(碧骨堤)의 남쪽 끝에 있어 벽골제를 경계할 수 있는 위치인데 벽골제는 예로부터 관개저수지였을 뿐 아니라 군사상으로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옛 문헌에 ‘정읍과 김제의 경계에 있는 소산맥상(小山脈上)에 있다. 주위 약 200칸의 토축(土築) 산성인데 전부 붕괴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질메산성 (익산시)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일원에 있는 왕궁터로 왕궁평성(王宮坪城), 모지밀산성(慕枳密山城), 또는 왕궁리성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익산 왕궁리 유적의 행정구역 명칭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하고 있다. 왕궁리 유적에 관한 유래는 마한 기준도읍설, 백제 무왕천도 및 별도설, 안승 도읍설, 후백제 견훤도 읍설 등 다양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의 문헌들에는 이곳이 ‘옛 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면적은 21만 6,862㎡이다. 1976년과 1977년에 일부 조사되어 동서 230m, 남북 450m의 규모이 고, 상부대관(上部大官)의 명문이 있는 기와 등이 알려졌다. 성벽의 규모는 남북 길이가 493.44m이고, 동서 길이는 235m, 성벽의 폭은 3m내외이다. 남성벽 동서 양측에 정면 11.45m 규모의 동·서 문지가 드러났고, 서성벽에서도 정면 8.6m 내외의 서문지 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성벽의 안팎에서 폭 0.8m 정도의 부석시설(敷石施設)이 노출되었다. 부석시 설은 성벽과 접한 상태여서 성벽보호를 위해 조성한 것이다. 이 시기의 건물지는 가장 이른 시기의 건물지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데, 백제 말경의 건물을 지속하여 사용하였거나 필요시 개축 또는 증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 후기까지 유물이 다양하다. 백제시대의 유 물로는 기와류와 토기류가 대부분이다. 백제 기와류는 수막새, 인장기와, 평기와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고, 이 중 수막새는 연화문수막새와, 태극문수막새, 소문수막새 등이 출토되었다. 기와 문양은 세 종류가 조사되는데, 중앙에 작은 듯한 둥근 자방을 배치하고 편평한 드림새에 4조의 곡선의 양각선 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배치하는 것, 볼륨이 크고 주연부로 가면서 점차 가는 문양을 역시 등간격으 로 4분하여 곡선으로 처리한 것, 자방을 중심으로 연화문과 볼륨 있는 문양을 겹치게 하여 4분하여 곡선으로 처리한 것 등이다. 소문수막새는 출토 유적이 극히 소량이 출토되었다. 한편, 인장기와는 도장을 기와 제작시에 찍은 것으로 ‘首府, 前部甲瓦, 前部乙瓦, 巳刀, 未斯, 戈止, 己酉, 上部’ 등의 명문이 있다. 이들 인장기와의 내용은 백제 행정지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것, 최고의 관청기관을 지칭하는 것, 간지를 의미하는 것 등으로 확인되었다. 왕궁리유적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 초기의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이들 유물들과 성벽의 축조 성격 등으로 미루어보아 왕궁급과 견주어져 안승(安勝)의 보덕국(寶德國)과 관련짓거나, 이보다 앞선 시 기에 백제 무왕(武王)이 이곳으로 천도(遷都)했던 유적 등으로 보려는 의견이 있다. 무장읍성 (고창군)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으로 고려시대까지 무송(茂松)과 장사(長 沙)의 두 고을이었던 것을 효과적인 왜구의 방비를 위하여 1417년(태종 17) 합하여 두 고을 첫자를 떼어 무장이라 하고 성과 관아를 새로 마련하였다.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장정과 승려 2만수천명이 동원되어 둘레 1,470척(尺), 높이 7척의 성벽을 쌓고, 성 위에 높이 1척짜리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471개를 만들고,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남문과 동·북문을 세웠다. 성벽 밖으로는 둘레 2,127척의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파서 견고히 하고, 병마사가 현감을 겸직하는 진(鎭)을 베풀었던 곳이다. 이후 성은 더욱 넓혀 축조되었던 듯하니 ≪신증동국여 지승람≫에서는 둘레가 2,639척이라 하였다. 성안에는 뱀의 두 눈처럼 생긴 지형에 두 곳의 샘을 마 련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읍성은 사두봉(蛇頭峰)이라 부르는, 남북으로 기다란 구릉을 중심으로 하여 평원을 마름모 꼴에 가깝게 네모지게 성벽이 감싸고 있다. 둘레가 대략 1.2km이고 성벽은 바깥의 돌이 흙 속에 묻 힌 채 높이 1∼2m로 확연하게 남아 있다. 해자는 너비 4m, 길이 574m가 남아 있다. 성에는 남문인 진무루(鎭茂樓)가 있으며, 성안에는 옛 고을의 풍모를 알 수 있는 객사와 동헌이 있 는데, 객사는 송사관(松沙館)이라 하여 옛 무송·장사의 끝자를 따서 이름지었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의 각종 건물터와 사직단·여단(厲壇)·성황단 등의 터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으로는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운 확실한 연혁을 가지고 있어 학술적·역사적 중요성 이 매우 크다. 성안의 중요한 건물들은 별도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미륵산성 (익산시) 
전 북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높이 430m의 미륵산 동사면을 감은 산성으로, 지금은 성문터·수구문· 옹성·장대터·건물터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성벽은 할석을 이용하여 내외협축, 즉 속을 단단히 다지 고 겉을 쌓은 흔적이 보이며, 높이는 4m 정도의 삼국시대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최고봉과 수구까지의 거리는 210m인데, 수구 남쪽에 있는 동문터는 옹성을 ㄷ자형으로 둘렀고, 성문 안에는 양쪽에 돌출부가 있다. 성문 너비는 4.3m이며, 성곽이 직선을 이루는 곳에는 간간이 치 성이 돌출되어 있다. 동변은 양 우각과 동문 좌우에 모두 4개의 치성이 있고, 남변에는 4개소, 서변 에는 3개소, 북변에도 1개소가 있다. 서남부에 있는 최고봉은 평탄하여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이 성 안에서는 ‘金馬渚(금마저)’라고 새겨진 백제의 기왓조각과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동 문 안 건물지에서는 고려와 조선조의 기와편도 발견되었다. 이로써 그 축조연대와 이용된 시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 산성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 전하는 준왕이 쌓은 성이라 하여 ‘기 준성’이라는 칭하기도 하지만, 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보이며, 동문지 일대의 치성·옹성 등의 시설은 후대에 수축한 것이다. 반양리산성 (서산시) 자료 수집 중 백산성 (부안군)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성터로 해발 47.4m의 백산이라 부르는 산 위에 동남쪽에 서 서북쪽으로 길이 120m, 너비 50-60m의 타원형 평면을 가진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 토 축산성이다. 외곽의 길이는 약 310m로서 이 외곽의 안쪽으로 평탄히 돌아가는 회랑식의 부분은 남쪽에서 너비 가 약 9m이고 서북쪽에서는 약 13.5m이다. 동쪽으로는 동진강을 바라보며, 급경사에 암반이 드러 나 있다. 동북쪽에 북문터가 있고, 남쪽에도 문터의 흔적이 있다. 정상부는 평탄한 대지로서 계단식의 대지면이 건물지로 여겨지며,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구릉지역 은 선사시대 이래의 유적지이다. 이 지역에서는 적갈색의 무문토기와 원삼국기의 타날문토기편을 비롯하여 삼국시기의 토기편이 채집된다. 특히 이 지역은 백제의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일으켜 일본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夫餘豊)을 왕으로 모시고, 일본의 수군을 불러들여 신라와 당의 연합군과 최후의 결전을 하였다는 백강(白江) 혹은 백 촌강(白村江) 싸움이 일어난 곳으로 비정되고 있어서 역사지리상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백산산성 (정읍) ![전북 산성리]()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와 신태인읍 백산리 백산에 있는 산성이다. 옹동면 산성리는 이 산성으로 인하여 생긴 지명이곳의 성은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솟은 두 개의 높은 봉우리 능선을 따라 돌로 축조한 석성(石城)으로, 성곽의 둘레 670m, 높이 2~4m에 이르는 테 뫼 산성이지만 지금은 거의 붕괴된 상태이다. 신태인읍 백산리에 있는 성곽은 북변의 길이는 259.5m이고, 동변은 삼각형으로 좁아지며, 남변은 거의 직선으로 축조되었다. 성 안쪽의 폭은 255m, 최대 길이는 126m이며, 남문과 북문의 터 그리고 우물터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 다 백산(栢山, 107m)의 산봉우리를 이중으로 감싼 테뫼식 산성으로, 현재 훼손이 심하여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토성(土城)인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에 축조하여 고려시대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고려 인의현(仁義縣)의 읍성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외성(外城)은 둘레 713m, 성곽 높이 4~5m이고, 내성(內城)의 둘레는 469m이다. 성 안쪽은 평탄 한 지형으로, 밭으로 개간된 곳도 있으며 우물과 성문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백산리산성 (정읍시) 
<백산리의 산>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백산리 백산(栢山, 107m)의 산봉우리를 이중으로 감싼 테뫼식 산성으 로, 현재 훼손이 심하여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토성(土城)인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에 축조하여 고려시대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고려 인의현(仁義縣)의 읍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외성(外城)은 둘레 713m, 성곽 높이 4~5m이고, 내성(內城)의 둘레는 469m이다. 성 안쪽은 평탄 한 지형으로, 밭으로 개간된 곳도 있으며 우물과 성문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외성 안에 소이암(笑而庵)의 절터가 있고, 그곳에 진안 마이산의 적석탑을 쌓은 이갑룡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높이 13.7m의 적석탑이 있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토기편·기와편 등 유물이 수습되었다.
봉실산성 (완주군) 
<봉실산> 전북 완주군 봉동읍의 서북쪽인 평야부에 우뚝 솟아 있는 봉실산이 있으며 9부 능선에는 백제의 산성인 봉실산성(鳳實山城)이 있다.ㅇ 부모 산성 (청주시) 충북으로 사료됨 부선산성 
자료수집 중 비홍산성 (남원시)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와 순창군 동계면의 경계지점에 풍악산 능선에 해당되는 응치(해발 고도 580m)라는 고개가 있다. 응치는 예전에 남원과 순창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는데 이 고개의 북쪽에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石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원 서매리 산성과 함께 비홍산성(飛鴻山城,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4호)의 지성(枝城; 원래의 성 밖에 따로 지은 작은 성)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위치상 순창 쪽에서 일어날 수 있는 환란에 대 비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며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리산성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
<산성리의 들판>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 옻밭골(칠전)마을 동쪽에 있는데 이 산성으로 인하여 산성리(山城 里)라는 지명이 생겼다.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솟은 두 개의 높은 봉우리 능선을 따라 돌로 축조한 석성(石城)으로, 성곽의 둘레 670m, 높이 2~4m에 이른다. 현재 거의 붕괴된 상태이다. 성곽 북변의 길이는 259.5m이고, 동변은 삼각형으로 좁아지며, 남변은 거의 직선으로 축조되었다. 성 안쪽의 폭은 255m, 최대 길이는 126m이며, 남문과 북문의 터 그리고 우물터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 다. 상두산성 (정읍시) 
<상두산>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상두리와 김제시 금산면 선동리에 걸쳐 있는 상두산(象頭山, 575.3m)의 정상을 휘감은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성 내부에 계곡을 포용하고 있는 형태로, 능선을 따라 축조 한 산성)이다. 대부분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1,966m이고 높이는 8m이며 노령산맥의 준봉 을 이루는 모악산과 바로 연결된 상두산에 있었던 산성인 만큼 호남지방의 군사적 요새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이들이 있다. 터를 비롯하여 건물을 세웠을 것으로 보이는 터가 4곳 있는데 이곳에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백제의 견훤이 축조했다는 주장도 있다
서고산성 (전주시) 
<화방산>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208.9m의 황방산 남쪽의 산상 분지를 둘러쌓은 석성[石城]으로 현재 거의 파괴되고 흔적만 남아있다. 수구 안에는 만덕사가 자리하며 평면은 오각형에 가깝다. 동 남향한 수구쪽은 높이 2.5m의 석축으로 길이는 약 50m가 남아있다. 남변은 132m, 동변은 204.5 m, 북변은 170m, 서북변은 110.5m, 서남변은 103.5m로 추정된다. 성의 전체 둘레는 721m이다. 성내에서 삼국시대 기와편 및 토기편이 수집된다. 서산산성 (고창군)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동·서·남의 3면에 하천을 끼고 있는 백제시대의 테뫼식 석성(石城) 으로, 둘레는 약 730m, 성내 면적은 3만 5703㎡이다.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6㎞ 거리에 있는 석치마을의 뒷산 섬틀봉(해발고도 150.3m) 꼭대기에 있다. 북동변에 성벽 높이 3m 정도만이 원형대로 남아 있을 뿐 거의가 붕괴되었으나, 자연석으로 튼튼하 게 쌓은 흔적은 찾아볼 수 있다. 북동쪽 모퉁이에는 남북으로 뻗어올라간 성벽에서 직각으로 돌출된 치성(雉城: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이 있으며, 산 정상에는 계단식 건물터가 남아 있다. 주변에서는 약간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고, 우 물터나 성문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축성법이나 입지로 보아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되지만 당시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조선 중기 이후의 문헌에만 언급되어 있다. 성묘산성 (진안군) ![[진안군토지경매]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단양리 325-8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13.naver.net%2F20141227_199%2Fqntkah2_14196651514296ituT_JPEG%2F00000_141222_095407_7087.jpg)
<단양리의 산>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단양리 성묘산 정상에 있는 산성이다. 성묘산은 남쪽으로부터 흘러 드는 진안천(鎭安川)과 접해 있고, 그 북서쪽은 험준한 벼랑을 이루고 있다. 이 성은 산 정상에 대지를 배모양으로 감은 석축 산성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파괴되어 성벽조차 거 의 남아 있지 않는다. 『고적자료』에 “성산 석축 2백 70간 우물”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우 물지로 보이는 직경 3m, 깊이 1.5m의 원형의 석축호만 소나무 숲에 남아 있다. 이곳에는 백제시대 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어 이 성이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며성묘산의 정상으로 부터 동남방 100m 지점 낭떠러지 부근에는 무너진 흙더미 속에 다수의 와편 등 유물이 산포되어 있 고, 다시 축성에 사용되었던 크고 작은 돌맹이가 산재해 있다. (원래 위봉산성?)
![[전북 진안] 성뫼산 성지(城址)_성산정에 올라 마이산을 바라보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5.naver.net%2F20151027_296%2Fjcjkks_1445906628791HVWnm_JPEG%2F20151016-DSC00705.jpg)
성미산성 (임실군)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의 성미산(430m)을 중심으로 좁은 정삼각형 형태로 축성하였으며, 둘레는 약 518m이다. 신라와 백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6~7세기에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는 주 저항선에 대해 진안·임 실·남원을 잇는 제2방어선 성격을 가진다. 〈신라 본기〉에는 이곳에서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8년(661) 두량이성과 정읍 태인에서 백 제군 2,000명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성미산성 주위에는 대리산성(신령면 대리), 방 현리산성(관촌면 방현리)이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6~7세기에 걸쳐 신라와 백제의 격전 지임을 알 수 있고,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장소이다. 우물터가 발견되었으며, 토기 파편들과 삼국사 기백제 본기에 무왕(武王) 6년(605) 2월에 축성하였다고 기록으로 미루어 백제시대에 조성된 설일 것이다. 성산산성 
<성산리>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성산리에 있는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합미성(合米城) 또는 팔량치(팔량재)산성이라고도 한다. 팔량재(513m)에서 오봉산(상산, 871m) 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중간지점에 있는 해발고도 약 550m의 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쌓은 테뫼식산 성(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쌓은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이 많이 무너져 있는 상태로, 현재 둘레 약 500m, 높이 약 3m에 이르는 성벽이 남아 있다. 성 문터와 암문(暗門)의 흔적이 보이며, 성 안쪽에는 밭이 조성되어 있다. 성터 주변에서 삼국시대의 회 백색 연질토기편을 비롯하여 승문(繩文; 새끼줄모양의 무늬)과 선문(線紋; 줄무늬)이 새겨진 경질토 기편, 적갈색 연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성산산성 (순천시) 
<승주읍 들판>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신성리 성산마을 동쪽에 있는 성산(城山, 193.1m) 정상부를 둘러싸고 쌓 은 테뫼식 산성이다. 일제강점기의 조사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높이 6~12척(약 1.8 ~3.6m), 폭 3간, 둘레 200간으로, 방형의 석축 성이다. 임진왜란 때 방어를 목적으로 쌓았다고 하나 축성법으로 볼 때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보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라남도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에는 ‘승주읍과 주암면 경계인 오성산성(五聖山城)과 대전하 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산상봉(山上峰)을 중심으로 오성산성 방향에만 쌓은 흔적이 있고, 현재 100 m 정도의 흔적만 남아 있다. 1940년 석촉(石鏃)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순천 승주향토지>에는 이 산성을 신성산성(新城城址)으로 표기하고 임진왜란 때의 유적으로 소 개하고 있다.
성시리산성 (남원시)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성시리와 장수군 산서면의 경계 지역인 해발 400m 정도의 성산 북쪽의 산 정상에 있으며, 산서면의 봉서리 쪽이 성곽의 중심을 이룬다. 이 산성의 동쪽으로는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본간이 이어져 있으며, 백두대간 능선에는 아막산성과 그 동쪽에 성산산성이 있어서 남 원의 외곽을 막아주고 있다. 성은 테뫼식 산성이며 형식은 포곡식 산성이다. 축성은 판상 할석을 사용한 협축, 내탁법이 이용되 었으며 성의 외곽으로는 가파른 능선이 있어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외곽 방어선을 마련한 것으로 판 단된다. 성의 둘레는 350m 정도이며, 비탈을 깎아 쌓아올린 내탁면의 성벽 높이가 8.8m에 이르는 곳도 있 다. 성벽은 서쪽 부분이 잘 남아 있으며, 근래에 많이 붕괴되었다. 성내에는 조계종 사찰인 영월암(映 月庵)이 자리하고 있다. 내부의 부속 시설로는 문지·치성·우물·망대·암문 등이 확인되고 있다. 성벽의 상면부에서 삼국시대의 기와편이 출토되었고, 동문 터에서는 토기편도 다량 출토된것을 분 석해 보면 삼국시대의 성일 것이다. 수문산성 (여수시) 전라남도 여수시 신기동의 산성으로 둘레가 약 1.4km이고, 현재 동벽과 북벽이 많이 무너졌으나 남벽은 기단부와 함께 석축이 잘 남아있으며 계함산성이라고도 한다. 구전에 따르면 임진왜란 전 왜구의 침략으로 피난민들이 쌓았다고 한다. 주변에 백제시대 쌓은 고 락산성과 이어져 있으며, 호랑산성, 토미성과 이어져 있어서 그 기능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수문성은 민드래미고개 북쪽 등성이에 있는 골짜기인 수문(숨은)골 위에 있다. 수문성은 수문골 위 에 있어서 그렇게 불러진 것 같다. 원래는 밖에서 보이지 않는 숨은 골짜기라고 해서 숨은 골이 나중 에 수문이라는 한자로 바뀐 것 같다. 수문산성은 둘레가 약 1.4km이고, 현재 동벽과 북벽이 많이 무너졌으며, 남벽은 기단부와 함께 석 축이 잘 남아 있다. 구전에 따르면 임진왜란 전 왜구의 침략으로 피난민들이 쌓았다고 한다. 주변에 백제시대 쌓은 고락산성과 이어져 있으며, 호랑산성, 토미성과 이어져 있어서 그 기능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신기리토성 (남원시) 
<운봉읍의 숲>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신기리 신기마을의 야산 구릉을 따라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다. 비교적 급한 경사를 이루는 남쪽을 제외한 구릉 정상부와 협곡 사이에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 는 50m 정도이며, 폭은 3m, 높이는 1.5m에 이른다. 성터에서 삼국시대의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격자 타날문(打捺文; 토기의 몸통을 다지거나 부풀리기 위하여 두들개로 두드려서 만든 무늬)이 새겨진 적갈색 연질토기편,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출토유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쌓은 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기마을에는 백제의 석실분 (石室墳; 돌방무덤) 20여 기로 이루어진 고분군도 있다 아막산성 (남원시) 
자료 수집 중 어래산성 (군산시)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笠店里)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터로 군산시 나포(羅浦)와 익산시 웅포(熊浦)의 경계지점에 있는 어래산(御來山:해발 180.4m) 봉우리 동쪽 능선과 서쪽 비탈면을 감 싼 테머리식 토성이다. 내탁(內托) 및 협축공법(夾築工法: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방 법)으로 쌓은 토성이며 성벽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둘레 150m 정도 되는 소규모 토성 이며, 남문터와 동문터가 남아 있고 성 바깥에는 너비 2~3m의 회랑이 5m 정도 남아 있다. 일설에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정벌할 때 쌓은 성이라고 하지만 주변의 함라산성(咸羅山城) 및 도 청산성(둘레 300m) 등과 함께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으로 1.5㎞ 거리를 두고 능선으로 이어진 도청산(해발 179m)과는 같은 산줄기에 있으며, 정상 의 도청산성 사이로 지나가는 어래재와 금강변을 방어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특히 마한시대와 삼국 시대를 거치며 금강이 백제의 관문이 된 이후 요충지로서 더욱 중요해졌고, 왜구의 침탈이 잦은 시 기에는 금강을 따라 오르는 왜구가 내륙에 닿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주방어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 다. 어래·도청 두 산성의 서남쪽에는 불지산 봉수대가 금강 하구를 지키고 서북쪽에는 함라산맥(咸羅 山脈)의 소방산(所方山) 봉수대가 있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지표조사 결과 백제 시대 토기조각 등이 수습되었으며, 인근 익산 입점리 고분(益山笠店里古墳:사적 347)과 관련이 있는 성곽으로 추정된다. 오성리산성 
<오송리의 산>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오성리 용호천(龍虎川) 남쪽의 야산(90.8m)에 있는 포곡식 산성(包谷式山 城; 성 내부에 계곡을 포용하고 있는 형태로,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산성)으로, 현재는 붕괴된 상태이다. 삼국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土城)인데 둘레 305.5m, 남북 너비 90m, 동서 너비 95 m에 이르며, 토루(土壘)의 높이는 4m 내외이다. 성 안에서는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오금산성 (전북 익산시) 불명확 용계산성 (완주군)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에 있으며 운주면 소재지에서 용계천을 따라 남쪽으로 약 4㎞ 정도 떨어진 천등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를 두른 석성으로, 둘레는 약 493m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고산고적조(高山古蹟條)’와 <문헌비고(文獻備考)> ‘고산조(高山 條)’에 백제시대에 쌓은 성으로 둘레 1,014척, 높이 10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ㄷ자형으로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인데 절벽을 이루는 동벽은 능선을 따라 외벽만 쌓고, 다른 쪽은 내외를 쌓은 협축(夾築)이다. 남벽은 잡석으로 쌓았으며 높이는 내벽 2.2m, 외벽 4m, 폭 4.3m 안팎이다. 남동쪽 모서리에는 우루대(隅樓臺)가 있고 서벽에는 수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 안에는 건물 터 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는 돗자리무늬를 새긴 백제시대 기와와 토기조각들을 분석해 보면 삼국시 대에 축주한 성르로 사료된다. 현재는 인적이 잘 닿지 않는 골짜기이지만 백제시대에는 육십령고개를 거쳐 신라땅으로 가는 군사 적 요로였다고 한다. 우금산성 (부안군) 
전 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산성으로 부안읍에서 남쪽으로 약 10㎞ 떨어진 개암사(開 巖寺) 뒷산에 있는데, 현재 수구(水口) 등 시설과 석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변의 길이는 수구에서 동측선이 563m, 울금바위까지의 서측선은 675m, 계 1,238m에 이르며, 동변은 1,010m, 북변은 830m, 서변은 838m로서, 전체의 평면은 북변이 좁고 남변이 넓은 모양이 다. 성벽은 약간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그대로 쓰기도 하였다. 이 산성은 백제 멸망 후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부여 풍(扶餘豐)을 받들어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주류성(周留城)에 비정됨으로써 그러한 사 실의 줄거리가 후세에 와전되기도 하였다. 근세에는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이 만났다 는 위금암이 우금단이 되고, 소래사가 내소사로 글자가 바뀐 결과를 가져왔으나, 이 곳은 복신(福信) 등의 백제부흥군이 최후까지 충혈을 뿌린 유적지이다. 본래 위금산성(位金山城)이라는 기록은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처음 보이는바 이에 의하면 신라의 장군 위금이라는 사람이 성을 쌓고 적을 막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문헌비고》에는 우진(禹陳)이라는 고성은 삼한시대에 우(禹)·진(陳) 두 장군이 성을 쌓고 주둔하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덕리산성 (정읍시)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일대에 있는 성터로 우덕리와 신월리의 경계를 이룬 해발 101m 의 시루봉에 있다. 시루봉은 남북으로 132m의 거리를 두고 두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이 두 개의 봉우리와 중간의 말 안장 모양의 안부(鞍部)를 포함하여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의 석축 산성을 만들어 전체의 둘레가 약 415m이다. 남북의 길이 약 180m, 북쪽에서의 너비 37m, 남쪽에서의 너비 45m, 중간의 너비 27m로서 평면 은 누에고치 모양을 이룬다. 성벽은 무너져서 안쪽에 내환도(內環道)의 형태를 둔 토루이나, 동남쪽 으로 석축의 축조된 흔적이 잇다. 성의 북쪽끝과 안부(鞍部)의 서측에 문터의 흔적으로 보이는 곳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에 축 조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와 동학 농민전쟁 시기에 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운주 산성 (전북 연기군) 세종시? 위봉산성 (완주군)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으며 1407년(태종 7)에 축성하여 1675년(숙종 1)에 중수하였 는데,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축성하였다. 1675년(숙중1)에 축성하고, 1808년(순종8)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중수하였다.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를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동학 농민운동 때 전주부성(全州府城)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피난시킨 일이 있다. 당시의 규모는 너비 3m, 높이 4~5m, 길이 16㎞이며, 서·동·북 3개 소의 성문과 8개의 암문이 있었 고, 성 안에는 4~5개의 우물과 9개의 못을 팠다. 지금은 성벽 일부와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남아 있는데, 문 위에 있던 3칸의 문루(門樓)는 붕괴되어 없어지고 높이 3m, 너비 3m의 아치형 석문만 남 아 있다. 전주 8경의 하나로 성 안에는 위봉사가 있고, 북방수구처에는 위봉폭포가 있다. 은선리토성 (정읍시) 
전북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 옥지(獄址)라고 부르는 탑림마을 서북쪽에 있는 토성지로 대지를 평 탄하게 다듬고 면적은 58,696㎡에 높이 약 4~5m의 토단을 쌓았으며 남북의 길이가 280m이고, 동 서 너비가 최대 160m이며, 둘레는 875m이다. 서쪽 중앙에 수구(물이 흘러가는 구멍)가 있고, 동서남북으로 함도로 된 문지가 있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 및 타제편평 돌도끼 등이 출토된 것을 미루어 백제의 토성지로 추정된 다. 익산 토성 
낭산산성과 겹침 장교리산성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 북서쪽에 있는 해발고도 595m의 산에 축조한 산성이다. 두 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쌓은 테뫼식산성으로, 산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 방향으로 긴 사다리꼴이다. 현재 길이 30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으며, 성벽 높이는 약 4m이다. 판상할석(板狀割石)을 이용 하여 내탁법(외부 성벽만 돌로 쌓고, 내부 성벽은 흙과 잡석으로 채우는 축조법)으로 축조하였다. 산성의 서남쪽 귀퉁이에 누각을 세웠던 흔적이 있으며, 동문·남문·서문의 터와 건물터·우물터 2개 소·적대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적대(敵臺;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는 장방형으로, 외벽 바깥으로 10~12m 정도 돌출되어 있다. 성터에서 삼국시 대의 기와편과 격자문·승석문(삿무늬·노끈무늬)이 새겨진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수습되므로 삼국시 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운봉면 장교리에 있고 합민성(合民城)이라 하고 석축 둘레는 200간이며, 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수합미성 (장수군) 
전라북도 무주군 장수읍 대성리 북방의 해발 1,013m 고지와 잣고개 혹은 차고개라 부르는 고개의 사이 기슭의 산능선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산성이다. 합미성이란 이름은 후백제 때 성에 주둔한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모았다하여 붙여진 것이라 하는 데, 당시 군사들이 쓸 물을 땅속으로 보내던 수로관 시설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970척(320m)이며, 높이는 바깥쪽이 15척(4.6m), 안쪽이 5척(1.6m)이다. 현재 대부 분의 성벽은 무너져 내린 상태이며, 다만 북서쪽과 남쪽의 일부 성벽만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 다. 이 수군(守軍)터는 와전되어 오늘날에는 쑤구머리로 전해지고 있다. 성터에서 3㎞쯤 떨어진 곳에 신무산이 있는데, 이곳에 허수아비로 군사를 만들어 적군이 합미성으로 오지 않고, 신무산으로 유인 하여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지금도 성터가 남아있으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땅속을 파보면 불탄 쌀이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으 며 백제시대의 성이다. (낭산성과 일치) 적상산성 (무주군)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적상산은 신라와 백제가 각축을 벌였던 요지로서, 고려시대 거란 족이 침입했을 때 인근 수십 군현의 백성들이 도륙되었는데도 이곳 사람들은 안전하였으므로 그 후 최영(崔瑩)이 산성쌓기를 상주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여지승람(輿地勝覽)》 <고적조(古蹟條)>에는 고성의 “석축 둘레는 1만 6,920자, 높 이가 7자였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세종 때는 체찰사(體察使) 최윤덕(崔潤德)이 폐허가 된 이곳을 답사하고, 반드시 산성을 쌓고 보존해야 할 곳이라고 건의한 일이 있었으므로 지금의 성터는 세종 때나 그 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 이며 처음 축조된 것은 고려시대로 추측된다. 1612년(광해군 4) 이곳에 실록전(實錄殿)이 세워졌고, 1614년에는 사각(史閣)이 세워짐으로써 조 선시대의 5대 사고(史庫)의 하나가 되었다. 또 1641년(인조 19)에는 선원각(璿源閣) ·군기고(軍器庫) ·대장관(大將館)이 건립되었다. 이 밖에 상원사(上元寺) ·중원사(中元寺) ·호국사(護國寺) 등이 있어 별장(別將) ·참봉 ·승장(僧將)들이 지켰 다. 지금은 성벽이 무너져 울창한 숲 사이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뿐 사각과 건물들은 터전만 남아 있다. 죽지산성 (정읍시) 전라북도 정읍시 연지동 대실(죽지)마을의 죽지산(竹支山, 97m) 동쪽 경사면을 삼태기처럼 감싸 고 있는 토성(土城)이다.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외성(外城)의 둘레 678m, 내성(內城)의 둘레 427m에 이 른다. 성 안(城內)의 물을 밖으로 빼내는 배수시설인 수구(水口)면에는 높이 4m 내외의 축대를 쌓았고, 그 남쪽에 성루(城樓)를 세웠던 터가 있다. 성 안쪽은 평탄한 지형으로, 우물터가 두 곳 있다. 외성의 성벽 길이는 북쪽 196m, 서쪽 263m이고, 내성의 성벽 길이는 서쪽 190.8m, 북쪽 67m, 동 쪽 175.3m이다. 내성에서 백제시대의 토기편과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척문리 산성 (남원시)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척문리에 있는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포곡식(包谷式) 성으로, 산성이 있 는 산봉은 동쪽에서 뻗어내려 서남쪽을 향한 수구를 가진 골짜기를 감은 것인데 석축으로 되어 있 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0m, 비고(比高) 50m 내외이다. 성의 둘레는 567m, 동서 길이 182m, 남북 길이 120m, 성내면적은 1만5523㎡에 이른다. 안으로 굽은 수구(水口)면은 길이 21m, 높이 8m의 석축을 쌓았다. 수구에서 서북 우각까지는 성벽 을 이중으로 쌓고, 가운데에 공호(空濠 : 물이 마른 못)를 설치하였다. 북변은 거의 직선을 이루는데, 요천(蓼川)변은 급준한 경사를 이루며 높이 9m의 견고한 석벽을 쌓았다. 북변을 따라 너비 11∼18m의 대지가 있는데 상성(上城)에 해당한다. 동북변에는 북문지가 있으며 수구의 남문지와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 남변은 돌로 쌓았는데 성 안에 너비 6∼10m의 회랑도가 설 치되었으며 최고봉은 동남 우각에 있는데 평탄한 장대지(將臺址)가 있다. 성내 수구 안은 통로 서쪽에 너비 30m 내외의 평지가 있고, 기와와 토기편이 퇴적되어 있다. 토기 편은 백제계 도질토기 또는 적색연질토기로서 삼족배(三足坏)·외반구호(外反口壺)·개배(蓋坏)·광구 호(廣口壺)·직립호(直立壺) 등이 있고, 승석문(繩蓆文 : 삿무늬)이 찍힌 백제 기와가 많기 때문에 삼 국시대에 만든 성일 것이다. 청계리산성 (남원시)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청계리에 있는 시루봉(784m) 정상을 둘러싸고 돌로 쌓은 테뫼식산성으 로, 삼국시대에 축조하였다. 시루봉과 연결된 능선들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었던 만큼 청계리 산성을 비롯한 주변 산성에서 백제와 신라 간에 격전이 벌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서 방향으로 길쭉하게 축조한 산성으로, 봉화대의 기능도 겸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둘레 16 6m, 길이 64m 정도가 남아 있다. 성벽 북쪽과 서쪽에 성문터가 있고, 남동쪽에는 공호(空濠; 성 주 위에 둘러 판 못)가 있다. 청계리 산성에서 북쪽으로 약 900m 떨어진 지점에는 성리 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아막성(阿莫城, 전라북도기념물 제38호)이 있다.
천호 산성 (익산시)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익산에서 가장 높은 천호산(해발고도 500m)의 주봉을 감싸며 쌓 은 테뫼식 석성이다. 둘레는 669m이며, 성벽의 높이는 2.5m 이상 남아 있는 부분도 있다. 대체로 성의 전체 윤곽은 뚜 렷이 남아 있다. 축조 방법을 살펴볼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은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질 위험에 처 해 있을 뿐 아니라 산봉우리에 군사시설과 민묘가 조성되어 있어 보호가 필요하다. 기록이 없어 성의 내력을 알 수 없지만, 성곽 주변에서 백제시대의 막새기와와 토기 조각들이 출토 된 점으로 미루어 백제시대 성곽으로 추정된다. 초산성 (정읍시) 전라북도 정읍시 시기동에 있다. 높이 232m의 내장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아양산(애산)을 거 쳐 이곳 초산으로 이어지고, 초산에서 다시 망상봉, 죽지봉으로 연결된다. ‘초산(楚山)’은 정읍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부족국가시대에 정읍 지역은 삼한 중 마한 지역에 속해 있었고, 고비리국(古卑離國)과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이라는 소국가가 있었는데 초산도비리국 이 있던 자리가 바로 연지동으로 추정된다. 산 정상에는 초산성(楚山城)의 터 즉 초산성지(楚山城址)가 있는데 이곳을 초산도비리국의 읍성으 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초산성은 백제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과 각축을 벌일 때 이곳의 호를 초 산으로 개칭하였는데 그때 축조한 요새이거나 고려시대에 몽고군과 왜군의 침략을 대비하여 수축했 던 산성으로 여겨진다. 현재 높이 1.5m, 길이 70m에 이르는 성벽의 하단 석축이 남아 있고, 관아터로 여겨지는 곳에 주춧 돌로 보이는 돌과 기와·토기 조각이 흩어져 있으며, 우물터로 추정되는 곳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초 산성의 둘레는 450m였다고 한다. 초산과 아양산 능선 사이에는 시기동과 교암동을 잇는 ‘싸리재’라 는 고개가 있다.
침령산성 (장수군)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침곡리에 위치하며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경구역에 있었던 성으로, 신라와의 분쟁시기에 쌓은 백제의 전방기지로 추정된다. 침곡리와 천천면 춘송리의 경계를 이루며 남북으로 길게 뻗은 법화산 정상의 양쪽 골짜기를 막고 동쪽으로 노출된 산봉우리를 따라 할석과 자 연석으로 쌓았다. 전체길이 420m, 동서너비 약 170m, 남북 최대너비 약 140m이다. 성벽은 남쪽과 북쪽을 빼고는 대부분 무너져 내린 상태이며, 남아 있는 성벽은 길이 7m, 높이 약 6.25m이다.
태평리산성 (남원시)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태평리 성산(269m)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돌로 쌓은 테뫼식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동쪽에 있는 절벽 아래로는 요천(蓼川)이 흐르고, 산성 서쪽의 골짜기는 비교적 평평하여 군사시설을 설치하기에 적당한 지형을 이룬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 둘레는 166m이고, 높이는 약 4m이다. 망대(望臺)로 추정되는 석조물이 확인 되었으며, 주변에서 삼국시대의 기와편과 토기편들이 수습되었다. 산성 동북쪽에 솟아 있는 암벽은 망대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평사리산성 (정읍시)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 척곡마을 앞산인 독계산(獨鷄山 169.6m)의 지봉(支峰 156m)을 감싸고 있는 산성이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석성(石城)으로, 둘레 403m에 이르는데 현재는 거의 붕 괴된 상태이다. 성 안(城內)의 물을 밖으로 빼내는 배수시설인 수구(水口)가 있는 성벽 북쪽의 길이는 158.3m이 며, 석축이 무너져 있다. 거의 일직선으로 축조된 성벽 남쪽의 길이는 84.6m로, 이곳에 석루(石壘) 를 쌓았는데 남문(南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남쪽 성벽의 길이는 68.6m이다. 성 안쪽에서는 백제 시대의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학현산성 (익산시) 
전라남도 익산시 왕궁면 동용리와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사이 해발 214m의 학현산(鶴峴山) 봉우 리에 있는 백제 때의 석성(石城)이다. 둘레는 약 700m이며, 서남쪽 능선을 기점으로 양쪽 사면을 따 라 이어지면서 골짜기를 감싸는 포곡형(包谷形)이다. 현재는 대부분 붕괴되고 북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는데 성벽의 폭은 4m이고 잔존높이는 2m 내외 이며, 20cm가량의 할석(割石)을 직사각형으로 거칠게 다듬어 평적하고 있다. 건물지에서 토기와 어 골문, 격자문 등의 문양이 새겨진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주봉에는 높게 붕괴된 석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 안에서 군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만든 장대지(將臺地)일 가능성이 크다.
합미산성 (장수군)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신학리 하신마을 뒷산인 성재산(200m)에 있는 테뫼식 산성(머리띠를 두 르듯 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산성)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신유산성(辛有山城) 또는 합미산성(合米山城)이라 부른다. 산 정상과 중복에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 약 300간이며 기와편이 산재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할미성이라고 부른다. 성 안에서 수습된 토기편과 기와편 등의 유물과 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이평리 평산마을의 석실 분 등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초축된 후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산성으로 보인다. 산성 둘레는 약 380m이며, 평면은 남북 장축의 타원형, 단면은 전체적으로 사다리꼴을 이룬다. 현재 남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붕괴되었는데 남벽의 경우 바깥쪽 성벽은 55~65×25㎝ 크기 의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로 수평을 유지하면서 쌓았고, 그 안쪽은 잡석으로 채운 뒤 흙을 덮었다. 4 5×30m 크기의 건물지(建物址)와 12×12m의 건물지 2개소가 확인되었다.
행단산성 (정읍시)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행단산(杏壇山, 405m)의 봉우리를 감싸고 축조한 삼국시대의 테 뫼식 산성이다.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총 둘레 482.5m에 이르며, 자성(子城; 본성에 딸려서 따 로 쌓은 작은 성)도 딸려 있다. 자성을 제외한 둘레는 439.3m이다. 성벽의 남쪽은 험한 지형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서북쪽은 붕괴되어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자성까지 포함한 성벽의 길이는 남쪽 209m, 동쪽 15m, 서북쪽 147.5m, 서쪽 74.2m이다. 성의 서 문(西門)터와 우물터 주변, 자성 안쪽에는 삼국시대의 기와편들이 흩어져 있다.
혜미산성 
충청도? 홀어머니 산성 (순창군)
전라북도 순창군 백산리의 마을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대모산 위에 있는 대모산 성 또는 백산리산성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모(大母)산성이라고 칭하며 석축으로 되어 있고 둘레는 780자이며, 높이가 26자다. 백제시대의 옛 산성터로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까지 군량미를 비축해 둔 곳이다. 약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대모산의 두 산봉우리를 배 모양으로 두르고 있는 석성(石城)으로 서, 동쪽으로 면한 수구는 직선으로 단을 쌓아 만들었다. 이 산성의 북쪽에 대모암(大母庵)이라는 작 은사찰이 있다. 홀어머니산성이라는 호칭이 정해진 것은 아홉 아들과 더불어 홀로된 할머니가 쌓았 다는 뜻에서 할미성이란 이름을 붙여왔다. 한편, 쌀을 저장하기 위해서 성을 쌓았다는 의미의 합미 성(合米城)에서 비롯된다는 주장도 있다. 또 양씨 부인이라는 과부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성에서 뛰 어내려 자결했다는 전설도 전해 오고 있다.이 살고 있었는데, 설씨 성을 가진 총각이 끈질기게 청혼 을 해왔다. 견디다 못한 양씨 부인은 설씨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내가 이 산에 돌로 성을 쌓을 테니 그 동안 총각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시오. 내가 만약 총각이 돌아올 때까지 성을 다 쌓지 못 하면 총각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그가 마지막 성돌을 채 올려 놓기 전에 총각이 돌아왔다. 양씨 부인은 돌을 나르던 치마폭을 뒤집어 쓰고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려 자결함으로써 끝까지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대모산성(大母山城)은 교룡산성, 금성산성 등과 함께 기 록되어 있어,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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