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의 랜드마크-누각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누각과 정자 많기로 유명하다. 경관 좋은 강 언덕에는 으레 날아 갈 듯 한 누각이 웅장하게 서있고,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마다 크고 작은 정자 없는 곳이 드물다. 요즘 아파트나 도심 공원 등에서 어렵지 않게 정자를 볼 수 있는 것도 우리 전통 누정문화의 한 단면이다.
옛 누정 건물 가운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고을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웅장하고 화려한 누각이다. 멀리서 봐도 장려함이 돋보이는 이 같은 누각은 대개 그 지방 객관客館에 딸린 건축물인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마다 행정 관서인 관아官衙와 중앙의 빈객이나 사신 접대를 위한 시설인 객관이 있었다. 관아에 딸린 누각은 진입루進入樓 역할을 하지만 객관에 부속된 누각은 대개 전원田園이나 강을 굽어 보는 곳이나 마을 경승지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림 1 정읍 피향정
지방 수령들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중앙에서 공무로 내려온 관찰사나 지체 높은 외래 빈객들을 접대하는 일이다. 수령들은 손님들을 위해 객관 주변에 정원을 꾸미거나 제일의 명승지에 누각을 세웠다. 대표적 유적으로는 밀양 객사의 부속 누樓인 영남루, 진주 남강을 낀 언덕 위에 서있는 촉석루, 그리고 정읍 태인의 피향정 등이 있다. 중앙 관리가 자기 고을을 방문하거나, 귀한 빈객이 멀리서 찾아오면 수령은 이들을 누각에 초대하여 환영 연회를 베풀었다. 이에 빈객들은 지방의 아름다운 경관과 풍속을 즐기며 유쾌하고 화기和氣 넘치는 시간을 보낸다.
그림 2 진주 촉석루
그림 3 밀양 영남루
누각은 번거로운 걱정과 피곤을 씻어내고 성정을 맑게 하는 곳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고을에 누각이 없으면 중앙의 빈객을 존경하여 접대하는 데 소홀함이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각의 존재여부가 지방 관아의 흥하고 폐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상징물처럼 간주되었고, 고을 수령의 덕치德治를 가름하는 잣대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점 때문에 고을 객관의 누각이 수 백 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유지돼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관리와 지방 수령들은 누각에서의 연회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내세웠다. 연회를 통해 사신과 중앙 빈객의 마음이 유쾌하고 화기和氣에 넘치면 그 혜택이 곧 고을 백성들에게 미치고, 그렇게 되면 고을 사람들 역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누각을 허물어진 채로 두는 것은 고을 수령과 그 고장 사람들의 공동책임이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누각은 연회 장소에 그치지 않고 용도가 매우 다양했다. 농번기에 논밭에서 농사일을 하던 농민들이 잠시 쉬거나 새참을 먹기 위해 모여드는 곳도 누각이고, 멀고 험한 길을 가던 나그네가 발바닥이 부르트고 목이 마를 때 잠시 들러 쉬고 가는 곳도 누정이며,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한담을 즐기고 편안히 낮잠을 자는 곳도 누각이다. 그런가 하면 어명이 내려오면 고을 수령이 관리를 인솔하여 이곳에 나와 예로써 맞이하며, 왕의 탄생이나 나라의 경사나 상서로운 일이 생기면 왕에게 올리는 글을 받들고 대궐을 향해 예를 행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죄인을 사면하거나 관직을 내리는 일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누각은 객사와 객관客館 등의 건축물과 달리 자유로운 형태로 지역의 자연환경에 순응하여 건립된 건축물이다. 정치 행사장으로서, 신분의 경계를 초월한 연회, 휴식, 시회詩會, 친목의 장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누각은 그 존재의 여부가 지방 관아의 흥하고 폐함을 말해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누각은 관부官府의 위엄을 드러냄과 동시에 공공 건축물로서의 기능과 함께 고을의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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