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정읍 칠보면의 정자를 찾아서

도심안 2018. 12. 29. 04:23

[스크랩] 정읍 칠보면의 정자를 찾아서| 최병원 선생님(청산)

靑山(최병원) | 조회 67 |추천 0 | 2014.12.05. 12:51

읍 칠보면의 정자를 찾아서

 

 

<정읍 칠보면 성황산 원촌 마을에 있는 한정 모습>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주변 지역의 정자를 찾아서 우리 문화의 참 멋을 느낀 지도 꽤 오래되었다.

자연친화적인 경상도 지역 정자에서 선조들의 은유와 풍류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지역의 교육에 이바지한 모습을 보았다.

정자를 지을 적당한 경관을 찾기 힘들었던 전라도 지역에서는 안정적이고 건축학적 형태를 갖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런 정자들은 어떤 계곡이나 하천 그리고 해안가에 위치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정읍의 칠보면에서 만난 정자는 선비촌에 밀집해 있는 형태여서 특이했다.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의 원촌마을은 전통적 유산이 많은 선비촌이다.

이 마을에는 두개의 서원과 다섯 개의 사당 그리고 다섯 정자가 있다.

원촌마을에 들어서면 아늑하게 자리한 성황산이 안정적으로 위치하는데 마을 가운데에 무성서원이 우뚝하다.

조선 중종 때 선비들이 을사사화로 인한 당파싸움과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벼슬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한 710현들의 모습들이 다섯 개의 정자와 서원들에 녹아 있다.

여기서 7()이란 미쳐버린 7명의 선비를 말하고, 10()이란 어진 사람을 말하는데 7광은 김대립,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상형, 이탁을 가리킨다. 또한 10현은 7광 외에 김관, 김정, 김급, 김우직, 양몽우를 말한다.

이들 710현들은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원촌마을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담소하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자신의 호를 딴 정자에 모인 이들이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 자연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각각의 정자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김약회의 11대손인 독립유공자 김영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필양사>

 

<한정>

 

성황산에 다가서며 처음 만난 정자는 한정(閒亭)이다.

산을 따라 마을이 형성된 원촌마을은 후송정, 송정, 영성정, 한정, 무송서원, 송산사, 시산사가 산기슭을 따라 안정적으로 위치한다.

한정은 평지에 세워져 있는데 정자 이름에서 보이듯이 커다란 소나무 밑에서 한가롭게 나그네를 반긴다. 조용한 시골 풍경 속에 대청마루에는 따스한 햇살이 비친다.

한정의 주인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 김약회(金若晦 1496~?)인데 자는 원명(原明), 호는 한정(閒亭) 또는 봉선당(奉宣堂)이다.

 

그는 당시의 유명한 유학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일재 이항(李恒 1499~1576) 등과 학문적 깊이를 다지며 교유하였다고 한다.

그의 덕행을 대변하는 당대의 명유였던 퇴계 이황, 일제 이항, 한정 김약회, 하서 김인후, 영천 신잠, 퇴암 박응남(朴應男), 기봉 백광홍(白光弘), 완산 유훈(柳塤) 승지 김선수(金善壽), 용재 이행(李荇) 율재 윤구(尹衢), 면앙 송순(宋純), 금호 임형계(林亨季), 인당 조희(曺禧), 불초자 원()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한정은 호남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나누는 장()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사라졌다가 1920년 후손 김환정(金煥亭)이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한정(閒亭)이란 현판 글씨는 구한말의 문신이자 명필인 장위산인(獐位山人) 석방(石邨)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쓴 것으로 보아 이 정자의 건립연대가 확인되고 있다.

정자 규모는 정면 3·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화강암을 가공하여 원추형으로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목조 원형기둥을 세워 아담한 모습으로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정자 내에는 후손들의 시문 등이 현액되어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한 칸씩 있는 전형적인 누정 건축물로, 전면과 좌우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정자를 빙 둘러 시멘트 담장이 둘러져 있고, 담장 바깥쪽으로 소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다.

한정 바로 좌측에는 김약회의 11대손인 독립유공자 김영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필양사가 위치하고 있고, 바로 앞쪽에는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 가사비가 세워져 있다.

한정에 얽힌 시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연못의 밤비 가을비 가을 못에 찰랑대는데 蓮塘夜雨秋雨漲秋池

가을 연잎 거의 모두 스러졌구나. 秋荷太多死

서걱서걱 잎 위를 지나는 바람소리 蕭蕭葉上聲

원앙 한 쌍 조을다 놀라 고개를 드네. 驚起鴛鴦睡 

 

 

<송산사>

 

<시산사>

 

한정을 보고 성황산으로 오르다 보면 송산사를 보게 되는데 우측으로 길을 따라 가면 시산사와 송정을 볼 수 있다.

 

<송정>

 

송정(松亭)은 매우 단아하고 정갈한 정자이다.

소나무 숲에 있어서 지은 이름인지 아니면 소나무처럼 푸르게 살고 싶다는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세상을 등지고 세월을 보낸 710현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듯하다.

이 정자는 광해군 재위 시절 지어진 정자인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들이 모여 지었다고 한다.

400년이 된 정자인 것이다.

벼슬을 버린 선비들은 송정에 올라 자연을 벗 삼으며 명예를 초개같이 대했는데 이들이 시를 짓고 읊으며 즐기던 곳으로 유명하다.

송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 정도의 작은 정자다. 사방에 마루를 놓고 그 중앙에 작은 방을 하나 두었다.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부정형의 주추를 놓았다.

마루는 난간도 없이 그저 평 마루다. 가운데 들인 방은 4면에 모두 문을 내었다.

마루 밑에는 아궁이가 있는데 불을 때서 겨울에도 만날 수 있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송정 현판>

 

<송정에 걸려 있는 현판 -정중동물화(靜中動物化)>

 

<송정>

 

<후송정>

 

송정을 지나 내려서면 마을 초입에 후송정이 있는데 마치 규모나 형태가 원두막처럼 생겼다.

크기가 작지만 바로 옆에 후송정이라 쓴 비문과 바위에 각자가 있다.

바위에 각자된 송루(松樓)라는 글씨가 관심을 끈다.

이 정자는 고종(광무 3) 때인 1899년에 화개헌 김직술이 처음 지었다고 후송정 정지(亭誌) 실기에 전한다.

이후 1985년에 다시 중건했으며 암반 위에 둥근 돌기둥을 올린 다음 사각기둥을 놓고 기와를 올렸으며 정면 2, 측면 한 칸의 누각형 무실정자다.

원래는 송정의 10()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송정이라 불렀는데 전북 부안 출신 간재 전우(艮齋 田愚)선생의 친서로 석벽(石壁)에 후송정(後松亭)이라 제서하고 경향의 문인(文人)과 달사(達士)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한다.

1985년에 화개헌공(和介軒公)의 뜻을 계승하여 그 곁에 정자 두 칸을 지어 이름을 붙이기를 후송정(後松亭)이라 하였다. 바위 위에 후송정 42원비(員碑)를 세웠다.

정자 이름의 후송(後松)은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짐을 안다)의 의미에서, 즉 절개가 높은 선비의 고결한 뜻을 기리고자 지은 것으로 의식 있는 선비들은 같은 뜻으로 한후(寒後)와 같이 흠모하는 단어이다.

정자 뒤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정겨움이 가득하다.

 

<각자 - 후송(後松)이라고 새겨져 있다>

 

<후송정 현판>

 

 

<후송정>

 

<상춘대 정자>

 

송정과 후송정을 본 후 성황산에 오르면 상춘곡(嘗春曲)의 산실임을 알려주는 상춘대가 있다. 새로 지은 정자에 오르면 칠보면 주변의 경치가 온전히 보인다.

성황산을 따라 능선을 걸어 내려오면 무성서원을 만나게 된다.

 

<현가루>

 

<무성서원>

 

<현가루 현판>

 

<무성서원 >

 

무성서원(武城書院)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 사학 교육의 전형으로서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한국 특유의 공간 유형과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서원에서는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 기초학습을 가르치고, 향사(香司) 곧 성연에 대한 존경과 예를 갖추는 법을 배웠다.

제향 의례와 강학, 사회교육 등의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는 탁월한 문화유산이다.

무성서원은 조선 성종 15(1418) 세워질 당시에는 태산서원이라 불렸고, 숙종 22(1696)에 무성서원으로 이름을 받았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이란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을 말한다.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편에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의 서원이다.

사당과 현가루, ·서재, 비각, 명륜당 등이 남아 있다.

배향 인물로는 통일신라 말 태산 군수를 지낸 최치원 선생을 비롯하여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 7현을 모시고 있다.

성종 17(1486) 이후에는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 등의 귀중한 서원자료가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고려 때부터 최치원과 신잠 등의 치적을 알리기 위해 세운 태산사(泰山祠)와 생사당(生祠堂)을 병합하고 세운 곳에서 유래되었는데 무성(武城)이란 이름을 붙여 서원으로 개편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844(헌종 10) 중수한 것이며, 명륜당은 1825(순조 25)에 불탄 것을 1828년에 중건하였다.

 

<강수재>

 

<무성서원 현판>

 

세계유산 잠정 목록으로 등재 신청한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 확정되었다.

포함된 9개 서원은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소수서원(경북 영주),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산서원과 병산서원(경북 안동),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흥선대원군'의 형이며 영의정을 지낸 이최응의 불망비 등 '무성서원' 보존에 공이 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는데 무성서원이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은 것은 이최응의 공이 크다고 한다.

 

현가루(絃歌樓)는 문루인데 두리기둥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기와집이다.

현가루는 논어의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공자께서 무성에 가셔서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셨다(子之武城 聞絃假之聲)’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과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轍)에서 따온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현가루 편액은 손병호 글씨로 알려져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칠보면에 먹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 무성서원에 먹을 대는 먹장사가 많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뒤편에 있는 명륜당은 정면 5,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 강당이고 동서재에 해당하는 강수재와 흥학재가 있다.

 

<현가루>

 

 

마을에서 나와 앞을 보니 칠보 발전소가 보이고 주변 평야지대가 꽤 넓다.

정읍에서 한참 떨어진 칠보면 원촌마을에 숨어 있는 무성서원과 정자들이 예전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글을 읽고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는 산실이었음에 놀란다.

안빈낙도의 멋과 맛을 간직한 정자들이 아름답고 풍치 좋은 장소에 지어졌다는 예측을 송두리째 버리게 만든 정읍 칠보면 정자 여행은 감동의 발걸음으로 뿌듯하다.

정읍에 있는 또 다른 문화재급 정자인 파향정과 군자정을 향하여 답사 여행을 떠나는 여정이 큰 기대를 갖게 한다.

(장성에서 백양사 쌍계루를 보고 정읍 칠보면 원촌마을에 들러 - 20141129)

 


Wind Beneath My Wings - Israel Kamakawiwo'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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