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조선왕조실록 유자광.안당 친족들이 구해냈다

도심안 2018. 7. 17. 03:27

 

조선왕조실록 유자광.안당 친족들이 구해냈다.

 


 

충주. 성주 실록사고 화재 왜군방화 아닐 수도 있다?

충주의 한명회, 성주의 김성일 정철이 통치했다.

당시 전주는 권율. 의병장 권극평,

 

진주성에 참전 순직한 의병장 보공장군 권극평의 충열사

 유자광의 고모가 살았던 마을 정읍 옹동면

 

 

유자광이 기르고 가르친 권이의 묘 (권극평의 고조부) 정읍군 옹동면

 

남명 조식선생의 친구 일제 이항 선생이 김천일. 안의 .손홍록 송상현 권극평

       가르킨 남고서원 애국학당

 

 

조선왕조실록이 서울. 충주 .성주. 전주에 보관하였는데

조선 문화재 도서에 욕심을 내고

침범한 일본이 실록사고부터 불을 지를 이유가 없다

그 들은 도공과 악공 학문 선비를 납치하고 비문화 인물 정치 관료들을 학살했다

전주의 조선왕조실록을 권극평 외조부 안의와 안의의 학우 손홍록이 조선왕조

실록을 구해냈다

유자광이 어려서 살았던 정읍 옹동면 고모집에서 살다가 성종시대 조카

권이(權怡)를 가르치고 벼슬을 시킨 가족장이였다

권이의 고손자 권극평이 임진난에 태인 의병장으로 호남에서 진주성 전투 지원군에 까지

 참전하고 부상으로 순직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성주와 충주에서 소실되고 전주에서 만 구해 낸 안의와 손홍록이

 내장사와 아산 황해도 묘향산까지 숨긴 것은 권극평 의병장이 친척 권율장군이 있었다

 

권극평 외갓집 안의의 집은 조광조를 등용시키고, 후

에 남곤 성혼이 죽이려하는 조광조를 살리려 하자 안당의 종 송사련이 역모로 밀고하여

몰살시킨 안당의 친척이였다

 

조광조는 이장곤 안당 시산정 이정숙 일제 이항등 사실상 유자광이 길러낸

선비들이 추천하였다

그 당시 중종이 유자광을 죽이기 위해 유자광을 안심시키려고 계획으로

 유자광파 이장곤 안당 박영문을 등용하고 유자광을 평창으로

 유배 눈을 멀게하여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죽였다

 

그리고 차례로 조광조 안당 박영문을 반역죄로 그들의 종을 매수하여

거짓 역모로 씨워 죽이고 종 송사련 막개등이 귀족이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 이항은 미리서 태인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항은

의병장 김천일 안의. 손홍록 이영남등을 가르치며 살아난다

남명 조식은 정인홍 곽재우등 영남 의병장을 가르첬다

 

그런 경상도 남명 조식과 사귀면서 영호남에서 청년들을 같은

시기 임진난의 애국자로 가르친다

이들이 같이 조선왕조실록 보호를 하려고 한 공통점이 여기에서도 보인다

경상도 성주에 있는 실록사고가 있는데 의병장 곽재우가 일어나자 김성일친구

경상감사 김수가 곽재우 도적으로 몰아서 죽이려 했다

 

 

                             안의 외손자 의병장 보공장군 권극평의 묘

 

전라도 태인에서 안의 송홍록 권극평과 같이 이항 선생으로부터 교육 받은

김천일이 왜 진주성에서 그리고 진주시민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이르킨

그 이유가 조선실록과 왕의 초상화등 보존에 전주와 같은 실록보존에 사수하려 했으나

김성일 정철등이 고의로 막아 선것 같다

여기서 ‘일본이 침략이 없다’ 라고 말한 조선통신사 김성일이

영남전투를 총 지휘하고 있었다

사실상 임진난을 초래한 김성일은 자기가 거짓말한 것이 왕조실록에

 모두기록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정대성과 곽재우를 도적으로 몰아서

성주실록사고 보호 이송의 기회를 없게 하여 방화로 소실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 김성일이 선조왕에 올린 장계문 글일부를 보면

‘곽재우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草溪)의 빈 성(城)으로 들어가 병장기(兵仗器)와

군량을 취득하니,

 이때 동현(同縣)에 사는 정대성(鄭大成)이란 자가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였으므로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은 곽재우까지 도적으로 의심하여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급히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감사와 병사가 마침내 명령을 내려 대성을 사로잡아 참수하니, 재우의 병사도

 흩어졌습니다.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이 그는 도적이 아니라고 말하자 감사(監司) 김수(金睟)는.....’

왜적이 거의 함락한 마당에 의병장을 도적으로 몰아 죽이려다 곽재우가 살아나서

김수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다

 

정대성이 성주성을 지키려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학살자 정철이 시급하게 심복 홍서봉을 성주목사를 발령내어 보낸 기록이

아래와 같이 실록에 있다 그 글의 증거를 없애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선조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8월 12일(경인) 6번째기사

한준겸·이형욱·구의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한준겸(韓浚謙)을 공조 참판으로, 이형욱(李馨郁)을 병조 참의로, 구의강(具義剛)을

병조 참지로, 조정립(趙正立)을 성균관 사예로, 권춘란(權春蘭)을 성균관 직강으로,

 권반(權盼)을 홍문관 수찬으로, 송안정(宋安庭)을 전라도 우수사로, 곽재우(郭再祐)를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홍서봉(洪瑞鳳)을【정철(鄭澈)을 존숭하여 좋은 벼슬을 얻었다. 】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실록을 쓴 사신(史臣)의 기록문으로 홍서봉을 정철이 임의로 등용했음을

 알리는 기록문을 첨부했다

민족에 죄를 많이지고 영화를 누린 정철과 김성일이 경상도 전투에서 실록사고를

 왜병 행위로 위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 들은 조선실록으로 죄가 이제야 모두 알려젔고 김종직의 ‘세조는 역적이다’

시를 김일손이 실록에 기록한 것도 훗날에 세조, 연산군세력 유자광 이극돈을 몰락하기 위한

 의도로 반역 의도 음모라고 보아진다

충주성은 신립장군이 탄금대로 와서 진을 치고 있으면서 왜적이 근처에 온다는 제보자를

미친놈이라고 참수하였다

그래서 갑자기 포위되고 전사하여 힘없이 충주성이 함락되고 성내 건물의 정보를

잘아는 일본군이 욕심내는 도서관을 첫 번에 소각 시킬 이유가 없다

후퇴하는 관군이나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불을 지른다

특히 청주한씨 한명회 세력 지방 호족으로 한명회가 남이를 죽이고 남이의

딸과 처제를 부인으로 살며 모든 남이 역모를 유자광 만든 것으로 거짓기록된 조선실록

 CCTV 녹화 태잎같은 것을 없애고 싶음이 당연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악학괘범 삼국사기 삼국유사등 고서는 거의 일본에 있는 이유가 이 시대

약탈해 간 것으로본다

일본은 스페인 포루트칼의 무기와 문화재 도서의 보물을 알고 침략 약탈이 목적이였다

전주실록사고에서도 전주근방의 수많은 선비 호족이 많아도 전주에서 거리가 먼

정읍 옹동면 자시내 마을 유자광인척이 자기 목숨 살기도 어려운 때

자기 돈으로 구하여낸 이이유가 있다

애국 충신으로 잘못이 없는데도 천하 악인으로 만든 유자광의 행적이

기록된 것이기에 보존하려고 그랬다

전주를 제외한 4곳이나 보관된 실록이 한권도 없이 소실된 것이 의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북한이 남침하여서도 소중히 가저다가 한글 번역하여 남한에 보급되어

 모두가 읽어보게 되었다

중종이 명나라 수족으로 한민족파 유자광이 문화유씨 안당이 순흥안씨 연좌제 벼슬금지 화를

피하려고 서로 성씨 분파를 성씨 분성하여 다른 성씨로 사용하였으나

 

유자광을 버린 문화유씨는300년 만에 조선실록 진실을 읽고나서 차씨 성까지

한성으로 연합하여 유자광의 신도비를 세웠다

 

 

조선실록 진실을 읽고나서 문화유씨는 차씨 성까지 한성으로 연합하여 최고의

충신으로 밝혀저서 유자광의 신도비를 세웠다

조광조를 살리려는 안당이 역적이 아닌 의인으로 알려저서 안씨들은 여러 성씨가 아니라

하나의 성씨라는 사실로 다툼과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조산왕조 실록 4곳이나 있어도 3곳이 사라진 허망한 이유 그 당시 세력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광조를 살리려더 역모조작 고발로 멸문 화를 입은 안당의 친족 안의의 묘

   제각이 옹동면 비봉산에 있다

 

이항 문하에서 수학하였고자라 청렴한 선비로 특히 안의는 세종때 정인지와 함께

용비어천가 를 지은 안지의 고손자이다.

안지가 인순부원의 직책에 있을 때 전주사고가 건립되고 직접 실록의

제본을 떠 전주에 이관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웃 칠보면 삼리에 사는 손

홍록 선생과 함께 전주사고를 지킨 손홍록과 안의 선비에 대해 손홍록과 안의가 7년 전쟁

 내내 내장산, 강화도를 거쳐

청천강 거슬러 묘향산 까지 실록을 이안하고 지켜내어 역사의 맥을 이어준 충정은

내장산 용굴암, 비례암에 어용과 실록을 옮긴 후에도 행여나 하여 교대로

수직을 섰는데 1592년 6월 23일부터 1593년 7월 8일까지 총 370일 동안 안 의가 174일,

 손홍록이 143일, 함께 구직한

날이 53일로 그 정성이 대단했다.

그후 순홍록은 실록을 충남 아산현을 거쳐 강화부로 옮겼고 강화에서

과로로 병이 난 안의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안의의 심복 한춘과 함께

평북 묘향산 보현사로 이안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록을 지켜냈다.

그런데 송익필 정철의 친구 이율곡의 매제 권태일 권진등 그 세력들이 후에

 묘향산 까지 가서 실록을 관리하여 '수정선조실록' 을 만들어 낸 변명실록으로 보인다.

 

안의와 권극평의 친족이 유자광과 친교 기록문은 명나라 식민지 걸림돌

유자광 죽이기 음모자료로서 사수했다

 

 

남명 조식선생의 친구 일제 이항 선생이 김천일. 안의 .손홍록 송상현 권극평을 가르킨

남고서원 애국학당 유자광이 '악학괘범'을 만든 예술문화 계승자이다

유자광이 유규의 서자로서 가족 천대에서 벗어나 두 고모집 태인현 옹동면과

산내면 대장금 마을에서 어려서 살았다

정읍시 옹동면 냇물건너 마을에 이항이 살았는데 이항의 고모할머니가 권이의 며느리 로서

훗날 임진난 조선실록을 지킨 의병장 권극평의 고조 할머니다

그리고 조광조를 벼슬시키고 천거한 안당 안처겸 등 안씨가 권이의

 친척으로 조선실록에 기록이 있다 .

 

예종1년은 유자광이 남이장군의 역모를 방지하여 그 해 최고의 세력시대 였는데도

 유자광의 조카 권이를 납치 죽이려는 행동이

일어났는데 여기에서 안당의 친족 안씨가 유자광에게 달려가서 알려서

유자광이 사헌부에 신고하여 조카를 살려냈다.

 

여기에서 권이가 다행히 살아나서 억울한 유자광 죽음의 이야기를 가훈으로 듣고

 그 고손자 권극평이 외조부 안의에게 부탁하고 진주유씨 유자광 세력이

 의병이 이르켜 지킨 진주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전투 성곽외부 전투대로

농악피리신호 군악전투 하다 부상으로 순직했다.

 

그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보면 유자광은 안씨 이씨 권씨와 이웃마을에서

 어려서 살며 다진 가족애가 보인다

예종 3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2월 10일(을미) 1번째기사

군기시 판관 정이원이 아들을 시켜 권이를 결박시키니 국문하게 하다

 

처음에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 정이원(鄭而元)이 그 오촌질(五寸姪)

생원(生員) 권이(權怡)와

더불어 노비(奴婢)를 소송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정이원이 그 아들 정정(鄭靖)을 보내서 형조(刑曹)의 장수(杖首곤장치는 대장) 를 청하여,

이들과 함께 권이의 집에 가서, 권이를 결박하여 그의 집 뜰 가운데 눈[雪] 위에다

놓아 두고,밤을 새고 한낮이 되어도 오히려 놓아주지 아니하므로,

 권이의 아내가 정이원의 집에 찾아갔으나, 문을 닫아 걸어서 들어갈 수 없으므로,

 울기를 매우 애통하게 하였다. 이웃 사람이 가엾어서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제 정이원의 아들 정정이 내 남편을 결박해 왔는데,

그 생사(生死)를 알 수 없어서 우는 것이니, 나를 위해서 살펴보아 달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웃 사람이 살펴보니, 권이가 과연 계단 위의 창(窓) 밖에서

꿇어앉아 있었는데

,이때 마침 그 족인(族人친척) 안근(安謹)이 와서 구원해 주어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권이의 오촌숙(五寸叔)인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이

 그 연유를 자세히 갖추어서 예종에게 아뢰니, 승정원에 명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승정원에서 곧 정정과 증인(證人)들을 불러서 사실을 물으니,

 모두 대답하기를 사실대로 하였으므로, 의금부에 명하여 추핵(推覈)하게 하였다.

이때 정이원이 이성 현감(利城縣監)을 제수받아 길을 떠난 지 하루가 되었는데,

이를 잡아오게 하여 국문하는 데 예종이 참여하게 하였다.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시산정, 조광조의 우두머리 이정숙은 이곳 이름

 '시산詩山正정'으로 태어나 부르며 유교의 성지 해동 공자라고 했으나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이곳의 모든 유교서적이 안당의 종 송사련이 고발한 공로

 상으로 받아가서 이율곡의 스승으로 이율곡 태양의 조선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전주의 조선왕조실록을 권극평 외조부 안의와 안의의 조선왕조 실록을 구해낸

 친족의 행적자료를 보면 유자광의 애국 결백의 기록문이기에 대대로

 안씨 권씨가 지키려 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유자광이 어려서 살았던 정읍 옹동면 고모집에서 가사를 돌보며

 3대독자 권이를 보호하며 기르고 살다가 세조시대 조카 권이(權怡)를

가르치고 벼슬을 시킨 가족장이였다

 

이처럼 유자광 세력이 최고인 시대에 유자광 고모의 유일한 3대독자를

 친척 정이원에게 얼어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죽이게하여고 함경도 현감으로 멀리 보내려는

 명나라황후 한명회 인수대비 세력의 유자광 뿌리 암살계획으로 보여지고

 그공으로 현감 벼슬로 보내다가 유자광이 살려낸 예종의 특명으로 무산되었다

정이원은 이집에 시집와서 아기를 낳지 못한 부인의 조카로서 시기하는 터에

 한명회와 그딸 예종 성종비가 유자광의 뿌리 암살의

음모로서 유자광의 고모는 숨어 다니며 손자를 살렸다고 족인들은 전한다

그래서 예종이 죽자 성종1년에 한명회 사둔 신숙주를 시켜서 종을 매수하여

 유자광을 역모로 꾸며 죽이려 했으나 유자광이 남원윤씨 페비 윤씨

 왕비(연산군어머니)가 어린 성종에게 부탁하여 수렴청정

세조비에게 사실을 알려서 살려냈다

 

한명회 천하시대 한명회 딸의 시아버지 신숙주는 세조왕비 태후가

 내용을 파악하고 살려주라고 명령해도 신숙주는 자꾸 반대하며 죽이려 했고

 어린 성종은 유자광 처형을 끝까지 반대했다

세조왕비 태후는 이시애난 평정에서 유자광을 삼국지 촉나라 '제갈양'이라 고

불리며 아낀 역사가 있다

이런 명나라 황족 식민지 세력이 민족 세력자 유자광 조카 권이의 고손자

 권극평이 임진난에 태인 의병장으로 호남에서 진주성 전투 지원군에 까지

참전하고 부상으로 순직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서울. 성주. 충주에서 소실되고 전주에서 만 구해 낸 안의와 손홍록이

내장사와 아산 황해도 묘향산까지 숨긴 것은 권극평 의병장이 친척 권율장군이 있었다

 

조광조는 이장곤 안당 시산정 이정숙 일제 이항등 사실상

유자광계 들이 길러낸 선비들이 추천하였다

여기서 시산정‘시산정(詩山正) 이정숙은 시산은 태인현 현 정읍군 칠보면

 시산리 詩山里 이름으로 단종왕비 고모가 할머니로서 그때부터 칠보면에서 대대로

 살아온 세조의 동생 임영대군 후손 이구 이준의 후손이다

그 당시 중종이 유자광을 죽이기 위해 유자광을 잠시 유배로 위장 안심시키려는

 계획으로 유자광파 이정숙 이장곤 안당 박영문을 등용하고 유자광을 평창으로

 유배 즉시 눈을 멀게하여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죽였다

그리고 차례로 조광조 안당 박영문을 반역죄로 그들의 종을 매수하여 거짓 역모로

 씨워 죽이고 종 송사련 막개등이 귀족이 되었다

 

이런 유자광 숙청 계획 사실을 잘아는 이항의 백부가 귀향 명령하여 이항은

 미리서 태인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항은 의병장 김천일 안의.

손홍록 이영남등을 가르치며 살아난다

이항의 절친한 학우 경상도 남명 조식은 정인홍 곽재우등 영남 의병장을 가르친

 영호남의 수호 햇심 두 어른이였다

 

 

진주성에 참전 순직한 권이의 고손자 의병장 보공장군 권극평의 충열사

유자광의 고모가 살았던 마을 정읍 옹동면 모충사

 

고려시대 기와에 학당이 이곳에 세워진 현종부터 충열왕시대 이자겸 송인세력자

인재양성소 학교 '학당' 글씨기와

 

 

세종대왕때 사가독서 1호이며 우부승지로서 향약 집성방을 지은 권채의 고향으로

친구 최항 안지 등 집현전 친구들이 모두 옆마을에 최씨 최항 후손 집성촌으로 살고 있다

안지가 인순부원의 직책에 있을 때 전주사고가 건립되고 직접 실록의 제본을 떠

 전주에 이관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웃 칠보면 삼리에 사는 손 홍록 선생과 함께 전주사고를 지킨

손홍록과 안의 선비에 대해 손홍록과 안의가 7년 전쟁 내내 내장산, 강화도를

 거쳐 청천강 거슬러 묘향산 까지 실록을 이안하고 지켜내어 역사의 맥을 이어준

 충정은 내장산 용굴암, 비례암에 어용과 실록을 옮긴 후에도 행여나 하여

 교대로 수직을 섰는데 1592년 6월 23일부터 1593년 7월 8일까지 총 370일

동안 안 의가 174일, 손홍록이 143일, 함께 구직한 날이 53일로 그 정성이 대단했다.

 그후 순홍록은 실록을 충남 아산현을 거쳐 강화부로 옮겼고 강화에서 과로로

 병이 난 안의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안의의 심복 한춘과 함께

평북 묘향산 보현사로 이안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록을 지켜냈다

.

그런데 송익필 정철의 친구 이율곡의 매제 권태일 권진등 그 세력들이 후에

 묘향산 실록사고까지 가서 실록을 관리하여 '수정선조실록' 을 만들어 낸

'변명실록'으로 보인다

 

조광조는 최고의충신, 조광조를 살리려는 사람은 역적으로 교육

고려 쌍화점 마을 안의의 고향 자시내 풍경

 

조선왕조실록 지킴이 안의 고향산천은 고려시대 쌍화점 시무비 조선 세종때

안지. 최항 한글창조자 의 후손이 산다

 

 

태인현 안씨의 역사를 탐구하여 보면 한글노래 상춘곡을 지은

그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을미(1475)에 지은 "태인고현 동중

향음 서(泰仁古縣洞中鄕飮序)"가 나온 安忠烈 ..安邦彦 ..安邦豪 ..安邦傑 ..

이 분들은 이름으로 보아 일가족으로 보이며, 이후로도 그 친족 또는 후손으로

보이는 안씨들이 다수 나오다가, 중간에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조선말에 탐진안씨와 순흥안씨들이 나타난다.

앞에 나오는 분들은 본관이 없다.

 

 이것은 그 이유는 친족 안당 안처겸을 안씨 종 송사련이 무고로 고발하여

역적이 되어 안씨들이 연좌제 처벌이 두려워서 성씨를 바꾸거나 숨어버린 것이다

조선시대 역적의 친족은 9족을 죽이고 모든 동성동본은 벼슬금지 시키는 시대였다

이로 보아 처음 안씨들은 시산정 이정숙의 무리 안당 안처겸이 친구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종 송사련이 거짓 밀고로 멸문 다른데로 이주해 가고,

 전남 강진섬으로 피신 탐진 변성) 나중에 탐진 및 순흥 안씨들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강진김씨가 호족인 칠보면의 친척이 전남 강진에 많이 살아서

 그 연고로 강진으로 숨어 들어간 것이 탐진(강진) 안씨로 안의의 성씨 변경

 사유로 보여진다

현 강진군 국회의원 김영진과 이곳 칠보 김원기 전의원이 도강김씨는 같은

강진(탐진)김씨로 같은 친족계보로 원거리 동족거주 지역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1475년 무렵 태인에 살았던 안씨들은 어떤 분들일까?

당시는 호남 지역에 광주안씨나, 순흥안씨들은 살기 전이었고,

주로 구죽산안씨 복야공파나, 신죽산안씨들이 살았다. 광주안씨 시조와 같은 이름(安邦傑)이

나오니 광주안씨냐 아니냐 등 학론이 구구하다.

성종시대 전국 최대 벼슬가문의 문화유씨 유자광을 죽이고 그 가문별 벼슬자리를

한명회의 청주한씨가 그 후에 영상급 최대 벼슬이 성씨가 되었다

그래서 최대 벼슬가문 문화유씨는 유자광 탈피 결백을 표시하려고

유자광을 진주유씨로 떼어내고

 

진주유씨는 유자광의 부친 유규가 예종때 영광군수 였는데 태조 이성계 시절의

조부 유혜손까지 떼어내어 영광유씨로 축출 멸문압박의 고통으로 살았다

명나라 세력 추종자 중종과 사헌부를 강화 모든선비는 유자광 타도의 상소문을 올리게 하고

유자광의 친족과 사돈관계의 타성 친척도 압력을 넣어 유자광 타도의 상소문을 올려야

생존하는 법으로 유자광 누나 고모 이모 등의 친척도 유자광 타도 욕설 처벌요구 상소문을

모두 올렸다 그래야 살았다

 

문화 유씨와 전주 진주 안동등 유씨에서 유자광 이름과 친족은 모두 삭제되어 없다

그런데 유자광 친척 가문 중에서 안의 외손자 권극평 안동권씨 족보에 유자광의 조부

유두명 부친 유규가 고모부 권채의 부인 란에 명기 되어 내려 온다.

 

이것은 권채의 3대 외독자 손자 권이 살려낸 유자광의 은혜와 공적을 대대로 알고

타성족보에 기록한 유일한 곳이다.

신숙주 큰어머니 족보 홍길동의 사촌형수 고모들 족보에서도 삭제되어 있다

 

유자광의 족보는 이처럼 외줄 독자 계승으로 희귀 성씨로 몰락햇다

심지어 중종실록에 유자광 부인이 유자광과 자기 자식을 처벌하라는 내용 그 상소문이

 실록 원문에는 없는데 중종실록을 편집책임자나 세력자로 집필하는 사신(史臣)들이

아래와 같이 조작하여 꾸며서 중종실록을 만들어서 유자광 타도 관제 데모를 시켰다

중종 23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9월 8일(신묘) 2번째기사

유자광의 아내 박씨의 상언에 의해 아들 유진을 절도에 유배시키다

유자광(柳子光)의 아내 박씨(朴氏)의 상언(上言)5981) 을 정원(政院)에 내리고 이르기를,

“원하는 바에 따라 그 아들 유진(柳軫)을 절도(絶島)에 이배(移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유자광(柳子光)은 천한 서출(庶出)이다.

젊어서부터 늘 출세하고자 온갖 방법으로 꾀하여 기회를 엿보았는데 세조(世祖)에게

인정을 받아 녹공(錄功) 되었고, 부원군(府院君)에 이르렀다. 무오사화(戊午史禍)는

 이 사람이 일으킨 것이며, 갑자 사화(甲子士禍) 때에 사림(士林)이 다

 죽었는데도 부족하게 여겨, 송일(宋軼)의 상소에 따라 또 일망타진하려 하였으나

, 김세필(金世弼)이 그 간사한 정상을 박원종(朴元宗)에게 애써 알렸으므로,

 마침내 귀양가서 죽었다.

 그 아들 유진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말감(末減) 하여 사변(徙邊) 하였다.

유진의 아우 유방(柳房)도 변변치 못하였는데, 세상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서

 목매어 죽었다. 독사가 반드시 독사를 낳는 것이니, 이상하게 여길 것이 있으랴!

 

【태백산사고본】

유자광 부인의 상소문이 없는데 사신 기록자가 악의에 찬 유자광 욕설로 이처럼

조작 편집기록했을 을 알게 한다

유자광의 아들 유방을 죽이고 자살했다고 하고 하는 말은 귀에 익은소리 장준하 선생과

장태완 아들 의문사 자살 위장과 같이 유자광의 아들도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다

유자광 친족이 한맺혀 숨어 살면서도 끈질기게 해명자료로 구출한 마음이 장준하 장태완의

유가족 현대사와 비교된다.

거짓말 선전 '유자광전'을보고 분성된 문화유씨 이제 조선왕조실록 기록문을 보고

모든유씨 차씨들총친이 통합하여 유자광의 신도비를 세우고 웃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물제 안의가 조선왕조실록과 이조문기 30여마차,

고려사기(고려사)문 등의 전적 20여마를 적군의 눈을 피해 내장산으로 옮겼다.

내장산 용굴암, 비례암에 어용과 실록을 옮긴 후에도 행여나 정철 송익필 세력이

방화할까 하여 교대로 경비를 하였다

 

그후 조선실록을 충남 아산현을 거쳐 강화부로 옮겼고 강화에서

과로로 병이 난 안의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안의의 심복.

그리고 외손자 권극평의 권씨 가문 머슴들과 함께 평북 묘향산 보현사로 이안하여

임진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록을 지켜냈다.

특히 권극평은 세종때 정인지와 함께 용비어천가 를 지은 안지의 고손자이다.

안지가 인순부원의 직책에 있을 때 전주사고가 건립되고 직접 실록의

제본을 떠 전주에 이관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의가 손홍록과

외손자 권극평이 왕조실록을 구했다

 

세종때 용비어천가를 지은 고은 안지(安止 ; 1377 ~ 1464순흥안씨) 선생의 시문집도 있다.

안지선생은 고려때인 1377년에 김제에서 태어나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이 됐으며,

변계량과 함께 실록편수에 착수, 태조실록 태종실록을 편찬하고 세종때

집현전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어 정당문학 검교 찬성 겸 세자사부빈객 승을 지냈으며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들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중종실록을 철저하게 김일성과 박정희 정권이 그 수법으로 모방 군사정권을 쟁취에 성공했다

이 처럼 북한의 반동분자 처형과 정치보위부는 중종시대 사헌부 역할을 그대로

모방한 성공이였다

 

문화유씨는 조선왕조실록 한글판의 증거자료가 유자광 충신으로 밝혀저서

'자랑스런 유자광'으로 모든 문화유씨와 동족 차씨 까지 통합문중회의를 하고

 안씨 문중에서는 안당과 안처겸의 종 송사련의 밀고로 몰락 분성된 그 과정을 토론 또는

 언쟁 중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역사기록을 고의로 무시하고 누가 어려운 한문 조선실록을 보랴 하고 실록기록을

자기세력만 보고 숨기고 충신 가문을 역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북한이 남침하여 바로 가저간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한 것을 복제했다

산업 예술 국방의 선각자 부산 왜병방어 상소문의 유자광 가문과 조광조 충신을 조의제문을

지어 거짓 조작으로 죽이려는 것을 막으려다 멸문화를

당해 두 가문이 몰락하여 조선실록이 그시대

CCTV 녹화필림 같은 변론 자료를 그 가족들이 찾아내었다 .

 

삼국사기. 악학괘범등 대부분 고서가 일본에서 나왔다

그 이유는 일본 풍신수길의 욕심은 조선의 문화재 강탈이 였다고도 한다

서울. 성주. 충주. 실록이 왜병이 강탈아려고 욕심내는 책과 글씨를 소각했다는 말은

좀 더 연구하여 밝혀야 한다

조선통신사에게 글씨 하나 받기위해 몰려든 일본 왜군이 전투와 무관한

책창고 부터 방화 했다니 ...

왜 정철이 시급히 심복 홍서봉을 성주목사로 발령하였는가

그 의문을 풀어야 한다

성종 시대는 유자광 실력시대 나이 70세에도 벼슬 못한 정극인이 유자광 세력에

벼슬을 하고 유자광 몰락에 그 벼슬도 마친다

 


출처 : 매헌梅軒 권우權遇
글쓴이 : 권오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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