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내 용장사는 한국 불교 출판의 메카였다

도심안 2012. 4. 27. 12:49

산내 용장사는 한국 불교 출판의 메카였다

만경대에 대사찰 터 남아...인근은 한지 대량 생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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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덕 notay350@hanmail.net

 

전북에서 가장 많이 서적을 출판하는 사찰은 용장사였다.

전라도가 예술의 중심지라고 말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그 문화예술의 기본이 되는 지점이 어딘지는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무릇 문화예술이 꽃 피우려면 출판문화가 융성해야 한다. 조선시대 판소리 예술의 기본도 대부분 전주에서 책이 출판되어 남아있다.

불교서적이 도내에서 가장 많이 출판된 사찰은 태인현 산내면 매죽리 운주산(절안마을) 용장사이다. 기자는 1970년에 이 지역에서 폐사지를 조사하던 중에 산골짜기마다 칠성암.청계암 신선암 등 절터 이름이 있고 전설에 팔만 구암자가 있었다고 촌노들에게 전해 들었다. 폐사지에 무려 집이 들어앉은 터가 6300평. 그러니까, 금산사나 내장사 보다도 그 규모가 크다.

산내면 매죽리 운주산 용장사, 불교 서적 출판의 메카 

불교역사 문헌자료에도 후백제 견훤의 신앙터로 운주산 도통바위 석굴에 물이 나오는 석굴이 있고 그아래 학바위에 말 발자욱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순창의 복흥 쌍치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이 여기서 구부러저서 동쪽으로 흐르는 성역의 동류수 앞의 사찰로서 사찰 앞 입구에  있는 국사봉이라는 산 정상에 백제시대 만든 말,소 닭 개 범 사람 등 토우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더 깊은 역사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동국여지승람 태인현편에서도 고려 명종시대 방랑시인 김극기는 이곳에 와서 여기 용장사를 무릉도원의 경지로 견주어 시를 붙이고 갔다. 도연명과 왕희지가 만들어 놓은 곳으로 비유했다. 불교사찰의 어느 서적에서는 견훤의 후백제시대 세워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를 증명하듯 김극기 싯구절에도 사찰음료인 "녹차를 마시는 듯 절의 풍경이 흔들린다"고 하여 "다도'(녹차)의 전문서적이나 일본의 음료 식품학계에는 전부터 용장사를 거론하였다. 어쩌면 최치원이 여기서 녹차를 마시는 풍류시로 왕희지와 도연명을 찬미한 후에 지리산 쌍계사로 가서 다도를 전하여진 듯 보인다.

그리고 왕희지의 글씨 쓰는 유적지 난정기(蘭亭記 ), 즉 왕희지가 42명의 제자와 술잔을 띠우며 시를 지을 수 있는 바위가 있다.  (경주 포석정 같은) 물흐르는 바위굴곡의 터가 난정기라고 하는데 그바위는 백제대부터 호족의 별장 즉 장원, 부곡 등으로 사병과 시녀들의 가무훈련의 장소로 내려왔다.

그래서 그곳에는 고려시대 최충헌통치, 몽고7차 입암산성 침입,삼벌초의 난등을 물리친 송송레 ,송인과 최영장군과 이성계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이태조 군악대 나팔수 송안(宋安)의 비문이 있다.

고려 충열왕의 시대는 이지역 사람들이 중앙에 대거 진출하였다. 이러한 요새지에 뛰어난 경치가 있어 강대한 귀족, 호족의 소유로 예술과 학문의 기본이 서민 부녀자에게까지 유행되어 삼대목, 향악, 정읍사, 상춘곡, 태산가 등이 태어난다.

용장사가 출판한 불교 승려교육을 위한 교과서 3권

전북에서 가장 많이 출판하는 용장사 출판의 불교 승려교육 교과서 셋만을 우선 여기에 공개한다.

첫번째로 산내면 용장사에서 출판된 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이란 승려교육교과서는 고려희종1년(1205년)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지은 책이다. 불교에 처음으로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경계할 점을 가르친 내용이다. 1397년 상총(尙聰)이 태조의 명으로 전국 사원의 청규(淸規)로 시행하였으며, 원효(元曉)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혜근(惠勤)의 《야운자경(野雲自警)》과 함께 불교 입문자의 필독서이다. (1권 1책. 목판본.)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지은 근본 불교경전의 하나. 1권 1책. 목판본. 불교계가 국가의 비호 아래 안일과 사치에 빠져 승려들이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는 등의 폐단이 많았으므로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처음으로 불교에 뜻을 둔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썼다.

불교의 수행규범인 율문(律文)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 중 핵심부분만 뽑아 우리나라 사원생활에 맞게 구성하였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불도의 초학자를 경계한 부분의 비중이 가장 크다. 처음 불문에 들어온 사람은 오계(五戒)·십계(十戒)를 받아 지니고 도를 닦는 데만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음에는 일반 승려가 지켜야 할 주의사항, 사원생활의 화합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를 지적하였다. 끝에는 선방(禪房)에서 수행하는 자들을 경계한 내용이다. 이 책은 조선초부터 불교 교과목의 필수과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승려는 물론 일반 신도까지 배워야 할 기본 교과서가 되었다.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은 전라도 태인 운주산 용장사에서 1635년에 출판으로 18/14센티크기이다.

두번째로 다음은 보헤보각선사서 (大慧普覺禪師書) 전라 태인 용장사 1635 20/16센티1635年乙亥 8月日 全羅道泰仁地雲住山龍藏寺刊. 책에 실린 62편의 편지글 가운데 50편을 선정하여 각 편지에서 밝히고 있는 주요한 가르침들을 주제로 삼아, 그 내용을 알기 쉽고 상세하게 풀이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과 태고종은 조사선(祖師禪)의 전통을 이은 간화선(看話禪)을 그 종지(宗旨)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교계의 안팎에서 한국의 간화선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이 빈번하다. 심지어 한국선의 정체성을 새로 확립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들리고 있다. 선이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디엔가 문제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에게 있지 선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간화선을 재고하자고 요구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서장의 가르침을 철저히 파고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대혜종고(大慧宗 ; 1089~1163) 스님이 문하의 거사와 유학자들의 질문에 답하여 선의 요지를 설명한 편지글을 모은 것이다. 임제종 양기파에 속하는 중국 남송 시대의 스님인 대혜종고는 묵조선을 배격하고 간화선을 제창하였기 때문에, 간화선의 전통을 이은 한국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대혜의 방대한 어록(語錄) 가운데 조계종의 승려를 교육하는 강원에서는 오래 전부터 필수과목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세번째로 "법집별행록절요"(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1635,(인조 13 )8月7日 전라도 태인 운주산 용장사에서 출판(全羅道泰仁地雲住山龍藏寺開刊.)한 또 한권을 소개한다. 고려시대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당나라 규봉(圭峰) 종밀(宗密)의 법집별행록을 절요하고,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는 사기(私記)를 덧붙여 편집한 책이다. 1권 1책. 목판본. 1209년(고려 희종 5)의 저술로 지눌의 만년 저작에 속한다.

전체의 1/4을 차지하는 〈법집별행록〉은 종밀이 선종 가운데 하택종(荷澤宗),·북종(北宗),·홍주종(洪州宗),·우두종(牛頭宗) 등 4종파의 선법(禪法)을 채집해 펴낸 것이다. 그 나머지는 지눌이 그것을 줄이고 자신의 견해를 부연하여, 송(宋)나라 대혜(大慧) 종고(宗)의 간화선(看話禪)을 응용하는 방편을 제시한 것이다. 당시에 선종과 교종이 서로 대립해 선종에서는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묵좌(默坐)만을 제일로 하며, 교종에서는 오직 교리의 탐구와 이론적 지식만을 불법(佛法)이라 했다.

이에 지눌은 "학자는 먼저 불조의 참다운 가르침에 의해 참된 지견(知見)을 세워 관행(觀行)의 귀감을 삼되, 그 교의는 놓아두고 오직 앞에 드러난 일념(一念)만을 가지고 선지(禪旨)를 참구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게함으로써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화합시켜 먼저 교리를 이해하고 그 교리대로 수행하는 방편으로 선을 닦을 것을 주장해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수행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명지대학교 박물관, 한솔종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이 각각 보물 제1148호,! 보물 제12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장사는 고려시대 승병의 교육 장소이기도 했다

고려 희종시대는 최충헌의 학정으로 피신한 승려들이 여기서 교육을 받아 결국은 이곳 송씨 송군비 송송례 장군의 몽고7차전승리 그리고 삼벌초, 임유구 등을 제거하는 불교 사병교육의 힘으로 고려의 왕권 탈환으로 평화와  정읍사의 음악이 빛을 본 것으로 본다.

불교 타도의 선두자 정극인의 세력과 임진난으로 모든 사찰이 소실되었어도 용장사는 승병의용맹으로 건재하였다. 그리고 패망 동학군의 재결집과   6,25 남부군 저항이 가장 치열한 곳 역시 이곳이다 .

기자의 제보로 알아낸 최고 권위의 모 학자는 임진난에 소실되었다고 추정하여 글을 썼으나 이처럼 인조시대에도 불교서적을 출판하였음을 기록과 증언으로 소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출판명소 용장사 인근은 한지의 대량 생산지

조선말의 서원 난립의 핍박으로 철거되어 없어젔다. 그리고 인쇄기능을 지닌 승려는 무성서원에 흡수되어 명심보감, 훈몽자회 등 서원 출판의 명소로 유지시켰다 전한다.

한지생산지로 이곳과 근처 (봉무동)가 유명하여 60년대 농촌 이탈한  한경소, 전오봉 등 옹동면사람들이 잔뜩 짊어지고 서울로 팔로 간 것을 보았다. 한지의 대량 생산지로 용장사 터 앞 만경대 하천에서 닥나무를 치며 종이 만드는 주민들을 기자도 70년에 보았다. 그리고 70년도 산내면 능교국교, 매죽국교 등등의 창문을 이곳 한지로 장식했다.

 

입력 : 2005년 09월 01일 12:40:51 / 수정 : 2005년 09월 02일 10: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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