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 정읍(태산)에서 궁중문화 누렸던 역사 | |||||||||||||||||||||||||||||||||
[연재] 태인허씨의 무대는 동북아시아였다 (4)...정읍사가 계승되고 왕비들이 배출된 배경 | |||||||||||||||||||||||||||||||||
가야 망국후 백제에서 부흥군군이 된 태인허씨 활동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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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문화재가 전시된 전주박물관(2007.12)에서 대동여지도를 보면 당나라에서 사신이 오는 길은 부안 줄포에서 고부, 칠보, 남원, 함양, 거창, 대구, 청도까지 고속도로처럼 '일직선'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청도에서 경주를 넘어가는 운문산과 지룡산성에서부터는 굽어지고 산을 넘고 험한 요새지에 공암천이 있다. 그 청도군의 '공암'이 태인허씨 동생인 양천허씨의 탄생지역 김포군 공암으로 불렀다고 청도 사람들의 말이다. 청도군의 '공암'은 김포군으로 가서도 공암(양천)허씨가되어 김포군 '공암'이 되었다고 전한다. 경북 청도에서는 안동권씨와 양천허씨 두 시조 자녀가 결혼하여 모든 권씨의 후손은 권인행의 자손이 되었다.
양천허씨의 뿌리는 태인허씨 태인허씨는 진도, 강진, 부안, 인천, 김포등지의 남해 서해연안지역 요새지와 부안, 강진, 정읍 산외와 옹동 등의 고려자기 생산지가 모두 허씨와 '이자겸'의 소유라고 하였다. 정읍에서도 정읍 삼산동 음성지역과 산외면 살티(이치)마을이 본향이고 산내 칠보의 요새지가 허씨의 옛날 소유로 되어 있었다. 산외 김동수 가옥(문화재)이 있는 공동(蚣洞)마을은 지내 마을이란 뜻으로 지네공(蚣) 자를 써서 공동(蚣洞)인데 지금은 공동(公洞)이라고 김동수씨가 기자에게 전해주었다. 견훤왕이 지내 ,지렁이 자손이라는 토탬신앙 유래와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지룡산이 지렁이 이씨 견훤을 표시하는 산이다
태인허씨의 탄행지는 산외 살티(이치)마을 태인허씨 탄생지 살티마을은 다수의 고인돌과 울곰, 구무,곰단 등의 이름이있고 옆에는 지네가 사는 공동마을이니 허사문 시조가 허장군굴에서 나온 신화를 견훤이 모방한 느낌도 든다. 견훤이 지네 아들이라는 설화와 어떤 관계인지 알 수는 없으나 산외 김동수 가옥 역시 조상 김명관이 왕이 나온다는 명당전설의 땅으로 왔다고 하였고 허사문, 전봉준, 김개남도 여기로 이사와서 기를 받으려 한 것 같다. 풍수 명당, 산외가는 고개가 '빚재'가된 사연 또 김동수 가옥보다 더 큰 집이 두 곳에 있었다. 지금 소고기 집단마을 북쪽에는 흥덕사람이 지은 100칸짜리 기와집이 있었고 산외 초등학교 남쪽에는 경북 대구사람이 와서 집 13채를 사서 헐고 기와집을 짓고 왕의 명당터 기를 받으려고 하였다. 이처럼 왕의 터를 찾으러 왔다가 빚만 지고 간다고해서 옹동면 산성리에서 산외로 넘어가는 직통 고개길 고개 이름을 "빚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에 김동수 가옥이 소실될뻔한 위험한 일을 겪고 나서는 모두 헐어서 목재로 팔아 버리고 돌아 갔다.
경상북도 청도의 견훤(지룡)산성과 허사문 형제 최치원이 888년 정읍군수로 재임하는 해에 당나라 반란속에서 살던 장보고의 후손 '장원'이 귀국한다. 신라궁중의 장보고 살해로 반감을 갖고 당나라로 망명한 장보고의 후손 장원이 정읍군수 최치원을 888년에 찾았고 4년후에 후백제가 전남 순천에서 북진하여 정읍의 허사문, 장원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 287년에 가야국의 이서고국(경북 청도군)에서 서라벌을 습격하여 강한 피해를 주었던 가야 이서고국(경북청도) 주민으로 보이는 부족이 태인허씨 동생 양천허씨의 태생지로보인다. 여기가 공암이며 양천(공암)허씨 본관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가야 허씨가 신라 서울 경주를 습격한 군사력에 신라가 고구려에 찾아가 원병으로 가야는 망하고 주동자 허씨는 백제국 정읍으로 망명하여 후백제 신검의 군장으로 참여하여 고향땅 청도 공암을 점거하고 경순왕시대 운문산에 지룡산성을 쌓았다 ) 그 후 신라 진흥왕 때 밀려나서 가야의 함안(咸安) 땅에 일본의 왜신관(倭臣館)을 두어 친백제 가야인 허세신(許勢臣)과 530-538년, 8년간 통상하였으나 신라의 재침공으로 가야가 패망하였다고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게릴라전에 능통했던 친백제 가야인 허세신(許勢臣) 이 허세신 부족은 기습하는 게릴라 병법이 아주 뛰어나다. 후에 당나라에서 운주자사(고구려인 ) 이사도가 백제국의 의미로 제(濟)나라라는 국호로 나라를 세우고 816년 당나라 낙양성을 습격하여 불바다로 만들었고, 927년 후백제에서는 경주 포석정을 급습하여 불바다로 만들고 또 후백제 신검이 932년 예성강 선원으로 가장하여 서울 개성을 습격하여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런 병법은 태인허씨 부족의 전통적인 노하우 전술로 이루어낸 공적으로 추정된다. 그 신라습격의 작전을 살펴 보자면 927년 후백제가 신라왕궁 서라벌을 정복하려는 시기에 백제에서는 정읍사람 호족 허사문- 허선문 허씨 형제가 후백제의 능환과 신검 태자에게 합류하여 경북 청도 운문산 지룡(견훤)산성에서 주둔한다.
청도 운문산 견훤산성은 허씨 연고
경북 청도군 운문산 견훤산성은 허씨의 소유이며 견훤은 광주 북촌(태인) 이씨로서 허기 장군이 '이기'로 불리어 견훤이 허씨 종족이였음을 짐작케 한다 가야시대 가야 땅으로 미국의 '쿠바'관계처럼 신라를 가까이 공격하는 요새지 산성이다. 양천허씨는 태인허씨동생 허선문이 시조다. 후에 이 허씨들이 경북 청도군 운문산 공암천에서 경기도 김포로 가서 살았기에 김포를 공암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양천으로 부른다. 견훤은 주로 태인허씨 세력의 정읍군사를 몰고 전투없이 번개처럼 청도까지 진군해서 청도사람 허선문(허사문 동생)의 군수품 시설과 군량지원등으로 신라를 쉽게 함락했다. 그리고 후백제 견훤으로부터 청도군 공암 지룡산성 지역 땅을 허선문에게 하사하고 가야시대 가야 귀족 허씨까 살게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여기서 후백제가 견훤의 태자신검을 금강으로 바꾸자 신검이 허선문에거 백제 견훤의 위치 군사비밀을 권행에게 알려서 안동전투 에서 포위되어 대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신라군 권행의 아들 권인행이 허선문의 사위가 되어 그무덤을 청도에서 '권능'이라고 부른다 허선문의 양천(공암)허씨는 군량보급의 공적으로 왕건태조로부터 공암(청도)허씨로 성씨를 하사 받았다. 견훤의 신라정벌과 궁중악사 노획은 태인허씨의 공적 신라 포석정에서 가무를 벌이는 신라 왕궁 가무악공을 노획하여 견훤이 전주 궁중으로 보낸 기록이 있다. 경북 청도군청 안내문에 지룡(견훤)산성을 "호거산성이라고도 불리며, 둘레가 약 2km가 된다. 견훤이 신라를 침공할 때 기지로 사용했던 성이라고 전해진다. 절벽 중턱에 운문사의 암자인 북대암이 자리해 있어,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운문사의 사찰 경관이 아름답다"라고 하였다 청도 관광 안내 지도에서도 사진처럼 분명히 "지룡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시기에 후백제 태자로 전주사람 용검이 결정되자 930년에 안동전투에서 후백제 능환과 왕자 신검이 군사 기밀을 고의로 안동의 호족 권행과 장정에게 알려준다. 권행은 독자 아들이름이 권인행(權仁幸)인데 며느리가 허선문의 딸이며 허사문의 조카딸이다. 장정은 장보고의 후손이다. 태산군수 최치원은 태인허씨 시조 허사문과 교류했을 것 최치원이 888년 태산(칠보)군수시절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찾아온 장보고 후손 장정필 아들 장정은 칠보에서 허사문(태인허씨시조)과 교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군산 선유도태수(문창태수)의 아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장보고 계열의 동포와 어울리다가 당나라가 반군에 거의 망하게되어 가자 먼저 간 최치원을 칠보에서 찾아와 만나고 태인허씨와 교분이 친하여 경북 청도군과 안동군 지역에서 숨어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이사도, 장보고, 허이기의 교류관계 사실로 보아 장정과 권행은 태인허씨 호족장군 허사문과 절친한 사이가 분명하다. 이런 친절한 안동장씨 시조 장원에게 신검이 안동의 군사작전 기밀을 유출한다. 이것 때문에 견훤왕과 용검이 구사일생으로 싸웠으나 대패하였다. 여기서 신검이 용검이 전사하여 죽기를 바랬던 계교가 TV역사극 "태조왕건"에서도 이런 줄거리로 방영 소개됐다.
승승장구 하던 견훤이 왕건에 대패한 배경에는 허사문의 동생 허선문이 있다 이것은 허사문의 동생 허선문이 안동에서 권행장군과 의형제를 맺은 친구 장원(안동장씨시조)에게 후백제군 작전기밀을 알려주었기에 승승장구하던 견훤이 이 그처럼 허망한 패전을 당했다. 허선문의 딸과 사위의 능과 비문이 지룡산성 지역에 있는데 그 묘를 권능(權陵 )이라고 주민들이 전한다. 지룡산성을 지네산성, 또는 견훤산성이라고 청도군 홈페이지에서도 소개한다.
태인에 신라 궁중악이 흘러들어왔던 것도 허씨들의 공적
어쩌면 이 두명의 왕비는 이허겸의 친 외손녀가 아니고 어려서 미모와 지혜를겸한 애를 수양 딸로 입적시켜 글과 가무기예를 가르쳐서 현종에게 보인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조선 이성계의 왕자 방원(태종)이도 수양딸을 권근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는데 그 딸과 외손자를 가장 많이 귀여워 했다. 예쁘고 총명한 자를 골랐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는 자유 연애, 사랑 노래를 자유롭게 아름답게 표현했다.
정읍에서 왕비, 후궁이 줄줄이 배출된 것은 당시 문화 수준 탓 충열왕의 시무비와 충성왕비 허씨 고려 충혜왕이 산내면 홍씨를 후궁으로, 그리고 왕비선발대회를 거친 정순왕비, 중종 후궁 홍경주 딸 희빈, 조선영조의 모친 최상궁 등등 거지, 천민, 농민 구별 없이 뽑혀간 것은 궁주가무와 학습, 그리고 왕실요리를 만든 대장금의 기능이 이런 궁중인재의 생활에서 배워서 돋보이고 뛰어나서 선택한 것이다. 정읍사는 장사꾼의 노래가 아닌 동북아 대륙의 황제가 될려고 하였던 이사도, 장보고, 그리고 허이기, 이허겸, 이자겸, 유자광으로 이어진 왕족 기질의 지속과 투쟁적인 계승에서 이루어 �다. 문화, 예술, 역사를 모르는 보통 서민만 지속된 지역은 선창과 후렴으로 이어지는 노동노래만이 남아 있다.
운주산에 바위 벽에 암굴을 파고 '왕박암'은 약수가 나오고 있으며 당나라 또는 원나라에 보내는 말을 토우로 만들어 보냈다는 전설이 있고, 국수봉, 도통바위 ,운주산에서 그 토우가 출토되었다 당나라에서 참전군으로 활약한 허이기, 장보고, 최치원, 그리고 원나라 궁중세력으로 황동한 송씨 홍씨 허씨 임씨 설씨 등이 환국하여 중국의 운주로 말을 날려 보냈다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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