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혼 樓亭.17] 초간 권문해의 예천 용문면 초간정
|
초간정(草澗亭)은 초간(草澗) 권문해(1534~1591)가 공주목사를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노년의 수양처로 49세 무렵에 완성한 초당이다. 초간의 종가에서 약 2㎞ 거리인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의 초간정은 본래 이름이 초간정사(草澗精舍)였다. 후대에 누군가가 초간정이란 현판을 걸어 두었으나, 이는 본래 이름의 본뜻을 거스른 것이라고 초간의 종손은 지적한다. 초간 당시에 대사간을 지낸 소고(嘯皐) 박승임(1517~86)이 '초간정사'라 명명하여 직접 써 보냈고, 지금도 그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사(精舍)란 학문에 정진하는 집이란 뜻으로 본래는 유가의 문자였으나, 불가에서 빌려가 쓰면서 불가 문자처럼 되어 버렸다는 주자(朱子)의 설이 있다. 주자는 무이구곡에 세운 자신의 서재를 무이정사로 명명한 바 있다. 초간의 14세 종손인 권영기(權榮基)옹은 초간정은 초간정사로 이름부터 바로 지칭되어야 하며, 초간정은 사적지로서 본래 모습을 복원해 우리의 주체성을 되살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일궈야 함을 역설했다. 본래 모습이란 초간 종가에 있는 서고(書庫) 백승각(百承閣: 백세를 이어간다는 뜻으로 주자의 장서각명(藏書閣銘)에서 취해 온 것)과 백승각 옆 연못 등이 30년 전처럼 초간정 옆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던 모습을 말한다. 그리고 복원된 초간정 옆의 건물도 그 구조가 바뀌었고, 위치 또한 본래 있던 암반자리에서 약 10보 왼쪽으로 물러나 앉아있다는 것이다.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초간 권문해
초간 권문해는 본관이 예천이다. 종조부인 수헌(睡軒) 권오복, 조부 권오상 이래로 문학과 명절(名節: 명분과 절의)이 끊이지 않았다. 총명한 자질을 타고난 초간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 권지로부터 가학을 전수했다. 17세 무렵 부친을 모시고 조부 묘소 곁에 있는 재실에서 글을 읽을 때 총명이 일반 사람보다 넘쳤으며, 역사서를 널리 공부하고 눈에 한 번 스친 것은 모두 기억했다. 인물의 어질고 어리석음, 문장 수준의 높고 낮음에 대해 한 번만 보면 다 알아버렸다고 행장에 전하는 바이다.
이러한 총명으로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아우인 감정공(監正公) 문연(文淵)과 함께 용문사에서 공부하던 24세 무렵에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혹독하게 파고들어 늘 밤을 밝힐 등잔 기름이 모자랐다고 한다. 당시 신징(信澄)이란 스님이 등잔에 기름이 떨어지면 늘 기름을 갖다 부어주곤 했다. 훗날 초간이 그 스님에게 지어준 시에 '옛날 걸상이 뚫릴 정도로 앉아 학업에 열중하던 날, 스님께 밤마다 모자라는 등잔기름 대게 했던 때가 그립습니다(仍憶昔年穿榻日, 令渠夜夜點燈時)'라고 적고 있다. 23세 때는 한서암(寒棲庵)으로 가서 퇴계 선생에게 수학했고, 27세에 대과에 합격한 후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했다.
초간은 평소 아우 감정공에게 "동방의 풍속이 질박하고 비루하여 문헌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 선비들이 중국 역사의 흥망에 대해선 마치 어제의 일같이 되뇌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선 상하 수천 년간의 역사를 아득히 모르기를 태고시절 일같이 여긴다. 이는 눈 앞의 물건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의 것을 주시하려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독서하는 여가에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적을 널리 살펴 연구하며 우리의 백과사전을 만들 뜻을 일찍부터 품었다.
또한 역사가들이 황당하고 비루한 말로 저술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저술을 남겨 야사를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평생 벼슬생활 틈틈이 엮은 저술이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 20책이다. 민족의식이 짙게 깔린 순수한 우리 문화와 역사를
수록한 대백과사전이 완성된 것이다. #초간정 내력 초간(草澗)이란 뜻은 종현손(從玄孫)인 선계(仙溪) 권용이 쓴 초간정사 사적과 박손경이 쓴 중수기문에 의하면, 당나라 시인 위응물이 읊은 저주서간( 州西澗)이란 시에 '홀로 물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 사랑하노니(獨憐幽草澗邊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았다. 또한 당시 그곳 문수(汶水) 주변을 실제 초간이라 불렀고, 초간정을 짓기 전부터도 자신의 호를 초간이라 했다. 사적과 기문에서 덧붙이기를 '송나라 주돈이가 창 앞에 자라는 풀들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두고서 보며 천지의 기운이 생동하는 모습을 관찰한 뜻과 같다'고 했다. 이 초간정은 불후의 명저인 대동운부군옥 집필이 마무리된 사적지이고, 초간의 아들 죽소공(竹所公) 별이 부친을 이어 최초의 인명사전으로 알려진 해동잡록(海東雜錄) 14권 14책을 집필한 곳이다. 대동운부군옥을 집필했던 본래의 초가삼간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말았다. 인조 4년에 아들 죽소공이 그 터에 다시 세워 해동잡록을 집필한 초간정사가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됐다. 훗날 초간의 현손인 봉의공(鳳儀公)이 힘을 모아 그 유허지에 다시 중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종손 권영기옹이 두 아우 부영·영일씨와 함께 선대의 정신을 이어 정사를 관리하고 있다. 종택으로 옮겨진 백승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동운부군옥 목판과 초간일기가 보관돼 있고, 권영기옹이 이를 수호하고 있다. 놀랍게도 목판이 한 장도 빠짐없이 보관되고 있는 데에는 종손의 말 못할 고충과 노력이 배어 있다. 초간정에는 초간정 주위를 100번 돌면 과거에 합격한다는 전설과 관련된 일화도 전한다. 한 선비가 99번을 돈 뒤 현기증으로 난간 밖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자 그 장모가 도끼를 들고 와 기둥을 찍었다고 한다. 지금도 초간정 낭떠러지 쪽의 한 기둥에는 도끼로 찍힌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정도로 문혼이 서린 곳임을 말해준다. ◇대동운부군옥-지리·국호·성씨 등 한자 韻별로 정리 완벽한 '대백과사전' 중국의 원나라 음시부(陰時夫)가 중국의 역사를 106운의 운서(韻書)를 바탕으로 나열한 '운부군옥'이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초간이 우리나라 역사와 저작물을 운부군옥편찬 방식을 채택하여 편찬한 것이다. 역사와 전적을 전체적으로 일별할 수 있는 대백과사전으로 지리, 국호, 성씨, 인명, 효자, 열녀, 수령, 선명(仙名), 목명(木名), 금수 등으로 분류해 한자의 운별로 정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낙동(洛東)은 동(東)자 운에 찾으면 나온다. 172종의 전적이 참고된 이 역작이 선비 한 사람의 힘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여기에는 이미 없어진 문헌들도 기록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 수이전이 그렇고,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姜以式) 도원수(都元帥)에 대한 고증이 고려사에는 실전되고 없었으나 이 책에는 남아있는 것이 그 예다. 원고 초본을 3부로 만들었는데, 한 부는 학봉 김성일이 임금에게 아뢰어 나라에서 출판하려 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뜻을 못 이루고 분실되었다. 그 후 한강 정구가 한 부를 빌려가 분실했다. 마지막 한 부는 초간의 아들 죽소공이 보관했고, 죽소공이 다시 한 부 정서해 전하다가 헌종 2년(1836)에 목판으로 완간되었다. 일제 때는 왜경이 총을 겨누며 탈취해 가려 했으나, 종가에서 죽음으로 맞서자 빼앗아 가지 못했다고 한다. 죽소공의 해동잡록은 보관해 오던 초고를 40여년 전 태학사에서 영인본으로 출판한 적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