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전봉준과 강증산

도심안 2010. 5. 8. 21:26

전봉준과 강증산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 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 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 하였네/ 못 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 부분> “봉준이 이 사람아, 더운 국밥 한 그릇 못 말아 먹이고 보내다니…. 목이 메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하이”

시인의 애절한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귀에 들리는 듯 하다. 마음 따뜻한 혁명가 전봉준(1855~1895). 가마니 들것 위에 앉아 호송될 때조차도 당당하고 눈빛이 형형했던 조선 사내. 찬바람이 불면 녹두장군의 ‘붉은 마음’이 애틋하게 저려온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깜깜한 시대.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구한말.

그는 저잣거리 낮은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인지 화두를 놓치지 않고, 눈 부릅뜬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말이 없었다. 남의 묘 자리를 잡아주거나 동네서당 훈장 노릇을 하면서 끼니를 꾸려갔다. 말이 양반이지 보잘 것 없는 살림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기품을 잃지 않았다. 감정이나 시류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강증산(1871~1909)은 전봉준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전봉준과 같은 고부 땅에서 살았다. 마음만 먹으면 한걸음에 달려가 만날 수 있었다. 둘 다 동학에 이해가 깊었고 생각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큰 뜻에 조금도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것일까. 나이는 전봉준이 열여섯 살 위.

강증산도 양반이었지만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거나 땔나무를 팔아 살았다. 처가에서 훈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1894년 전봉준이 마침내 들떠 일어났다. 전봉준 나이 서른아홉. 하지만 피 끓는 스물 셋의 강증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봉준의 무장투쟁에 드러내놓고 반대했다. 물론 강증산도 이 썩은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데엔 생각이 같았다. 문제는 그 혁명의 끝이 무참한 죽음들로 가득하리라는 것이었다. 피로 물든 강산. 결국 불쌍한 백성들만 죽어날 판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결코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강증산은 ‘세상을 바꾸려면 땅과 하늘의 질서를 송두리째 뜯어고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후천개벽의 세상을 꿈꿨다. 여자들이 하늘같이 받들어지는 세상, 버림받고 천대받던 모든 생명이 하늘같이 대접받는 세상, 벌레 한 마리 풀잎 하나 삼라만상 모든 생명들이 서로서로 위하는 세상(相生), 바로 그런 후천개벽 세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봉건 반외세의 무장혁명을 꿈꿨던 전봉준. 우주 삼라만상의 후천개벽을 꿈꿨던 강증산. 강증산은 동학군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겨울에 쫓겨서 죽을 것이다”라며 빨리 빠져나오라고 설득했다. 동학군 지휘부에는 “무고한 백성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뜨리지 말라”고 외쳤다. 어찌 보면 강증산은 갑오농민전쟁의 훼방꾼이었다. 강증산의 제자 중에는 실제 우금치 전투에서 빠져나온 이도 있고, 가다가 도중에 강증산의 설득으로 그만 둔 이도 있다.

전봉준은 1895년 마흔의 나이로 그 핏빛 인생을 마감했다. 전봉준은 교수형에 앞서 마지막 시 한수를 읊었다.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가니 영웅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구나/ 백성 사랑하고 의를 세움에 나 잘못은 없었노라/ 나라 위하는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

강증산도 1909년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그가 평소에 늘 말한 대로 ‘질병으로 신음하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을 위해 이 세상의 병마를 몽땅 짊어지고’ 미륵의 세상으로 갔다. 그의 몸은 알 수 없는 수많은 병으로 진물이 나고 악취가 진동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태연자약했다. 그는 전봉준이 죽은 뒤 3년 동안(1897~1899) 조선 천지를 떠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눈으로 보고 확인했다. 그리고 서른(1901)에 모악산 대원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후천개벽의 세상에 대해서 역설했다. 전봉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전봉준은 진실로 만고의 명장이다. 백의한사(白衣寒士)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다. 세상 사람들이 전봉준의 힘을 많이 입었나니 감히 그의 이름을 해하지 말라”

전주 용머리고개는 전봉준이나 강증산의 발길이 많이 닿았던 곳이다. 전봉준은 1894년 4월 전주성을 점령할 때 용머리고개에서 일자진(일렬종대의 진법)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했다. 감사 김문현 등은 이미 서문 밖 수천채 민가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놓고 도망친 뒤였다. 농민군들이 민가의 지붕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올까 봐 아예 태워버린 것이다.

강증산은 용머리고개 주막에서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용머리고개에 사는 신도들의 집에 서 천지공사(증산교의 굿 의식)를 자주 행하기도 했다. 1907년엔 용머리고개 주막에서 “장차 서양 기운이 조선에 들어오리라, 조선 강토가 서양으로 둥둥 떠 넘어 가는 구나”라고 한탄하기도 하고 “이 고개를 몇 사람이나 넘을 수 있으리오. 서북은 살아날 사람이 없고 동남은 살아날 사람이 많으리라”며 6.25전쟁을 암시하기도 했다. 요즘 용머리고개 밖 삼천동에 막걸리 촌이 번성하는 것도 재미있다.

녹두로 살래? 숙주로 살래? 최두석 시인은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고 물어온다. 녹두는 씨앗이고 꽃이다. 숙주는 나물이다. 어떻게 살래? 녹두장군이 ‘붉은 꽃’이라면 강증산은 ‘붉은 씨알’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그저 나물같이 한 세상 살다 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