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자광이 축성한 남원산성 명나라 도독과 호남의 백성이 유일하게 안전하다고 믿었던 최고의 성
만명의 군사가 전사 '만인의총'에 뭍혔다
진주유씨 유자광이 개성(행주)의 성곽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유자광을 기록하는 국사학자는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읽어보았는가 의심이 난다
여종의 아들로 두번의 국난을 평정하고 국악의 지침서 악학괘법을 만든자를 모든 국민에게
간신으로 매도한 나팔수라는 생각이 든다
임진난 격전의 행주신성 남원산성 진주산성은 유자광이 '성쌓는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축성하여 이곳 3대 육전지로 명나라장군 까지 왜병의 우세에 몰려들어갔다
국방에 전혀 전투실적이 없는 이율곡과 그 친구 송익필(송구봉)이 한민족의 국방의 신격으로
교육시키는 현실이다
민족주의 세조임금을 해치려는 남이역모, 김일손의 사초 사건도 유자광이 막았을 충성이다
단 명나라 충성파 세력이 지금까지 국사교육을 유자광죽이기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역사에 유자광 만치 밥 숫가락을 던지고 전쟁터로 달려간 기록이 있는가
왜 이런 기록은 고의로 감추고 명나라 충성을 사모하는 시대로 남아 있다
영국 왕세자의 해리 왕자의 죽음의 전쟁터 자원에 말리지 않는 왕족의 자세가 광채가 난다 병역미필자 만신창이 대통령후보 및 고위층과 지도층 정치인 병역기피 만능의 한국이 부끄럽다 이런 해리왕자 같은 애국자는 한국인으로 비교하자면 두 번의 반란을 달려가 참전하고 평정한 일등공신 유자광을 들 수가 있다 찰스 왕세자의 둘째 아들인 해리 왕자는 보통의 군인과 마찬가지로 군복무에 임하겠다는 것이 자신의 뜻임을 강조해왔지만 해리 왕자의 군경력은 영국군 수뇌부를 곤경에 처하게 하고 있다고 영국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이에 따라 군 수뇌부은 해리 왕자가 이라크 최전선 지역인 남부 마이산 영국군 주둔지에 근무하는 것을 허용한 자신들의 결정을 재고하고 있다고 타블로이드 신문 "선"은 전했다고 한다. 모병제 나라인 영국에서 국민은 국방 의무를 지고 있지 않지만, 왕실 남자들은 왕실이 모범을 보인다는 전통에 따라 관행처럼 군 복무를 자원한다고 합니다.
오늘 전쟁이 터지면 유자광처럼 전쟁에 숫가락을 던지고 이처럼 뛰어들 자가 몇이나 될까
특히 조선시대 역사에 누가있었던가 이제는 병역을 마처도 취업 특혜도 없어지고 서민으로 유자광처럼 반란을 평정한자가 민족최고의 악질 간신 이미지로 조작하고 승리자 사림파들이 애국자로 둔갑하고 그 후손이 영화를 누리고 있는 느낌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 이처럼 민족최고의 간신으로 부각된 유자광의 진실을 조선실록의 기록에서 읽어보자 중동 6일전쟁시 이스라엘의 용사처럼 조국으로 달려가서 참전하는 기백의 내용과 견주는 우리역사는 유자광의 사실기록이 있어서 공개한다
세조임금 13년 6월 14일 이시애의 함경도반난 평정에 관한 갑사 갑사(甲士) 유자광(柳子光)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하번(下番)하여 남원(南原)에 있으면서 이시애(李施愛)의 일을 늦게 듣고서는 바야흐로 식사하다가 비저(匕箸숫가락) 를 버리고 계속 군현(郡縣)을 독려하여, 신(臣)이 징병(徵兵)하는 문권(文卷) 속에 이름이 기록된 것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본디 궁검(弓?)으로써 자허(自許)하였으니, 용약(?躍)하라는 것을 듣고 말[馬]을 의지하여 행군을 기다려 여러 날 차례를 기다렸는데, 군현(郡縣)에서 행군을 독촉하여 날짜를 정하였다는 지령이 있지 않았습니다. 신은 이에 밤새도록 자지 못하고 분연(奮然)히 그윽이 이르기를, ‘국가가 비록 사방(四方)을 계엄(戒嚴)하여서 병졸(兵卒)을 정제(整齊)하더라도 어찌 사방의 병사를 다 징발한 연후에야 일개 이시애(李施愛)를 토평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갑사(甲士)에 적명(籍名)되어 항상 변야(邊野)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으려고 하였는데, 하물며 국가에 심복(心腹)하는 적(賊)을 당하여 신이 어찌 마음으로 축대(逐隊) 수행(隨行)하여 징병(徵兵)의 수에 열차(列次)하고 원방(遠方)에서 안처(安處)하여 자고 먹는 데 좋게 여기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이달 초6일에 남원(南原)으로부터 발정(發程)하여 하루에 갑절의 길을 걸어서 도로(道路)를 갔는데, 사람에게 전문(傳聞)하니, 모두 이르기를,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는 아직도 굴혈(窟穴)을 지키고, 적은 죄 없는 이를 죽이어 함길도(咸吉道) 한 도가 소요(騷擾)하게 되었다.’고 하니, 어찌 일개의 적(賊)을 즉시 나아가 죽이지 못하고 전하의 치평(治平)에 누(累)를 끼치며, 묘당(廟堂)의 도의(圖議)를 수고롭게 하십니까? 살피지 못하거니와 전하께서는 벌써 장사(將士)로 하여금 1운(運)·2운(運), 심지어는 3운·4운에 이르도록 병사를 나누어 들여보냈다 하는데, 그렇다면 어찌 이제까지는 한 장사(將士)도 이시애(李施愛)의 머리를 참(斬)하여서 서울에 바치는 이가 없습니까? 만약 즉시 토평(討平)하지 못하면 이시애로 하여금 극진한 흉악(兇惡)을 방자(放恣)하게 하고, 날을 허비하여 주륙(誅戮)을 머물면, 함길도 수십 주(州)의 죄없는 백성이 진실로 가련(可憐)하게 되며, 또 만약 이시애가 악독함을 극진히 하여 죄가 다하면 이르는 곳의 주·부(州府)를 불사르고, 이르는 곳의 병기(兵器)를 싣고, 이르는 곳의 사졸(士卒)을 겁탈(劫奪)하여, 하루아침에 북적(北狄)에 도망하여 들어간다면, 다른 날에 변경의 근심을 당할 수 없는 자가 있을 것이니, 전하는 어찌 근심하지 않으십니까? 신이 망령되이 이르거니와, 이제 장수가 된 자는 바로 부귀(富貴)를 극진하지 않음이 없는데, 죽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여 두류(逗?) 하고 진격하지 않으며, 하는 것 없이 지구(持久)하고, 서로 이르기를, ‘이제 하월(夏月)을 당하여 궁력(弓力)이 해이하기 쉽고, 빗물이 바야흐로 막히고, 산천이 험조(險阻)하며, 초목이 무성하니, 경솔하게 진격할 수 없으며, 또 경솔하게 싸울 수도 없다.’고 합니다. 달리는 알지 못합니다마는, 우리만 홀로 여름을 당하고 저는 홀로 당하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궁력(弓力)이 해이하여지고 저는 홀로 해이하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빗물에 막히고 저는 홀로 막히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산천이 험하고 저는 홀로 험하지 않겠습니까? 비유하건대 두 쥐가 굴속에서 함께 다투면 힘이 있는 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급하게 장사(將士)로 하여금 날을 정하여
전쟁하여서 재화가 깊지 않은 때를 막지 않으십니까? 손무(孫武)는 말하기를, ‘병법은 졸속(拙速)함은 들었어도 공교하게 오해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대저 옛 사람의 용병(用兵)하는 것은 모두 인의(仁義)로서 몸[體]을 삼고, 권술(權術)로써 용(用)을 삼으며, 더욱 귀중하게 여기는 자는 신속(神速)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제 장사(將士)가 두류(逗?)하고 진격하지 않는 것은, 신은 그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람으로써 말을 폐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미천하다 하여 폐하지 마소서. 신은 비록 미천(微賤)하더라도 또한 한 모퉁이에 서서 스스로 싸움을 하여 쾌(快)하게 이시애(李施愛)의 머리를 참(斬)하여 바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글을 보고 경탄(驚嘆)하며,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그 글을 읽게 하고, 이어서 세조임금이 전교하기를,
“이 유자광의 글은 내 뜻에 매우 합당한 진실로 기특한 재목이다. 내 장차 임용(任用)하여서, 그 옳은 것을 시행하리라.” 하고, 명하여 밥을 먹이게 하였다. 남원에사서 숫가락을 놓은 것을 여기서 밥을 먹게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은 전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서자(庶子)이니, 효용하고 민첩하여 기사(騎射)를 잘하고, 서사(書史)를 알며, 문장을 잘 하였고, 일찍이 큰소리를 하여 기개(氣槪)를 숭상하였다

민족최고의 음악책 악학괘범은 유자광이 어렵게 만들고 유자광을 죽이라는 친명파 주자학파 성현을 오히려 이조판서로 영전시키고 아악부분 자료를 담당한 악학괘범 서문의 유자광이름
서로 죽이는 조선시대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말씀을 실천한 유일한 조선인 유자광이였다
최근 인터넷 설문조사에서 민족사최고 1위의 간신으로 유자광이 조사되었다니 한심한 역사교육의 태만한 현실로 본다
조선실록에 법원의 재판처럼 국문, 추문의 기록이 상세하다 최용범 (역사연구가 )새로운 조사평가 기사에도 다음같이 기록하였다
".....그러나 1등 공신에 책봉된 유자광의 득세에 그와 대척관계에 있던 사림세력은 불만이 컸다. 반정이 있은 지 1년도 안 돼 유자광을 죄주라는 주장이 비등했다. 공신세력은 그를 비호했지만 여론 앞에 어쩔 수 없었다. 유자광은 귀양에 처해졌고, 귀양 5년 만에 죽음을 맞았다. 천출이란 한계를 딛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 세조부터 중종까지의 다섯 임금 밑에서 유자광은 영화라면 영화를 누렸다. 물론 유자광이 남이 고변사건이나 연산군대의 무오사화 등 그를 간신배로 인식하게 했던 결정적인 사건에서 절대 악인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대를 부침했던 많은 인물들과 비교해봐도 유자광만이 절대 악인은 아니었다. 권력을 쥐기 위한 지배세력 내 투쟁은 어느 때나 있기 마련이다. 다만 유자광에겐 어떤 정치적 원칙이나 비전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출세욕을 가진 자는 어느 시대나 있기 마련이고, 그들 중 상당수는 권력의 맛을 보기도 했다. 유자광이 과에 비해 지나치게 간신이자 악인으로 낙인찍혔던 것은 그의 정적이었던 사림세력이 조선이 망하는 날까지 권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는 승리한 자가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분 최용범은 조선실록을 읽어보았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 생각된다
명나라 식민지 맹종사업이 세조 성종 연산군 시대 유자광 세력의 버팀목을 중종반정으로
중종실록은 유자광과 그뿌리 세력 죽이기 실록이였다
박영문 조광조 안당 안처겸 이정숙의 역모죄로 무고하여 죽인 안당의 종 송사련과 정여립의 이순신같은 왜군 격퇴 전공에 송사련의 아들 송익필이 대를이어 무고하여 죽이고 영화를 누리고
역사를 고치려고 '송구봉'으로 변성명하여 이순신의 임진왜란 전투까지 '송구봉'이 가르친 것으로 조작했다
이런 내용은 어느종교에서는 성경 구절로 사용까지 하고 있다
그간 대선후보나 국회의원, 지방의원 고급정치인청문회에서 병역기피 문제로 지적이 많았다 인기인, 부유층, 권력층의 병역면제 병역기피 기사가 풍성한 이시기에 병역특혜 마저 희박한이시기에 누가 유자광처럼 또 다시 6.25전쟁이 다시 온다면 누가 전선에 뛰어들까
유자광을 한국최고의 악인으로 가르친 역사가 들이여 조선'성종실록' '예종실록'을 읽어보셨나요
가짜 조선실록 '수정 선조실록'이라는 실록도 있다 '선조실록'과 다른것은 무슨 이유일까
유자광 만한 구국자가 세종 이순신 다음으로 몇이나 되는가
예수님의 말대로 당신은 유자광에게 돌을 던질만치 의무입대가 아닌 지원입대라도 하셨나요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위험이 있는 분단한국 특히 피아간에 양민학살, 전쟁, 방화, 비행기 폭격이 가장 많은 불바다전투 현장을 보았다 너무나 참혹하여 자세한 내용의 글을 생략한다 군인만의 천국시대 5.16 -12.12 군사독재시대에도 정읍시 산내면 매죽마을에서는 1950년겨을에 전사한 190명 학도병묘지는 방치되어 그 시대 치안대원 허병욱 씨의 투쟁으로 겨우 지탱하다가 이제야 국군묘지로 모셔진다 6.25 기념일에 맞이하여 끔직한 피비린내 학살, 불바다 ,주야전투 59년이 지났다 세계 11위 경제부국 오늘날 한국행복도 유자광처럼 국난에 달려나간 구국용사가 있어서 존재했다 라고 생각하는 정치가가 몇이나 될지 하나도 없을지 마음이 어둡기 만하다

유자광 마을의 유자광 하마석은 자연석 바위로 이처럼 소박하게 사용했다
당대 최고세력 유자광의 생활이 보인다
유자광의 기록은 수사 경찰관의 생각으로 살펴보자
병역 기피자가 득세하고 헤택도 없는 시기에 전쟁에 달려간 유자광을 초고의 추악한 인물로
가르치는 국사학자의 태만에 애국의 기준이 없어질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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