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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5>

도심안 2009. 7. 7. 21:54

◆ 익산 왕궁터는 신라 왕궁으로 밝혀졌다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5>
익산의 제석궁은 신라의 진평왕이 창건했다.
전라북도 김제시의 벽골제(碧骨堤)와 모산성(母山城:아영성),남원(南原)은 백제 영토가 아니고, 이미 신라 영토로 밝혀졌습니다.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제석궁, 황룡사9층 목탑, 대궁(大宮) 기와가 신라 왕궁터로 명백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황룡사 9층탑 건립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2월, 왕이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그 터에서 황용이 나타났다. 진흥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궁궐을 고쳐 절을 짓고, 황룡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진흥왕 30년(569) 사찰건물배치를 완료하고, 선덕여왕 14년(645) 9층 목탑을 완성하여 삼국통일로 승화된 신라 호국불토(護國佛土)의 불국사(佛國寺)를 세웠던 유적지라 사료된다.

신라의 “ 황룡사 9층탑”[삼국유사]

 신라 제 27대 선덕왕 제위 5년 병신(636년)에 慈藏法師(자장법사)가 서역국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중국으로 유학하여 五臺山(오대산)에서 文殊菩薩(문수보살)이 감응하여 佛法(불법)을 전수 받았다. 문수보살이 또 이르기를 너희 나라의 국왕은 天竺國(천축국)의 刹利種王(찰리종왕)은 이미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기 때문에 별다른 인연이 있으므로 東夷(동이)는 共工族(공공족)과는 같지 않느니라.

그리고 산천이 험준한 탓에 사람들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邪惡(사악)한 종교를 많이 믿고 있기 때문에 간혹 天神(천신)이 때때로 재앙을 내리고 있으나 多聞比丘(다문비구)가 신라국 안에 있기 때문에 君臣(군신)이 편안하고 만 백성들이 화평한 것이다. 라고 말을 마치자 이내 몸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자장법사는 이것이 大聖(대성:석가모니)의 변화인줄 알고 울면서 물러났다.

자장법사가 大和池(대화지)라는 연못가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神人(신인) 胡(호)승이 나와서 묻기를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셨는가? 자장법사가 대답하기를 菩提(보리)를 구하려고 왔습니다. 神人(신인)은 예배하더니 또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습니까?

자장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북쪽에 말갈과 연접하고 남쪽은 왜인과 인접하고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나라 도적들의 횡포가 자주 일어나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이것이 큰 걱정입니다. 신인이 말씀하시기를 지금 그대의 나라에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고 있으니 속히 본국으로 귀국하시오 자장이 묻기를 본국으로 귀향하면 장차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습니까?

신인이 말하기를 황룡사의 護法龍(호법용)은 바로 나의 큰 아들이요 梵王(범왕)의 명을 받아 황룡사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귀국하면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할 것이며 九韓(9한)이 와서 조공을 할 것이며 신라 왕조는 영원히 편안할 것입니다. 탑을 건립한 이후는 八關會(팔관회)를 설치하여 법회를 열고 죄인들을 赦免(사면)하면 外賊(외적)들은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나를 위하여 京畿(경기) 남쪽 海岸(해안)에 寺院(사원:절) 한 채를 지어서 함께 내 복을 빌어주면 나 또한 그 은덕에 보답 할 것이오. 라고 말씀을 마치고 구슬로 만든 玉(옥)을 주면서 갑자기 형체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寺中記(사중기)에서 이르기를 마지막에 南山(남산)의 圓香禪師(원향선사)가 계신 곳에서 탑을 세운 사유를 들었다. 라고 하였다) 

 643년 16일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주신 불경과 불상과 부처님께서 입었던 가사(옷)과 幣帛(폐백)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 탑의 건립에 대한 사항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듣고 群臣(군신) 회의를 열었다. 群臣(군신)들이 말하기를 백제에서 工匠(공장)이를 초청한 후에 그 방향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초청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의 工匠(공장) 이름이 阿非知(아비지)라는 사람이 왕명을 받고 와서 木石(목석)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맡고 신라는 伊干(이간) 龍春(용춘 일명 龍樹(용수)가 공사를 맡아 이 역사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거느리고 일한 小匠(소장)은 200명이나 되었다.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백제의 工匠(공장)  阿非知(아비지)의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고 工匠(공장)이는 이내 마음속에서 의심이 일어나 공사일을 중지하였더니 갑자기 대지가 진동 치며  밤중과 같은 어둠 속에서 老僧(노승) 한사람과 젊은 장사 한사람이 金殿門(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老僧(노승)과 壯士(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나타나지 않았다. 백제의 工匠(공장)이는 공사를 멈춘 것을 후회하고 마음을 고쳐 그 탑을 완성시켰다.

刹柱記(찰주기)에서 이르기를 鐵盤(철반)위의 높이가 42尺(척)이고 철반 밑은 183尺(척)이였다. 慈藏(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아 가져온 舍利(사리) 100알을 황용사 탑 기둥 속에 넣고 아울러 通度寺(통도사) 계단과 또 大和寺(대화사) 탑에 나누어 넣어 두었다. 이것은 연못에 龍(용)의 청에 따른 것이다.

(大和寺(대화사)는 阿曲縣(하곡현) 남쪽에 있다. 지금의 蔚州(울주:현재 울산?)이며 역시 자장법사가 창건한 것이다) 황룡사에 탑을 세운 뒤에 천지가 개벽되어 삼한이 하나로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과 부처님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그 후에 고려왕이 장차 신라를 토벌할 모략을 세우고 말하기를 신라에는 3가지 보물이 있으므로 함부로 침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니 그 보물은 무엇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황룡사의 丈六尊像(장육존상)과 9층탑과 진흥왕 天賜玉帶(천사옥대)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고려왕은 침범할 계획을 그만 두었다. 周(주)나라에 九鼎(9정)이 있어 楚(초)나라 사람들은 감히 北窺(북침)을 할 수 없었다. 하였으니 아마 이와 같은 유형일 것이다. 또 해동의 名賢(명현) 安弘(안홍)이 지은 東都成立記(동도성립기)에서 이르기를 신라 27대 선덕 여왕은 비록 임금의 위엄은 없어도 도리는 있었기 때문에 九韓(9한)의 침범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만약에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건립하면 곧 이웃나라의 침범과 재앙을 진압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층은 日本(일본), 제 2층은 中華(중화), 제 3층은 吳越(오월), 제 4층은 托羅(탁라), 제 5층은 鷹遊(응유), 제 6층은 靺鞨(말갈), 제 7층은 丹國(단국:거란), 제 8층은 女狄(여적:여진), 제 9층은 穢貊(예맥)을 진압시킬 것이라 하였다.

또한 國史(국사) 및 寺中古記(사중고기)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 계유(553년) 황룡사를 처음 창건한 후에 선덕왕 시대인 645년에 처음 탑을 이루고 제 32대 孝昭王(효소왕)이 즉위한 7년 聖曆(성역) 원년 무술(698년) 6월에 절에 벼락이 떨어졌다. (寺中古記(사중고기)에서 이르기는 聖德王(성덕왕) 시대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성덕왕 시대는 戊戌(무술)년이 없기 때문이다) 제 33대 성덕왕 경신(720년)에 다시 이 절을 세웠으나 제 48대 경문왕 무자(868년)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시대에 세 번째로 절을 다시 세웠다.

고려 光宗(광종) 즉위 5년 계축(953년)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顯宗(현종) 13년 신유(1021년)에 네 번째로 절을 重修(중수)하였다. 또 靖宗(정종) 2년 을해(1035년)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고 또한 文宗(문종) 갑진(1064년)에 다섯 번째 重修(중수)하고 또한 憲(獻)宗(헌종) 말년 을해(1095년)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고 肅宗(숙종) 원년 병자(1096년)에 여섯 번째로 중수하고 또 高宗(고종) 16년 무술(1238년) 겨울에 몽고 병이 침입하여 西山(서산 : 선도산)에 병사 들이 불을 질러 황룡사 탑과 殿閣(전각)과 丈六尊像(장육존상)과 절집이 모두다 재앙을 입었다. 끝.

◉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 : (삼국유사)
[전라남도] 海南(해남)에 거대한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신라 제 24대 진흥왕이 즉위한 14년 계유(553년) 2월에 장차 용궁 남쪽에 紫宮殿(자궁전)을 지으려고 하자 황룡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궁궐을 개조하여 佛寺(불사:절)를 설치하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고 기축년(569년)에 이르러 둘레에 담장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전라남도] 海南(해남)에 거대한 배 한 척이 들어왔다. 河曲縣(하곡현)의 絲浦(사포:지금 蔚州(울주) 谷浦(곡포)에서 들어왔다. 이 배를 검사해 보았더니 公文(공문)이 들어 있었다.

그 공문에서 이르기를 서천축국의 아육왕(아소카왕)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 三尊像(3존상)을 鑄造(주조)하려고 하였으나 주물로 불상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하여 불상을 만들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부디 인연있는 국토에 도착하여 丈六尊像(장육존상)을 완성해 주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한 佛像(불상)과 두 菩薩像(보살상)의 모형도를 함께 실려 있었다.

(별전에는 철이 4만 7천근이고 金(금)이 1000냥이라 되어 있는데 잘못인 것 같다. 혹 3만 7천근이라 하였다.) 河曲縣(하곡현)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 상부에 보고하자 진흥왕이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하곡현의 城(성) 동쪽 爽塏(상개) 지역에 東竺寺(동축사)를 창건하여 三尊像(삼존상)을 안치해 두고 그 금과 鐵(철)은 京都(경도)에 수송하여 大建(대건) 6년 갑오(574년) 3월(寺中記(사중기는 癸巳(계사 10월 17일이라고 되 있음)에 장육존상의 鑄造(주조)는 쇠 물을 부어 한번에 만들었는데 그 중량이 3만 5천근과 황금이 1만 136푼이 들어갔다.

두 菩薩象(보살상)은 철이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어갔다. 이 장육존상을 황룡사에 안치하여 두었더니 그 이듬해에 佛像(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자나 젖어있었다. 이것은 대왕이 升遐(승하)하실 조짐이었다. 혹 佛像(불상)이 완성된 것은 진평왕 재임 시대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別本(별본)에서 이르기를 아육왕은 서천축 大香華國(대향화국)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100년 만에 출생 했다. 그는 부처님에게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다 금과 쇠를 몇 근씩을 모아 세 번이나 佛像(불상)을 鑄造(주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이때 왕의 태자가 홀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으니 태자가 아뢰기를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벌서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더니 그 배는 남염부제 16개의 大國(대국)과 500개의 中國(중국)과 十千(10천)의 小國(소국)과 8만 부락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모두다 쇠를 부어 불상을 만드는 鑄造術(주조술)이 부족하여 불상을 만들 수 없었으나 최후로 신라국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신라에서는 鑄造(주조) 기술력이 뛰어나 진흥왕이 文仍林(문잉림)에서 鑄造(주조)하여 佛像(불상)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완성시키니 아주 좋은 모양이 모두 다 갖추어졌다. 이로서 아육왕은 근심이 없어졌다. 후세에 대덕 慈藏(자장)이 西學(서학)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오대산에 도착하였는데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비결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하기를 너희 나라에 있는 황룡사는 “석가모니 부처와 가섭불”이 강연하신 곳이며, 그 지역에 아직 까지 가섭불의 宴坐石(연좌석)이 있다.

고대 천축국 無憂王(무우왕:아육왕;아소카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년이 지난 뒤에 너희 나라에 도착하여 불상을 주조로 완성하여 황룡사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대개 부처의 위신력과 부처와 인연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別記(별기)에 기록된 것은 符道(부도)와 같다)

황룡사에 佛像(불상)을 성공한 후에 東竺寺(동천사)의 三尊佛(삼존불)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 안치하였다. 寺記(사기)에서 이르기를 진평왕 5(6)년 갑진(584년)에 金堂(금당:대웅전)을 만들었고 선덕왕 시대에  이 절에 초대 주지는 眞骨(진골) 歡喜師(환희사)이고 제 2대 주지는 慈藏國統(자장국통)이고 그 다음은 國統惠訓(국통혜훈)이고 그 다음은 廂律師(상률사)가 주지가 되었다. 지금은 兵火(병화:고려 고종때 몽고병이 침략하여 불에 탄 이래로 大佛像(대불상)과 두 菩薩像(보살상)은 모두 다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여래상만 아직까지 남아있을 뿐이다. 본문 끝.

        ➤ 익산의 제석궁은 신라 진평왕이 창건했다.

◈ 天賜玉帶(천사옥대) : (삼국유사1권-1기이) 신라의 제 26대 白淨王(백정왕)의 諡號(시호)가 眞平(진평)이다. 진평대왕의 성은 김씨이고 大建(대건)11년) 己亥(기해:579년) 8월에 즉위했다. 진평대왕은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駕幸內帝釋宮(亦名天柱寺,王之所創)踏石梯,二石竝折,
王謂左右曰不動此石, 以示後來,卽城中不動石之一也 

 어느 날 신라 진평대왕은 몸소 제석사 사찰공사 진척을 살펴보기 위해 수레를 타고 [전북 익산]의 帝釋宮(제석궁,天柱寺)에 행차하시자 사닥다리처럼 나란이 세워져 있던 큰 돌 바위(당간지주)가 뿌러져 있었다. 대왕이 좌우재상들에게 말하기를 이 돌은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엇 다가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라 즉 이 돌은 城(성)에서 옮겨서는 아니 되는 5개 돌(당간지주) 중에 하나였다. [제석궁을 또한 이름을 天柱寺(천주사)라고도 하는데 진평대왕이 창건했다]

진평대왕 즉위 원년 기해(579년) 8월 하늘의 천사가 궁전 정원에 내려와 대왕에게 말하기를 하늘나라 옥황상제님의 명을 받아 내가 하사하는 玉帶(옥대)이니 잘 전하도록 하시요 라고 말씀을 하니 왕은 친히 꿇어앉아 이 옥대를 받았다. 그러고 난 후에 그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왕은 교외에 나들이 할 때나 종묘에 큰 제사가 있을 때는 항상 띠고 다녔다.[후략]

➤ 사닥다리처럼 나란이 세워진 당간지주

익산의 미륵사(彌勒寺)터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m의 간격을 두고 서 있다. 지주를 받치는 기단부는 완전히 파괴되어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며, 약간만이 드러나서 그 원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특별한 장식 없이 마주보고 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이 곳의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경북 영풍군의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 문화재청이 발표 했습니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대궁(大宮) 기와가 신라 왕궁터로 입증했다

최근 발굴 중인 왕궁리유적의 지정면적 약 8만 3000m2와. 인접한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제석정사(帝釋精舍)가 세워졌던 자리로 추정되는 절터에서 목탑의 주춧돌이 발굴되었으며, ➤ 제석사(帝釋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특히 왕궁평성 안에 오층석탑의 주변으로는 四口石유구(궁궐담장)와 그 안의 관궁사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 관궁사(官宮寺)·대궁사(大宮寺) 등의 절터와 대궁(大宮)터가 남아 있다. 고 문화재청이 발표 했습니다.

신라 진평왕은 623년 정월 왕이 몸소 황룡사에 거둥했다. 2월 이찬 용수(龍樹)를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았다. 진평왕 7년(585년) 대수촌의 ➤ 대궁(大宮), 양주의 ➤ 양궁(梁宮), 모량리의 ➤ 사량궁(沙梁宮) 세 관궁에 각 사신(私臣)을 두었는데, 이때 이르러 내성사신 김용춘 한 사람이 세 궁궐(宮)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도록 하였다.의 삼국사기 본문이 신라왕궁터로 명확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신라 황룡사는 진흥왕 재위 27년(566년) 봄 2월에 황룡사가 준공되었다. 신라 진평왕 재위 31년(610년) 정월 모지악(毛只嶽:지모밀지(枳慕蜜地:전북 익산) 아래의 땅이 불에 탔다. 그 넓이가 네 보(步)이고 길이가 여덟 보였으며 깊이가 다섯 자였는데, 10월 15일에 이르러 불이 꺼졌다. 이때 제석사(帝釋寺)가 불에 탔다.

신라의 익산 왕궁터는 무려 10개월 동안 불에 탔다면 신라의 불국사(佛國寺)와 왕궁이 그 얼마나 웅대했는지 후세의 우리는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상기의 본문이 전라북도 익산 금마는 백제의 왕궁리유적이 아니라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신라 호국불토(護國佛土)의 황룡사(黃龍寺), 왕궁 유적지로 입증되었다.

황룡사는 그 넓이가 네 보(步)이고 길이가 여덟 보였으며 깊이가 다섯 자였는데, 610년 10월 15일에 이르러 불이 꺼졌다. [왕궁터는 신라의 호국불토이기 때문에 백제에서 고의적으로 불을 질렀을 가능성은 배제 할 수 없다.]

▲   해체전 미륵사(신라 제석사) 9층탑   © 박병역 칼럼니스트


          백제의 미륵사(彌勒寺)가 아니고

      신라의 제석정사(帝釋亭舍)로 밝혀졌다. 

 백제 무왕은 도대체 신라황룡사 1층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일본의 침략을 진압할 수 있단 말인가? 백제 무왕은 신라 황룡사 1층탑 속이 매우 궁금하여 신라의 제석사(황룡사) 9층 탑 속의 가운데 주춧돌을 들추어 내고 열어보았다.

익산 金馬(금마)의 고대지명은 金馬渚(금마저),지모(枳慕),한지(漢只),모지(毛只) 등이다. 백제 무왕은 신라 제2왕궁이 소재한 지모(枳慕),금마(金馬)에 천도하여 [신라 제석정사(帝釋亭舍)를 운영하면서 신라제석사 9층 탑 속의 가운데 주춧돌을 [들추어 열어보고] 백제왕후의 금제사리봉안기를 639년 11월에 넣어두었다는 내용이다. 최근 지모밀지(枳慕蜜地)의 발견으로 전북 익산 금마는 백제의 미륵사로 지금까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미륵사는 신라의 제석정사로 밝혀졌습니다.

지모밀지(枳慕蜜地)의 문건이 1970년. 일본 교토대 마키타 다이료 교수가 10세기쯤에 편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와 1965년, 부여문화재연구소가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 수리 때 발견된 사리함과 꼭 같았다. [2006년 09월 26일 일본 마키타 타이료(牧田諦亮) 전 교토대 교수의‘지모밀지(枳慕蜜地) 원문은 아래와 같다.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기록된 미륵사
百濟 武廣王 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歲次己亥 冬十一月 天大雷雨遂災 帝釋精舍 佛堂七級浮圖 乃至廊房 一皆消盡 塔下礎石中 有種種七寶 亦有佛舍利 ?水精甁 又璘作紙 寫金剛波若經 貯以木漆函 發礎石開視 悉皆消盡 唯佛舍利甁與波若經漆函與故 水精甁內外徹見 盖亦不動而舍利悉無 不知所出 六個悉見於是大王及 諸宮人倍加敬信發卽供養 更造寺貯焉. 

 백제 무왕은 지모밀지(枳慕蜜地)에 천도(遷都)하여 [신라 제석]정사(精舍)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639년 11월] 하늘에 큰 비와 벼락이 처서 제석정사의 불당과 부도 7개와 회랑방이 불에 다 타버렸다. 9층탑 속의 가운데 주춧돌을 [들추고 열어보니] 여러 종류의 칠보(七寶)와 또한 부처님 사리가 든 수정병과 구리로 만든 종이 금강반야경을 베껴 옻칠한 나무함이 들어 있었다.

[백제 무왕이] 주춧돌을 들추고 열어보니 모두 남김없이 타버렸으나. 오직 부처님 사리가 든 병과 반야경 옻칠함과 수정병 안팎을 살펴보니 모두 움직이지 않았는데 사리만 다 없어졌다. 가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리) 6개가 들어 있었다. 이를 보고 대왕과 여러 사람과 궁궐 사람들은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 갑절로 받들어 발원하고 공양을 올리고 [639년 11월] 다시 [백제왕후 사리봉안기를] 담아 두었다. 끝.

              [1], 백제 무왕이 본래 신라 사리봉안기를 

                             백제왕후 사리봉안기로 바꾸어 넣었다.

신라 진평왕 재위 31년(610년) 정월에 천둥번개로 제석정사에 불이나 10월 15일 불이 꺼졌다. [지모밀지]는 기해년(639년) 11월에 천둥 번개로 제석사가 불에 탔다고 했으나 639년 11월은 불에 탄 날자가 아니고, 백제왕후의 사리봉안기를 넣은 날자이다. 백제 무왕이 지모(枳慕:금마)에 천도(遷都)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기 [관세음응험기]의 본문 중 ➤ [주춧돌을 들추고 열어보니]라고 돼있습니다. 즉 백제 무왕이 제석사를 창건한 것이 아니라 신라 제석사 9층목탑 속의 [주춧돌을 들추어 열어보니]의 뜻은 본래 신라에서 넣어 두었던 사리봉안기를 열고보니 입니다. 따라서 말미의 [갱조사저언(更造寺貯焉)을 해설하면 ➤ 백제 무왕은 불에 탄 신라 제석정사 1층 주춧돌을 들추고 본래 신라 사리봉안기를 읽어보고 난후 백제왕후 금제사리봉안기와 바꾸어 639년 11월에 다시 담아 두었다. 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황룡사 9층 목탑 제 1층은 日本(일본)의 침범을 진압 할 수 있는 설을 백제 무왕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편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심지어 삼국사기마저 왜곡, 변조한 일본인들이 마치 백제 무왕이 전라북도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 했던 것처럼 변조 한 후에 후세 대한민국 사람들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도록 ➤ 일제식민지시대에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를 넣었을 가능성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의 본문과 같이 지금도 백제 무왕이 9층 목탑 속을 들추어 냈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호와 명문이 적힌 금제 사리봉안기,     © 박병역 칼럼니스트
   ◉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의 비밀이 밝혀졌다.

  [삼국유사 무왕(武王)]편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武康)이 없다) 백제 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扶餘璋(부여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신라 경도(금성)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璋)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며,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薯여]를 캐다가 파는 일을 생업(生業)으로 삼아 사람들이 이름을 서동이라고 불렀다.

 서동(薯童)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승려로 변장해 신라경도로 들어가서 마, 사과, 엿 등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먹이니 곧 아이들과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동요를 부르게 하였다. 그 동요의 가사는 이러하다. 

 善化公主主隱他 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 卯乙抱遺去如
선화공주주은야 밀지가랑치고서동방을야이 묘을포유거여

선화공주는 몰래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고
고도(古都) 밀지(密只)의 서동에게 시집갔다네...
몰래 서동(薯童) 방에 잠자고, 밤에는 알을 품고 돌아가네

서동(백제 무왕)의 동요(童謠)가 신라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해서 선화공주를 멀리 귀양 보내게 하였다. 선화공주는 장차 떠나려 하는 데 진평왕의 왕후(王后)는 순금(純金)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선화공주가 장차 귀양지(익산)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백제의 서동(무왕)이 나와 공주에게 공손히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선화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인연으로 믿고 좋아하니 서동을 따라가면서 공주는 비밀히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익산 금마로 와서 모후(母后)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요 이금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 

 "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 금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이에 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에 계시는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이 금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력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사자사(師子寺) 앞에 금을 갖다 놓았다.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자 신라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신라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서동)이 부인과 함께 [신라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밑 큰 못 가에 이르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무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부인의 말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상(像)을 만들고 전각(殿閣)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삼국사기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 했다. 신라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 분을 법왕(法王)의 아들 무왕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끝. 

          서동요는 백제 무왕의 장기적 계략으로 

                  신라와 백제를 통합하기 위해 만든 동요이다.

[삼국유사 무왕]편의 서동(薯童)은 일본인이 만든 가짜 설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록 일본인들이 만든 가짜 서동요 일찌라도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셋째 딸이 분명하고 백제 무왕의 부인이 틀림없다고 사료된다. 


  [1]. 薯童(서동)과 善花(선화)공주의 결혼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이름이 백정(白淨)이다. 아버지는 동륜(銅輪)이며 동륜태자(東輪太子)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딸인 만호(萬呼), 혹은  만녕부인(萬寧夫人)이며, 이름은 행의(行義)이다. 선비(先妃)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며 이름은 복힐구(福盻口)이다. 후비는 승만부인(僧滿夫人) 손씨이다. 기해년에 즉위했다.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천명, 선덕, 선화의 세 딸이 태어났다. 

 1, 첫째 천명(天明)은 김용수(김용춘:김춘추 아버지)의 부인이다.
2, 둘째 선덕(善德)은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27대 선덕여왕이다.
3, 셋째 선화((善花)는 백제 무왕의 부인이 되었다. 

 백제 제 27대 위덕왕의 증손 서동 (薯童)은 인물이 준수하고 풍모가 걸출하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는 인물이 예쁜 아가씨로 3국에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백제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계락을 세웠다. 백제와 신라는 개국초부터 서로 영토 점령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善花) 공주에게 비록 청혼을 하더라도 백제와 신라의 여러 신하들은 적국의 자손과 혼인을 적극 반대할 것이 분명하였다. 서동은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백제 왕궁에서 탈출하여 신라의 경도로 들어가서는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 변장해서 신라 지명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때마침 신라에서는 진평왕의 왕가족과 국가를 위해 [전라도 익산]의 제석정사(帝釋亭舍)에서 신라의 유명한 고승을 초청하여 백고좌(百高座) 법회를 베풀고 있었다. 익산의 내지성(奈祗城) 지모밀지(枳慕蜜地) 제석사(帝釋寺) 법회를 맞아 선화공주도 원효법사 등 고승들의 설법을 듣고 있던 중에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선화공주는 서동의 준수한 인물에 사랑스러운 사나이였으나 법회 중에 차마 말은 못하고, 생각만 갖고 있었다. 서동은 법연(法筵)을 기회삼아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선화공주와 만나 드디어 서동이 사랑을 고백하였다. 

 선화공주 역시 서동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버리고 못하고 있던 중에 서동을 만나자 두 사람의 사랑은 급속히 깊어져 서로 혼인 할 것을 굳게 맹세하고, 법회가 끝나자 선화공주는 경도 궁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서동은 신라 궁중 시녀에게 뇌물을 주어 밤마다 담장을 넘고 들어가 궁중에서 선화공주와 사통하였다 .비록 선화공주와 사통하여 서로 결혼을 굳게 약속했으나 두 사람의 혼인을 쉽지 않았다. 

 서동과 선화공주는 서로 의논한 끝에 차라리 두 사람이 사통한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진평왕도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허락하리라 생각하고 서동은 여러 가지 과일을 많이 사가지고 거리로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꾀어서 동요를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대신들은 혼인을 용납하지 못하고 귀양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귀양을 떠나는 선화공주 앞에 서동이 나타나 결국 혼인을 이루는 것이 소위 삼국유사의 서동요 이야기의 요지이다.

서동요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멘스가 아니고, 백제 무왕의 주도면밀한 장기적 계략을 세워 신라 진평왕의 사위가 되기 위한 모략이라 사료된다. 왜냐하면 진평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기 때문에 진평왕의 사위만 된다면 자연적으로 신라 왕위를 계승하여 평화적 통합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서동요라는 동요로 자신은 백제 왕손이 아니고, 보통 평민으로 가장하여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한 간교한 동요 가사로 이루어져있다. 서동의 어머니는 용과 감응하여 낳았기 때문에 자신은 보통사람이 아니고, 하루 밤 사이에 산처럼 쌓은 금을 진평왕 궁전에 이동시키는 신이한 사람으로 둔갑하여 진평왕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드디어 신라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원효법사에 의해 백제 무왕의 계략이 들통나고 말았다.

[2], 신라 진평왕은 서동의 계략에 속았다

 신라는 왕족에 관계없이 특별한 신통력이 있는 사람에게 왕위를 계승한 전통을 갖고 있었다. 백제 무왕은 인물이 준주하고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 어찌 원대한 포부가 없었겠는가?. 3국 역사상 공주가 왕위를 계승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무왕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어 신라 왕위를 계승한다면 자연적으로 신라와 백제가 평화적 통합을 이루고자 계략을 세웠던 것이다.

백제 무왕이 특별한 신통력을 갖고 있는 것 처럼 진평왕을 믿을 수 있게 계략을 음모했기 때문에 진평왕과 선화공주는 의심 없이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신라 진평왕과 선화공주는 서동이 백제 위덕왕의 증손자란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진평왕은 깜쪽 같이 속아서 600년 셋째 딸 선화공주와 혼인을 허락하고 서동(백제 무왕)에게 신라의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한편 혼인에 성공하여 신라 왕위를 계승한 백제무왕의 신상 내력을 잘 알고 있었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600년에 입국하였다., 또 이미 출가해서 스님이 된 둘째 딸 덕만(德曼:선덕여왕)을 입궁시켜 19년(서기 602년)에 왕태녀(王太女)로 삼고 맏사위 김용춘(김춘추 아버지)을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중용하고, 세 곳의 궁궐을 관장하여 철통같이 지키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무왕이 신라왕위에 올랐으나 계략이 발각된 결정적 사유라 사료된다. 

 또 한편 서동(무왕)의 신라왕위를 맏사위 김용춘과 김유신, 김춘추 등이 극구 반대했던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곧 신라의 대신들이 서동(무왕)의 음흉한 계략을 뒤늦게 깨달을 뿐 아니라 서동이 백제 왕자로 들통 났기 때문에 백제 서동(무왕)이 즉위 3년부터 대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게 된다. 이로 미루어 볼때 [삼국유사 무왕(武王)]편의 서동 설화는 마치 일연 스님이 저술 한것 처럼 일본인들이 거짓으로 만들어 삼국유사에 슬적 집어넣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삼국사기 백제 무왕편에 무왕이 김제에 천도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 백제 무왕은 김제에 천도한 기록이 없다

백제 제30대 무왕(武王:600~641 재위기간 41년)의 이름은 장(璋)이며 법왕(法王;재위599-600년)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인물이 준수하고 뜻과 기개가 걸출하였다. 602년 8월 무왕은 대군사를 출동하여 [전라북도 남원에 위치한] 신라의 아막성(阿莫城, 모산성(母山城)을 포위하였다. 위급에 처한 신라 진평왕은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성(小陀城), 외석성(畏石城), 천산성(泉山城), 옹잠성(甕岑城)의 네 성을 쌓고 우리 강토 가까이 쳐들어 왔다. 왕이 노하여 좌평 해수(解讐)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 네 성을 공격하자 신라 장군 건품(乾品)과 무은(武殷)이 무리를 거느리고 막아 싸웠다. 해수는 전투가 불리하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泉山) 서쪽의 큰 진펄 가운데로 퇴각하여 군사를 매복하여 놓고 기다렸다. 신라 무은이 갑옷으로 무장한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큰 황산펄에 이르자 백제의 매복한 군사들이 일어나 급히 공격하였다.

신라의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병사들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은의 아들 귀산(貴山)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받은 가르침은 ‘군사는 마땅히 싸움터에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어찌 감히 도망쳐 물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는가!” [귀산은]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小將) 추항(項)과 더불어 창을 휘두르며 온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나머지 신라 군사들이 이것을 보고 더욱 분발하니 백제 군사가 대패하였다. 해수는 겨우 죽음을 면하여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605년 2월 각산성(角山城)을 쌓았다. 8월에 신라가 동쪽 변경을 쳤다. 607년 5월에 고구려가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해 와서 함락하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석두성(石頭城)을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608년 10월에 신라의 가잠성(岑城)을 포위하여 성주(城主) 찬덕(讚德)을 죽이고 그 성을 함락하였다. 

 616년 10월, 달솔(2품) 백기(奇)에게 명하여 군사 8천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치게 하였다. 618년 신라 장군 변품(邊品) 등이 가잠성(岑城)을 공격해 와서 이를 회복하였는데 해론(奚論)이 전사하였다.  624년(무왕 25) 10월 신라 속함성(速含城), 앵잠성(櫻岑城), 기잠성(岐岑城), 봉잠성(烽岑城), 기현성(旗懸城), 용책성(冗柵城) 등 6성을 빼앗았다.

626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왕이 상주하는 왕재성(王在城)을 공격하여 성주 동소(東所)를 붙잡아 죽였다. 628년 2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가봉성(峯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630년 2월 사비(泗)의 궁궐을 수리하고 왕은 웅진성(熊津城)으로 거둥했다가 7월에 웅진으로부터 돌아왔다. 

  632년 정월, 맏아들 의자(義慈)를 태자로 봉했다. 7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마천성(馬川城)을 쳤으나 이익이 없었다.  633년 8월에 장수를 보내 신라의 서곡성(西谷城)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하였다. 634년 2월 왕흥사(충남 부여군 규암면)가 완성되었다. 3월에는 궁성 남쪽에 못을 파고 금강 물을 20여 리나 끌어 들였다. 또 연못 언덕 네 모퉁이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섬을 만들었는데 선인(仙人)과 불사약(不死藥)이 있다는 신라의 방장산(方丈山)과 비슷하였다. [중략]

636년 5월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 독산성(獨山城:주류성)을 습격하고자 우소가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안장을 풀고 사졸들을 쉬게 하였다. 신라 장군 알천(閼川)의 군사들이 엄습해 오자 백제 장군 우소(于召)는 변산반도 주류성 지맥석(持麥石) 위에 올라가 활을 당겨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져 사로잡혔다. 641년 3월 무왕이 죽었다. 끝. 상기의 백제 무왕은 김제에 천도한 기록이 없으나 지모밀지는 천도했다.고 돼있습니다.

전라도의 명산은 모두 다 신라 산으로 밝혀졌다.

1,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智異山)과
2, 전북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있는 천관산(723m),
3,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에 위치한 모악산(793.5m 아영산(阿英山),
4, 전북 고창군과 정읍시, 전남 장성군의 경계를 이룬 방장산(742.8m)과
5, 신라 6촌 중 대수촌의 광주 무등산(1187m)등은 다 신라산으로 밝혀졌다.
6, 특히 전라북도 변산반도의 부산(주류산)은 신라 천년 왕도로 밝혀졌습니다. 

땅이 육체라면 역사는 그 나라의 민족정신(얼,넋,혼)이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본인과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조국의 고대사를 말살하고, 전라도에서 건국된 신라를 경상도로 얽어 맞추었던 거짓 가짜 국사교과서에 무려 62년간 세뇌되고, 고착된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질적 병폐가 곧 왜독(倭毒)입니다.

대한민국 정통 고대사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삼국사기 문헌을 고증으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신라의 전라도 건국설]을 명확히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왜독에 중독된 대한민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참과 거짓의 역사를 판별하지 못하니 어찌 왜독에 얼빠진 민족이 아니고 무엇인가? 

 즉 기준(箕準) 왕이 건국했던 후3한(진한,마한,변한)은 현재 대한민국의 땅이다.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곧 진한(신라), 마한(고구려, 백제), 변한(가야)의 4국 모태국의 마한(제1~9대 212년) 역사를 말살하고,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마치 충청도 이남 지역에 3한이 건국되었던 것처럼 변조하므로서 대한민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큰 혼돈을 일으켜 [3국의 중국 대륙설]이 난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필자 박병역이도 한때 신라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 또한 신라, 백제, 가야의 3국은 한반도 속에 없었다. 등으로 그 어느 누구 보다 3국 대륙설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시는 민족사학자들 또한 이병도가 말살한 기준(箕準) 왕이 건국했던 후3한(진한,마한,변한) 역사를 올바로 납득하지 못하고, 신라, 백제, 가야의 중국 대륙설이 난무했던 것입니다.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말살한 기준(箕準)왕의 후3한(진한,마한,변한) 역사를 복원하고,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제1~5편]으로 [신라 전라도 건국설]을 명확히 입증하므로서 차후로는 신라, 백제, 가야의 3국 대륙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본 연재는]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 국사를 정통적 역사로 고수하고 있는 이병도의 망령(제자들)과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 개편을 적극 방해하는 일본 귀신들(정부 당국자)들의 망령을 깨끗이 치유하는 경문(經文)이 될 것이다. 대한국인은 읽으면 읽을 수록 잃어버린 민족혼을 일깨워 대한국인으로 새롭게 태어 날 것이며, 기필코 고질적 왜독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해독제가 될 것이다.
1945년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진실을 밝히는 본 블레이크뉴스의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제1~5편]은 일제가 말살하여 잃어버린 대한민족 혼을 되찾고, 이병도가 거짓 가짜로 왜곡한 신라 천년의 건국지를 올바로 정립했습니다. 드디어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밝혀진 [신라의 전라도 건국설]을 정부당국자도 수용하고 우리나라 정통국사 편찬의 지침서가 되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만약에 대한민국의 어떤 사람이 대한민국 역사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할 때 [신라의 전라도 건국설]을 제외한 역사서, 국사교과서는 우리나라 정통역사라 할 수 없음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아울러 국내최초의 독보적 [신라 전라도 건국설]은 필자 박병역의 동의 없이 역사서, 국사교과서 편찬을 불허(不許)함을 공지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명백한 고증으로 입증된 [신라 전라도 건국설]을 정북당국에서 확인 하고도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를 철폐하고, 올바른 국사로 개편하지 않는다면 필자 박병역은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것을 엄히 경고한다. 끝으로 장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탐독해 주신 애독자 여러분에게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제5편]을 끝으로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정신문화선양회
인류시조성전건립회
琇巖 朴炳譯(박병역)/올림



▲   황룡사 9층탑 모형도    © 박병역 칼럼니스트
※ 편집자주 : 외부 필자의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브레이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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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황세옥의 전통건축이야기
글쓴이 : 황세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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