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나라 이후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 명나라의 힘이 약해질 무렵, 만주의 여진족은 차차 힘을 키워 1616년에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세웠다. 그리고 명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성경(지금의 선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누르하치(태조)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태종(재위 1626∼1643년)은 만주뿐만 아니라 내몽고까지도 정복하고, 1636년에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고쳤다. 다음의 세조(순치제 : 재위 1643∼1661년)는 명나라 장군 오삼계 등의 힘을 빌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군대를 쳐부수고, 베이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남쪽 지역과 타이완에서는 청을 반대하는 세력이 남아 있어 중국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하였다.제4대 성조(강희제 : 재위 1661∼1722년) 때에 이르러 '삼번(三蕃)의 난'을 평정하고, 타이완에서 반항을 계속하던 정씨 일족도 굴복시켜 중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중국을 정복한 여진족들은 한인(漢人)들에게 자기들의 풍습인 변발과 만주복을 강요하여 한인들의 심한 반발을 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중국의 전통 문화를 존중하고 과거 제도를 실시하였다. 또 동일 관직에 만주인과 한인을 병용하는 만한 병용제를 실시하고, 조세를 가볍게 하여 민심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옛날 원나라(몽고족)가 중국을 통치하던 방법과는 다른 것으로 청나라가 한족을 300년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청나라는 통일을 완성시킨 강희제로부터 다음 옹정제를 거쳐 제6대 건륭제 시대까지의 약 130년간이 전성기였다. 강희제는 중국에 접근해 온 러시아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는 동시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진을 막았다. 또 몽고를 공격하여 외몽고 일대를 영토로 삼고 티베트도 청나라의 지배 아래 두었다. 옹정제 시대에는 티베트와 칭하이 지방을 청나라의 세력 밑에 넣고,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1727년)을 맺어 외몽고를 국경으로 정하였다.
건륭제는 이웃 민족들에 대해 적극적인 정복 정책을 써서 많은 속국을 만들었다. 곧 서쪽의 위구르를 정복하고, 다시 남장에 진출하여 안남(베트남)·미얀마·시암(타이) 등지를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청나라 영토는 몽고 제국 다음 가는 큰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 ·먀오족[苗族]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되어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등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기(八旗:軍隊)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和筌)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
<건륭제>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 아편전쟁), 프랑스 ·러시아 ·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 ·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 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 ‘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 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湘軍 ·淮軍)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화되고 후의 군벌(軍閥) 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 ‘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 ·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 ·유학생 ·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근대사는 청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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