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호 청년을 위한 한국기독인물열전①] 거리의 성자 방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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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할머니를 수남이 어머님 댁에 두고 목욕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식비를 담당하기로 했다.” “이 불쌍한 노인이 헛소리를 하면서 날뛰며 괴롭게 하니 수남이가 자기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나는 너무도 가엾어 하나님께 깊은 눈물로 기도하였다. 과연 그의 정신은 좀 깨끗하게 되었다. 아! 이는 나의 무거운 짐이로다. 그러나 주께서 맡으시니 나는 평안하다.”-<내가 존경하는 인물들>(엄두섭 지음, 은성출판사) <방애인 소전>의 저자 배은희 목사가 방애인과 함께 지내던 때였다. 밤 열한 시 경, 밖에는 눈보라 치고 거센 바람이 불던 겨울밤에 밖에서 “사모님, 사모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추운 밤중에 누구인가 나가보았더니 방애인이 온몸에 눈을 뒤집어 쓴 채 떨고 서 있는데 보니 등에 고아를 업고 있었다. “이 아이가 길가에서 추위에 떨고 있기에 업고 왔습니다.” 방안에 들어와서 그녀는 아이를 목욕시키고 머리를 깎고 새 옷을 입혀 고아원까지 업어다 주었다. 그 이후에도 고아들을 만나면 업고 왔는데, 그렇게 고아들의 수가 늘어나면 한 달에 몇 번씩 공중목욕탕에 갔다. 어린 아이는 업고 좀 큰 아이는 앞세우고 목욕탕에 가서 때를 씻어 주었다. 고아들의 어머니 같았다. 방양이 고아를 업고 가는 모습은 이후에 그림으로 그려져 보는 이들마다 감동시켰다. 방애인의 모교 호수돈여학교에는 방애인이 거지 아이를 업고 자기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 이 그림이 걸려있다. 호수돈에서는 그녀를 으레 ‘성녀 방애인’이라고 불렀고 그의 전기를 읽으며 후배들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방애인이 죽은 후에 그가 단벌옷으로 사는 검소한 삶을 살았음을 알았고, 호수돈 여학교에서는 그녀를 본받아 검소한 생활을 하는 여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주여!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의 능력과 사랑이 내 손을 통하여 이 괴로운 병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주시여, 자비와 긍휼을 아끼지 마시옵소서.” “이 간절한 기도는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씨를 깊이깊이 심었다. 그들의 손등에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그들의 썩어가는 살을 소생하게 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학교를 찾아 성자의 눈물을 구한다.”-<방애인 소전> 中 그리고 문둥병자들은 그런 방애인의 기도와 돌봄을 통해 육체와 영혼의 위로를 받았고 그녀를 따랐다. 그녀는 거리의 모든 이들에게 진정 ‘성자’였다. 가난한 이들에게든 병든 자들에게든. SCENE #3. 때 묻지 않은 신여성에서 거리의 성자로 ‘조선의 성자(聖者)’(배은희 목사의 표현)란 칭호를 받았던 방애인. 그는 1909년 9월 26일 황해도 황주군 황주읍 벽성리에서 방중일(方中日)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지고 있던 인물로 초기 황주읍교회 교인이었으며 모친 김중선도 교인이었다. 즉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출석하였고 그의 할아버지 방흥복(方興福)은 자선가로 인근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방애인은 이같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그 당시의 일반 조선여성보다는 좋은 조건 속에서 성장하였다. 7세 때 황주읍교회에서 설립한 양성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정명리(鄭明理)라고 하는 선각자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마펫(S.A.Moffett)이 재정적인 후원을 하였다. 방애인은 1921년 3월 이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한국교회 처음여성들>(이덕주 지음, 기독교문사) 당시 영재였던 방애인은 양성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의 숭의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여러 선생들에게 끝없는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으면서 지내던 중 1920년 당시의 사회의 반선교사 반기독교의 분위기와 맞물려 발생한 숭의여학교 학생 동맹휴학사건을 접하고 개성의 호수돈으로 학교를 옮긴다. 1923년 우등으로 호수돈을 졸업한 후 그녀는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당시 그녀는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신여성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삶 속에서 계속된 영적인 갈증을 느낀 그녀는 “언제나 주님의 지신 십자가를 맛보려고 심히 갈급(<방애인 소전>中)”한 마음으로 모교인 황주 양성학교로 돌아간다. 그 곳에서 그는 성서를 읽으며 묵상하던 중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1930년 1월 10일. 나는 처음으로 신의 음성을 듣다. ‘눈과 같이 깨끗하라.’ 아아!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다. 이런 영적인 체험이 그를 변화시켰고 그는 온전히 새로 태어났다. 최고급 의상에 화장을 한 신여성의 모습은 사라지고 검소하고 신령한 여인이 되어 전주에 돌아왔다. 전주 거리를 다니며 늘 전도하는 이었고, 거리에서는 가난한 이들과 병든 자들의 친구였다. SCENE #4. 조선의 테레사 2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다 나중에 그녀가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머니는 방문한 배은희 목사에게 “목사님, 보십시오. 딸이 옷이 하도 없어서 할머님이 입으시던 털로 안을 받친 갓옷 저고리 한 개와 햇솜을 넣은 바지 한 개를 보내 주었더니 한 번도 입어보지도 않고 다 남에게 주어 버렸어요. 죽은 후에 옷이라고 찾아보니 다 떨어져 입지 못할 것 몇 개 밖에는 없더이다”하며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동네에 사는 이 치고 방양의 옷을 얻어 입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고, 죽기 전 방학에 마지막으로 방문한 고향에서도 마치 사경회를 하듯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하고 여름 성경학교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테레사와 같은 삶을 산 그녀의 죽음은 온 전주 시민이 애도했고, 평소에 그녀가 돌보던 수십 명의 여자들과 고아들이 상여를 메고 묘지로 나갈 때에는 모두가 목을 놓아 통곡했다고 한다. 성녀 방애인의 삶이 널리 본이 되어 알려지지 않고, 그런 삶이 이어져 가고 있지 않는 현실에 필자도 당시의 여자들과 고아들의 무리에서 함께 통곡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이런 작은 예수의 삶을 산 선배가 있어서 자랑스럽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현대를 헤쳐 나갈 용기를 얻는다. 감사합니다. 방애인 선생님. 글· 박찬주 기자(joshua93@newsnjoy.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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