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박정희삼선개헌 김종필 밀어내기에서 "삼선개헌을 통과 시키고 즉시 그 공화당국회의원을 청와대에서 수고했다 라고말하면서 맥주를 하사했다 " 라는 증언 글을 신문과 잡지에서 본적이 있다
그리고 조선실록에서 중종의 유자광 죽이기 시대에 "중종 2년 4월 22일 술을 내리다 " 라는 자세한 기록이 있다
역사는 이 처럼 모방의 반복인듯하다
임금으로 만들어준 유자광을 사헌부 (중앙정보부)를 시켜서 상소를 올리게 지령을 내리거 그 토록 반대하는 연극을 벌이더니 세력가 반정공신 박원종마저 매수하여 유자광죽이기에 동함하는 날에 중종이 직접 하사주를 내리고 치하했다
너무나 비슷한 사건이다 박정희는 토사구팽의 역사 중종의 유자광죽이기를 모방했다
중종은 1957년 4월22일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있다
대간에 명하여 나와 일을 보게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
“유자광은 여러 대 조정의 원훈이니, 파직도 너무 과한데, 또 어찌 죄를 더하겠는가? 더구나 이미 노쇠하였으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난들 어찌 생각하지 않고서 그러겠는가? 근일 경들이 나의 부덕으로 이렇게까지 노고하니, 술을 하사한다.” |
하였다. |
중종 반정 1등 공신은 유자광 중심의 호남인맥 숙청
여기서 신윤무 박영문은 유자광이 등용시킨자이고 홍경주와 홍경림은 중종의 후궁인 희빈홍씨의 부친이고 형제들이다. 정읍 산내 대장금마을에서 단종폐위 시대 홍척, 홍연, 홍정, 홍휴, 홍계종, 홍효종 등은 단종의 정읍사람 충신들로서 홍경주, 홍경림은 중종후궁 희빈홍씨의 친척과 조부 ,부친이다.
유자광은 전라도에서는 유빈(柳濱) 등이 거사(擧事)할 것을 같이 모의하여 서울과 지방에 격문을 띄웠고, 경기도 김포에 무장단체를 비치하고 그리고 심복 김장곤을 미리 도피시켜 함경도에 비치해 두었다.
위의 기록을 보면 1등공신이 당연하다. 그러나 토사구팽(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의 절차가 다음과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토사구팽의 사례를 현대사에서 살펴보면 중국과 한국에서 팽덕회, 등소평, 김구, 조봉암 사태와 똑같다.
하지만 반정 성공 후 중종은 토사구팽 계획
중종 1년(1506년) 12월 3일 (정미) 유자광 등이 사헌부가 유자광의 서리를 잡아간 일로 왕에게 사직하니 불허하다. 무령 부원군 유자광·좌의정 박원종·우의정 유순정 등이 아뢰기를, “무릇 1품 아문(衙門)은 비록 하리(下吏)일지라도 사헌부에서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첩정(牒呈)) 으로 통지하는 것입니다. 지금 공신을 마련하는 것 때문에 국(局)을 설치했는데, 사헌부에서 나졸을 풀어 서리(書吏)를 잡아갔고, 박영문에게 또 공함(公緘)) 을 보내어 핵문하니, 이는 장차 신들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사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사직하지 말라.”하였다.
두 얼굴의 중종 태도가 보인다. 큰 세력을 숙청하는 절차로서 중종이 반정에 이용하고 "토사구팽"의 계교로 유자광의 반대세력인 김종직, 한명회의 추종자를 사헌부에 대거 투입시켜서 마구 잡아갔다.
중종 1년(1506년) 12월 3일 유자광과 함께 사직서를 낸 좌의정 박원종, 우의정 유순정마저도 여기서 박원종도 살기위하여 배신으로 돌아서서 압력으로 유자광 죽이기 상소농성에 동참하였으나 자신도 유자광 같은 "토사구팽"의 결과로 숙청되었다.
유자광의 죄는 '서자'라는 점
유자광의 죄는 서인(서자)라는 것이였다. 간추려 본 유자광 탄핵 관제농성의 기록의 순서를 보면 이해가 되리라 생각한다.
중종 2년 4월 13일 (대간이 합사하여 유자광을 탄핵하다
중종 2권 2년 4월 14일 홍문관 부제학 이윤이 유자광을 탄핵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중종 2권 2년 4월 16일 유자광이 죄받기를 청하는 차자를 올리다
여기서 유자광은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했으나 붙잡아두고 뒤로는 이런 상소를 올리게하 였다
중종 2권 2년 4월 16일 대간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다
중종 2권 2년 4월 17일 신용개의 추천으로 직강 이철균의 자품을 올리다
중종 2권 2년 4월 17일 대간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중종 2권 2년 4월 17 홍문관·예문관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중종 2년 4월 17일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중종 2년 4월 17일 예문관 봉교 정충량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회보하지 않다
2년 4월 18일 참찬관 이윤 등이 유자광의 중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중종 2권 2년 4월 18일 태학생 윤임이 유자광을 탄핵하니 불허하다
중종 2권 2년 4월 19일 유자광을 벌주라는 간언은 모두 물리치다
중종 2권 2년 4월 19일 대간·홍문관·예문관·승정원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중종 2권 2년 4월 19일 대간·홍문관·대사헌·대사간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중종 2권 2년 4월 19일 성균관 생원 권숙균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중종 2권 2년 4월 20일 대간·정원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중종 2권 2년 4월 21일 대사헌 민상안·대사간 윤희손 등이 유자광을 탄핵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전교하다
중종 2년 4월 21일 신상 등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중종 2년 4월 21일 이윤 등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중종 2년 4월 21일 성균관 생원 조삼 등이 상소하여 유자광을 주벌하기를 청하나 불허하다
중종 2년 4월 22일 ( 좌의정 박원종이 유자광을 유배시키자고 항복하듯 아뢰다
중종 2년 4월 22일 대간에게 술을 내리다 (유자광죽이기 성공의 축배)
유자광 숙청 이후 심복 2차 숙청되어 전라도 인맥 끊겼다
유자광을 숙청하고 박영문과 홍경주 등 심복을 숙청하려는 2차순서가 다음과 같이 진행되어 전라도의 한국예술과 전라도의 인맥은 여기서 사라지게 된다.
중종은(1513년) 삼포왜란을 박영문이 평정하고 그 세력이 커지자 중종8년 10월 막개를 시켜 엿듣고 고발하자 막개에게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박영문을 공개 조사하는 국문자리에서 중종이 직접 박영문에게 홍경주와 공모했다고 말하라고 매질해도 그는 거부하고 죽어갔다. 여기서 전날에 박영문이 신윤무에게 불평하며 말하기를,
‘우리 나라 문무(文武) 재상(宰相)들 중에 공이 있는 사람이 누가 유자광(柳子光)만 한가? 중국에서 찾더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전일에 비록 자기의 공을 과장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아뢴 말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신(文臣)에게 그런 과실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고 파직(罷職)에 그쳤을 것이요, 또 유자광에게 문신 자제 하나만 있었다면, 그 동년(同年) 벗들이 논박하려 하다가도 역시 동년을 비호하여서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의 앞날이 어찌 자광과 다르겠는가!’
하니, 윤무가 대답하기를,
' 연산군(廢朝) 때에 유명한 문신을 많이 모함하여 죽였는데, 이 때문에 문관이 유자광을 미워하여 틈을 타서 힘써 배척한 것이다.’
라고 신윤무가 말해서 박영문이,
‘우리(유자광)가 어느 문신을 죽였는가? 다만 거의 죽게 된 문신(文臣)을 구제하였을 뿐인데,...... 송일(宋?)이 정승에 제배될 때에, 우리 생각에는 반드시 홍경주(洪景舟)가 될 것이라고 여기고, 송일 따위에게는 의논이 미치지도 않았는데, 송일은 복벗은 지 열흘도 못 되어 곧 이조 판서에 제수되고, 또 한 달도....... "
홍경주의 딸 희빈의 아들 왕자 영산군을 제거하기 위한 사건으로 묻혀버렸다
이 글을 보면 연산군일기를 조작, 선비숙했다는 내용도 유자광을 악인으로 만든 근거로 제시한것이다. 더 자세하고 확실한 자료는 다음에 제시하고자한다.
이것은 유자광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김종직의 후계자들에게 농성을 유도하여 못이긴 척하며 유자광을 숙청하는 술책으로 보인다.
정읍인맥 중심이었던 단종-중종 조정과 동학 전붕준 세력...'정읍역사의 아쉬움'
중종이 반정에 이용하고 "토사구팽"의 계교로 유자광 반대세력인 김종직, 한명회 추종자를 사헌부에 대거 투입시켰다. 중종 1년(1506년) 12월 3일 유자광과 함께 사직서를 낸 좌의정 박원종·우의정 유순정중 박원종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유자광 죽이기에 동참시켰고 그 박원종도 다시 유자광 같은 신세로 "토사구팽"의 결과로 숙청되었다.
토사구팽의 현대사에서 중국은 등소평이 살아나서 중국을 대중화국으로 만들어 세계중심국으로 진동시키고 있다. 등소평이 처형되었다고 생각하여보자...
단종의 조정과 중종의 조정, 동학 전봉준 세력등 절호의 기회가 왔어도 차지하지 못하는 우유부단 정읍역사가 있었다.
위대한 세계최고의 악보와 가사, 백제가요 정읍사노래를 유자광이 악학괘범에 실어 전해주었어도 정읍농악에서조차 미국애국가인 방태진류 서울태평소 가락으로 가짜 농악으로 먹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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