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편 * 알렉산더 대왕 *
알렉산더 대왕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정복자로서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시에서 BC 356년 한창 무더운 여름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로 참으로 뛰어난 재능과 앞일을 내다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그리스 서북 에페이로스의 공주로서 트라키아 지방의 광신적인 밀교를 믿으며 자존심이 강하고 다감하며 격정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뒤에 필리포스와 금실이 나빠져 국왕이 후궁을 들이자 알렉산드로스를 데리고 별거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경애했으며, 성격적으로도 그 공상적 신비적인 분방한 기질을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았다. 한편 아버지로부터는 정치·군사적 재능 이외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한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그는 살결이 희고 온몸에서 방향(芳香)을 발산해 그 향기가 옷에까지 배었으며 눈은 온화하게 젖은 듯하고 목을 약간 왼쪽으로 갸웃이 굽히는 버릇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가 46세의 젊은 나이로 공주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암살되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약관 20세의 청년이었으나 아무런 장애없이 순조롭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필리포스는 용의주도하게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상당한 전쟁 경험을 쌓고 있었고, 가정교사가 아리스토텔레스였기 때문에 지적 교육도 다져져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즉시 페르시아 제국을 침략했다. 병력의 숫자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를 격파시켰는데, 이 대성공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필리포스가 남겨준 군대는 페르시아 군보다 훨씬 잘 훈련되고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알렉산더는 참으로 드문 천재적인 장군이었다는 것이며, 셋째로 그의 용감성이었다. 그는 전선의 배후에서 각 전국의 초기단계를 직접 지휘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중대한 작전에 임해서는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돌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이 따르는 일로 그도 때로는 부상을 당했다. 왕 자신이 병사들과 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을 보고 사기가 충천했기에 승전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계속 정복해 가자 이집트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왔다. 거기서 대왕은 나일강 하구에 지중해의 새로운 상항(商港) 및 군항을 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시의 창설을 계획하고 로마인 디노크라테스에게 그 설계를 맡겨 즉시 착수케 했다. 그해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에서 500Km 이상이나 떨어진 열사의 땅 시바에 있는 태양신 아몬 신전에 참배하고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아몬(Amon)신은 고대 이집트의 주신(主神)으로 이를 모신 카르나크 대신전 (大神殿)은 유명하다. 동물신으로는 숫양이며, 심벌로서는 위가 편편한 관(冠) 위에 한쌍의 날개를 얹고,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알렉산더는 아몬 신전에 나아가 말했다. "아몬신이여! 나에게 전지전능한 힘을 내려 주십시오. 나로 하여금 아몬신의 능력을 보여 주게 하십시오." 그러나 신전엔 찬바람만 맴돌았다. 순간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그래서 즉시 이렇게 말을 바꾸었다. "전지전능한 아몬신이여! 저를 신의 아들이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아몬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아몬신의 위력을 알리게 하소서! 저는 이제 신의 아들입니다. 힘을 주소서!" 신전에 신비스러운 기운이 차올라 알렉산더의 온몸을 뜨겁게 달아 올렸다. 그는 그 순간 아몬신의 전지전능한 위력을 온몸에 받은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집트에서 머무는 동안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등 뒤엔 이집트의 주신인 아몬신의 위력을 둘렀고, 앞에는 이집트의 지휘관들의 지지를 깔았고, 그 높은 파라오의 왕위에 올랐으니 탄탄대로였다. 그때 나이 24세로, 중국의 연나라가 와의 칭호를 사용하자 우리나라 기자조선의 제후도 왕을 칭하던 시대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앉은 자리가 확고해지자 이집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구세주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이집트의 말로는 소테르(Soter)로 구제자란 말인데, 알렉산더는 그들이 소망하는 소테르임을 선언함으로써 위대한 역사의 문을 열어제켰다. 신의 아들에서 신으로 변신한 알렉산더의 정복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고도 야망이 가시질 않아,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인도에까지 침입했다. 서부 인도에서도 연전연승을 하고 다시 동부 인도까지 진격을 계획했으나, 다년간의 전쟁으로 지쳐서 페르시아로 귀환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알렉산더의 견문은 크게 넓혀졌다. 이집트의 오리엔트 문화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인도의 인더스 문화에 감탄했다. 그는 오직 그리스 문화야말로 참다운 문화이며, 그리스 외의 모든 것은 야만이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이 사고방식은 당시 그리스인들에겐 통용된 상식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는 우선 페르시아 인이 결코 야만인이 아니며 페르시아 인 각 개인은 그리스 각 개인과 마찬가지로 교양이 있고 재능도 있으므로 존경할 만하다고 이해하기 이르렀다. 그래서 그의 제국이 두 민족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융합하여 그리스와 페르시아 연합문화와 연합제국을 건설해 자신이 전 통치자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인을 그리스 인이나 마케도니아 인과 똑같은 파트너로 하고, '동서의 합동 결혼식'이라는 대단한 축하연을 베풀어, 우선 마케도니아의 고관·부장· 친구 등 80명을 골라 페르시아 명문의 딸과 결혼시켰다. 이어서 1만여 명의 마케도니아 병사들을 아시아의 여성들과 합동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그 자신도 박트리아의 왕녀 록사네와 결혼했었지만, 다시 다른 나라의 공주를 후궁으로 맞아 결혼식을 가졌다. 세계의 인종은 나름대로 문화가 있고 위대하다는 것을 안 대왕은, 계속 정복을 하여 합동 결혼을 시켜서 세계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BC 323년 6월 초순에 그는 돌연히 열병에 걸려 자리에 누운 지 불과 10일만에 죽었다. 겨우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후계자를 지명해 놓지 않았으므로, 그의 사망 후 순식간에 세력 다툼의 내전이 잇달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왕의 모후·왕비·왕자들 전원이 새로운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대제국의 영토는 실제로 부하 장군들에 의해서 분할되고 말았다. 드디어 디아도코이 시대가 막을 올렸던 것이다. 디아도코이(Diadochoi)는 그리스어로 '후계자들'이라는 뜻의 보통 명사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급사했기 때문에 대왕의 유장(遺將)들은 각기 자기가 후계자라고 자칭하여 싸웠는데 이들을 가리켜 디아도코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된 말이다. 디아도코이는 안티고노스 1세·안티파토로스·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등을 가르키는데, 이들의 뒤를 계승한 제2대를 에피고노이(Epigonoi)라 부르게 되었다. 그들 상호간의 전쟁을 디아도코이 전쟁이라 하며 알레산더 대왕의 사후 약 40년 간이나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을 '디아도코이 시대'라 불렀다. 디아도코이 전쟁의 결과로 이집트·시리아·트라키아·마케도니아 등 네 왕국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실은 세계통일제국의 건설이라는 알렉산더 대왕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이때 이집트로 들어가 알렉산드리아에 수도를 정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1세는 왕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대왕이 죽은 뒤엔 이집트로 들어가 이집트를 향해 말했다. "내가 소테르다. 이제부터 내가 백성을 구원하리라." 그는 스스로 구세주인 소테르임을 선언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조(朝)를 세웠다. 외교적 수완이 뛰어난 정치가로 팔레스티나를 비롯하여 사이프러스, 나아가서는 에게해(海)의 여러 도시 및 소아시아를 손에 넣어 동지중해 지역에 영토를 확대하고 또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경영에 힘써 그곳을 이집트에서의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마케도니아 귀족의 혈통을 이어 받은 왕가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3세 시대에 확대 발전하여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였고,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스 문화만을 알았던 알렉산더가 오리엔트 문화에 심취하여 스스로 이집트의 소테르가 되었듯이, 대왕이 죽은 뒤의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이집트의 오리엔트 문화 안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드여 새로운 문화시대를 펼쳐나갔고, 마케도니아나 그리스 등에서도 오리엔트의 문화를 받아드여 새로운 문화권을 열어나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제12대 프톨레마이오스에 이르렀을 때 클레오파트라가 둘째딸로 태어났다. 왕조가 탄생된 지 237년 만의 일이었다. 그해가 단기 2265년 (BC 69) 임자년(壬子年)으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나던 해였다. 클레오파트라(Kleopatra)는 마케도니아 왕가,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이집트에서 애용한 여성의 이름이다. 이전에도 시대적인 미녀로서 칭송을 받았던 여성으로 여섯 명이 있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 7세였지만, 자국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한 세계적인 여걸이 되어 클레오파트라는 7세의 대명사가 되어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다음은 제28편 클레오파트라의 야심 입니다
출처 : 볼링, 독서, 음악감상
글쓴이 : hawk4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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