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진시황제 5두마차가 정읍에 남아있다

도심안 2009. 4. 25. 20:48

 

진시황제 5두마차가 정읍에  남아있다

삼한은 진나라 망명들이 건설했고  진시황제의  종교 신앙터

 가야국 백제 망명군 근거지  허장군 종교신앙 터

 

진시황제의 5두마차를 처음 타는 한민족 사람의   기록사진



진시황제가 타고 다닌 5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진나라시대 있었다

그 마차가 진시황제의 발굴된 무덤에서도 동으로 만들어저 있엇다

그러한 말 마차로 보이는 돌 오두마차가  정읍시 칠보면 허장군봉 허장군 굴문밖에 대기하고 있다

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망명 세력이 이곳 기자조선 땅에 얼마간 동안 망명으로 부흥의 꿈을 구던 세력이 진시황이 굴속에서 살아나와서  5두마차 를 타고 나가기를 기원하는 종교신앙 유물로 보인다


  김해에서 가야국 김수로왕이 이땅에 태어날 때에  김해 구지산 정상에 고인돌 바위를 거북이라고 하며  그 거북이 김수로왕 이라고 하고 모시고 구지가 노래로 찬송가를 불렀다


그런데 이곳의 5두마차는 5마리 말이 분명하고 마차바위판의 중앙에 기둥을 세운 홈자리가 있다

그홈자리를 허장군이 말타고 나간 말 발자욱이라고도  하였다

 산제당이 암자가된 이곳에 절 명암사에서 불경. 재굿 구절에도 그리고 장군봉 전설에도 허장군이 나타나서 이세상을 개벽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1960년대 '전설따라 삼천리' 에서도  장군봉의 허장군이 말을 타고 활을 무성리 원촌 서낭산 나무에  쏘고  그 화살보다 먼저 말을 달려가라 라고 하였는데 서낭산에 도착하여  말이 늦은줄알고 말의목을 베고나니까  바로이어서 화살이 서낭나무에 박혔다고 하였다

이처럼 말의 전설이 무수한 곳에 바위로 말을 조각하여 남아있는  그 유물이  진시황제의 5두마차와  유사한데  가야국 망명의   허장군의 5두 마차로 통치하고 허씨왕국  궁궐이라는 이름 '허궁실 '마을이 앞에 있다

중국 한국 일본 아시아 역사변천의 중요한 자료 '허장군 5두마차' 타기

장군봉에 이 허장군의 굴이있는데 이 이름이 '허왕굴' 이다

장군봉 허왕굴아래 마을 이름이 복호마을이다

일본의 단군왕검 같은 신화로서  천조대신 신화에는 '천석굴의 반호'라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는데  복호와 반호이름이 비슷하다


478년에 대산성 반란사건이 남부백제와 가야세력이 백제에 항거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기록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다


 이들 망명세력이 백제가망하자 일본에서 지원군으로 동진강으로 들어와  장군봉 허씨족을 구하려고 들어와서 참패하여 돌아갔다


  백제 가야와 백제인 세력이 현재의 일본 천황족이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진시황제의 망명한 세력의 종교성역에  가야국의 망명족 가야 허씨 세력이 숨어살면서 전래되는 진시황 망명족  풍속의 유적이  허장군 유적으로 남아있다가  후백제 견훤을 고려망명에 협조하고  훗날 고려 현종이 나주로 피난하는 시기에  태인허씨 세력이 현종왕비로 두명의 후손이 들어가서 고려 궁중을 이자겸 통치시대 까지   장악했다


 진나라와 가야국은 철기문화가 발달한 공통점이 있다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진시황의 5두마차 가 서기 26년에  밴허영화에 나타나는 전차에서도 5두마차가 등장한다

가야와 백제에서도 사용하였거나 그시대 신앙 유적으로 정읍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유적의 위치가 험준한  그병사진 산 정상으로  잘 보존되어있다


정읍시 문화원 사무국장 김희선씨와 칠보면 사무소 문화 담당자 최창기 씨가 한민족인으로는 처음으로 5두마차를  타고 사진을 찍었다

 

 

 

 

 

 
 
▲ 칠보면 장군봉 허장군굴앞의 5두마차,누가보아도 5마리 말을 돌로 원시적인 조각 장식하여 마차를 만들었음을 알게한다. 뒤의 수레는 원통으로 난타북 모양으로 일본서기 천석굴신화가 연상된다.
말 발자욱이라는 홈과 뒤의 산에 천석굴에서 가무고취로 신을 모셔낸다는 전설이다.
동서양을 통일한 진나라의 최고의 미인 가무고취의 무녀 서시,  그리고 삼신산에 온 서불과 백제의 성씨 서씨가 같다.

신라말기부터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유교학문 숭상 탓으로 주나라, 송나라, 명나라는 성인국으로 진나라는 추악한 국가로  교육시켰고 조선에서 연산군과 유자광처럼 매도해 버린 '쓰레기 국가' 이름이었다. 그래서 어느 문헌이나 족보에 진나라를 계승한 흔적은 없다.

칠보면 시산리 복호마을 굴봉산 허장군 석굴에 왜 5두마차 석상이 있었는지 역사와 민속 전설등을 아는대로 모아서 참신한 애향 학도들의 '국악발상지 정읍' 연구에 도움이 되라고 자료로 제시한다.

진나라가 삼한의 건국자?

   

이런 진시황제의 5두마차를 정읍 칠보 장군봉 허장군 5두마차를 돌로만들어 남아있다

 

▲ 진시황제 능에서 발굴된 동제 마차가 하늘의 신으로상징하며 타고다녔다. 진시황제는 4두마차 여불위는 5두마차를 타고다녔다고 한다.
이런마차를 돌로 만들어 종교신앙으로 허장군 봉에 있다

 

 

 

 

 

 

 

 

 

 

 

 

 

 

 

 

 

 

 

 

 

 

 

중국역사책 삼국지 동이전 진한전(三國志券30- 魏書30-烏丸鮮卑東夷傳策30- 辰韓傳)에 "중국 진시황의 진나라에서 만리장성 축성의 힘든 부역을 피하려고  마한국으로 도망하는 백성이 많아저서 동쪽의 땅을 주어서 살게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마한은 말을, 진한은 용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 삼국지 기록의 전문을 기록하여 보자.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나라(진한)의 노인들이 대대로 스스로 말하기를 옛날에 진(秦)나라로부터 부역을 피해 도망해 왔다고 한다. 마한은 마한동쪽 경계(국경지방)의 땅을 쪼개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 하고 도적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고 불렀다. 모두들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 하여 진나라 사람과 같으니 다만 연나라, 제나라의 물건에 부르는 이름만은 아니었다. 낙랑인을 아잔(阿棧)으로 불렀으며 동쪽지방 사람들은 우리를 아(阿)라고 불렀다."

술잔을 돌리는 '행상'...개성-정읍 칠보-경주에만 있는 유적

이런 기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는 말이 있다. 유별나게 정읍의 칠보면(대산.태산태수) 지역에 남아있는 향음주례행사와 유상곡수등 술잔 돌리기의 풍속을  특별히 기록 하였다.

개성과 정읍 칠보, 경주에만 행상(行觴;술잔돌리기)유적이 있다. 진나라 때에 생긴 도시  중국의 장사현(장가계 국제공항근처)에서 와서 살았거나 진나라 멸망으로 진나라의 귀족이 이곳으로 망명하여 궁중 황족들의 술잔돌리기를 계승한 풍속이 삼국지 위나라 (조조의 나라) 진수가 와서 보고 적어 간 것으로 보인다.

바위 탄생 설화, 동북아의 공통된 시조 신화

   
 씨름장사를 선출 굴속의 태양신을 농악으로 문열게하고   
 힘으로 끌어내는 일본 신화
하나라시대 요임금과 순임금을 이어온  우임금의 부인은 여교 (女嬌)이다. 여교는 도산(塗山)출신으로 곰으로 변한 우임금을 무서워하여 도망하다가 숭고산(崇高山)에서 돌로 변했다. 우임금이 아들을 돌려달라고 하자 바위의 북쪽이 갈라져서 계(啓)라는 아들이 튀어나왔다.

우임금의 부인 여교가 바위로 변하자 곰, 즉 우임금이 기도하고 또는 가무고취(노래와 춤)로 계(啓) 왕자가 북쪽 바위를 가르고 나왔다.

칠보면의 장군봉(석굴봉산)의 허장군신화와 일본의 시조 천조대신(아마데라우스오오가미)이 이와 같고 또 고구려 국신 동명왕 수신굴, 백제무녕왕의 대마도 탄생바위굴이 같은 신앙이다.

고대 동양의  시조 신앙은 서로 비슷하다. 언어학자가 고구려, 백제, 일본이 같다고하는 논문을 본 적이 있다. 지금 쓰는 우리 한국어는 신라어로 중국과 문법이 같다고 했다.

고인돌왕국 사로현(고창군 상하면의 백제군명)에 사로나기타갑배 장군이 있다. 웅진에서 젊은 나이로 즉위한 동성왕은 초기 곤지의 섭정 하에 있었으나 점차 군왕의 위엄을 갖추고 독자적 정치를 하게된다.

 AD 478년 칠보 대산성(帶山城)의 담로왕 기생반숙미, 삼한왕으로 자칭

   

▲ 새가 노래하고 북치니 태양신이 문열어보니

씨름 선수가  태양신을 모셔낸다

일본에는  이런 신화에 맞는  지형이 없다

국내적으로는 AD 478년 정읍 칠보면 대산성(帶山城)의 담로왕 기생반숙미가 사로나기타갑배와 함께  삼한왕을 자칭하면서 백제의 군량 수송을 방해하고 보급품을 횡령했다. 그러자 동성왕은 고이해 장군을 파견하여 그 세력을 토벌하고 임나항의 지배권을 확보함으로써 자유 이민항으로서 기능을 회복시켰다. 그리고 신라, 가야와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하였다.

이 해에 기생반숙미해가 임나에 있다가 양쪽에 걸쳐 고구려와도 통교하였다. 서쪽으로 삼한 (三韓)의 왕이 되려고 하여 관부(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神聖)이라 일컬었다.  

"좌노나기타갑배" (左魯那奇他甲背)는 고창군 상하면 사람으로 괴상한 갑옷 입은 장군의 뜻으로 해석이 된다. 일본의 기록에는 고창군의 무장현이 좌로현(左魯縣)이라고 주장하여  고창군 출신군사라고 일본의 일부학자가 해석을 하는 분도 있다.

칠보 시산리 복호마을의 허장군굴은 바위에서 다시 황제가 환생하기를 바라는 동이족의 장군 좌로나기타갑배와 바위속에서 자고 태어난 기운 센 미륵이라는 뜻의 이름인 "기생반숙미"(紀生磐宿彌)장군이 상징적으로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쪼개고  동쪽의 태양을 바라보는 암굴을 만들다가 백제 동성왕의 반격으로 미완성으로 끝난 기초과정의 유물로 보인다.

진시황제가 타고 다니던 5두마차 유적이 허장군굴 앞 5두마차 바위

   
▲ 5두마차 말궁둥이와 수레의 바퀴,누가 보아도 말궁둥이와 마차다. 이곳은 동진강과 섬진강의 이음고개로 구둘재 산외 태인의 움직임을 보는곳이다. 진시황제의 패잔병이 페루의 인디안처럼 산악지대 요새지에서 임시 신궁을 차라고 "허궁실"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부른다.
특히 진시황제와 재상 여불위만이 타고 다닌 5두마차의 석조 유적이 수상하다. 진나라를 멸한 한나라시대이니까  "진시황제여!, 어서 나오셔서 5두마차를 타고 세상을 평정하십시오"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그러다가 고주몽의 후손 온조왕계 동성왕에게 밀린 마한의 무녕왕 세력이 반격을 시도한 신앙 유적이다. 통일신라가 되자 백제인 아사달과 같이 신라에 노예로 끌려간 백제의 석공들이 백제신앙건물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 석굴암의 현구조와 유사한 것이다.

분황사와 석굴암의 정문에 있는 역사상(씨름장사)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고유한 조각이다. 분황사의 역사상처럼 문벽에 숨어서 태양신이 나오게 하는 모습으로 바위절벽에 파낸 올라설 수 있는 홈에 바위순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백제가 망하고 일본의 지원군이 동진강으로 온 것과 부안 주유성 ,(개암사) 도침과 풍왕이 활동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가야의 허황후는 인도 출신아닌 진나라 출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지은 김부식, 일연 등은 모두 신라와  가야계 사람으로 가야의 허황후가 진나라에서 망명한 것을  은폐할 가능성이 있다. 그 당시 악의 상징 진나라를 숨기고 성스런 선진국 인도국 사람으로 각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태인허씨 활동무대는 장사현(장가계근처)이나 산동지방으로 뛰어난 철기무기와 공격전투 무역 등이 진나라를 흡사하다.

인도국과의 전투나 도움, 교류 등의 기록은 거의 없다. 진나라 시황제의 불로초를 구하러간 서시(徐市)를 통해 영원히 산다는 어린 소년 소녀 3천명과 왔다는 기록이 일본에는 많아도 한국에서는 전설조차 희박한 것은 유교가 탄압했던 증거다.

   

 

▲ , 씨름선수가 문옆에서 태양신 천조대신을 납치하려고 숨어있고 가무고취를 5두마차에서 진종하니 바위속 태양신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씨름선수가 바위에서 서있을 수 있는 발판 홈으로 보이는 곳에 풀이 무성하다. 이 사진으로 석굴암과 분황사의 태권도지세 역사상의 임무를 이해할 수 있다. 문지기가 아니라 신을 마을로 모셔가는  무속의 제사장이다.

   일본서기 내용과 같은 이곳을 그림으로  그려본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출처 : 고구려 백제 신라 소리찾기
글쓴이 : notan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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