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강응환

도심안 2023. 7. 31. 00:39

향토문화전자대전

강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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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유형지역시대출처
역사/전통 시대,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인물/문무 관인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조선/조선 후기
디지털고창문화대전-강응환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명서(), 호는 물기재().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에서 세조 조에 이르기까지의 명신으로 이름난 강희맹()의 11세손이다. 강희맹의 둘째 아들 강학손()의 여섯째 아들 강흔수()가 강응환()의 9대조인데, 그의 6대조 강계오()가 전라남도 영광에서 외가인 무송유씨()와 처가인 진주정씨()를 좇아 무장() 땅으로 이거하게 되어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정착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모산() 강민저()이다.

활동사항

강응환은 36세 때인 1770년(영조 46) 무과에 급제하여, 40세 때부터 서반직인 무관직과 지방 수령직이 대부분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74년(영조 50) 경기도감영의 군관을 시작으로 1776년(정조 1) 9월 선략장군()의 품계를 받아 행용양위우부장()의 직분을 제수 받았다.

1778년(정조 2)에는 조봉대부()로 통례원인의()의 동반직을 제수 받았다. 6개월 후 12월에 통훈대부로 승품되어 행사헌부감찰로 승진하였다. 8개월 후 칠원현감으로 임명되어 1783년(정조 7) 3월까지 5년의 임기를 마쳤다. 이후 초계군수를 마감하여 동반직을 떠나 서반직으로 돌아와 용양위부호군겸대구영장, 고령진병마절제사, 창성도호부사를 거쳐 1792년(정조 16) 9월 절충장군으로 승품되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1794년 11월 임기를 마쳤다.

대구영장으로 있을 때 요승 육지()을 붙잡아 정조의 칭찬을 받았고, 창성부사로 재직할 때엔 강변 7읍의 형세를 지도로 그려 조정에 올려 북변 지역의 요새 수비 대책을 강구하였다. 또한 연노궁()을 만들어 연읍에 비치했으며, 동래수사로 있을 때는 영남 해안 일대의 군사 지도를 만들어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저술 및 작품

강응환이 약관에 지었다고 하는 「무호가()」를 보면, “대장부 천지간에 태어나서 장부 일을 하려 하고 인간 만사 헤아리니 글 읽기 글쓰기는 쓸모없는 선비들이 할 일이고 밭갈기 논매기는 농부들이 할 일이라. (중략) 남병사 북병사를 차례로 역임하고 통어사, 통제사를 계제에 지낸 뒤에 (중략) 왕명을 받들어 삼군을 호령하리.” 하여 대장부의 포부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후에도 때가 평시인지라 무인의 기개를 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저서로 『물기재집()』, 『칠원정적()』, 『내영정적()』이 있다. 유품으로 무과에 급제한 후에 받은 교지를 비롯한 12매의 교지와 「청북변성도()」·「고려중요처도()」 및 정조가 하사한 초상화 1폭과 사령기(使) 등이 가보로 보존되고 있다. 그의 초상화는 세배 인사차 중병의 몸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자 정조가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특별히 실물 크기의 상반신을 정교한 채색화로 그려서 내려 준 것이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규장각직학사() 송규헌()이 신도비명을 지어 주었다.

참고문헌

  • 『모양성의 얼』(고창군, 1982)
  • 이기화, 『고창의 맥』(고창문화원, 1991)
  •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강응환 [姜膺煥]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