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산서원 입구의 수은 강항 동상 앞에서
- 강항이 세이카에게 퇴계학을 가르쳤다니? 내산서원을 나오면서 서원 입구에 있는 수은 강항 동상을 다시 보았다. 동상 앞에는 ‘수은 강항 선생 동상을 제막하면서’ 라는 동판이 있다. 수은 강항 선생은 세조 때의 큰 문장가이신 사숙재 강희맹 선생의 5대손으로 자를 태초, 호를 수은이라 하였으며 1567년에 영광 불갑 서봉에서 탄생했다. (중략) 적지에서 포로생활 중 우연히 만나게 된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퇴계학을 가르쳐 그 사람이 일본 주자학의 비조가 됨으로서 선생의 공적은 천추에 찬연히 오늘날 빛나고 있으며 너무나도 유명한 역사의 한 토막이기도 하다. 선생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친절한 도움으로 적지에서의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시게 되시었다. (후략) 서기 2002년 11월 사단법인 영광내산서원 보존회 이 동판을 읽다가 ‘강항이 세이카에게 퇴계학을 가르쳤다’는 문장에 호흡이 멈추었다. 아니 강항(1567-1618)이 퇴계 이황(1501-1570)의 제자였나? 1570년 퇴계 서거 당시 강항은 겨우 4살이었는데. 안동 사는 퇴계에게 학문을 직접 배운 적이 없는데. 필자는 고 故 이을호 교수(1910-1998)가 쓴 <국역 수은집> 서문에서 “수은 선생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가서는 소위 경학 京學의 시조라 하는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퇴계학을 처음 강론한 바 있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주35) 호사카 유지도 “강항은 세이카에게 사서오경, 이황의 성리학, 과거제도, 조선의 장례제도 등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준다.”라고 기술하고 있고 (주36) ,박맹수 교수도 “수은이 퇴계 이황 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우계 성혼(1535-1598)의 문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주37)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강항은 성혼의 제자이다. 성혼은 퇴계의 제자였다. 그러니 강항은 퇴계의 제자가 맞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강항은 퇴계학을 전수한 것이 맞다. 그런데 면밀히 검토하여 보면 성혼은 퇴계의 제자이기는 하나 퇴계의 학통을 그대로 이어 받은 학자가 아니다. 조목(趙穆, 1524~1606), 김성일(金誠一, 1538~1593),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정구(鄭逑, 1543~1620)같은 퇴계 직계 문하의 영남학파가 아니다. 퇴계와 사단칠정논변을 한 고봉 기대승도 퇴계의 제자이고, 율곡 이이도 퇴계의 제자이기는 하나 고봉이나 율곡을 퇴계학의 전수자라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혼은 절충파로 알려진 학자이고 이이와 친한 기호학파이며 서인이었다. (주38) 또한 강항은 어려서 큰 형 강해로부터 공부를 배웠는데 강해는 율곡 이이의 문인이었다. 강항이 성혼의 제자이기는 하나, 윤순거가 지은 ‘국조인물고’를 읽어보면, 강항이 학문적으로 성혼의 영향을 받은 기록은 없다. (주39) 한편 이을호 교수가 말한 경학의 시조 후지와라 세이카의 사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세이카의 경학파는 퇴계 이황의 성리학을 기조로 하지만 율곡 이이의 학설이나 양명학을 수용하는 등 포섭력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세이카의 이런 학풍은 조선 절충파의 영향을 받았다. (주40) 그런데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1583-1657)은 스승인 세이카와 달리 오로지 주자학만을 신봉했다. 양명학과 불교를 배제하고 철저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태도를 견지하여 퇴계 이황만을 존경하였다. 그래서 임태홍은 하야시 라잔을 ‘퇴계학의 충실한 소개자’로 기술하고 있다.(주41) 일본에서의 퇴계 학문의 영향은 대단하였다. 퇴계의 학문은 하야시 라잔, 마쓰나가 세키고 등 후지와라 세이카 문하 사천왕을 비롯하여 이후 에도시대 학문 전반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퇴계 이황에 대한 일본 유학자의 존경도가 어느 정도 컸는가는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주42) 1719년에 조선통신사 신유한은 <해유록>에서 “오사카의 출판업이 번성한 것에 놀라움을 나타내면서, 일본인들이 <퇴계집>을 숭상하여 집집마다 이를 외우고 다녔다고 하였고, 여러 학자들과의 필담에서도 그들이 묻는 항목은 반드시 <퇴계집> 안의 구절을 첫째로 삼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주43) 주35) 강항 저, 국역 수은집, p5 서문 주36) 호사카 유지, p140 주37) 박맹수, p 41 주38) 우계 성혼은 퇴계 제자이기는 하나 퇴계의 이기론에 충실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의 이기일원론의 절충을 취하였다. (위키백과, 성혼) 주39) 윤순거가 지은 강항의 ‘국조인물고’에는 “강항은 1593년에 우계 성혼이 뭇 소인배들에게 미움을 받아 문하가 적막했는데, 공이 멀리 찾아가 뵈니 우계가 공의 단아하고 진실함을 칭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주40) 호사카 유지, p150. 그런데 호사카 유지는 강항이 세이카에게 이황의 성리학을 가르쳤다고 기술하고는 세이카의 경학파는 이황의 성리학을 기조로 하지만 절충파라고 하여 다소 혼란스럽다. 주41) 임태홍, p125. 한편 강항은 퇴계의 신봉자 하야시 라잔을 만난 적이 없다. 라잔이 1604년에 세이카의 제자가 되었는데 1600년에 귀국한 강항이 라잔에게 퇴계학을 전수하였을 리 없다. 주42) 최관, p35 주43) 강재언, p266 [출처]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 (8)|작성자 바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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