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진강하면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강이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섬진강을 떠 올리면 사람들은 대부분 곡성 구례 하동을 떠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봄의 전령인 매화꽃과 산수유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를 흐르는 섬진강이 하도 아름다워서도 그렇지만 중상류를 가본 사람들이 별로 없고, 더더구나 그 강 길을 속속들이 걸어본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섬진강 댐에서부터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의 고향 마을인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을 지나 천담·구담 거쳐 강물이 휘돌아가는 회룡마을을 한발 한발 걸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곳에 이르는 길들이 그냥 무심코 걷는 길이 아니라, 아무도 잠깨지 않은 새벽에 내리는 이슬처럼 그 이슬 맞으며 피어나는 연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난 한 송이 꽃과도 같다는 것을,
나무숲이며, 징검다리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무개 네의 집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까지 모든 것이 다 우리네 산천에 아직도 남아 있는 그윽한 역사의 숨결이라는 것을,
△아름답게 피어난 한 송이 꽃과도 같은 마을
천담리에서 휘돌아가는 강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보면 구담(九潭)마을에 이른다. 구담은 본래 안담울이었으나,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에 자라(龜)가 많이 서식한다고 하여 구담(龜潭)이라는 설도 있고 일설에는 이 강줄기에 아홉군데의 소(沼)가 있다고 하여 구담(九潭)이라고 부르기도 한 곳이다.
주서동(뒤주골), 가운데골(중동), 장작골(용동)등의 옛 이름들이 남아 있는 구미리에는 북쏘, 사발쏘, 조쏘 등의 깊으디 깊은 쏘가 있고 거북바위 동남쪽에는 구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나라 안 이름난 강에 아름다운 물돌이 동이 몇 개가 있다. 낙동강 변에 위치한 하회마을과, 회룡포 물돌이 동, 금강의 죽도가 이름이 났는데, 섬진강 530리에서는 구담리에서 휘돌아가는 물돌이동 풍경이 제일이다.
△아름다운 마을 구담리
옛날 옛 시절 사람들은 이 깊은 골짝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구담리 마을에 국기봉은 녹슬어있고 새마을회관에 새마을 기가 바람에 펄럭이며 사람들이 살다가 떠난 빈 집터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정든 마을, 정든 사람들, 정든 집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의 신산했던 마음 풍경을 시인 김용택 시인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
“우리들은 저녁밥을 일찍 먹고 너나없이 모여들어 이삿짐을 꾸렸다. 거울, 깨진 농짝 하나, 테 맨 장독 몇 개, 헌옷 보따리, 때 낀 카시미롱 이불, 그 흔한 흑백 텔레비전 하나 없는 이런 촌 세간들이 서울에 가서 산다는 게 우습고 기막히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말없이 이삿짐을 꾸려 회관마당 삼륜차에 실었다. 아주머니는 연신 눈물콧물을 훌쩍이며 코를 풀어 치맛자락에 닦았다…

구담리 마을 숲에서 흘러오고 가는 강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가고 오는 것들이여 나는 그 속에서 어디만큼 가고 있는가. 오고 간다. 나는 우주순환의 섭리를 이곳 구담마을의 빈집에서 느낀다. 느티나무 숲 우거진 동산에서는 흐르는 섬진강의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고 흐르는 저 강물을 따라 나도 역시 흐르듯 내려갈 것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빈집들이 즐비한 회룡마을을 지나 언덕을 넘어 내려가면 장구목에 이른다.
이곳 내령리는 본래 임실군 영계면의 지역으로 영계면에서 가장 안쪽이 되므로 안영계 또는 내령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장군목, 장구목, 장군항, 물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느재 동쪽 기산(345미터)과 용골산 사이의 기슭에 있는 내동마을에는 장군대좌형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 내동마을 부근이 섬진강 중에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
저마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수많은 바위들이 강을 수놓은 가운데 바라보면 볼수록 기기묘묘한 바위가 요강바위이다. 큰 마을 사람들이 줄 서서 저녁 내내 싸도 채워질 것 같지 않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요강처럼 뻥 뚫린 이 바위를 한때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다. 섬진강을 같이 걸었던 박준열씨가 남원 KBS에 근무하던 때였다니까 94년쯤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마을에 와서 골재 채취업자라고 한 후 한참을 지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막걸리도 사주고 밤을 새워 이야기도 하면서 한 두어 달 사이좋게 지내면서 밤마다 포크레인으로 골재채취를 한다고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사람도 사라지고 요강바위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발칵 뒤집힌 마을 사람들이 남원 KBS에 연락을 해서 전국방송으로 내보낸 뒤 마을 사람의 인상착의를 알려주어 몽타주를 만들어 보냈다. 그리고 두어 달 지났는데, 경기도 지역에서 신고가 들어온 것이다.
언젠가 방송에서 보았던 그 바위가 모모지역에 있더라, 하는 제보를 받고 경찰들을 급파해보니 자기 집에는 두지 못하고 외딴 곳에 숨겨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붙잡혀 감옥에 가고 요강바위는 약간의 상처를 입은 뒤에 이 고향에 되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장구목 그 아름다운 풍경

수석이나 분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나라는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이 구석구석에 많은 나라라서 시간을 내어 조금만 도심에서 벗어나면 도처에 분재가 널려있고 수석들이 즐비하다. 그런데도 그 수석들이나 분재들을 힘들여 가져다놓고 물주고 거름 주고 정성을 쏟고 하면 그 분재나 수석들이 고마워할까? 그들에게 영혼이 있다면 수천 수백 년을 더불어 살아온 이웃과 친지들을 떠나 좁은 방안에 갇혀있으면 갑갑하기만 할 것이다. 그 나무나 돌멩이들이 그 모심(?)당함을 절대로 행복해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수집가들은 그 수석이나 분재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상품성을 생각해서 가져온 경우가 더 많다.
나와 내 가족의 이익이라는 개인주의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세상은 얼마나 자유스럽고 사랑스러워질까 그런데 이렇게 큰 요강바위를 어떻게 싣고 갔을까?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무량산에서 회문산으로 가는 루트가 이 요강바위 부근이었다고 한다. “요강바위에 빨갱이들이 다섯 명이 들어갔대요. 다섯 명이 들어간 뒤에 바위로 모자를 쓰고 있으면 토벌대들이 모르고 지나가고 그러면 바위에서 나오고, 그래서 살아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요”
그곳에서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강 길을 한참만 따라서 가면 순창군 동계면의 구미리에 이른다. 순창군 이동면의 지역으로 거북바위가 있어서 구미리라고 이름 지은 이 마을은 600 년 전 고려 우왕 때 직제학을 역임한 양수생의 처 이씨 부인이 이곳에 온 뒤에 나무 매 세 마리를 날려 보냈다. 그러자 그 매들이 순창군 동계면 관전리와 구미리 그리고 적성면 농소리로 날아갔는데, 구미리 마을이 마음에 들어 구미리에 정착해 살면서 농소리에는 묘소를 썼다고 한다.
풍수 지리학자인 최창조 선생은 〈한국의 자생풍수 2〉에서 이곳 구미리를 김용규씨의 증언을 받아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마을은 거북바위가 하나 놓여있는데 마을 사람들과 취암산 취암사 승려들 사이에 이 문제를 놓고 싸움을 벌이다 결국 승려들이 거북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 말았다. 그 거북이가 지금도 길가에 서 있다. 그 뒤 마을은 번창하고, 절은 폐사가 되고 말았다 한다. 금구몰리형의 자리에 아직 못 찾은 또 하나의 명당이 있다함(김용규)”
주산은 무량산(56.4m). 덕유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온 산맥이 남원 교룡산을 지나 비홍재에서 적성강을 끼고 북으로 달려와 남향으로 앉았다. 무량산의 본래 이름은 구악산(龜岳山), 즉 거북산이다. 지금 청룡이라 부르는 산 쪽이 주산에서 뻗어 내린 청룡이고 거북의 머리 부분에 해당된다. 백호는 청룡보다 짧지만 역시 주산에서 그대로 뻗어 내렸다.
거북이 남성을 상징하듯 안산은 옥녀봉, 그 형국은 옥녀탄금형 또는 옥녀직금형으로 묘가 있다. 옥녀봉 앞으로 동에서 서로 냇물이 흐르고 백호 쪽에서 흐르는 적성강은 서북쪽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내외수류역세가 된다.
한편 이 마을은 탕록음수형으로 그 사슴의 먹이 부분에 해당된다는 설도 있다. 종가 안쪽 대모정이 형국을 완성하였고, 종가 뒤에는 대나무숲이 있으며, 여기에 사슴을 상징하는 녹갈암이 있다. 지금도 바위가 마르지 않도록 가끔 대모정의 물을 떠다가 부어 준다고 한다. 금구예미형의 자리에 아직 못 찾은 또 하나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명당자리가 숨어서 기다리는 곳

이 마을이 고향인 양병완 선생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구미리에 300여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78호 뿐이다. 그것도 양씨 외에 타성받이는 다섯 집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한 성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것은 좋은 점도 있지만 안 좋은 점도 많다고 한다. 이웃마을인 장구목에서 가든을 운영하는 유영길(52세)씨의 말이 재미있다. 씨족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는 농사철엔 촌수가 없다고 한다. 날이 가물면 물싸움이 시작되는데 그때는 물이 곧 지난한 삶이기 때문에 전쟁 같은 물싸움을 벌리고 농사철이 끝나야만 아재, 또는 할아버지가 된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날이 몹시도 가물었던 어느 해에 논이 거북이 등처럼 타들어가자 ‘젊은 여자가 옷을 발가벗고 논두렁에 앉아서 물꼬를 잡고 있어서 남자들이 차마 그 여자와 물싸움을 할 수 없었다.’는 말이 남아 있을까?
이곳 구미리의 남원양씨들이 소장하고 있던 종중문서가 보물 제 72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내용은 1355년(공민왕 4년)과 1376년(우왕 2)에 이시(以時) 수생(首生)의 고거 합격증서 2통과, 임진왜란 이전의 교지(敎旨)로 1508년(중종 3년)과 1540,1591년(선조 24)의 양공준이 홍(洪)·시성(時省) 등의 백패(白牌) 2장, 홍패(紅牌) 2장, 1559(명종 14)의 양홍을 청도군수로 임명한다는 고신(告身) 1장 등 5통으로 되어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과거합격증서는 조선시대의 백패. 홍패의 서식과 달리 왕명(王命)으로 되어 있는 귀한 자료로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의 홍패,백패,고신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문서 서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고려 때 합격증서로는 1305년(충렬왕 31) 장계(張桂)에게 사급(賜給)된 인동장씨선세홍백패(仁同張氏先世洪白牌)가 보물 제 501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미리 마을은 섬진강변의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오랜 역사가 있으며 아름다운 경치가 즐비한 곳이다.
“진나라 장한은 제 멋대로 살아 거리끼는 바가 없어서 당시 사람들이 강동(江東)의 완적(阮籍)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장한에게 물었다. “경은 한 세상을 방탕하게 살면서 죽은 후의 명성은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나에게는 죽은 후의 명성이 당장의 한 잔 술보다 못하네.”〈세설신어〉에 실린 글이다.
죽어서 잘 사는 것보다 살아 있는 동안의 행복이 참된 행복이고, 지금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이러한 곳에 자리 잡고 사는 것이 더 할 수 없는 기쁨일 것이다.
이곳을 흐르는 섬진강, 즉 적성면, 동계면, 인계면의 퇴적암류와 응회암지대의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지역을 적성강이라고 부른다. 강의 물이 맑아 소녀의 눈동자 같다는 적성강, 섬진강 오백 삼십리 물길 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아름다우면서도 한적한 곳이 이 지역이다. 선돌 마을을 지나 무량산과 용골산이 섬진강에 물 그늘을 드리운 길을 거닐 때 랭보의 〈감각〉이라는 시가 친구해준다면 더 없이 황홀하지 않을까?.
“여름철의 푸른 저녁나절에는, 나는 오솔길로 나서리라..
보리가 듬성듬성한 그 길을, 나는 여린 잡초를 밟으며, 걸으리라…
몽상가인 나는 그 싱그러움을 발밑에서 느끼면서,
바람에 내 맨 머리를 멱 감기리라.
나는 말 하지 않으리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무한한 사랑이 내 마음 속에 솟아오르리라.
그리하여 나는 가리라.
멀리, 아주 멀리, 방랑자처럼, 자연 속으로 따라가리라,
-어느 여인과 함께라면 행복하리라…“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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