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유고(明齋遺稿) 제39권 -묘갈명(墓碣銘) 윤증(尹拯 1629-1714]
명재유고 제39권
묘갈명(墓碣銘)
1 호조 좌랑(戶曹佐郞) 양공(梁公) 묘갈명 경진년(1700, 숙종26)
2 창평 현령(昌平縣令) 심공(沈公) 묘갈명
3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한공(韓公) 묘갈명
4 해주 목사(海州牧使) 민공(閔公) 묘갈명
5 형조 정랑(刑曹正郞) 이군(李君) 묘갈명
6 형조 참의 김공(金公) 묘갈명
7 참봉(參奉) 심공(沈公) 묘갈명
8 증(贈) 좌승지(左承旨) 이공(李公) 묘갈명
9 장령(掌令) 조공(趙公) 묘갈명
10 문화 현령(文化縣令) 이군(李君) 묘갈명
11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 한공(韓公) 묘갈명
12 장령(掌令) 이공(李公) 묘갈명
13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공(李公) 묘갈명
14 숙인(淑人) 경주 김씨(慶州金氏) 묘갈(墓碣)
15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이공(李公) 묘갈명
호조 좌랑(戶曹佐郞) 양공(梁公) 묘갈명 경진년(1700, 숙종26)
공의 휘(諱)는 원(榞), 자(字)는 군실(君實), 성(姓)은 양씨(梁氏)이다. 양씨는 제주(濟州)에서 처음 나왔을 때 성이 양씨(良氏)였는데, 고씨(高氏)와 부씨(夫氏) 두 성과 함께 그 땅을 나누어 다스렸다. 신라 시대에 양(良)을 양(梁)으로 고치고 남원(南原)에 본적(本籍)을 하사받아 마침내 남원인이 되었다. 고려를 거쳐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대대로 현관(顯官)이 있었다. 휘 천지(川至)는 성균관 생원으로 은덕이 있었고 가훈을 지어 자손을 가르쳤으니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관(灌)인데 동지(同知)를 지냈고, 성종(成宗)이 어찰(御札)을 내려 청렴결백함을 칭찬하였다. 증조의 휘는 응곤(應鯤)인데 여러 차례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으나, 벼슬은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조부의 휘는 희(喜)인데 이조 참판을 지냈고,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옥하관(玉河館)에서 작고하여 천자가 애도하는 제문을 하사하였으며, 사신으로 가서 나랏일에 몸을 바친 공으로 훗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홍주(弘澍)인데 의금부 도사를 지냈고, 일찍이 정인홍(鄭仁弘)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악독함을 낱낱이 꾸짖었다. 임진왜란 때 의기를 펼쳐 국난에 달려간 공으로 훗날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현감 사민(師閔)의 따님이며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23) 1월 을축일(22일)에 태어났다. 6세에 백씨(伯氏) 황(榥)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에게 수학하다가 파산(坡山 파주(坡州))에서 돌아왔는데, 《효경》 1장(章)을 입으로 불러 주니 공이 바로 암송하였다. 13세에 부친의 명으로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배웠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부친상을 당하여 초상을 치르는 데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임자년(1612) 봄에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서쪽 변방으로 귀양을 갔으니, 광해군 혼조(昏朝) 때이다. 무오년(1618)에 사천(泗川)으로 양이(量移)되고 이듬해에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가 즉위하면서 무신년(1608, 선조41) 이후로 원옥(冤獄)에 관련된 죄가 모두 신설(伸雪)되었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와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공을 천거하여 효릉 참봉(孝陵參奉)이 되었다. 병인년(1626)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보임되고 의금부 도사로 옮겼다.
일찍이 명을 받들고 제주에 갔다가 희생(犧牲)과 감주(甘酒)를 갖추어 한라산(漢拏山)에서 시조(始祖)에게 제사를 지냈다. 돌아와서는 평안 병사(平安兵使) 유림(柳琳)을 안주(安州)에서 붙잡아 오라는 명을 받았는데, 유림은 한창 군사를 모아 훈련하고 있었고 이때는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매우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개의치 않고서 혼자 말을 타고 진중(陣中)에 들어가 유림을 체포하였다. 이에 위태롭게 여기던 자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사재감(司宰監), 군자감(軍資監), 상의원(尙衣院)의 주부를 거쳐 용인 현령(龍仁縣令)으로 나갔는데, 얼마 뒤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다시 사섬시(司贍寺)와 종부시(宗簿寺)의 주부,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무인년(1638) 여름에 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어 3년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갑신년(1644)에 전주 판관(全州判官), 익위사 사어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호조 좌랑에 제수되고, 9월에 또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나갔다. 부임한 뒤에 학교를 일으켜서 선비를 기르고, 병기를 수선하고 부세를 줄여서 치성(治聲)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3년 동안 표리(表裏)를 세 번, 호피(虎皮)와 궁마(弓馬)를 각각 한 번씩 하사받았다.
인조가 승하하자 공은 스스로 성은(聖恩)에 보답하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여겨 소리 내어 울며 슬프게 사모하면서 방상(方喪)의 절차를 다하였다. 이해 겨울에 암행 어사에게 파직을 당하자 관찰사, 통제사, 절도사들이 번갈아 상소하여 공의 원통함을 호소하니, 효종(孝宗)이 다시 관직에 나아오도록 명하였다. 공은 이때 이미 병으로 누워 있어 극력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2월 3일에 집에서 작고하니, 나이 61세였다. 부음을 듣고 공경대부들이 너나없이 애석히 여겼다. 함양군(咸陽郡) 북쪽 야동(冶洞)의 참판공(參判公) 묘소 아래에 장사 지내고, 갑술년(1694, 숙종20)에 같은 묘역 묘향(卯向)의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공은 신천 강씨(信川康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병조 참판 욱(昱)의 따님으로 공보다 12년 먼저인 기묘년(1639, 인조17) 6월에 작고하니 나이 45세였다. 다시 거창 유씨(居昌劉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광도(光道)의 따님으로 공보다 1년 뒤인 신묘년(1651, 효종2) 5월에 작고하니 나이 34세였다. 모두 덕이 공의 배필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강씨 소생은 1남 7녀이고, 유씨 소생은 2남 1녀이다. 장남은 용제(用濟), 차남은 도제(道濟)인데, 모두 통덕랑(通德郞)이고, 막내는 처제(處濟)이다. 장녀는 장사랑(將仕郞) 박후문(朴後文)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선교랑(宣敎郞) 권석(權晳)에게, 삼녀는 사인(士人) 신상(申)에게, 사녀는 익위(翊衛) 최휘지(崔徽之)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 딸들은 이지원(李祉遠), 홍우엽(洪宇燁), 조시수(曺始遂), 정재화(丁載和)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사인이다. 측실(側室)의 아들은 신제(愼濟)이다.
용제의 아들은 석필(錫弼)이다. 도제의 아들은 석명(錫命)이며, 측실 소생은 석보(錫輔)이다. 처제의 아들은 석길(錫吉)이고 두 딸은 정희교(鄭希僑)와 권상원(權尙元)에게 시집갔으며, 측실 소생은 석효(錫孝)와 석로(錫老)이다. 신제의 아들은 석호(錫虎)이다. 박후문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재만(再蔓)은 진사(進士)이며 효도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차남은 재무(再茂)이고, 삼남 재화(再華)는 통정대부로 현감이며, 딸은 부사(府使) 임홍량(任弘亮), 홍서극(洪敍極), 김구상(金九相)에게 시집갔다. 권석은 2남을 두었는데, 상홍(尙弘)과 상신(尙信)이다. 신상의 아들은 경윤(景潤)이다. 최휘지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시옹(是翁)은 천거로 동몽교관이 되고, 계옹(啓翁)은 사간원 정언이며, 딸은 김석(金晳)에게 시집갔다. 홍우엽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훈(塤), 균(均), 류(㙧)이고, 딸은 이규상(李奎祥), 채제윤(蔡悌胤), 안서증(安瑞增)에게 시집갔다. 이지원, 조시수, 정재화는 모두 일찍 죽어서 자식이 없다.
내외(內外)의 손(孫)과 증손이 50여 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부친과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본래 효도하고 우애하는 집안의 전통이 있었고, 게다가 재주와 식견이 동년배들보다 뛰어났다. 또한 모난 행동을 하지 않고 오직 의(義)를 행하였다. 혼조(昏朝) 때에는 향리에 은거하면서 일찍이 세상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밝은 시대를 만나서도 강직하여 아부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는 몸가짐을 단속하여 스스로 삼가며 조심하기를 힘써서 벼슬을 그만두고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공을 생각하였고, 죽은 뒤에는 친구들이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자호(自號)를 순수(順受)라고 하고, 또 임천(任天)이라고도 하였다.
처제(處濟)가 공의 사적(事迹)을 기록해서 행장을 만들어 반남(潘南) 박공 세채(朴公世采)에게 묘갈명을 청하였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박공이 세상을 떠났다. 처제는 백부(伯父)가 우계(牛溪)에게 수학하고 내가 우계의 외손이 되기 때문에, 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情誼)로써 나를 찾아와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뒤에 태어나서 공에 대해 모르지만, 처제 및 최군 시옹(崔君是翁) 형제와 친하므로, 삼가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비는 재주 있기 어렵고 / 士難有才
재주 있는 선비는 때를 만나기 어렵네 / 才難遇時
이미 재주 있고 때를 만났으니 / 旣有旣遇
공업을 기약할 수 있거늘 / 功業可期
또한 뜻을 얻지 못하니 / 而又迍邅
누군가 저지한 듯하네 / 若或尼之
슬프다 양공이여 / 嗟哉梁公
운수의 기박함을 어찌하겠는가 / 奈數之奇
운수는 기박하지만 / 數則奇矣
본래의 행실은 변함이 없으니 / 素履無變
순수(順受)와 임천(任天)이란 자호에서 / 曰順曰任
그의 뜻을 알 수 있구려 / 其志可見
내가 글솜씨 없으니 / 我筆無文
어떻게 숨은 덕행을 밝힐 수 있으랴 / 何以闡幽
후손이 면면히 이어지니 / 子姓綿綿
여경(餘慶)을 징험할 수 있으리라 / 尙徵餘庥
[주D-001]임자년 …… 때이다 : 1612년(광해군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국문(鞫問)을 받고 변경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에 풀려난 일을 말한다.
[주D-002]백부(伯父) :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인 양황(梁榥)을 가리킨다. 《韓國系行譜 南陽梁氏》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창평 현령(昌平縣令) 심공(沈公) 묘갈명
공의 휘는 력(櫟), 자는 무경(茂卿), 성은 심씨(沈氏)이며,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11세손이다. 좌참찬을 지내고 호가 둔암(鈍庵)인 휘 광언(光彦)이라는 분이 휘 호(鎬)를 낳았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로 대사헌을 지냈다. 증조의 휘는 종민(宗敏)으로 군수를 지냈고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그의 묘지명을 지었다. 조부의 휘는 혁()인데 군수를 지냈다. 선고(先考)의 휘는 지택(之澤)인데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선비(先妣)는 영월 엄씨(寧越嚴氏)로 군수 휘 열(悅)의 따님이다.
공은 천계(天啓) 임술년(1622, 광해군14) 5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신중하였으며, 열두서너 살에 연이어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여 상제(喪制) 노릇을 어른처럼 하였다. 마침 중국 사신이 도성에 들어왔는데 집이 길가에 있어서 여러 아이들이 함께 구경하자고 졸랐지만 스스로 상복(喪服)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꼼짝 않고 응하지 않으니, 이를 본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병자년(1636, 인조14) 난리를 만나 제부(諸父)를 따라 시골구석을 떠돌다가 종조부 치헌공(恥軒公) 모(某)에게 나아가 부지런히 학문을 배우고 장가간 뒤에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치헌공이 수령으로 나가는 바람에 공이 사당의 신주(神主)를 임시로 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주를 도로 가묘(家廟)에 봉안하여 구업(舊業)을 회복하니, 외롭고 고단한 가운데에서 자신을 추슬러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은 하기 어려운 일로 여겼다.
공은 이미 일찍부터 상란(喪亂)을 만났고, 조금 장성해서는 또 집안일에 얽매여 학업에 힘을 쏟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항상 스스로 탄식하였으며, 여러 번 해액(解額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대과(大科)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정미년(1667, 현종8)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사산감역(四山監役)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신중하게 공무를 처리하였다. 관할 지역은 역관(譯官)과 시정배(市井輩)들이 무덤을 쓰면서 국금(國禁)을 범하는 경우가 많은 곳이었는데, 이들이 으레 뇌물을 주어 죄를 면하려고 했으나 공은 한결같이 법대로 처리하여 청탁과 뇌물이 모두 근절되었다. 경조(京兆 한성부(漢城府))가 어떤 일 때문에 무덤의 숫자를 파악하고자 하여 공으로 하여금 상세하게 조사하게 한 적이 있었다. 공은 즉시 무덤 곁에 각각 푯말을 세우도록 하고는 직접 달려가서 살펴보고 푯말을 뽑아 해가 저물기 전에 돌아와서 보고하니, 상관(上官)이 공의 민첩함에 탄복하였다.
경술년(1670)에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로 승진하였다. 세금을 거두고 요미(料米)를 나눠 주고 나서 남은 것이 있으면 사적인 용도로 쓰는 것이 관례였는데, 공은 그때마다 모두 하배(下輩)들에게 나누어 주니 너나없이 감복하였다. 신해년(1671, 현종12)에 큰 기근이 들어 진청(賑廳)을 설치하였는데 공이 낭청에 뽑혔다. 그때는 전염병까지 덩달아 발생하여 죽는 자들이 속출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정성을 다해 구제하여 많은 백성을 살려 내었다.
임자년(1672)에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에 제수되고, 장례원 사평(掌隸院司評)으로 옮겼으나 친혐(親嫌)으로 체차되었다. 계축년(1673)에 다시 인의 겸 한성부참군(引儀兼漢城府參軍)이 되었는데, 부리(府吏)가 자기들끼리 서로 경계하기를, “이 사람은 전에 사산감역을 지낸, 강직하고 현명한 분이다.” 하였다.
그해 가을에 창평 현령(昌平縣令)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백성과 사직이 맡긴자리이니 더욱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직 칠사(七事)에 힘썼다. 여러 사단(祀壇)을 수리하고 때가 되면 반드시 몸소 경건하게 제사를 지냈으며,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낼 때는 병풍이나 장막을 치지 않고 비가 내리면 옷이 젖는 것도 피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그의 정성에 감동하였다. 매월 몸소 성묘(聖廟)를 배알하고 기물을 점검하여 훼손된 곳이 있으면 반드시 수리하였다. 고을에 예전부터 서당이 훼손된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데, 즉시 수리하게 하고 또 글 잘하는 사람을 구하여 맡도록 하니 고을의 수재들 중에 흥기한 자가 많았다. 가난하여 시집 못 간 여자가 있으면 그 집의 가장을 불러 권면하고는 혼수 비용을 보태 주었으며, 세시(歲時) 때마다 녹봉을 떼어서 찬물(饌物)을 마련하여 경내의 노인들을 위문하였다. 또 일찍이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였는데 원근에서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노래하고 시를 읊조렸다.
무릇 관청의 명령을 어긴 자가 있으면 비록 세력 있는 자라도 일찍이 용서한 적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더욱이 옥사(獄事)에 신중하고 재판의 판결은 적체된 것이 없어서, 호인(湖人) 중에 송사(訟事)가 있으면 방백(方伯)이 대부분 공에게 맡겼고 송사에 진 자도 원망하지 않았다. 장정(壯丁)을 군적(軍籍)에 올릴 때에 어떤 백성이 지팡이를 짚고서 절름발이라고 스스로 호소하자, 공은 거짓말임을 알아채고 그의 신발을 가져오게 하여 힐문하니 그자가 즉시 자복하였다. 고을에서 도둑 몇 명을 붙잡았는데 공은 직접 치죄(治罪)하지 않고 모두 토포사(討捕使)에게 보냈으니, 이것은 대개 도둑을 잡은 것으로 상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사년(1677, 숙종3)에 공격(公格)으로 체차되어 귀향할 때, 관청에서 말을 빌렸기 때문에 백성들은 전임 수령을 전송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관청의 창고에 재물이 가득한데 어찌하여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지 않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비용을 절약하여 재물을 불려서 백성의 요역(徭役)에 보태고자 하는 것뿐이다. 남는 것이 있으면 후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남겨 두어야 한다. 어찌 남들처럼 상을 바라고 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은 친척을 잃는 것처럼 여겼다.
무오년(1678)에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에 제수되어 마지못해 반열에 나아갔다. 마침 북사(北使)가 나와서 공이 도감(都監)에 차출되었는데, 관반(館伴) 오시수(吳始壽)가 계사를 잘못 아뢰고는 허물을 공에게 돌리는 바람에 체직되었다. 계해년(1683) 가을에 회덕 현감(懷德縣監)에 보임되었으나, 또 공격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병인년(1686) 2월 17일에 숙환으로 서울 집에서 작고하니, 향년 65세였다.
공은 가정에서의 행실을 잘 닦고 매일 반드시 사당을 배알하였으며, 제사 때에는 반드시 목욕하여 청결하게 하였고 일찍이 세속에서 꺼리는 바에 구애되어 그만둔 적이 없었다. 철철이 나온 햇것은 아무리 값이 비싸고 귀해도 즉시 갖추어 올렸고, 묘제(墓祭)의 제수(祭需)는 반드시 감봉(監封)한 뒤에 가지고 가서 몸소 잘 익었는지 살핀 다음 진설하였다. 삭망제(朔望祭)에 필요한 물건은 반드시 날짜를 헤아려 미리 갖추어 놓아 때에 닥쳐서 군색한 적이 없었다. 삼세(三世)의 묘도(墓道)에 비지(碑誌)가 모두 없어서 힘을 다해 마련하려고 했으나 비석도 세우지 못한 탓에 임종 때의 유언이 매우 세밀하였다.
항상 부모를 일찍 여의어 장례를 정성 들여 치르지 못한 것을 애통스럽게 여겨, 처상(妻喪) 때에 장례를 되도록 검소하게 치르려고 애썼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그렇게 하도록 경계하였다. 제부(諸父)를 섬김에 있어서는 한집에 살면서 시봉(侍奉)하여 일찍이 역병(疫病)을 만나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한번은 숙환이 위독하자 걸어서 의원과 약물을 구하러 다니느라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초상이 나면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상차(喪次)를 떠나지 않았고 소식(素食)은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하였다.
누이 하나가 있었는데 시집보낼 때에 의복과 집기를 제대로 갖추자, 시댁에서는 부모가 살아 계시더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감탄하였다. 그런 누이가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자 매양 불쌍히 여긴 나머지 고을 수령으로 나갈 때 데리고 가서 돌보았다. 아우 부사공(府使公)과 날마다 만나 함께 식사하며 같이 잠을 잤으며, 또 경기에 있는 전장(田莊)을 빌려 주어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을축년(1685, 숙종11)에 부사공이 광릉(廣陵)에 유배되었는데, 공이 이때 병석에 누워서 말하기를, “병중에 서로 떨어져 있으니 어찌 괴로운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하고, 즉시 가마를 타고 가서 몇 달 동안 함께 지냈으니, 동기간의 우애가 이처럼 돈독하였다.
사정이 곤란하고 급박한 사람을 만나면 힘닿는 대로 구제하고, 빌려 준 것을 갚지 않아도 내버려 두고 따지지 않았다. 친구 중에 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약간의 베와 곡식이나마 반드시 부의(賻儀)를 하였으며, 혹시 염습(斂襲)할 것이 없으면 새 옷이라도 벗어서 주었다.
평소에는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으며, 병이 있지 않고서는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의복과 음식은 맛있고 좋은 것을 구하지 않았으며, 비록 웃옷이라도 기워 입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거처는 안락한 것을 구하지 않았고, 병이 들었을 때도 병풍과 족자 같은 사치품을 물리쳤다. 기용(器用)은 수수하고 허름하였으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찍이 진기한 물건은 간직하지 않았다.
다만 서적만은 매우 좋아하여 집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팔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팔아 책을 사서 자손을 가르쳤다. 잡객(雜客)을 사귀지 않았고 잡희(雜戱)를 베풀지 않았으며, 오직 서책에 전심하였다. 평소에 몸가짐이 구차하지 않았고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일찍이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말년에 한가롭게 지낸 거의 10년 동안 벼슬을 구하는 데에 뜻이 없었다. 아무리 서로 친한 자라도 높은 벼슬로 올라가면 그 집 대문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일에 있어서는 매양 스스로 만족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관직은 내직과 외직을 역임하였고 수(壽)는 선조들만큼 누렸다. 먹고살기 위해 구차하고 천박하게 행동하는 자가 많은 것을 보건대,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도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에 나는 만족한다. 어찌 또한 분수 밖의 것을 구하려고 애쓰겠는가.” 하였다.
벼슬한 이후로 무릇 관청의 물건이 아무리 작고, 또한 으레 받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번번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나라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니,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저 탐욕스러워 나라를 저버린 자들은 비록 죽는다고 하더라도 동정할 가치도 없다.” 하였다.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에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는데 일찍이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연달아 국상(國喪)을 당해서는 한데에서 거처하며 성복(成服)할 때까지 반드시 슬픔을 다해 곡(哭)을 하였다.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상을 당해서 공은 병이 한창 심했지만 억지로 일어나 수레를 재촉하여 가서는 남의 부축을 받고 곡반(哭班)에 나아가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공의 충심과 정성에 감탄하였다.
남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성품이었고, 사람을 대하면 그가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를 제대로 분변하였으며, 남의 옳지 못한 점을 보면 면전에서 꾸짖거나 그렇게 하지 않을 바에는 묵묵히 떠났다. 공을 아는 자는 아무개는 남들에 대해서 속을 훤히 아는 것 같아 참으로 두렵다고 하였다. 중과 무당을 몹시 싫어하여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는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엄금하였다. 하나뿐인 손자가 중병에 걸리자 집안사람들이 귀신에게 빌려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누이가 몰래 귀신에게 빌려고 하였는데, 공이 이를 알고 심하게 책망하기를,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이 정한(定限)이 있는데 어찌하여 괴이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공의 뛰어난 식견이 또한 이와 같았다. 이것은 모두 공의 질박한 행실이다.
공은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참판에 추증된 진량(震亮)의 따님으로 부덕(婦德)과 부용(婦容)을 아울러 갖추고 부녀자의 직분을 잘 수행하였다. 공이 예를 갖추어 선조를 받들고 집안을 잘 다스리고 우애가 더욱 두터웠던 것은 내조가 컸기 때문이다. 병인년(1626, 인조4)에 태어나 병신년(1656, 효종7)에 작고하였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정희(廷熙)이다. 계취(繼娶)는 연안 김씨(延安金氏)로 사인(士人) 민성(敏成)의 따님이고, 또한 부덕이 있어서 친척들이 칭찬하였다. 기묘년(1639)에 태어나 정미년(1667, 현종8)에 작고하였다.
공을 처음에 광주(廣州)에 장사 지냈고, 기사년(1689, 숙종15) 10월에 이천(利川) 둔지산(屯知山) 후곡리(後谷里) 건좌손향(乾坐巽向)의 언덕으로 천장(遷葬)하였는데, 두 숙인(淑人)은 모두 공과 합장하였다.
정희는 첨지 이헌(李藼)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준(埈)이다. 준이 부제학 윤진(尹搢)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규진(奎鎭)과 성진(星鎭)이다.
옛날에 죽은 벗 송자문(宋子文)은 공의 이종 아우인데, 나는 처음에 자문(子文)을 통해 공을 알고서 공의 정성과 충후함을 흠모하였다. 이때 우리 선친께서 바야흐로 《우계집(牛溪集) 속집(續集)》을 편찬하고 있었는데, 공의 증조 군수공(郡守公)은 바로 우계의 문인이다. 공으로부터 우계의 편지를 얻은 것이 매우 많았는데, 공이 구가(舊家)의 문헌을 조심스럽게 지켜 왔음을 또한 징험할 수 있다. 공이 작고하고 7년 뒤에 맏아들이 와서 묘문(墓文)을 부탁하였는데, 나는 병들고 고루한 사람이라고 사양하였으나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서술하고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그 사람을 관찰해 보니 / 我觀於人
타고난 성품이 으뜸이었고 / 天賦爲最
게다가 보고 배운 곳도 있어서 / 加以濡染
그 쓰임 또한 컸도다 / 其用亦大
아 심공은 / 嗟惟沈公
그 바탕이 참으로 아름답고 / 信美其質
더구나 그대 연원은 / 矧爾淵源
벗들이 기술한 바이다 / 德友攸述
집에 있으나 벼슬에 있으나 / 于家于官
어진 마음 한량없었고 / 良心藹然
비록 입신양명은 못 했지만 / 雖未顯揚
그 행실은 전할 만하네 / 其行可傳
학문이 뛰어난 자식도 있고 / 有子有學
재주 있는 손자도 있으니 / 有孫有才
내가 여경을 증거하여 / 我徵餘慶
후손들을 면려하노라 / 用勖方來
[주D-001]치헌공(恥軒公) 모(某) : 심집(沈)을 가리킨다. 《南溪集 外集 卷14 昌平縣令沈公墓誌銘, 韓國文集叢刊 142輯》
[주D-002]칠사(七事) : 수령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로, 농상(農桑)을 진흥하고, 호구(戶口)를 늘리고, 학교(學校)를 일으키고, 군정(軍政)을 잘 다스리고,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고, 사송(詞訟)을 간결하게 하고, 간활(奸猾)이 없어지게 하는 일을 말한다. 《經國大典 吏典》
[주D-003]아우 부사공(府使公) : 심익선(沈益善)을 가리키는데, 심지원(沈之源)의 양자로 나갔다. 《韓國系行譜 靑松沈氏》
[주D-004]광릉(廣陵) : 경기도 광주(廣州)의 별칭이다.
[주D-005]인경왕후(仁敬王后) : 1661~1680. 숙종의 비(妃)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주D-006]송자문(宋子文) : 송두장(宋斗章:1634~1671)을 가리킨다. 윤선거(尹宣擧)의 문인이며, 명재의 친구이다. 《明齋遺稿 卷46 處士宋君行狀, 韓國文集叢刊 136輯》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한공(韓公) 묘갈명
공의 휘는 필명(必明), 자는 회이(晦而)이며,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시조 란(蘭)은 고려의 통합삼한 공신(統合三韓功臣)이고 후손은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 고려 말에 휘 수(脩)라는 분이 있는데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분이 휘 상경(尙敬)을 낳았는데 우리 조선에 들어와 개국 공신(開國功臣) 영의정이 되었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두 대를 지나 휘 계희(繼禧)에 이르렀는데, 익대 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 우찬성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공의 6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윤창(允昌)인데 예조 참판을 지냈고, 증조의 휘는 극공(克恭)인데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지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조부의 휘는 천뢰(天賚)인데 성균관 생원이었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효중(孝仲)인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선비(先妣)는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후손인 감찰(監察) 언형(彦亨)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정유년(1597, 선조30) 3월 5일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장성해서는 학문과 품행이 모두 훌륭하니, 사람들이 큰일을 해낼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글 짓는 솜씨 또한 당시 동류(同類)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인조 갑자년(1624, 인조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청의(淸議)를 견지하는 데 힘썼다.
무진년(1628)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를 살면서 상복을 벗지 않았고 너무 슬퍼하다가 몸을 상한 탓에 병이 들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고 곧이어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며, 계유년(1633)에 위솔(衛率)로 승진하였다. 을해년(1635)에 공조 좌랑으로 옮겼는데 사소한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병자년(1636) 겨울에 오랑캐 군대가 쳐들어와서 대가(大駕)가 몽진(蒙塵)할 때 모부인(母夫人)이 차남이 있는 청풍군(淸風郡) 임소(任所)로 피난 가려고 하였다. 공은 ‘노친(老親)은 아무 탈이 없으며 지금 의지할 곳이 있지만, 임금께서는 위급한 상황이니 참으로 신하로서 목숨을 바칠 때이다. 내가 비록 벼슬이 없다 하더라도 의리상 떠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임금을 호종하였다.
난리가 끝난 뒤에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에 제수되고, 창녕 현감(昌寧縣監)으로 나갔다. 이때는 전란이 끝난 어수선한 시기여서 관청의 일이 문란하였는데 공은 자신을 검속하고 쇠잔한 고을을 소생시켜 치적(治績)이 날로 드러났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모부인이 청풍에서 돌아와 여강(驪江)에서 우거(寓居)하자, 공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모셨고, 창녕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0월에 정시(庭試)에 급제하였다.
임오년(1642)에 예조 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연이어 제수되고, 계미년(1643)까지 2년 동안 여러 차례 양사(兩司)에 들어가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는데, 논의가 공평하고 정직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일찍이 아전(亞銓)으로 있는 자가 제멋대로 사욕을 부려도 사람들이 모두 눈만 흘길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는데, 공이 탄핵하여 파직시키자 모두 공의 위풍에 감복하였다.
갑신년(1644)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너무 고집스럽게 상제(喪制)를 봉행한 탓에 마침내 이해 5월 18일에 여주(驪州) 묘소 곁의 여막(廬幕)에서 작고하니, 나이 겨우 48세였다.
공의 기질은 순수하고 총명하며, 언어는 소탈하고 과묵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분명하였고, 지기(志氣)는 높고 굳세지만 사무(事務)는 너그럽고 여유가 있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일가친척들이 공의 돈독하고 화목함을 칭찬하고 벗들이 공의 신의(信義)를 추중(推重)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담박한 생활을 하여 처자가 추위와 배고픔을 면하지 못하였고, 벼슬할 때는 청렴하고 검약하여 물건 하나도 자기 것으로 취한 적이 없었다. 훤칠한 용모에 풍채가 준수하여 유생(儒生) 때부터 이미 명성이 있었고, 과거에 급제한 뒤로는 더욱 두터운 명망을 받으니 사람들이 한 시대의 명류(名類)를 헤아릴 때 가장 먼저 손꼽았다. 불행하게도 상(喪)을 감당하지 못하고 상중에 죽으니 사람들이 너나없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공의 배위(配位)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승지 호(頀)의 따님이고, 후배(後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현감 봉룡(鳳龍)의 따님이다. 모두 부덕(婦德)이 있어 시부모를 잘 섬기고 남편의 뜻을 순종하여 받들었는데 모두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2녀 1남을 두었는데, 장녀는 현감 조종면(趙宗冕)에게 시집갔으며 민씨 소생이다. 차녀는 군수 윤전(尹塼)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여천(如川)인데 이씨 소생이다.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여범(如范)이고 딸은 출신(出身) 이거병(李去病)의 처가 되었다.
여천은 창강(滄江) 조속(趙涑)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태기(泰箕), 우기(佑箕), 범기(範箕), 윤기(允箕)이고, 사위는 정의주(鄭儀周), 이만시(李萬始), 생원 박태주(朴泰冑)이다. 조종면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봉사(奉事) 의한(儀漢), 의정(儀廷), 의헌(儀獻), 생원(生員) 의화(儀華)이고, 사위는 이후정(李後鼎), 윤의준(尹毅駿)이다. 윤전은 1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세탁(世鐸)이고, 사위는 이성석(李聖錫), 진사 이사원(李思遠), 이징해(李徵海), 이기헌(李箕獻), 민중기(閔仲基), 이신(李藎)이다.
태기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조(鳴朝)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우기는 2남 1녀를 두었고, 범기는 1남 1녀를 두었으며, 윤기는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내외(內外)의 손(孫)과 증손이 40여 인이다.
공을 처음에 여주(驪州) 흥곡(興谷)에 장사 지냈고 배위 두 분은 모두 묘(墓)를 각각 썼는데, 임신년(1692, 숙종18)에 흥곡 사향(巳向)의 언덕으로 이장하고 배위 두 분을 아울러 합장하였으니, 선친 판서공(判書公)의 묘소 왼쪽 산기슭이다.
여천은 나이 겨우 열세 살에 부모를 모두 여의었고, 일찍부터 병을 앓았다. 집에서는 우애가 있고 분수를 지키며 졸렬함을 기르니, 친지 중에 천거하려는 자가 있었으나 바라지 않았다. 실로 집안을 이을 훌륭한 자식이었으나 불행하게도 명운(命運)이 없어 세상을 뜨니, 공을 아는 자들이 거듭 슬퍼하였다.
공이 작고한 지 거의 50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으니, 이것은 대개 합장한 뒤에 세우려다가 미처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기 등이 공의 조카인 처사(處士) 예산공(禮山公) 여해(如海)에게 공의 행장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고, 우기가 그 행장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나는 공을 생전에 만나 뵙지 못했지만 예산공이 우리 선인(先人)과 교분이 깊고, 우기가 또 나와 서로 종유(從遊)하며 몸가짐도 바르니, 정의(情義)로 보아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명을 붙인다. 다만 노쇠하고 비루하며 글재주도 없는 나로서는 공의 행적을 영원히 전하는 데에 부족하니, 이 점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충성심도 있고 효성도 있으며 / 有忠有孝
문채도 있고 바탕도 있도다 / 有文有質
이미 이름을 떨쳤고 / 旣已蜚英
뭇사람의 기대가 한창 성하였는데 / 輿望方蔚
어찌 액운의 해를 만나서 / 胡戹于年
포부도 제대로 펴지 못했단 말인가 / 展布不卒
어진 자식 있었으나 / 有子克賢
또한 일찍 죽었도다 / 亦復沈淪
이치는 반드시 선행에 보답하고 / 理必報善
기운은 굽히고 펴지는 때가 있도다 / 氣有屈伸
비석에 글을 새겨 / 劖之于石
후인을 면려하노라 / 用勖後人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해주 목사(海州牧使) 민공(閔公) 묘갈명
내가 옛날 시남(市南 유계(兪棨)) 유 선생(兪先生)의 문하에 있을 때 여흥(驪興) 민공(閔公)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들었다. 그 뒤에 마침내 칠산(七山)에서 만나 뵈었는데 매우 환대해 주신 것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공이 작고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공의 맏아들 백기(伯基)가 깊은 산골짜기까지 찾아와서 공의 묘명(墓銘)을 부탁하였는데, 나는 노쇠하고 고루하며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였으나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민씨는 고려 때부터 현달하여 대대로 이름난 인물이 있었다. 휘(諱) 세영(世榮)은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관직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으니, 바로 공의 9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총(叢)인데 전첨(典籤)을 지냈고, 증조의 휘는 치중(致中)인데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의 휘는 호(頀)인데 승지를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응경(應慶)인데 부사(府使)를 지냈고, 선비(先妣)는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현감 몽원(夢轅)의 따님이다.
공의 휘는 도(燾)이고, 자는 태초(太初)인데, 만력 정미년(1607, 선조40)에 태어났다. 성품은 소탈하고 국량이 있었으며, 약관(弱冠)에 사람들이 재상(宰相)이 될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1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갑신년(1644)에 처음으로 벼슬하였다. 사직서(社稷署)와 경기전(慶基殿)의 참봉,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를 거쳤고, 도감에서 공로가 있어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로 승진하였다. 의금부 도사, 호조의 좌랑과 정랑, 평시서 영(平市署令)으로 여러 차례 옮겼다. 계사년(1653, 효종4)에 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제수되고, 3년 있다가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 추념하였다.
정유년(1657)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기해년(1659)에 함흥 판관(咸興判官)에 제수되었는데 1년도 못 되어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경자년(1660, 현종1)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계묘년(1663)에 공조 정랑,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역임하였다. 갑진년(1664)에 평산 부사(平山府使)에 제수되고, 얼마 뒤에 파직되어 돌아오게 되었는데, 노소(老少)의 고을 백성들이 수레를 붙잡고 길을 막았는데, 마치 옛날 백성들이 수레바퀴 앞에 누운 고사와 같았다.
병오년(1666, 현종7)에 김제 군수(金堤郡守)에 제수되었는데, 당시에 고을이 오랫동안 피폐한 탓에 조정에서 특별히 선발하여 등용한 것이다. 공은 부임한 뒤로 묵은 폐단을 완전히 없애고, 폐지되고 실추된 것을 회복하였으며, 관사(館舍)와 역참(驛站)을 잘 수리하고 창고의 비축을 넉넉하게 불려서 마침내 김제를 호남의 어엿한 고을이 되게 하였다.
사인(士人) 한 사람이 있었는데 부모가 함께 역질(疫疾)에 걸려 거의 죽게 되자 자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모의 입에 흘려 넣으니 기절했던 부모가 다시 살아났다. 또한 양가의 딸이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적변(賊變)을 만나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가 적의 칼날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자기 몸으로 대신 막았으나 요행히 죽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혼인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가난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공은 두 집안의 부형(父兄)에게 말하여 두 사람을 결혼시키도록 하고 의복 등 여러 혼수품은 모두 관청에서 마련하도록 하니, 남쪽 지방 사람들이 미담으로 전하고 있다.
경술년(1670)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에 제수되고, 신해년(1671)에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한성부 서윤으로 옮겼다. 이해에 크게 기근이 들어 조정에서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하고 공을 낭청으로 삼았다. 공이 정성을 다해 맡은 일을 처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태하지 않으니, 아전들이 속이지 못하고 사람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공의 후세에 필시 음보(陰報)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진휼이 끝난 뒤에 배천 군수(白川郡守)로 나갔다가 곧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승진하였다. 임자년(1672)에 나이가 많은 것을 핑계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감사가 공의 치적을 중히 여겨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 계축년(1673)에 비로소 체차되어 돌아왔다. 을묘년(1675, 숙종1)에 군함(軍銜)으로 선혜청 낭청을 겸대하였다. 정사년(1677)에 장악원 첨정에 제수되고 기미년(1679)에 체직되어 한거(閑居)하였다.
대개 공은 치사(致仕)할 나이가 된 뒤로 세상에 뜻이 없어서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해 놓고 도서(圖書)와 화죽(花竹)으로 유유자적하였다. 매양 시절(時節)이 되면 그때마다 내외종 형제를 초대하여 단란하게 술을 마시며 하루 종일 즐겁게 보냈다. 또 낙사(洛社)에서 기로계(耆老稧) 모임을 가진 고사를 본받아 삼짇날과 중구일(重九日)의 좋은 때에 진솔회(眞率會)를 만드니, 보는 사람들이 부럽게 여겼고 심지어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세상에 전하기까지 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9) 가을에 병에 걸려 비록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으나 의관(衣冠)을 폐하지 않았고, 문후하러 온 자는 친소(親疏)와 노소(老少)를 불문하고 모두 병석으로 맞아들여 평소처럼 담소하였다. 병이 심해지자 친척들에게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밤낮과 같다. 나는 건장한 아들 셋을 두었고, 벼슬은 주목(州牧)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나이는 여든 살에 이르렀으니, 내가 또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하였다. 갑자년(1684) 5월 28일에 성남(城南)의 집에서 작고하여, 8월에 통진(通津) 문수산(文殊山)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처음에 공의 백부(伯父) 참찬공(參贊公) 휘(諱) 모(某)가 부사공(府使公)과 한집에서 살았는데 서로 사재(私財)를 쌓아 두지 않았고, 기쁘고 즐겁게 살면서 집안에 이간질하는 말이 없어 사대부 집의 모범이 되었다. 공은 일찍부터 가정의 가르침이 몸에 배어 효도와 우애를 돈독하게 행하고 형제들과 의식(衣食)을 함께하였다. 매일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형제들이 부모의 좌우에서 빙 둘러 모시니 온 집안이 화기애애하였다. 이미 연이어 양친을 여의었기 때문에 참찬공 내외를 부모를 모시듯이 섬겼고, 참찬공의 상을 당해서는 부모상처럼 슬픔을 다하였다.
두 아우가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아우에 대한 말이 나오면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를 여읜 조카들을 양육하고 때에 맞게 혼수를 다 갖추어 혼인을 시켰다. 중씨(仲氏) 첨정공(僉正公)의 장지(葬地)가 국법(國法)을 어겼다는 관리들의 무고를 받아, 그의 양자인 창기(昌基)가 약관에 상복 차림으로 감옥에 갇혔다. 공이 이때 평산(平山) 임소(任所)에 있었는데 급히 달려와 자청해서 말하기를, “가사(家事)는 큰아들에게 맡겨야 하니 대신 죄를 받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끝내 이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고도 개의치 않자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누이들이 일찍 과부가 되자 매우 가엾게 여겨 계속해서 보살펴 주고, 친척 중에 빈궁한 자까지 반드시 온 힘을 다해 돌보고 구제해 주니, 너나없이 공을 친애하고 존경하였고 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찾아왔다. 공에게 촌수가 먼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높은 벼슬에 있어서 문정(門庭)이 매우 성했으나, 공은 담담하게 스스로 분수를 지키며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그가 영락하게 되어서도 친척의 의리를 폐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처신을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남들과 사귈 때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자신을 드러내어 과시하지 않았으며, 천한 종들에게도 매우 은혜롭게 대우하였으니, 공의 온화하고 돈후함은 타고난 성품이었다.
관직에 있을 때는 반드시 폐지된 것을 일으키고 쇠잔한 것을 소생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다. 비록 조정의 명령이라도 만일 백성에게 불편한 것이 있으면 따르지 않기도 하였다. 해주 목사로 있을 때에 조정에서는 경술년(1670, 현종11)과 신해년(1671)의 큰 흉년 뒤로 군오(軍伍)가 부족하게 되자 장정(壯丁)을 군적에 올리라는 명을 거듭 내렸는데 기한이 매우 촉박하였다. 공은 떠돌아다니는 호구(戶口)가 열에 하나도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풍년을 기다려 준행하기를 청하니, 감사가 조정에 그대로 아뢰었다. 비변사가 공을 무고하여 붙잡아 오기를 청하여 공이 심문을 받았는데, 백성의 실정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자세히 진달하니 상이 특명으로 도로 잉임하고 전에 내린 명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여러 도에도 똑같이 시행하도록 명을 내리니 먼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더욱이 공은 번거롭고 시급한 일을 잘 처리하는 데에 뛰어났고, 강직함과 명민함, 위엄과 은혜로 한 도에서 크게 칭송을 받았다. 판결하기 어려운 송사는 번번이 공에게 넘겼지만 즉시 옳고 그름을 분변하여 송사에 진 자도 원망이 없었다. 금시(金矢)가 들어오면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고 하나도 자기 것으로 차지하지 않았으며,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고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고서도 재산을 불린 것이 없었다.
공은 평소에 모난 행동을 하지 않고 과장(科場)에서도 마음가짐이 구차하지 않으니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는 점이 있었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명성이 자자하니 사람들이 모두 조만간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끝내 급제하지 못하여 마침내 음직(蔭職)에 국한되어 크게 포부를 펴지 못했기 때문에 공을 아는 자들이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언양 김씨(彦陽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안주 방어사(安州防禦使)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준(浚)의 따님이다. 부덕(婦德)을 잘 갖추었고 딸 둘을 낳고 작고하였는데, 공의 묘소와 같은 묘역에 있으나 봉분이 다르다. 재취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사인(士人) 문형(文炯)의 따님인데, 1녀 3남을 낳았다.
장남은 백기(伯基), 차남은 중기(仲基), 막내는 계기(季基)이다. 장녀는 사인 정수성(鄭洙成)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사 유명필(兪命弼)에게 시집갔으니, 곧 시남(市南)의 차남이다. 삼녀는 송징은(宋徵殷)에게 시집갔는데, 문과(文科) 출신으로 직장(直長)이다. 측실 자식으로 윤기(潤基)가 있다.
백기는 2남을 두었는데 정(禎)과 상(祥)이며, 사위는 심달현(沈達賢)이다. 계기는 2남을 두었는데 진(禛)과 의(禕)이며, 딸은 어리다. 정수성은 계자(繼子) 우주(宇柱)를 두었는데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이고, 사위는 한영서(韓永敍)이다. 유명필은 경기(敬基)라는 1남을 두었는데 요절하였고, 사위는 이후곤(李厚坤)이다. 송징은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정명(正明)은 진사이고, 차남은 성명(成明)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윤기는 2남을 두었는데, 유()와 오(祦)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사람을 논평할 때 / 古者論人
어짊과 능력을 가지고 했는데 / 曰賢曰能
어진 이는 덕에 의하여 선발되고 / 賢由德選
능력 있는 이는 재주로써 일컬어졌다오 / 能以才稱
내가 민공을 살펴보건대 / 我觀閔公
거의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으니 / 庶皆有之
어떤 지위이든 어떤 자리이든 / 以位以職
공에게 맞지 않으랴마는 / 奚處不宜
어찌하여 크게 드러나서 / 曷不大闡
원대한 포부를 다 펴지 못했던고 / 用展遠步
벼슬이 국량에 걸맞지 않아 / 官不稱器
사업을 크게 이루지 못했네 / 業未大措
오직 장수를 누려 / 惟享有壽
진실로 만년을 즐겼고 / 寔娛晩景
자기의 복록을 남겨서 / 留其餘祿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네 / 以遺子姓
죽은 것을 애통해 말라고 / 乘化無怛
천명을 아는 이가 말했네 / 達命有言
공을 알려고 할진댄 / 有欲知公
오히려 이 글에서 징험할 수 있으리 / 尙徵斯文
[주D-001]칠산(七山) : 충청도 임천군(林川郡)에 있는 지명으로, 1687년(숙종13) 이곳에 칠산서원(七山書院)을 세워 유계(兪棨)를 향사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7 忠淸道 林川郡》
[주D-002]수레바퀴 …… 고사 :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 관원의 유임을 청하는 말이다. 후패(侯覇)가 왕망(王莽) 초기에 회평대윤(淮平大尹)으로 있을 때 정치를 잘하였다. 왕망이 패(敗)한 뒤 경시(更始) 원년(23)에 사신을 보내어 후패를 부르려고 하자, 그곳 백성들이 사신의 수레를 막기도 하고 수레바퀴 앞에 누워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後漢書 卷26 侯霸列傳》
[주D-003]치사(致仕)할 나이 : 치사는 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두는 것으로, 《주례(周禮)》에 대부는 70세에 치사한다고 하였다.
[주D-004]낙사(洛社)에서 …… 고사 : 문언박(文彦博)이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있을 때에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모방하여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등 13인의 학덕(學德) 높은 노인들과 함께 만든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말한다.
[주D-005]진솔회(眞率會) :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참석한 순서대로 자리에 앉아 친목을 도모하는, 형식을 초월한 연회(宴會)를 말한다. 사마광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양(洛陽)에 있을 때에 고로(故老)들을 모아 만든 모임이다.
[주D-006]백부(伯父) …… 모(某) : 민응형(閔應亨)을 가리킨다. 《萬姓大同譜 驪興閔氏》
[주D-007]중씨(仲氏) 첨정공(僉正公) : 민후(閔煦)를 가리킨다. 《萬姓大同譜 驪興閔氏》
[주D-008]금시(金矢) : 옥송(獄訟)을 벌일 때 소송 쌍방이 관가(官家)에 맡기는 물건인데, 판결이 나면 이긴 자는 금(金)과 시(矢)를 돌려받고, 패한 자는 몰수당한다. 《주역(周易)》 〈서합괘(噬嗑卦) 구사(九四)〉의 〈본의(本義)〉에 “《주례(周禮)》에 ‘옥송을 할 경우 균금(鈞金)과 속시(束矢)를 납입한 뒤에 송사(訟事)를 다스린다.’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주D-009]죽은 …… 말했네 : 원문의 무달(無怛)은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의 ‘무달화(無怛化)’에서 나온 말인데, 죽음을 슬퍼하며 호들갑을 떨어 죽은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고 조용히 죽게 하라는 뜻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형조 정랑(刑曹正郞) 이군(李君) 묘갈명
고(故) 형조 정랑 이군 공권(李君公權)의 자는 평중(平仲)이요, 그의 선조는 공주(公州) 사람이다. 휘 명성(明誠)은 고려에서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지냈으나,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벼슬하지 않고 이천(伊川) 산중에 은거하다가 작고하였다. 4세(世)를 지나 휘 경지(慶祉)에 이르렀는데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군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건(鍵)인데 젊어서 재주가 뛰어났으나 늦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도시 정(司䆃寺正)에 그치니, 당시 사람들이 지위가 덕(德)에 걸맞지 않다고들 하였다. 조부의 휘는 장욱(長郁)인데 승의랑(承議郞)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즙(檝)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선비(先妣)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세마(洗馬) 선(瑄)의 따님이다.
군은 숭정(崇禎) 신사년(1641, 인조19)에 태어났다. 어릴 적에 준수한 용모에 미목(眉目)이 훤칠하고 글재주가 출중하였다. 장성해서는 큰형 공간(公榦) 정백(貞伯)과 함께 과장(科場)에서 명성을 날렸다. 계묘년(1663, 현종4)에 사마 양시(司馬兩試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계축년(1673)에 벼슬길에 올라 내직으로는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 형조 좌랑,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 의금부 도사, 한성부 판관, 외직으로는 순안(順安), 강서(江西), 신계(新溪)의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병자년(1696, 숙종22)에 다시 추조(秋曹 형조(刑曹))로 들어와 정랑이 되고, 8월에 관직에 있으면서 작고하니, 나이 겨우 56세였다. 10월에 인천(仁川) 소래산(蘇來山) 진향(辰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군은 타고난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부모를 섬길 때에는 정성과 사랑을 곡진하게 다하고, 옛사람이 어린아이 놀이를 한 것처럼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였다. 형을 섬길 때에는 늙도록 한결같이 온화한 태도로 화락하게 지냈으며, 형의 상을 당해서는 무더운 날씨에도 상복 일체를 갖춰 입으니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로 여겼다.
전후로 직임을 맡아 관직에 있으면서는 법도를 준수하고 청탁을 근절하였으며, 생업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으나 친구 가운데 궁핍한 자가 있으면 힘닿는 대로 도와주었다.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아전들을 단속하고 백성들에게 잘해 주며 학문을 권장하고 폐단을 제거하여 역임한 고을마다 유애(遺愛)가 있었는데 순안(順安)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추념하였다.
이보다 앞서 참판공이 해서(海西)에서 유락(流落)하였는데 군의 형제를 낳고 나서 윤 부인(尹夫人)과 함께 “시골구석은 자식들이 살 만한 곳이 아니다.”라고 의논하고는 마침내 식솔을 거느리고 서울로 들어왔는데, 집은 세내어 살고 먹을 것은 부족하였지만 군의 형제가 유학(遊學)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 주었다. 군의 형제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집안이 쇠퇴한 것을 탄식하고는 반드시 입신양명하여 양친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과거 공부에 끊임없이 힘을 쏟았으나 끝내 한 번도 합격하지 못하였다. 아, 그것은 운명이라고 하겠다.
배위(配位) 함양 여씨(咸陽呂氏)는 영의정 성제(聖齊)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섭(爕), 형(瑩), 혁(㷜)이며, 사위는 윤인교(尹仁敎)이다.
섭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연세(延世), 안세(安世), 관세(觀世)이다. 윤인교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동정(東鼎), 동로(東輅)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나는 군과 내외종 형제로서 함께 사도시 정 부군(府君)에게서 나왔으나 일찍 모친을 여읜 까닭에 외가 쪽과 친밀하고 의지하는 정이 각별하였다. 다만 멀리 한쪽에 칩거하고 있어서 서로 자주 만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는데, 군이 나보다 10여 세나 적은데 어찌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섭(爕) 등이 묘문을 부탁하였는데, 차마 지을 수도 없고 차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마침내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장이 크게 드러나지 못했으니 / 文未大闡
운수가 어쩌면 그리도 기박한가 / 數何奇也
천수를 누리지 못했으니 / 壽未遐享
또한 슬프도다 / 又可悲也
오직 그의 아름다운 행실은 / 唯其懿行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니 / 孝且友也
내가 그의 실상을 적어서 / 我書其實
후세에 보이노라 / 可示後也
[주D-001]옛사람이 …… 것 :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 앞에서 재롱을 피웠다는 말이다. 옛날에 노래자(老萊子)가 70세의 나이에도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高士傳》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형조 참의 김공(金公) 묘갈명
공의 휘는 중일(重鎰), 자는 백진(伯珍), 성은 김씨(金氏)이며, 계통은 신라에서 나왔다. 휘 선평(宣平)은 고창 성주(古昌城主)로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甄萱)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책훈(策勳)되어 태사(太師)가 되었으니, 이분이 시조이다. 고창은 지금의 안동(安東)인데, 자손이 마침내 안동인이 되었다.
태사 이후로 벼슬아치가 계속 나왔는데 휘 득우(得雨)에 이르러서 본조(本朝)에 들어와 전농시 정(典農寺正)이 되었다. 4세(世) 뒤에 휘 영수(永銖)는 관직이 장령(掌令)에 이르렀고 승지 휘 영(瑛)을 낳았다. 승지가 별제(別提) 휘 생락(生洛)을 낳았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규보(奎報)인데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의 휘는 량(樑)인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광수(光燧)인데 재주가 있고 국량이 커서 여러 차례 군읍(郡邑)을 맡았다. 관직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향년은 91세였으며, 공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됨에 따라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광평대군(廣平大君) 휘 여(璵)의 후손이자 감역(監役) 휘 탁(倬)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임인년(1602, 선조35) 4월 2일에 서울 북부(北部)의 고을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열흘도 안 되어 큰 호랑이가 밤에 집 안에 들어왔는데 점쟁이에게 점을 치니, “아이가 귀하게 될 운명이다. 호랑이가 길조(吉兆)를 알린 것이니 재앙은 아니다.” 하였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빼어났고 재기(才氣)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차츰 장성하자 문사(文思)가 날로 진보하였다. 16세에 첨지(僉知) 이공 식립(李公植立)의 문(門)에 위금(委禽)하니, 이공이 이르기를, “자네는 기상이 범상치 않지만 혈기가 앞서니 마땅히 법도를 따라야 한다.” 하고, 이에 《소학(小學)》을 주니 공이 그 말에 느낀 바가 있어 마음을 고쳐먹고 장인에게 배워서 옛날 습관을 완전히 바꾸었다. 만년에 항상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외물(外物)로 치닫지 않은 것은 장인의 힘이다.”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병인년(1626)에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기사년(1629)에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계유년(163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을해년(1635)에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형조 좌랑으로 옮겼으며, 겨울에 사서(司書), 정언(正言), 직강(直講)을 역임하였다. 병자년(1636)에 어가(御駕)를 남한산성(南漢山城)까지 호위하였고, 독전 어사(督戰御史)로서 북문(北門)의 군사를 감독하였다. 정축년(1637) 봄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친 동지공(同知公)이 그때 면천(沔川)의 수령으로 있었기 때문에 공격(公格)으로 체차되어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지평(持平)으로 옮겼다.
무인년(1638) 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심양(瀋陽)에 갔고, 6월에 도로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이 여러 소인배들에게 무함을 받았는데, 장령(掌令) 이계(李烓)가 원지(遠地)에 유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공이 그를 탄핵하였다. 그러자 헌납(獻納) 최계훈(崔繼勳)이 도리어 공을 탄핵하여 9월에 북청 판관(北靑判官)에 보임되어 나갔는데, 5년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 공의 덕을 기렸다. 을유년(1645, 인조23)에 서용되어 다시 전적(典籍)이 되고, 얼마 뒤에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당시의 폐단을 상소하여 진달하였고, 가을에 명을 받들고 영남에 가서 선비를 시취(試取)하였다. 병술년(1646) 봄에 병조의 좌랑과 정랑이 되었고, 가을에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수찬(修撰), 교리(校理)에 제수되고, 전조(銓曹)에 천거되었다가 헌납으로 옮겼다. 무자년(1648)에 또 시관(試官)으로 호남에 갔다. 기축년(1649) 가을에 필선(弼善)으로 승진하고 장령으로 옮겼다.
경인년(1650, 효종1)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옮겼다가 이윽고 도로 장령이 되었다. 여름에 수찬 유공 계(兪公棨)가 인조(仁祖)의 묘호(廟號)를 논의한 일에 연좌되어 북쪽 변방으로 귀양 갔다. 공이 상소하여 극력 구원하다가 공산 현감(公山縣監)에 보임되어 나갔는데, 전임 관원이 잉임(仍任)된 까닭에 도로 체직되었다. 9월에 또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나갔는데, 포악한 도적이 있어서 공이 붙잡아 주벌하였다. 신묘년(1651)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계사년(1653)에 부모의 나이가 80세여서 국법대로 정사(呈辭)하여 체직되었다. 갑오년(1654)에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4월에 다시 제수되었으며, 겨울에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구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가 을미년(1655) 가을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무술년(1658) 겨울에 또 파주 목사(坡州牧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파직되었다.
경자년(1660, 현종1) 겨울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상소를 올려 사직하여 체직되고, 통진(通津) 수령으로 나갔다가 임인년(1662)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계묘년(1663, 현종4)에 부모의 나이가 만 90세여서 가족을 이끌고 귀향하여 벼슬길에 뜻을 끊고 아침저녁으로 부모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겨울에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고 갑진년(1664)에 또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곧바로 체직되었다. 또 고양 군수(高陽郡守)에 제수되었는데, 11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로 상례(喪禮) 규정을 도에 지나치게 지킨 탓에 거의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정미년(1667)에 삼년상을 마치고 승지에 제수되고, 체직되어 풍덕 부사(豐德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윤4월 8일에 부사(府舍)에서 작고하였다. 8월에 교하(交河) 치소(治所)의 북쪽 탄포(炭浦)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공은 기개와 도량이 시원스러웠고 풍채와 태도가 점잖고 차분하였으며, 수염이 아름답고 말은 간결하였는데, 사람들이 한눈에 큰 인물이 될 것을 알았다. 평생 분수를 지키면서 일찍이 남에게 부화뇌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 있을 때에도 가까이하는 사람이 없었다. 북청(北靑)은 백성의 습속이 포악하여 다스리기 어려운 곳인 데다 병란(兵亂)이 끝난 뒤여서 온갖 일이 피폐하고 기강이 없었다. 공은 관청 일에 밝고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잘 알아서 누적된 폐단을 개혁하여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이때 여공 이징(呂公爾徵)이 감사(監司)로 있었는데 크게 칭찬하기를, “양계(兩界)의 감사가 될 재목이다.” 하였다.
조공 계원(趙公啓遠)이 평소 공을 능력 있는 인물로 여겼는데, 공이 창원(昌原) 수령으로 있을 때 조공이 경상 감사였다. 함안(咸安)에 큰 송사(訟事)가 있어서 오랫동안 판결이 나지 않자 공에게 맡겼는데, 공이 전후의 문안(文案)에 의거하여 사리의 옳고 그름을 분석하여 보고하니, 조공이 “명쾌하기가 구름과 안개를 걷어 내고 푸른 하늘을 보는 것 같다.[快若披雲覩天]”라고 적었다. 뒤에 한번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지난번 수원(水原)에 수령 자리가 비어서 내가 공을 추천했는데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수령 한 사람이 호응하여 말하기를, ‘성품이 순박하고 신중하니 맡을 만하다. 공의 순박하고 신중한 성품은 알지만 그 밖의 것은 모른다.’ 하였다. 이것은 공이 교유(交遊)가 적은 결과이다.” 하였다.
공은 병자호란 뒤로 시사(時事)를 개탄하여 서울 집을 헐값에 팔아 버리고 선산(先山) 아래로 와서 두서너 칸 되는 초가집을 지었는데 벼슬이 갈릴 때마다 이곳으로 돌아왔다. 조석 끼니를 자주 걸렀으나 일찍이 생계 대책을 마련하려고 한 적도 없으며, 벼슬하고 싶은 생각도 적어져서 위세강(韋世康)의 “녹봉이 많을 필요는 없고 한도가 차면 물러나야 하며, 나이는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몸이 병들었으면 사직해야 한다.[祿不須多 防滿則退 年不待暮 有疾便辭]”라는 글귀를 손수 벽에 적어 놓았다. 시(詩)로 읊조린 내용도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살면서 지족(止足)하는 뜻을 담은 것이 대부분이다.
오직 부모 봉양을 위해 마지못해 외직에 부임하였고 항상 자식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문관(文官) 벼슬은 나로서 족하고, 음관(蔭官)은 한 고을의 수령이면 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나는 위로 늙은 부모를 봉양하고 있으니 나를 위한 음식과 거처를 후하게 마련할 수 없다. 비록 맛있는 고기가 있더라도 한 그릇을 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항상 무명으로 옷을 지어 입고 예순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주옷을 입었는데, 늘 말하기를, “마땅히 분수를 지켜 복을 길러서 자손에게 남겨 주어야 한다.” 하였다. 슬하의 자손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허물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고, 고을 사람들과 나눈 말은 다만 농사에 관한 것이었다. 하인을 부리는 데에도 은의(恩意)를 두어서 항상 말하기를, “하인과 주인은 의리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위엄과 포악으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 기아와 추위에 고생하는 자는 후하게 돌보아 주고 병든 자는 반드시 의원에게 진료받게 하여 치료해 주어야 한다.” 하였다.
처음 북청(北靑)에 부임해서 형벌을 너무 엄하게 적용하여 목숨을 잃은 자가 있었는데, 만년에 항상 이것을 후회하였다. 성품이 본래 엄격하고 굳세었으나 평소에는 온화하여 비록 천한 사람이라도 자기 생각을 다 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젊어서는 주량(酒量)이 꽤 세었으나 쉰 살 이후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문장에 대한 감식안이 있어서 짧은 서찰이나 절구(絶句)를 보아도 그 사람의 앞으로의 득실(得失)에 대해 알았다. 필법(筆法), 음률(音律), 백공(百工)의 제조(制造) 같은 것에는 그다지 뜻을 두지 않았으나 스스로 모두 정밀하게 통하였으니, 사물에 통달하고 학식이 넓음이 이처럼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아, 공은 몸가짐을 삼가고 조심하여 벼슬에 있을 때에는 청렴결백하였고 사람들과 사귀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한결같이 공평(公平)과 충서(忠恕)를 근본으로 하였다. 권세와 이익을 멀리하고 늘 겸손히 물러나는 쪽을 고집하다 보니 명성과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았다. 우리 숙부 석호공(石湖公 윤문거(尹文擧))이 평소에 공과 사이가 좋았는데 일찍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그대의 간직한 바가 욕심이 없고 깨끗하여 ‘영욕(榮辱)’ 두 자를 완전히 끊어 버린 지가 이미 오래되었음을 본래 알고 있지만, 세도(世道)를 자임한 자가 어찌 그 책임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공의 마음을 알고 있으나 포부를 펴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긴 말이다.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의 후손이다. 천성이 정숙하고 현명하며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부친 첨지공(僉知公)이 고금(古今)의 훌륭한 말과 착한 행실을 가르쳤기 때문에 부도(婦道)가 완비되어 모두 규방(閨房)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공은 평소에 청렴하고 근신하여 문하(門下)에 사적인 청탁을 위해 찾아오는 이가 없었는데, 부인은 안으로 공의 덕을 도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더욱이 조상을 받드는 데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지낼 때마다 반드시 몸소 여러 제구(祭具)를 살피고 제사를 지내는 새벽까지 앉아서 기다렸다. 만력 기해년(1599, 선조32)에 태어나서 무자년(1648, 인조26)에 작고하여 공보다 먼저 장사 지냈다가 뒤에 공의 왼쪽에 합장하였다.
1남 1녀를 낳아 키웠으니, 아들은 명석(命碩)인데 진사(進士)로 현령(縣令)을 지냈고, 딸은 진사 서문욱(徐文郁)에게 시집갔다. 측실에게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적(命頔)이고, 사위는 정고한(鄭高漢), 신명정(申命鼎), 이성번(李盛蕃)이다.
현령은 참판 이행진(李行進)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하성(夏成), 하형(夏亨), 하정(夏貞), 하명(夏明), 하영(夏英)인데, 하명은 진사로 재랑(齋郞)이다. 장녀는 부사(府使) 이희택(李喜澤)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성지헌(成至憲), 막내는 이진우(李眞遇)에게 시집갔다. 측실에게서 4남을 두었으니, 하정(夏精), 하청(夏淸), 하평(夏平), 하생(夏生)이요, 딸 하나는 이근(李謹)에게 시집갔다. 서문욱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종두(宗斗)이다. 명적은 1남 1녀, 정고한은 3남, 신명정은 1남 3녀, 이성번은 2남을 두었다.
하성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민갑(敏甲), 준갑(俊甲), 현갑(顯甲)이고, 사위는 이몽상(李夢相)이다. 하형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치갑(致甲), 이갑(履甲)이고, 사위는 구정원(具鼎元), 이현상(李顯相), 이경수(李慶守)이다. 하정은 아들이 없어서 아우의 아들 상갑(相甲)으로 후사를 삼았다. 하명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서갑(瑞甲)이고, 사위는 성덕해(成德海)이다. 하영은 4남을 두었는데, 성갑(聖甲)은 생원이요, 상갑, 범갑(范甲), 우갑(禹甲)이다. 성지헌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두석(斗錫), 기석(箕錫)이고, 사위는 이창빈(李昌彬), 양일규(梁一揆)이다. 이진우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광보(匡輔)요, 나머지는 어리다. 하정은 3남, 하평도 3남, 하생은 2남 2녀, 이근은 1남 3녀를 두었다.
내외(內外)의 증손과 현손이 70여 인인데 모두 기록할 수 없다.
공은 2대 독자로 이토록 자손이 번성하니 또한 성대하다고 하겠다. 현령군(縣令君)이 공의 유사(遺事)를 기록하여 석호공(石湖公)에게 명(銘)을 청하였는데, 그러마고 했다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공의 손자인 하성(夏成) 등이 지금 나에게 부탁하니, 비록 공을 만나 뵙지는 못했으나 선친의 묘소가 또한 교하(交河)에 있어서 공이 살던 곳과 멀지 않아 젊어서부터 공이 후덕하고 순수한 행실을 지닌 어른이라는 말을 듣고서 마음속으로 사모했던 터였다. 근래에 또 공의 손자들과 연이어 혼인을 하였으니 정의(情義)로 보아 감히 사양할 수 없어 삼가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효도와 자애가 돈독하고 / 孝慈之篤
청렴과 신중함을 지켰으며 / 淸愼之守
자신을 기르는 데 검소하고 / 儉於自牧
벼슬자리 얻는 데 담담하였네 / 恬於進取
이 아름다운 덕을 / 惟玆懿德
공은 모두 소유하였고 / 公乃兼有
또한 재주도 많았으니 / 又富於才
하늘이 부여한 것이 실로 두터웠네 / 天畀實厚
그런데 재능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 而嗇其施
누가 공의 포부를 알겠는가 / 孰識抱負
벼슬은 삼품에 그쳤고 / 位止三品
수는 칠십도 못 누렸지만 / 年未中壽
남은 복을 후손에게 남겨서 / 留遺餘祉
후손을 편히 보호하리라 / 保艾爾後
비석에 글을 새기니 / 有劖在石
오랜 후세에 징험이 되리라 / 尙徵悠久
[주D-001]위금(委禽) : 혼례(婚禮) 때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납폐(納幣)의 예로 기러기를 보내는 일이다. 곧 장가드는 일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昭公元年》
[주D-002]유공 계(兪公棨)가 …… 일 : 인조가 승하하자 효종은 부왕(父王)의 묘호에 조(祖) 자를 쓰도록 명하여 인조로 정하였다. 그러자 응교로 있던 심대부(沈大孚)가 상소하여 조 자를 쓸 수 없다고 하면서 역대 전고(典故)를 들어 반박하였고 옥당의 유계(兪棨)도 상소하여 선대왕에 인종(仁宗)이 있으므로 다시 인(仁) 자를 쓰는 것은 혐의스러운 점이 있다며 그 잘못을 지적했다. 이에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이 두 사람은 결국 귀양 갔다. 《燃藜室記述 別集 卷1 廟號諡》
[주D-003]위세강(韋世康)의 …… 글귀 : 수(隋)나라 강주 자사(絳州刺史) 위세강은 평소 성품이 담박하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벼슬자리를 얻고 잃는 것으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도 지족(止足)의 뜻이 있었는데, 이 글은 자제(子弟)에게 준 편지의 일부분이다. 《隋書 卷47 韋世康列傳》
[주D-004]지족(止足) : 그칠 줄을 알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도덕경(道德經)》 제44장에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게 되어, 장구하게 자기 몸을 보전할 수 있게 된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하였다.
[주D-005]재랑(齋郞) : 묘(廟), 사(社), 전(殿), 궁(宮), 능(陵)의 참봉(參奉)을 통칭하는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참봉(參奉) 심공(沈公) 묘갈명
공의 휘는 지현(之灦), 자는 택지(澤之)이며, 성은 심씨(沈氏),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고려 말에 휘 덕부(德符)라는 분이 관직이 좌시중(左侍中)에 이르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는데, 공은 그의 후손이다. 고조의 휘는 광언(光彦)인데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다. 증조의 휘는 금(錦)인데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종침(宗忱)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사(府使)를 지냈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석()인데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을 지냈고, 선비(先妣)는 진주 유씨(晉州柳氏)로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 휘 순(楯)의 따님이다.
공은 천계(天啓) 3년 계해년(1623, 인조1) 7월 1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천성이 탁월하여 5, 6세 때에 이미 부모 곁에 단정히 앉아 응대하기를 조심스럽게 하였다. 부형은 공이 몸이 약해서 자주 병치레를 하므로 일과를 정해 채근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공부를 좋아하여 부지런히 하였으며, 선현(先賢)들의 격언을 접할 때마다 진심으로 흠모하였다. 14세에 형님 둘이 역병(疫病)으로 죽자 집안사람이 모두 피하여 밖으로 나갔으나, 공은 혼자 시신 곁에 남아 직접 시신을 염습하여 관에 안치하고 울부짖으며 애통해하니, 이웃 사람들이 찬탄하고는 유곤(庾袞)보다 낫다고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야곡(冶谷) 조극선(趙克善)에게 《소학》, 사서(四書), 《가례(家禮)》를 배웠는데, 조공이 매우 칭찬하였다. 24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29세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전후의 거상(居喪)에서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였다. 공은 평소에 병약하여 사람들이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끝내 죽음에는 이르지 않으니 너나없이 감탄하였다. 공은 부모를 여읜 뒤에 또 연달아 여러 형들의 상을 당하자 결성(結城)에서 청양(靑陽)으로 이사하여 우거(寓居)하였다. 이것은 대개 장모가 병이 많고, 그 집 양자가 바로 공의 누이의 아들이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조카 중에 일찍 아버지를 여읜 몇 명을 공이 모두 데리고 와서 양육하고 가르치기를 자기 자식처럼 하였다.
모년(某年)에 천거를 받아 장릉 참봉(長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처음에는 사은(謝恩)하지 않는 것을 온당치 않다고 여겨 명(命)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끝내 노병(老病)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지난 20년 동안 지친(至親)의 상(喪)이 없던 해가 없었는데, 평소 은애(恩愛)에 돈독하여 스스로 슬픔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늘그막에 초상을 치르느라 자기 생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전귀(全歸)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 감정을 절제하고 사리에 맞게 처리하니, 사람들이 공의 정력(定力)에 감복하였다. 기묘년(1699, 숙종25) 1월에 우연히 경미한 질병에 걸려 18일에 작고하였다. 그해 8월에 홍주(洪州) 용천면(湧川面) 구음방(求音坊) 진향(辰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사람됨은 정결하고 욕심이 없어서 속기(俗氣)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젊었을 때 일찍이 과장(科場)에 들어갔다가 난잡한 모습을 보고는 마침내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몸단속을 매우 바르게 하여 자못 엄격한 점이 있었고, 남의 비위(非違)를 보면 장차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다. 중년 이후로는 스스로 기질이 편협하고 조급하다고 생각하여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자 ‘홍대평수(弘大平粹)’ 넉 자를 벽에 크게 써서 스스로를 경계하였으며, 사람들을 접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온화하고 후덕하게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개탄하기를, “선비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포부가 작지 않았지만 타고난 기운이 너무 약한 탓에 몸이 중병에 걸렸다. 이미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실질적인 것에 노력하지 않았고, 또 남들이 하는 대로 과거 공부를 하여 집안을 일으킬 계책으로도 삼지 않았다. 오직 고요함을 지키고 졸렬함을 보전하며 옛날 들은 것을 다시 음미하여 허물이 적은 사람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였다. 또 일찍이 말하기를, “입으로는 성현을 말하면서도 행동으로 그 말을 실천하지 못했으니 학문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거상(居喪) 때에는 《가례》, 《격몽요결(擊蒙要訣)》, 《상례비요(喪禮備要)》를 가져다가 강구(講究)하고 그대로 좇아서 행하였다.
만년에는 함양하기를 순일하고 깊게 하였으며, 경전(經傳)과 송유(宋儒)의 여러 책을 완색(玩索)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여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나태하지 않았다. 거처하는 곳은 주변 경관이 뛰어나서 늦은 봄에 바람이 온화하고 늦가을에 서늘해지는 때가 되면 자제들이나 산승(山僧)과 더불어 그 사이에서 소요하며 한적하게 보내면서 스스로 시름을 풀었다. 아, 공과 같은 자는 참으로 옛사람이 말한 은덕군자(隱德君子)라고 하겠다.
공의 배위(配位)는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감찰(監察) 휘 준(埈)의 따님이다. 공과 함께 58년을 해로하였는데,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 깍듯이 하였고 덕이 공의 배필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모두 법도가 있었다. 공보다 3년 먼저 작고하였는데 나이 73세였고, 공과 같은 무덤에 장사 지냈다.
2남 6녀를 낳아 키웠는데, 장남은 익동(益東)이고, 차남은 진사 익래(益來)이다. 장녀는 현감 황렴(黃燫)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홍량(洪量), 삼녀는 남궁기(南宮墍), 사녀는 정제량(鄭齊良), 오녀는 주부(主簿) 이연회(李延會), 막내는 참봉 이희상(李喜相)에게 시집갔다. 서출(庶出)은 자못 번성하였으나, 두 아들이 모두 현재 후사가 없으니, 사람들이 또 착한 이에게 복을 내려 준다는 이치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나는 일찍이 공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공의 조카 익장(益章)이 나와 종유(從遊)하였기 때문에 그의 단아하고 근엄한 태도를 보고서 보고 들은 데가 있음을 알았다. 근년에 마침 홍주의 용계(龍溪)로 이사 와서 공의 집과 서로 가까운 까닭에 마침내 친구가 되었는데 옛날부터 사귀어 온 듯한 느낌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이산(尼山)으로 돌아오게 되자 공이 또 멀리서 찾아왔는데, 마침 누이의 초상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바람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 뒤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유명(幽明)을 달리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매양 서글프고 한탄스럽다. 지금 공의 두 아들이 내가 공을 안다는 이유로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니, 공에 대한 명을 짓는 것이 어찌 부끄럽겠는가마는, 다만 내가 늙고 비루하여 글이 후대까지 전해지지 못할까 부끄럽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산에는 지초가 있고 / 維山有芝
골짜기에는 난초가 있는데 / 維谷有蘭
아름다운 어진 이가 / 有美碩人
여기에 은거하였네 / 此焉考槃
나를 알아줄 이는 없으나 / 人莫我知
향기는 절로 남아 있기에 / 馨香自在
이에 명을 지어 / 于以銘之
그 숨은덕을 드러내노라 / 以發其晦
[주D-001]천계(天啓) 3년 : 대본에는 ‘天啓四年’으로 되어 있으나 계해년은 천계 3년이므로 ‘四’를 ‘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유곤(庾袞) : 진(晉)나라 언릉(鄢陵) 사람으로 자(字)는 숙포(叔褒)이며 명목황후(明穆皇后)의 백부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세상에서 ‘유이행(庾異行)’이라고 불렀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유곤의 두 형이 이미 죽고 또 둘째 형 비(毗)가 위독하자, 부모와 여러 아우들마저 다 밖으로 나가 거처하였으나 유곤만은 형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하였다. 이에 부형들이 밖으로 나갈 것을 억지로 권하자, 유곤이 말하기를 “저는 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고 끝내 형을 치유하였는데, 수개월에 걸쳐 죽은 형들의 널을 어루만지며 통곡하고 병든 형을 간호하였지만 끝내 병에 전염되지 않았다. 《晉書 卷88 庾袞列傳》
[주D-003]전귀(全歸) :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신 몸을 자식이 손상하지 않고 온전히 보전하고서 죽는다는 뜻이다. 《論語 泰伯》
[주D-004]정력(定力) : 불교 용어로 오력(五力)의 하나이다. 번뇌와 망상을 사라지게 하는 선정(禪定)의 힘으로 변화에 대처하는 강인한 의지력을 이르기도 한다. 여기서는 수양의 힘을 뜻한다.
[주D-005]홍대평수(弘大平粹) : 넓고 크며 평온하고 순수하다는 뜻으로, 주자(朱子)는 이 넉 자를 자리 모퉁이에 적어 놓고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자 하였다. 《朱子全書 卷34 答呂伯恭》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증(贈) 좌승지(左承旨) 이공(李公) 묘갈명
공의 휘는 련(堜), 자는 교옹(郊翁), 성은 이씨(李氏)이다. 시조 총언(悤言)은 신라 말에 벽진 태수(碧珍太守)가 되어 견고한 성(城)을 굳게 지켰는데, 고려 태조가 공과 친교가 있어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으로 깨우치고서 혼인을 약속하고 본읍(本邑)의 장군(將軍)으로 봉하였다. 벽진은 지금의 성주(星州)인데, 자손이 이에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 시대가 끝날 때까지 벼슬아치가 대대로 나왔고, 장군으로부터 14세(世)인 휘 희목(希牧)에 이르러서 우리 조선에 들어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었다. 또 3세 뒤에 휘 약동(約東)은 성종조(成宗朝)의 명신(名臣)으로 네 조정에서 벼슬을 역임하였고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고조의 휘는 유번(有蕃)인데 참봉을 지냈고 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증조의 휘는 석명(碩明)인데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희선(喜善)인데 교관(敎官)을 지냈고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상급(尙伋)인데, 병조 참지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형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과 더불어 모두 곧은 절개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선비(先妣)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첨지중추부사 휘 주(冑)의 따님인데, 중추공은 곧 음애(陰崖) 문경공(文敬公) 이자(李耔)의 외손이다. 만력 정미년(1607, 선조40) 1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신중하여 어렸을 때부터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행실도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아우 승지공 인()은 공보다 한 살 적은데 유년 시절부터 서로 화기애애하게 잘 지냈으나, 승지공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면 공이 정색하고서 말을 하지 않아 승지공이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으며, 승지공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나서야 공의 마음이 풀렸다. 장성해서는 친척에게 후하게 대하고 남을 응대하는 데에 공손히 하였다. 또한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말수가 적은 데다가 성품이 고결하고 준엄하여 동년배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가정에서 배울 때 널리 여러 책을 보았는데 걸핏하면 침식(寢食)을 잊곤 하였다. 일찍이 절에 가서 독서할 때 친구가 찾아오자 공은 사례하고 말하기를, “친구가 멀리서 왔으니 어찌 정답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잠깐 동안이라도 공부를 중단하면 엄친의 훈계를 어기게 될까 두렵다.” 하고는 즉시 돌아와 책을 보았다. 친구들과 모여서 시문을 지을 때에 한 편의 글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전에는 수많은 말로 앞에서 떠들어 대도 본체만체하고, 글을 다 짓고 나서야 비로소 대화를 약간 나누었다.
상제(庠製)에 응시했다가 한 번 낙방한 뒤로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다시 응시하기를 다투어 권하였으나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니, 그의 견고한 마음가짐과 구차하지 않은 일 처리가 이와 같았다. 기사년(1629, 인조7)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슬퍼한 탓에 몸이 수척해지고 병이 들어 수년 동안 고질병이 되었고, 끝내 을해년(1635) 2월 24일에 작고하니, 나이 겨우 29세였다.
판서공이 조문객을 응대하다가 목이 메어 말하기를, “내가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있을 때 문방(文房)의 기물 하나를 만들어 보냈는데, 아들이 돌려보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하찮은 물건이지만 백성의 수고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런 것으로 아버지의 정사를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내 아들의 뜻과 행실이 이와 같은데도 하늘이 너무 빨리 아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으니, 내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또한 부모를 위한 지극한 정성을 알 수 있다.
초실(初室)은 임천 조씨(林川趙氏)로 참판 희일(希逸)의 따님이다. 타고난 성품이 정직하고 총명하여 시어머니에게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태어나서 23세에 작고하였다. 계실(繼室)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도사(都事) 구준(耈俊)의 따님이자 청강공(淸江公) 제신(濟臣)의 손녀이다. 씩씩하고 엄숙하며 효도하고 공경하여 부덕(婦德)을 두루 잘 갖추었고, 평소의 사적(事迹)은 남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점이 많아서 친척들이 모두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일컬었다. 병오년(1606)에 태어나서 정미년(1667, 현종8)에 작고하였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남은 지웅(志雄)인데 한성부 서윤이고, 차남은 지걸(志傑)인데 첨지중추부사이다.
내외(內外)의 손(孫)과 증손, 현손이 50여 인이나 되는데, 각각 서윤(庶尹)과 첨추(僉樞) 두 공의 갈문(碣文)에 상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을 충주(忠州) 서쪽 덕면(德面) 만산(蔓山)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바로 선영(先塋)이다. 조 부인(趙夫人)의 묘는 양주(楊州) 노원(蘆原)의 찬성공(贊成公) 묘소 옆에 있고, 이 부인(李夫人)의 묘는 공의 묘소 뒤에 있다. 공은 작고한 지 46년 뒤에 첨추공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됨에 따라 좌승지에 추증되고, 두 부인은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아, 공은 이미 일찍 작고하여 후세에 전할 만한 현저한 업적이 없다. 나는 늦게 태어났고 또한 한 번도 공을 만나 뵌 적이 없어서, 드러나지 않은 공의 덕을 말로 칭송하기는 좀 어렵다. 그러나 글은 반드시 많을 필요도 없고, 반드시 갖출 필요도 없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정성, 공경하고 삼가는 행실, 간결하고 엄중하며 바르고 확고한 절조, 부지런하고 독실하며 민첩하고 박식한 학문만으로도 충분히 자손에게 불식(不食)의 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삼가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명문가의 훌륭한 아들로 / 名家令子
옥처럼 깨끗하고 금처럼 귀한데 / 如玉如金
지조를 가다듬고 학업에 힘쓰니 / 礪操劬業
밝고 밝은 한결같은 마음이네 / 炯炯一心
하늘이 이미 공을 냈으니 / 夫旣生之
이룬 것이 있을 듯한데 / 若以有成
어쩌면 그리도 복이 없어서 / 云何不淑
하늘이 수명을 아꼈단 말인가 / 反嗇其齡
하늘이 착한 이에게 복을 내리는 것이 / 惟天福善
바로 떳떳한 이치이니 / 乃理之常
그 자손들이 / 宜其子孫
많고 또 착한 것은 마땅하도다 / 旣多且臧
볼록하게 솟은 봉분에 / 宰如之丘
수척 높이의 비석이 있으니 / 有碣數尺
여기에 명을 새겨서 / 于以銘之
후인을 권면하노라 / 後人是勖
[주D-001]상제(庠製) : 성균관에서 보이는 제술(製述) 시험을 말한다.
[주D-002]불식(不食) : 선조의 공덕이 후손에게 전해져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하나 남은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碩果不食]” 하였는데, 그 주석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아, 장차 다시 생겨나게 되는 이치를 볼 수 있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장령(掌令) 조공(趙公) 묘갈명
공의 휘는 진석(晉錫), 자는 여삼(汝三)이며, 한양 조씨(漢陽趙氏)이다. 고려 시대에 판중추부사 휘 잠(岑)이란 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시조이다. 대대로 벼슬아치가 나왔고,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휘 말생(末生)이 태종(太宗)과 세종(世宗)을 섬겼는데, 본병(本兵 병조(兵曹))의 장관을 지냈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문강의 차남 휘 찬(瓚)은 사직(司直)을 지내고, 막내 휘 근(瑾)은 관찰사를 지냈다. 관찰공의 4세인 증 판서 휘 연손(連孫)에 이르러 아들이 없자 사직공의 5세손 휘 람(擥)을 후사로 삼았는데, 람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조부의 휘는 존성(存性)인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정의(情義)가 매우 깊었고, 돈녕부 지사(敦寧府知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소민(昭敏)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계원(啓遠)인데 형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흠(欽)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 10월 을미일(24일)에 태어났다. 겨우 지각이 있을 나이에 소민공이 올바른 도리로 가르쳐서 유년기에 이미 성인처럼 엄숙하였고, 성동(成童)이 되기 전에 경적(經籍)에 정통하였다. 2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경진년(1640, 인조18)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창릉 참봉(昌陵參奉), 전설사 별검(典設司別檢),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 의금부 도사를 역임하였다. 임실 현감(任實縣監)으로 나가서는 청렴하고 밝은 정치를 하여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암행 어사도 공의 치적(治績)을 으뜸으로 보고하였다. 기축년(1649)에 정시(庭試)에 급제하였는데, 공은 약관 때부터 자주 공거(公車)에 뽑혔으나,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하게 되자 사람들이 늦었다고 하였다.
신묘년(1651, 효종2)에 병조 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말했다. 그 내용에 “내수사(內需司)에 불법으로 소속된 자는 반주율(叛主律)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한데 전하께서 처벌하지 말라는 특명을 내리셨으니, 이것은 주인을 배반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어찌 백성에게 주인을 배반하도록 가르치고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문묘 종사(文廟從祀) 요청에 대해 갑자기 따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을 보이시는 것이 마땅한데, 도리어 엄한 비답을 내려 ‘그 죄는 사형을 면할 수 없다.’라고까지 하셨으니, 옛날 역사를 두루 살펴보건대 형벌로 선비를 대한 경우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편당(偏黨)을 짓는 풍조를 미워하여 양쪽을 다 보전하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시비와 곡직을 분변하지 않고 조정(調停)하는 것만을 위주로 한다면, 그 조정하는 것이 도리어 소란을 확대하는 단서가 될 뿐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직을 오래 맡겨 일의 성과를 거두고자 한다면 적임자를 얻는 것이 관건입니다. 만일 적임자가 아니면 오래 맡길수록 그만큼 일에 해로울 뿐입니다.” 하였다. 공의 말이 모두 절실하고 올바르기 때문에 당시의 의논이 훌륭하게 여겼다.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고 인조실록청 낭청(仁祖實錄廳郞廳)에 차임되었다.
임진년(1652)에 공산 현감(公山縣監)에 보임되어 나갔는데 얼마 뒤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성상께서 황주(黃州)가 쇠잔하고 피폐한 까닭에 특별히 가려서 차임하려고 하였는데, 이조 판서가 평소에 공과 사이가 좋지 않던 차에 마침내 공을 선발하여 판관(判官)으로 삼았으나, 공의(公議)를 두려워하여 이내 성상께 아뢰어 조정에 머물도록 하였다. 얼마 뒤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가 또 병조 정랑으로 옮겼다. 갑오년(1654, 효종5) 봄에 사헌부 지평으로 옮기고, 여름에 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수찬 홍우원(洪宇遠)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소장을 올려서, 왕자와 왕손 중에 죄를 짓고 귀양 간 자를 석방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말이 많았다. 성상께서 경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원이 상소한 말은 너무 패악한데도, 대간의 신하들은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으니 개탄스럽다.” 하였다. 집의(執義) 홍처대(洪處大)가 죄를 주기를 청하는 의논을 갑자기 제기하니, 공이 쟁론하여 말하기를, “임금이 구언(求言)을 듣는 방법은 신하가 아뢴 말이 비록 죄를 줄 만하더라도 용서를 한 뒤에라야 간언(諫言)의 길이 활짝 열려 여러 계책을 모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구언하는 초기에 이미 죄를 주지 않겠다는 분부를 내렸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원의 상소 내용이 비록 사리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숨김없는 충정에서 나왔으니, 어찌 성상의 분부를 순순히 좇아 며칠 지난 뒤에 죄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헌 이시해(李時楷)가 상소하여 공을 배척하니, 공 또한 스스로 그 일에 대해 진술하고 도로 이시해를 배척하자, 상이 진노하여 특명으로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았다. 공은 나가서 서호(西湖)에 머물렀는데, 얼마 뒤에 모친의 병이 위독하였으나 도성으로 들어가서 모친을 뵐 수가 없었다. 이에 너무 지나치게 걱정한 나머지 침식을 모두 폐하였다. 며칠 뒤에 몇 되나 되는 피를 토하더니 마침내 병이 나서 끝내 이해 8월 2일에 작고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관작을 회복하도록 명하고 규례대로 부의(賻儀)를 보냈다. 9월에 광주(廣州)에 임시로 묘(墓)를 쓰고, 정유년(1657) 2월에 전의(全義) 중소동(中巢洞)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언행을 삼갔는데, 때때로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으면 반드시 자기 몸에 돌이켜 스스로 책망하고 어떤 때에는 밤새 잠을 자지 않기까지 하였다. 충정공(忠靖公)이 일찍이 남원(南原)에 있을 때 병에 걸려 위독하였는데, 공은 3개월 동안이나 옷을 벗지 않고 의원을 대면하고서 병세를 의논하며 눈물을 흘리니 고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였다. 어렸을 적에 충정공이 손수 삼강오륜(三綱五倫)과 기타 격언 중에서 어린아이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을 첩자(帖子) 하나에 써서 공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조 간자(趙簡子)가 쪽지를 준 일을 말하며 이르기를, “너는 무휼(無恤)이 되고 백로(伯魯)가 되지 말라.” 하였다. 공은 항상 이 말을 암송하며 종신토록 이 첩자를 잘 간직하였다. 임종 때에 손수 아들에게 첩자를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아버지의 수적(手蹟)이니, 너는 의당 보배처럼 간직하라.” 하였으니, 부모를 공경하는 데 게으르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에게 네 아우가 있었는데, 중씨(仲氏) 관찰공(觀察公) 귀석(龜錫)과 나이가 서로 비슷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부모를 섬겼는데 효도하고 우애가 있어 형제간에 화락하니, 충정공이 신 부인(申夫人)과 일찍이 서로 말하기를, “장남이 있으니 우리 집의 대를 이을 수 있겠다.” 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온후하고 질박하여 평소에 아첨하는 말과 명예를 구하는 행동이 일찍이 없었고, 남과 사귈 때에는 반드시 단정하고 방정한 사람을 취하였다. 평소에는 겸손히 사양하여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하였으나, 의리에 격동되어서는 용감히 나아가서 꺾이지 않았다. 조정에 벼슬하게 되어서는 개연히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겠다는 뜻이 있었다. 임금에게 과실이 있거나 조정의 정사에 누락되고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을 보면 그때마다 여러 날 동안 걱정과 탄식을 하였다. 대각(臺閣)에 들어가서는 얼마 있지 않아 직언을 서슴없이 한다는 평이 났는데, 미처 다시 등용되지 못하고 갑자기 작고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애석히 여겼다. 공은 필법(筆法)에 정통하였는데, 큰외삼촌 동회(東淮 신익성(申翊聖)) 신공(申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비석의 글씨는 이 조카에게 부탁해야 한다.……” 하였다.
숙인(淑人)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동지(同知) 취지(就之)의 따님이자 영의정 두수(斗壽)의 증손녀이다. 부덕이 있고 시부모를 섬기는 데 매우 조심스러웠으며, 시누이와 동서들 사이에서 모두 호감을 얻었다. 공보다 17년 뒤인 신해년(1671, 현종12) 10월 28일에 작고하였는데, 공의 묘 왼편에 합장하였다.
아들 태기(泰期)는 목사이고, 태개(泰開)는 진사이며, 딸은 현령 김재문(金載文)에게 시집갔고, 측실의 아들은 태벽(泰璧)이다.
목사는 2남을 두었는데, 홍빈(弘彬)과 참군(參軍) 익빈(益彬)이다. 태개는 아들이 없어서 익빈을 후사로 삼았다. 김재문은 1녀를 두었는데 황처의(黃處義)에게 시집갔다.
홍빈은 3남, 익빈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태벽은 3남 3녀를 두었다.
공은 선친과 동갑으로 어려서부터 서로 친하였고, 또 같은 해에 함께 진사가 되었다. 일찍이 아우 의정공(議政公) 사석(師錫)을 데리고 석강(石江)으로 선친을 방문하였는데, 나는 참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공은 어눌한 말투였으나 말에 조리가 있었고, 풍채와 용모는 온화하고 공손하였다. 선친이 공과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매우 다정하였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목사가 공의 사적(事迹)을 기록하여 나에게 묘도문(墓道文)을 부탁하였는데, 나는 노병으로 혼몽하여 애당초 이 일을 감히 맡을 수 없었다. 다만 선대의 교분이 있기 때문에 끝내 사양할 수가 없어 삼가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이어 명(銘)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맏아들이요 / 世家胄子
밝은 조정의 사헌부 신하로다 / 明廷憲臣
효성은 쪽지를 간직한 데서 독실하였고 / 孝篤懷簡
충성은 직간에서 드러났네 / 忠著批鱗
어찌 그리 불행한가 / 云胡不幸
수를 쉰 살도 누리지 못했구려 / 壽未中身
병이 위독할 때에도 / 當其疾革
부모와 임금 생각뿐이었네 / 念結君親
아 공의 뜻과 사업이 / 嗟公志業
중도에 꺾임이여 / 中道沈淪
부족함도 있고 남음도 있으니 / 有嗇有贏
천명이 고르지 않은 것을 어찌하랴 / 奈命不均
근원은 깊고 물결은 멀리 가니 / 源深瀾遠
남은 복이 바야흐로 새로우리 / 餘慶方新
비석에 글을 새겨 / 有刻在石
후인을 기다리노라 / 以俟後人
[주D-001]공거(公車) : 원래 한(漢)나라 때 초야의 선비를 등용할 때 보내던 역마(驛馬)를 의미하였는데, 뒤에는 거인(擧人)이 되어 과거에 응시하는 일, 또는 응시자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는 향시(鄕試), 초시(初試) 등을 말한다.
[주D-002]상소하여 …… 말했다 : 본문에 인용된 상소는 조진석(趙晉錫)이 사간원 정언으로 있던 1651년(효종2) 6월 12일에 올린 것으로 그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孝宗實錄 2年 6月 12日》
[주D-003]반주율(叛主律) : 노비가 주인을 배반했을 경우 이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형률을 말한다. 《전록통고(典錄通考)》 〈형전(刑典) 추단(推斷)〉에 “주인을 배반한 노비를 정배(定配)하지 않고 도로 본래 주인에게 돌려보내면 노비를 멋대로 죽이는 자가 계속하여 생길 것이므로 법례(法例)에 의거하여 전가사변(全家徙邊)하라.” 하였다.
[주D-004]문묘 종사(文廟從祀) 요청 : 북방(北方)과 영남(嶺南)의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한 상소를 말하는데, 효종은 엄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좌의정 조익(趙翼)이 상차(上箚)하여 이들에게 너그럽게 대해 주기를 청하였다. 《孝宗實錄 1年 9月 16日》
[주D-005]조 간자(趙簡子)가 …… 말라 : 조 간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백로(伯魯)이고, 차남이 무휼(無恤)이었다. 어느 날 간자가 훈계의 말을 쪽지에 적어 각각 두 아들에게 주고서 잘 기억해 두라고 명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 물어보니, 형 백로는 훈계의 말을 잊어버려 대답을 못 하였고 쪽지도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아우 무휼은 그 말을 암송하여 잘 알고 있었고 쪽지를 꺼내라고 하자 즉시 품속에서 꺼내어 아버지에게 올렸다. 《十八史略 春秋戰國 趙》
[주D-006]효성은 …… 독실하였고 : 조 간자(趙簡子)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백로(伯魯)이고, 차남이 무휼(無恤)이었다. 어느 날 간자가 훈계의 말을 쪽지에 적어 각각 두 아들에게 주고서 잘 기억해 두라고 명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 물어보니, 형 백로는 훈계의 말을 잊어버려 대답을 못 하였고 쪽지도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아우 무휼은 그 말을 암송하여 잘 알고 있었고 쪽지를 꺼내라고 하자 즉시 품속에서 꺼내어 아버지에게 올렸다. 《十八史略 春秋戰國 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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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현령(文化縣令) 이군(李君) 묘갈명
내가 옛날에 평중(平仲)을 위해 묘문(墓文)을 지었는데, 어찌 오늘 또다시 정백(貞伯)의 묘에 명(銘)을 지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와 두 사람은 모두 사도시 정(司䆃寺正) 부군(府君)의 증손이다. 나의 외조부 생원 부군이 바로 군의 조부 승의공(承議公)의 아우이다. 그러므로 군과 나는 재종중표(再從中表)가 되고, 어려서부터 서로 친애하였다. 군의 형제는 모두 나보다 어린데도 서로 잇달아 세상을 떠나, 유독 나에게 뒤에 죽는 슬픔을 안겼으니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군의 휘는 공간(公榦)이다. 공주 이씨(公州李氏)여서 공(公) 자로 이름을 지었는데 우리 선친이 명명한 것이며, 정백(貞伯)은 그의 자이다. 평중은 군의 아우 공권(公權)이다. 공주 이씨는 고려 말에 일어났다. 휘 명성(明誠)은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고,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벼슬하지 않고 이천(伊川) 산중에 은거하다가 작고하였다. 4세가 지나 휘 경지(慶祉)에 이르렀는데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군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건(鍵)인데 바로 도정공(䆃正公)으로, 젊어서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늦게 문과에 급제하였고 지위가 덕(德)에 걸맞지 않았다. 조부의 휘는 장욱(長郁)인데 승의랑(承議郞)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즙(檝)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선비(先妣)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세마(洗馬) 선(瑄)의 따님이다.
군은 숭정(崇禎) 정축년(1637, 인조15) 4월 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출중하게 빼어나서 열 살도 되기 전에 글을 엮어 시구(詩句)를 지었는데 그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글귀가 있었다. 이때 참판공이 해서(海西)에서 타향살이하고 있었는데, 윤 부인이 지혜롭고 식견이 있어서 ‘궁벽한 시골에서 자식을 살게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는, 참판공에게 청하여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 와서 집을 세내어 가난하게 살면서도 군의 형제가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아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계묘년(1663, 현종4)에 막내와 함께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군은 가문이 쇠퇴한 것을 생각하고는 반드시 입신양명하여 도정공의 사업을 계승하려고 마음먹었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고 기송(記誦)과 술작(述作)에 매우 공력을 들인 결과 과장(科場)에서 이름을 날려 거벽(巨擘)으로 일컬어졌다. 전후로 여러 차례 응시하여 더러 장원으로 뽑히기도 했으나 끝내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니, 동년배들이 너나없이 탄식하고 애석히 여기며 운수가 기박하다고 하였다.
갑인년(1674)에 장릉 참봉(長陵參奉)에 제수되고, 병진년(1676, 숙종2)에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로 옮겼으며, 무오년(1678)에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으로 옮겼으나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아 체직되었다. 경신년(1680)에 다시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이 되고, 8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거상(居喪) 중에 예(禮)를 극진히 하여 아무리 무더워도 상복(喪服)과 수질(首絰), 요질(腰絰)을 벗지 않았다. 갑자년(1684)에 다시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가 되고, 이어 광흥창 부봉사(廣興倉副奉事)로 바뀌었다. 병인년(1686, 숙종12)에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으로 옮기고, 이어 실직(實職)으로 승진하고, 또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승진하고 공조 좌랑에 옮겨 제수되었다.
정묘년(1687)에 문화 현령(文化縣令)이 되었는데, 3년간의 재임 중에 청렴, 근면, 관용, 온화로 정사를 하였다. 선비들에게는 일과(日課)를 정해 공부하도록 하고, 백성의 부역(賦役)을 견감하였으며, 친척 가운데 궁핍한 자에게는 녹봉을 떼어 구휼하는 등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는 여전히 조석거리를 남에게 의존할 정도로 청빈하였다. 을해년(1695)에 다시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가 되고 또 봉화 현감(奉化縣監)이 되었다. 이해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바닥에 널려 있었는데, 삭름(朔廩)을 덜어 내어 마음을 다해 진휼한 덕분에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 고을의 풍습이 송사(訟事)를 좋아하여 명색이 사부(士夫)라는 자들도 다투어 관청에 출입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군이 방(榜)을 써 붙여 보이기를, “이끗만을 다투어, 송사를 여는 동헌(東軒) 뜰에 직접 나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조상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직접 송사하지 말라.” 하였다. 이 뒤로 송사를 좋아하는 풍습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기묘년(1699) 11월에 병에 걸려 11일에 임소(任所)에서 작고하니, 온 경내 사람들이 슬피 울부짖었고 제물(祭物)을 가지고 망자를 전송하는 자들이 가득 길을 메웠다. 이듬해 2월에 배천(白川) 부정곡(釜鼎谷) 선영 아래 사향(巳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군은 사람됨이 온화하고 너그러워서 일찍이 노여워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효성으로 양친을 섬겨 물질적인 봉양과 뜻을 받듦에 있어 곡진하게 행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나이 예순이 넘었는데도 오히려 어린아이 놀이를 하였다. 평생 따로 재산을 챙기는 일이 없었으며 만일 녹봉이나 소득이 있으면 모두 부모에게 드려서 오직 부모의 뜻대로 쓰도록 하였다.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어서 하루 종일 화락하였고, 막내가 먼저 죽자 아버지를 여읜 조카들을 돌보는 데에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훈계하였다. 멀고 가까운 친척에 대해서도 차별 없이 후하게 대우하였으며, 제사에 대해서는 더욱 삼가서 생신날 지내는 제사는 폐지하고 시향(時享)은 회복하였으며, 신알(晨謁)은 예(禮)대로 하여 종신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벼슬에 있을 때에는 자신을 단속하여 공무를 봉행하였으며, 집에 거처할 때에는 생업을 일삼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군의 실제 행실이다.
군은 두 번 장가갔는데 부인이 모두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전(前) 숙인(淑人)은 무공랑(務功郞) 두(紏)의 따님으로, 자애롭고 인자하여 부덕(婦德)이 있었으며 예법을 행하는 데에 어김이 없었다. 갑진년(1664, 현종5) 7월 6일에 작고하였는데 나이 30세였다. 부정곡(釜鼎谷)의 군의 묘소와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장사 지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경(燝)은 일찍 죽었고, 차남은 성()이며, 딸은 현감 윤세강(尹世綱)에게 시집갔다. 후(後) 숙인(淑人)은 충의위(忠義衛) 혁(赫)의 따님이다. 딸 둘을 낳았는데 장녀는 사인(士人) 조정순(趙正純)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성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윤세(胤世)는 경의 후사가 되어 승중(承重)하였고, 차남은 어리다. 윤세강은 2남 1녀를 두었고, 조정순은 1녀를 두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군의 훌륭함이여 / 嗟君之賢
스스로 자신을 분발하고 / 自奮于身
글을 업으로 삼아 벼슬하여 / 績文取仕
쇠락한 가문을 일으켰네 / 以振衰門
내직으로는 낭청을 지내고 / 內踐郞署
외직으로는 동장을 차서 / 外綰銅章
선친에게 벼슬이 추증되고 / 貤爵顯考
모친을 영화로이 봉양했으니 / 榮養萱堂
평소의 효심을 / 平生孝心
조금 폈다고 이를 만하네 / 可謂少伸
벼슬의 높고 낮음이야 / 官資崇庳
어찌 다시 논할 것이 있겠는가 / 何足復論
오직 누리지 못한 것을 / 唯其不贏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도다 / 可遺子孫
자손이 더욱 번성하고 드러나는 것을 / 益蕃以闡
오히려 이 글에서 징험할 수 있으리 / 尙徵斯文
[주D-001]외조부 생원 부군 : 이장백(李長白:1587~?)을 가리킨다.
[주D-002]재종중표(再從中表) : 내외종 6촌 형제를 말한다.
[주D-003]나이 …… 하였다 :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 앞에서 재롱을 피웠다는 말이다. 옛날에 노래자(老萊子)가 70세의 나이에도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高士傳》
[주D-004]신알(晨謁) : 아침 일찍 집 안에 모신 사당에 문안하는 일을 말한다. 《격몽요결(擊蒙要訣)》 〈제례장(祭禮章)〉에 “사당을 주관하는 자는 매일 새벽마다 대문 안에서 배알(拜謁)하여 두 번 절하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한다.”라고 하였다.
[주D-005]동장(銅章) : 지방 수령이 차는 관인(官印)을 말한다. 동부(銅符)라고도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 한공(韓公) 묘갈명
공의 휘는 성익(聖翼), 자는 여익(汝翼)이며, 성은 한씨(韓氏)로 그 선조는 청주인(淸州人)이다. 휘 란(蘭)이 고려 태조를 도와 태사(太師)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분이 바로 시조이다. 우리 세조조(世祖朝)에 좌의정을 지낸 양절공(襄節公) 휘 확(確)이 9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경남(敬男)인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응인(應寅)인데 우리 선조(宣祖)를 보좌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고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조부의 휘는 덕급(德及)인데 여러 차례 주군(州郡)에서 수령을 지냈고, 청녕군(淸寧君)을 습봉(襲封)하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수원(壽遠)인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김 문원공(金文元公)의 외손으로, 덕행(德行)이 순수하고 공업(功業)이 완전하였으며, 벼슬은 목사에 이르렀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장양공(莊襄公) 종생(從生)의 후손이자 좌승지에 추증된 용계처사(龍溪處士) 영원(榮元)의 따님이다.
공은 천계 신유년(1621, 광해군13) 6월 1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조금 장성해서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김 선생(金先生)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선생은 공에게 외종조(外從祖)가 되며, 문장과 덕행으로 가르치고 공의 탁월함을 매우 칭찬하였다. 공은 한편으로 과거 공부도 하였는데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고자 해서였다. 평소에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그때마다 좋은 성적을 받았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자, 선배들이 너나없이 운수가 기박하다고 탄식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경술년(1670)에 거듭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픔으로 몸이 여위어 거의 지탱하지 못할 정도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서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끊고 오직 경적(經籍)에 침잠하였는데, 특히 《자경편(自警編)》과 《주자서(朱子書)》를 좋아하여 늙도록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공의 처가가 호서(湖西)의 비홍현(飛鴻縣) 경내에 있었기 때문에 공은 미산(眉山) 아래에 우거하였다. 계축년(1673)에 처상(妻喪)을 당하여 홍주(洪州) 치소(治所)의 동쪽 상전향(上田鄕)에 장사 지내고, 그곳으로 이사하여 마침내 평생 살 곳으로 삼았다. 공의 형제가 공을 따라와서 우거하였는데 산기슭을 사이에 두고 모여 살았다. 공은 늘그막에 단란하게 모여 사는 것을 지극한 즐거움으로 생각하여,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을 얻더라도 반드시 함께 먹었고,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서 만나기까지 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9)에 천거를 받아 숭릉 참봉(崇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형제가 모두 이미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명을 받들었다. 갑자년(1684)에 조그만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상국(相國) 남구만(南九萬)이 평소 공의 행의(行義)를 알고 있어 병인년(1686) 봄에 다시 공을 천거하여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고, 그해 6월에 공로로 6품으로 오르고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에 제수되었다. 9월에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으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마음을 다해 공무를 봉행하여 아무리 날씨가 무덥거나 비가 오더라도 조운(漕運)의 왕래를 잠시라도 중지한 적이 없었다. 수참(水站)에 필요한 비용을 전적으로 조졸(漕卒)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폐단이었는데, 이 책임을 맡은 자가 대개 예전 규례를 그대로 답습하여 구휼할 줄을 몰랐다. 공이 특별히 해조(該曹)에 보고하여 요역(徭役)의 3분의 1을 견감해 주고, 그 밖의 거두어들일 세입을 모두 줄여 주는 쪽으로 조처하니, 조졸들이 감격하여 공의 덕을 송축하였다. 무진년(1688, 숙종14) 12월 26일에 병으로 서울 집에서 작고하였고, 이듬해 기사년(1689) 2월에 홍주로 반장(返葬)하였는데, 숙인(淑人)과 같은 무덤이다.
공은 천성이 어질고 조용하며 학통의 영향을 받아 과거(科擧) 이외에 마음을 써야 할 곳이 있음을 일찌감치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몸가짐을 돈후하고 조심성 있게 하여 늙도록 한결같았고,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모두 법도가 있었다. 부모를 섬길 때에는 화순하고 온유하게 하였으며, 부모상을 당해서는 이미 노쇠한 나이인데도 상제(喪制)를 지키는 것이 매우 확고하여,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가서 절하고 슬피 우는 것을 혹한(酷寒)에도 폐하지 않았다. 추모의 정성은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하여 매양 기신(忌辰) 때에는 반드시 별도로 찬품(饌品)을 마련하여 제사를 도왔다. 형제간에는 공손과 사랑을 극진히 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형제간에는 화락함이 우선이다.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감정이 틀어지는 일이 있으면 곧 우애의 정을 손상하게 된다.” 하였다. 이 때문에 일찍이 거슬리는 말과 사나운 낯빛을 띠지 않았다. 막내아우가 어질었는데 일찍 죽은 것을 항상 애통히 여겨 아버지를 여읜 조카를 자기 자식처럼 돌보면서 녹봉이 비록 적었지만 반드시 나누어 도와주었고, 종족에 대해서는 남들에게보다 훨씬 정이 두텁고 화목하였다.
집에 거처할 때에는 간결하고 담박한 것으로 스스로 수양하고 사치한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재물을 숭상하고 이끗을 좋아하는 무리를 보면 매우 추악하게 여겼고, 곤궁한 사람을 만나면 재물을 털어 도와주었다. 일찍이 집안일에 신경을 쓴 적이 없기 때문에 생계 대책이 항상 부족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평소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일찍이 목사공(牧使公)을 임소(任所)에 모시고 갈 때에 시일이 꽤 걸렸으나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만년에 홀아비로 살다가 비로소 첩(妾)을 얻어서는 장중하게 대하여 집안에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으며, 남과 사귈 때에는 정성으로 대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친구들도 모두 경모하였다.
성품은 온량(溫良)하여 남과 거슬림이 없었으나 시비와 선악을 가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매우 분명하게 분변하고 확고하게 지켜서 남들이 뜻을 꺾거나 빼앗지 못했다. 자식들에게는 어미를 일찍 여읜 것을 늘 가련하게 여겨 매우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교육과 독려의 방도는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평소 훈계가 엄정하여 사우(師友)를 가리고 근본에 힘쓰게 하여 나아갈 방향에 어둡지 않도록 하였다. 병이 심해지자 자식들을 불러서 더욱 간곡한 뜻을 다하였고, 임종할 때에는 형제간에 우애하고 학업에 부지런할 것을 당부하였는데 말이 또렷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혼란스럽지 않았다. 아, 이것은 모두 공의 실덕(實德)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뜻을 돈독하게 하고 학업을 익혀서 문학에 여유가 있었으며, 자신을 신칙하고 갈고닦아 행의(行義)에 하자가 없었다. 오직 분수에 편안하고 고요함을 지켜서 명리(名利)에 초연한 까닭에 세상에 공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늘그막의 작은 벼슬은 녹봉이 덕에 걸맞지 않았다. 아, 운명이로다.
숙인(淑人) 이씨(李氏)는 이조 판서 휘 산보(山甫)의 증손녀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준성(畯成)인데 사직서 참봉을 지냈으며, 선비(先妣)는 의령 남씨(宜寧南氏)이다. 천계 갑자년(1624, 인조2)에 태어났는데, 자애롭고 총명하여 남자 같은 식견과 사려가 있었다. 16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가정에서의 다스림이 매우 엄정하였고, 평생 동안 무격(巫覡)을 엄금하여 항상 세속에서 부인들이 무격에 미혹되는 것을 탄식하였다.
남씨가 과부로 지내면서 연로한 데다가 외아들마저 잃자, 숙인은 시중들고 봉양하는 데 성심과 효성을 다하였다. 친정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한 적이 없고 항상 올케에게 사양하니, 올케가 매우 감동하였다. 올케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숙인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것을 불쌍히 여겨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고, 나이가 차자 공에게 청하여 사위를 골라 시집을 보낸 뒤에 자기 딸을 시집보내니, 친척들이 너나없이 탄복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어린 자식을 잃고 너무 애통한 나머지 병이 생겨 몇 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매양 묵묵히 하늘에 빌기를, ‘노모가 집에 계시니 하늘은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노모가 살아 계시는 동안만 더 살게 해 주어 효도를 다 마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과연 병이 나았다. 계축년(1673, 현종14) 1월에 남씨가 작고하였는데, 숙인은 장례 치르는 일로부터 장례 물품 등에 이르기까지 직접 주관하여 여한이 없도록 하였다. 그 뒤에 예전의 병이 갑자기 도져서 마침내 그해 4월 9일에 모친의 뒤를 이어서 작고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지성이면 감천이라 병중에 빌었던 대로 된 것이다.” 하였다.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배우(配虞)는 폐질(廢疾)이 있어서 일찍 죽었고, 차남 배하(配夏)는 정언(正言)인데 공의 명으로 백부(伯父)의 양자가 되었으며, 삼남 배상(配商)은 진사인데 불행히 단명(短命)하였고, 사남 배주(配周)는 진사로 감찰(監察)을 지냈고, 막내 배한(配漢)은 생원이며, 딸은 윤자교(尹自敎)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자녀는 1남 1녀인데 배송(配宋)은 요절하였고, 딸은 어리다.
배하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사맹(師孟)은 생원이고, 그다음은 사철(師哲), 사선(師善)이며, 장녀는 이덕순(李德淳)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어리다. 배상은 2남을 두었는데, 사덕(師德), 사득(師得)이다. 배주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사백(師百)은 생원이고, 그다음 사만(師萬)은 진사이고, 그다음은 사억(師億)이며, 장녀는 최창회(崔昌會)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배한은 1남을 두었는데 어리다. 윤자교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동수(東洙)이고, 딸은 이사제(李思齊), 이보원(李普元)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나는 공과 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情誼)가 매우 두터워서 외람되이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예전에 공의 이웃에 살면서 종유(從遊)하여 더욱 친하였다. 나는 신중하지 못한 언행으로 당시에 죄를 얻어 친구들이 대부분 절교하였으나, 공은 논의가 들끓는 중에도 개의치 않고 우뚝 서서 끝내 조금도 마음을 변치 않았고, 심지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겠다는 뜻을 품기까지 하였다. 내가 일찍이 탄식하기를, “공처럼 밖으로 온화하지만 안으로 강한 사람은 옛사람 가운데에서나 찾을 수 있다.” 하였다.
배하 등이 공의 묘도문자(墓道文字)를 부탁하니, 정의(情義)로 보아 글을 못한다는 말로 사양할 수가 없어서 삼가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명(銘)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성이 말하기를 / 亞聖有言
욕심이 적어야 마음이 보전된다고 하였으니 / 欲寡心存
사람은 외물의 유혹이 없어야 / 人無外誘
타고난 성품 그대로를 보전할 수 있네 / 方保天眞
내가 공을 보건대 / 我觀於公
흉금은 담백하고 / 沖襟淡然
반평생 한가로이 지내며 / 半世棲遲
산수에서 유유자적하였네 / 自適林泉
말년의 미관말직은 / 末路微官
애오라지 인연을 따른 것이네 / 聊以隨緣
본래의 분수대로 편안히 행하여 / 安其素履
외물 때문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네 / 不爲物遷
좋구나 이 무덤이여 / 樂哉斯丘
아내와 언덕을 같이하였네 / 嘉耦同原
내 몸에 누린 행복 없으니 / 于躬不贏
후손을 창성하게 하리다 / 以昌後昆
나의 문장이 비록 질박하지만 / 我文雖質
오직 실상만을 표현했으니 / 惟表其實
덕을 알고자 할진댄 / 有欲知德
이 비석에 있지 않은가 / 不在斯刻
[주D-001]아성(亞聖)이 …… 하였으니 : 아성은 맹자(孟子)를 말하는데,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마음을 수양함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養心莫善於寡欲]”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장령(掌令) 이공(李公) 묘갈명
공의 휘는 선원(善源), 자는 경보(敬甫)이다.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고려 중랑장(中郞將) 돈수(敦守)로부터 시작되는데, 공조 참의 양(揚)에 이르러 우리 조선에 들어왔고, 좌의정 행(荇)이 공의 6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형(泂)인데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였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안인(安訒)인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침(梣)인데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지냈고 효성으로 특별히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관하(觀夏)인데 진위 현령(振威縣令)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우의정을 지냈고 효정공(孝貞公)의 시호를 받은 행원(行遠)의 따님이다.
공은 숭정 임신년(1632, 인조10) 4월 30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매우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어른 같았으며, 책을 읽게 되자 바로 글을 지을 줄 알았다. 10여 세에 조부 목사공(牧使公)이 불어난 물을 보고 시를 짓도록 하였는데, “이 천 도랑의 작은 물을 받아들여 보태어 사해(四海)의 큰 물을 이루네.”라는 구절이 있었다. 정동명(鄭東溟 정두경(鄭斗卿))이 크게 칭찬하기를, “필력이 웅건하고 표일(飄逸)하여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풍골(風骨)이 있다.” 하였다.
22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36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전후의 거상(居喪)에서 애통함으로 몸이 상한 탓에 병이 나서 거의 죽을 뻔하였다.
38세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다. 공은 문사(文詞)가 일찍 이루어졌고 젊어서 이미 친구들 사이에 이름이 났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을 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늦었다고 하였다.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ㆍ저작(著作)ㆍ박사(博士), 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ㆍ직강(直講), 병조의 좌랑ㆍ정랑,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해운 판관(海運判官),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영평(永平)과 문의(文義)의 현령,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를 거쳐 울산 부사(蔚山府使)에서 그쳤으니, 이것이 공의 내직과 외직의 이력이다. 이 밖에 제원 찰방(濟源察訪)과 진주 목사(晉州牧使) 자리는 부임하지 않았고, 풍기 군수(豐基郡守) 자리는 부임하기 전에 파직되었다. 공은 조정에서 15년 동안 벼슬하였으나, 영리(榮利)에 담박하였고 교유(交遊)를 통해 벼슬자리 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당론(黨論)이 점점 고질화되고 세도(世道)가 날로 잘못되는 것을 보고 항상 스스로 개탄하기를, “내가 어찌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여 세상에 용납되기를 구하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말년에 제수된 벼슬자리는 모두 폄직(貶職)된 낮은 자리였으나, 이르는 곳마다 편안하게 여기고 기미(幾微)를 드러내지 않아서 공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를 아는 자가 드물었다. 대개 공은 을묘년(1675, 숙종1)에 간직(諫職)에 제수되고 오래지 않아 곧 체직되었다. 병진년(1676)에 장헌(掌憲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마침 양사(兩司)에서 김상 수항(金相壽恒)에게 죄를 더 주라는 계사를 올렸는데, 공의 힘으로는 계사를 정지시킬 수가 없어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외직에 보임되어 탄핵을 받게 되어서는, 훗날 시의(時議)가 오히려 피혐하는 말이 준엄하지 못했다고 하여 허물로 삼은 까닭에 마침내 벼슬길이 순탄치 못하게 되었다.
공은 천성이 온후하고 성실하며 욕심이 적었고, 평소에는 말수가 적고 잘 웃지 않았으며, 신실하게 사람들을 대하였지만 지나치게 친근하게 사귀지는 않았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지성(至性)에서 나왔고, 조부모와 증조모를 섬길 때에는 안색을 살피고 뜻을 좇아서 매우 지극하게 봉양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마다 기일에 앞서 미리 조처하여 빠진 것이 없게 하고 사랑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제부(諸父)를 받들고 종당(宗黨)과 친목을 도모할 때는 은혜와 의리가 아울러 극진하였으며, 몸가짐은 청렴하고 담박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일을 생각하는 데에 주도면밀하고 처신하는 데에 거짓이 없었다.
문의 현령(文義縣令)으로 있을 때에 마침 연기현(燕歧縣)이 혁파되어 문의현에 소속되었는데, 두 고을이 모두 큰길가에 있어서 쇠잔한 고을데도 책응(責應)이 많았다. 공은 마음을 다하여 백성의 형편을 살피고 정사를 하는 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하니, 백성들이 공의 깨끗함에 감복하여 지금까지도 추념하고 있다. 울산 부사로 있을 때에 풍토병에 걸려 병이 이미 심해졌는데도 스스로 휴식을 취하지 않고 말하기를, “직임을 맡은 이상 어찌 일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지키는 바가 이와 같았다.
공은 둘째 아우 군수공(郡守公) 선연(善淵), 막내아우 승지공(承旨公) 선부(善溥)와 서로 뜻이 잘 맞았는데, 방 한 칸에 서사(書史)를 갖추고서 하루 종일 화목하고 즐겁게 지냈다. 항상 말하기를, “형제가 벼슬하여 시종신(侍從臣)의 반열에까지 이르렀으니 영화가 이미 지나친 것이다. 어찌 함께 면양(沔陽)으로 돌아가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여 병을 조리하면서 여생을 마칠 계획을 세우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공의 평소 생각이다. 갑자년(1684, 숙종10) 5월 19일에 영남(嶺南) 고을에서 재임 중 작고하여 7월 모일(某日)에 해미현(海美縣) 북쪽 첨추공(僉樞公)의 묘소 오른쪽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공은 온후한 덕과 인자한 마음을 갖고도 쉰 살 정도밖에 수(壽)를 누리지 못하였고, 또 후사가 없어서 둘째 아우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이것으로 보면 착한 이가 복을 받는다는 이치가 정말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물며 벼슬의 높고 낮음이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공의 배위는 풍성 조씨(豐城趙氏)로 판서 충정공(忠貞公) 형(珩)의 따님이다. 양자 덕흠(德欽)은 별제(別提) 심인서(沈麟瑞)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해종(海宗)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아, 공의 선부군(先府君) 현령공(縣令公)은 나의 선친과 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情誼)가 매우 두텁고, 우리 고을의 수령을 지낸 까닭에 왕래가 더욱 잦았다. 그 당시 공의 형제와 우리 형제는 항상 좌우에서 모셨고 공 또한 때때로 우리 분암(墳庵)에서 모여 몇 달씩 함께 거처하기도 하였다. 공은 감숭감숭 난 수염에 네모난 얼굴이었고 숨김없는 솔직한 성격이어서 함께 오랫동안 생활하다 보니 가까이할 만한 사람임을 더욱 알 수 있었다.
공이 작고한 지 20년 뒤에 공의 사자(嗣子) 덕흠이 공의 사적(事迹)을 기록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문(墓文)을 청하였다. 나는 나이가 많고 정신이 혼미하여 이미 문필(文筆)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굳이 사양했으나, 덕흠이 포기하지 않고 세 차례나 찾아와 부탁한 것은 내가 공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어쩔 수 없이 삼가 편차하고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너그럽고 후덕하며 편안하고 조용함은 / 寬厚沖靜
천부적인 아름다움이요 / 天賦之美
효도하고 우애롭고 돈독하고 화목함은 / 孝友敦睦
대대로 집안에 전해 온 훌륭함이로다 / 家行之懿
생업을 영위하는 데에는 담박하고 / 淡于營爲
명예와 이익은 멀리하였으며 / 疎于名利
본성대로 살고 분수를 따라 / 任眞隨分
흐르면 행하고 막히면 멈추었도다 / 流行坎止
남들은 혹 우활하다고 하지만 / 人或謂迂
나는 스스로 이것을 즐겼네 / 我自樂此
중씨는 청렴 검소하고 / 仲氏淸儉
재주 또한 매우 뛰어났으니 / 亦復絶特
이 훌륭한 형제들을 / 此令兄弟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 何處可得
덕을 간직하고 재주를 감춘 채 / 蘊德韜光
산수에서 유유자적하였네 / 以適于丘
나의 문장이 화려하지 못하니 / 我筆無華
어찌 숨은 덕행을 밝힐 수 있겠는가 / 曷以闡幽
[주D-001]양사(兩司)에서 …… 체직되었다 : 김수항(金壽恒)이 1675년(숙종1) 7월에 교지에 응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안에 언급한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服喪) 문제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영암(靈巖)으로 귀양을 갔다. 이듬해에 이선원(李善源)이 김수항의 방환(放還)과 관련하여 아뢴 일로 체직되었다. 《肅宗實錄 2年 7月 29日》
[주D-002]면양(沔陽) : 조선 시대의 면천군(沔川郡)으로, 지금의 당진군(唐津郡) 면천면(沔川面) 일대를 말한다.
[주D-003]흐르면 …… 멈추었도다 : 출사(出仕)하고 은거(隱居)하는 일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권48 〈가의전(賈誼傳)〉의 “흐름을 타게 되면 함께 흘러 내려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잠깐 정지할 뿐이다.[乘流則逝 得坎則止]”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공(李公) 묘갈명
공의 휘는 지걸(志傑), 자는 수부(秀夫), 호는 금호(琴湖),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시조 총언(悤言)은 고려 개국 공신(開國功臣)이다. 그 후로 벼슬아치가 계속 이어 나왔고,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소재(少宰) 약동(約東)이 덕행과 청렴결백, 분수에 자족하며 물러난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3대를 지나 휘 석명(碩明)이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바로 공의 고조로서 또한 청렴한 절조가 있어 사람들이 ‘맑은 물[淸水]’에 비유하였다. 증조의 휘는 희선(喜善)인데 경행(經行)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조부의 휘는 상급(尙伋)인데 병조 참지를 지냈고, 형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과 함께 모두 곧은 절개로 당시에 존경을 받았다. 선고(先考)의 휘는 련(堜)인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약관의 나이에 부모의 초상을 당하여 애통함으로 몸이 상하여 작고하였으며,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가림 조씨(嘉林趙氏 임천 조씨(林川趙氏))와 전성 이씨(全城李氏 전의 이씨(全義李氏)) 두 분인데,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이씨는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구준(耈俊)의 따님이자 청강공(淸江公) 제신(濟臣)의 손녀인데, 숭정 임신년(1632, 인조10) 5월 6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어 계부(季父) 승지공(承旨公)의 집에서 자랐다. 아이 때부터 총명하고 책을 좋아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문예(文藝)가 일찍부터 뛰어났다. 약관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정미년(1667, 현종8)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이미 평소에 큰 기대를 모았고, 과거 시험은 쉽게 급제할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여 반드시 모친이 건강할 때 급제하여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여 마침내 평생의 크나큰 한이 되었다. 경신년(1680, 숙종6)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고, 여섯 번 옮겨서 사사(四司)를 역임하고 공조 좌랑으로 승진하였다.
계해년(1683)에 고산 현감(高山縣監)에 제수되고 2년 뒤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정묘년(1687) 봄에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제수되고, 가을에 흡곡 현령(歙谷縣令)에 제수되었으나 공격(公格)으로 체직되고, 다시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가 되었다가 감찰(監察)로 옮기고 또 공조 좌랑으로 옮겼다. 무진년(1688)에 영덕 현령(盈德縣令)에 제수되고, 기사년(1689)에 파직되어 체포되었으며, 경오년(1690)에 다시 감옥에 갇혔다. 신미년(1691)에 곤양(昆陽)으로 귀양 갔다가, 갑술년(1694)에 죄를 용서받고 돌아왔다. 신사년(1701)에 70세가 되었는데 아들이 시종신(侍從臣)이었던 은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집에서 작고하니, 임오년(1702) 7월 8일이었다. 이해 9월 22일에 충주(忠州) 서쪽 맹동(孟洞) 율리(栗里)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풍채가 의젓하고 언론이 뛰어나서 당시에 동년배들이 추중(推重)하였고, 성균관에 있을 때에는 항상 사림(士林)을 위하여 논의를 주도하였다. 갑인년(1674, 현종15)에 조정에서 행실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할 때 홍득우(洪得禹), 이인혁(李寅爀) 등 제공(諸公)과 함께 천거되니, 이것은 대개 모두 당시에 인망(人望)을 얻었기 때문이다. 을묘년(1675, 숙종1) 이후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서호(西湖)에 은거하여 여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벼슬길에 들어가서 고을 수령으로 부임한 것은 대대로 녹봉을 받은 신하로서 조정의 명령을 사양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지 벼슬살이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후로 내직과 외직에 있는 동안 항상 청렴결백으로 자신을 절제하고, 공무를 봉행할 때는 법을 준수하여 외압에 꺾이거나 굴복한 적이 없었다. 민사(民事), 군정(軍政), 학교(學校), 전결(田結), 송옥(訟獄), 진조(賑糶) 같은 일에 대해서도 마음과 힘을 다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부지런히 힘썼는데, 이것들은 모두 후세의 법이 될 만하였다. 여러 고을이 진정(賑政)을 할 때에 으레 전매(轉賣)하여 취한 이익을 가지고 밑천으로 삼았는데, 공은 백성에게 돌아갈 이익을 도리어 관아에서 독점하는 것을 싫어하여 오직 스스로 의복을 덜 입고 음식을 줄여 백성을 먹였다.
고산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상사(上司)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아 폄출당하였고, 영덕 현령으로 있을 때에는 토호(土豪)를 치죄하다가 죽은 자가 세 명이었는데 그들 집에서 고소하여 심지어 재물을 탐하였다고 무고를 하기까지 하였다. 마침내 당시 소인배들의 무함을 받아 1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공의 빙벽(氷檗)의 절조가 평소에 드러난 데다가 샅샅이 조사해 보았으나 나오는 것이 없자 마침내 형벌을 남용했다는 죄목으로 멀리 유배되었다. 적소(謫所)에 있을 때에는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오직 옛 전적을 보는 것으로 스스로 즐기면서 천리 밖의 갇혀 있는 신세가 된 것을 잊었다.
죄를 용서받고 풀려난 뒤로 수년 동안 벼슬에 제수되지 않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들이 그의 원통함을 아뢰어야 한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당시에 화를 면하고 오늘날 살아 돌아온 것은 모두 성상의 은혜이다. 어찌 감히 다시 은택을 바랄 생각을 하겠는가.” 하고는 여러 아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으니, 공의 지키는 바를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일찍 부친을 여읜 탓에 봉양을 제대로 못한 것을 매우 원통하게 여겨서, 모친을 봉양할 때에 세심하게 살피고 맛있는 음식으로 극진히 봉양하였고, 돌아가시자 시묘를 살면서 상제(喪制)를 지키느라 마침내 병이 났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묘소를 지키면서 3년 동안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절일(節日)에 성묘하는 일 또한 노쇠하다는 이유로 혹시라도 그만두지 않았다. 고조(高祖) 이상의 두 대(代)의 선영이 함께 같은 산에 있어서, 그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사철마다 고조의 묘소에 제사 지낼 적에 두 대도 함께 제사 지냈다.
백씨(伯氏)와 어려서부터 일찍이 함께 살았고, 중년에 이르러서는 근처에 집을 지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서로 왕래하며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자질(子姪)들을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 가르쳤고 주색(酒色)과 사치에 대해서는 특히 엄하게 경계하였다. 내외종 형제뿐만 아니라 종족(宗族)과 외친(外親)에게도 극진하게 대하였으니, 가난한 시골에 사는 먼 일가라도 보첩(譜牒)에 이름이 실려 있으면 정성껏 대하였고 종회(宗會)의 법을 강론하여 친척을 친애하는 정의(情誼)를 돈독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공이 가정에서 보인 아름다운 행실이었다.
공은 자신을 지키는 데 조용하고 조촐하게 하여 평소에 하찮은 물건 하나도 남에게 달라고 하지 않았으며, 아첨하는 태도가 있는 자에게는 얼굴에 침을 뱉으려고 하였다. 마음가짐은 공명정대하고 속이지 않고자 힘써서 이 때문에 서로 속이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매우 미워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였다. ‘편당(偏黨)’ 두 자에 대해서는 마음에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으며, 붕우를 권면하고 자제를 경계할 때 일찍이 이 점을 강조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서 옷과 띠를 바르게 착용하고 반드시 자리를 바르게 하고 앉으며 방 한 칸을 깨끗하게 소제하고 하루 종일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거처하는 방의 벽에 쓰기를, “내 방에 들어오는 자는 남의 선악과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라.” 하였다. 자제들이 남의 불선(不善)에 대해 논하면 그때마다 꾸짖기를, “남의 악행을 말하고 남의 사생활을 들추면 어찌 덕이 있는 자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하객이 문 앞에 가득하자, 이에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기를, “네 아비는 백발노인이 되도록 경서(經書)를 연구했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했는데, 자식이 급제를 하였으니 어찌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일단 벼슬하게 되면 곧 우환의 시작이니, 내가 마음에 기쁘지 않은 까닭이다.” 하였다. 아들이 언사(言事)로 외직에 보임되자 또 태연하게 말하기를, “직책은 내직과 외직의 구별이 없고 지방 수령은 크고 작은 것이 없다. 또한 기한이 촉박한 길이라 지체해서는 안 되니 빨리 떠나도록 당부할 뿐이다.” 하였다.
아, 이 몇 가지를 보면 공의 사람됨을 대략 알 수 있다. 또한 전할 만한 다른 언행도 대부분 다 기록하지 못했다. 공은 문(文)에 대해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시(詩)에 더욱 뛰어났다. 공이 읊은 시는 사람들에게 전해져 암송되고 있는 것이 많고, 유고(遺稿) 5권이 집에 간수되어 있는데 모두 1500여 수가 된다. 아, 이것 또한 하나의 불후(不朽)가 될 수 있다.
배위(配位)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으며, 생원 순열(順悅)의 따님이다. 5녀 2남을 낳아 길렀으니, 장남 세근(世瑾)은 지평(持平)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음성 현감(陰城縣監)에 보임되었고, 차남은 세진(世璡)이다. 장녀는 유중영(柳重榮)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사 어사하(魚史夏)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정만준(鄭萬準)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군수 조세망(趙世望)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유창진(柳昌晉)에게 시집갔다.
음성 현감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정주(挺柱)이다. 세진은 3남을 두었는데 정즙(挺楫), 정림(挺霖)이고 막내는 어리다. 어사하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유관(有寬), 유인(有寅)이고, 사위는 이하영(李夏榮)이다. 정만준은 양자를 두었다. 조세망은 3녀를 두었는데 둘은 유씨(柳氏)에게 시집가서 후사 없이 일찍 죽었다.
공이 작고하고 1년 뒤에 음성(陰城)이 공의 사적(事迹)을 기록하여 상복 차림으로 먼 길을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였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칩거하여 비록 공과 종유할 수 없었지만 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情誼)가 이미 깊었다. 재종제(再從弟) 택(擇)은 단아한 선비로 공과는 내외형제(內外兄弟) 사이로 생전에 일찍이 공을 칭찬한 말이 적지 않았고, 규(揆)는 공의 조카사위로 항상 공의 행의(行義)를 매우 자세하게 말했으며, 또한 상주(喪主)의 애달픈 간청을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노쇠하고 비루한 신세를 잊고 대략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이어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비의 처세는 / 士之處世
자기 몸에 얻는 것이 귀하니 / 貴得於己
실상이 우세하면 신임을 받으나 / 實勝則孚
이름이 우세하면 치욕이 된다네 / 名勝爲恥
공의 평생은 / 惟公本末
문장과 덕행을 겸했으나 / 有文與行
자랑하지도 구차하지도 않으며 / 不衒不苟
얻고 잃는 것을 운명에 맡겼도다 / 得喪惟命
가슴속 회포는 맑고 트였으며 / 襟懷淸曠
운치는 속세를 벗어났기에 / 韻致脫俗
또한 조정의 품평이 있어서 / 亦有朝評
지란옥수(芝蘭玉樹)에 비유하였네 / 比之蘭玉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 官不登顯
장수도 누리지 못했으니 / 壽未到遐
덕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 視德雖歉
내가 무엇을 탄식하겠는가 / 在我何嗟
어진 아들이 있어서 / 有子克賢
그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려고 하니 / 思顯厥懿
나의 문장이 화려하지 않지만 / 我筆非華
거짓이 아니어서 거의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 / 唯庶無愧
[주D-001]소재(少宰) : 이조 참판의 별칭이다. 소재는 춘추 시대에는 태재(太宰)를 보좌하여 국정(國政)을 다스렸고, 명청(明淸) 시대에는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소재(小宰)와 통용된다. 《春秋左氏傳 宣公2年》 《傳習錄 中 答羅整庵小宰書》
[주D-002]경행(經行) :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약칭으로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르다는 뜻이다.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를 천용(薦用)하는 인재 등용 방법의 하나이다. 《國朝寶鑑 卷23 明宗 21年 5月》
[주D-003]계부(季父) 승지공(承旨公) : 이인(李:1608~?)을 가리킨다. 《韓國系行譜 碧珍李氏》
[주D-004]사사(四司) : 조선 시대 형조(刑曹)에 소속된 상복사(詳覆司), 고율사(考律司), 장금사(掌禁司), 장례사(掌隷司)의 네 관아를 말한다. 《經國大典 吏典 京官職 刑曹》
[주D-005]빙벽(氷檗) : 얼음물을 마시고 황벽나무를 먹는다는 뜻으로, 청고(淸苦)한 생활을 하며 절조를 지키는 것을 뜻한다.
[주D-006]하나의 불후(不朽) : 불후는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의 삼불후(三不朽)를 말하는데, 이 세 가지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불후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훌륭한 말을 남긴 것이 하나의 불후가 된다는 뜻이다. 《春秋左氏傳 襄公24年》
[주D-007]음성 …… 정주(挺柱)이다 :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묘지명에는 세 아들의 이름이 정주, 정해(挺楷), 정재(挺材)로 기록되어 있다. 《明谷集 卷26 僉知中樞府事李公墓誌銘, 韓國文集叢刊 154輯》
[주D-008]자기 …… 귀하니 : 자기 몸에 얻는 것이란 학문이나 수양 등을 말하며, 이와 반대로 밖에서 얻는 것이란 부귀, 영화 등을 말한다.
[주D-009]지란옥수(芝蘭玉樹) : 훌륭한 자손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때 사안(謝安)이 일찍이 여러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비유하건대, 지란옥수가 자기 집 뜰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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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인(淑人) 경주 김씨(慶州金氏) 묘갈(墓碣)
명촌(明村) 나군 현도(羅君顯道)가 선비(先妣) 태숙인(太淑人)의 행장을 직접 지어 편지로 보내오기를, “선공(先公)을 장사 지낼 때 선비가 살아 계셔서 선비의 사적(事迹)이 묘갈에 실리지 않았으니, 선생님께서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쇠병(衰病)으로 사양하였으나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행장을 읽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숙인은 경주 김씨이다. 고조의 휘는 만균(萬鈞)인데 대사헌을 지냈고, 증조의 휘는 명원(命元)인데 경림부원군(慶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조부의 휘는 수렴(守廉)인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오원군(鰲原君)에 추봉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남중(南重)인데 예조 판서 경천군(慶川君)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선비(先妣)는 정부인(貞夫人)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도정(都正) 유경(有慶)의 따님이다.
숙인은 만력 갑인년(1614, 광해군6) 6월 6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언행이 엄숙하고 일 처리가 정직하였는데, 정효공(貞孝公)이 항상 탄식하기를, “네가 만약 남자라면 필시 우리 가문을 창성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16세에 나공(羅公)에게 시집갔는데 시부모를 섬길 때 뜻에 맞도록 힘썼다. 정축년(1637, 인조15) 난리에 조모 이 부인(李夫人)이 배 안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사방을 돌아보아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전(奠)을 올리는 데 필요한 여러 제수(祭需)부터 시부모의 의복과 음식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성의를 다하여 마땅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시동생들이 모두 어렸는데 매우 부지런하여 잘 양육하니, 시부모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피란 중의 위험하고 어려운 때에 우리 두 사람과 여러 자식들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 며느리 덕분이다. 만약 자손들이 우리 며느리처럼 성심과 효성을 다한다면 어찌 창성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참의공(參議公)이 영해(寧海)로 귀양 가서 슬픔을 머금고 먼 곳에서 귀양살이하느라 건강을 해쳐 병이 났고, 정 부인(鄭夫人)의 병 또한 심해졌다. 숙인은 밤에 옷을 벗지 않은 채 잠을 자고 몸소 밥을 지어 봉양하였는데 오랫동안 하면서도 나태해지지 않았다. 참의공이 부창증(浮脹症)을 앓아 평생 동안 낫지 않았는데 숙인이 병 수발을 하며 노심초사하였다. 돌아가시자 상제(喪祭)의 제반 사항을 마음을 다하여 준비하였고, 제사 지내는 시각이 빠르거나 늦어지는 실수를 할까 염려하여 집 기둥에 먹으로 눈금을 표시하고 해그림자를 보아서 3년 동안 제사 지내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켰다. 밤낮으로 정 부인을 부축하였는데, 부인을 편안하게 해 드리려고 해서이니, 그 뜻이 매우 극진하였다.
나공의 아우 셋이 모두 일찍 죽었는데 이들이 병이 들었을 때는 자기 자식처럼 간호하였고, 죽었을 때는 재물을 털어 염습(斂襲)하는 도구를 마련하는 데 아낌없이 도와주었다. 둘째 시동생에게 유복자(遺腹子)가 있었는데, 숙인은 따로 여비(女婢)를 구하여 유모(乳母)로 삼아 주었고, 뒤에 그의 두 딸에게 모두 문서를 작성하여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나공이 주군(州郡)의 수령으로 있을 때 항상 형제들이 가난한 것을 염려하여 녹봉을 나누어서 실어 보냈고, 친척 가운데 춥고 배고픈 자가 있으면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었다. 숙인은 이 같은 일로 청렴을 상하게 한다는 비난이 있을까 염려하여 틈나는 대로 공에게 간략하고 절제 있게 하도록 간언하였다. 노비들을 엄하게 신칙하여 안과 밖을 차단하여 상화(商貨)가 드나들지 못하게 하니 관아 안이 엄숙하였다.
계묘년(1663, 현종4)에 정효공(貞孝公)과 나공이 한 달 간격으로 갑자기 작고하니, 숙인은 거듭 큰 슬픔을 당해서 애통함으로 몸이 몹시 상하였으나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전(奠)을 받들어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무릇 제사를 지낼 때에는 아무리 엄동설한이라도 반드시 목욕하고 치재(致齋)하였으며, 실(室)과 당(堂)을 소제하고, 뜰과 섬돌을 청소하였으며, 모든 제기(祭器)를 직접 씻었다. 비복(婢僕)들도 옷을 빨고 목욕하게 하여 매우 정결하게 하는 데 힘썼다. 자식들을 훈계하는 데에는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 하였고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비복을 부릴 때에는 은혜롭게 하되 위엄이 있었으며, 참소하는 습성을 엄금하여 온 집안이 화목하고 이간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동서(同壻) 간에 온화함과 공경으로 서로 대하여 동서들이 종신토록 어머니 섬기듯이 하였다. 무릇 과장된 말을 한 적이 없고, 남에게 보낸 편지는 몇 줄을 넘지 않았는데 말은 간결하지만 이치에 합당하였다. 사위 김 의정(金議政)이 전조(銓曹)에 있을 때, 친척이 숙인의 편지를 받아 벼슬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숙인은 절대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미망인으로서 할 일이겠는가.” 하였다.
평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찍이 세포(細布)를 짜서 관아에 들이고 돈을 받아 곤궁한 생활에 보태었는데, 하루는 현도(顯道)가 고하기를, “이 물건은 필경 오랑캐 땅으로 갈 것이니 매우 옳지 않은 일입니다.” 하니, 숙인이 이에 깨닫고 말하기를, “과연 너의 말과 같다. 하물며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종신토록 병자년(1636, 인조14) 변란을 원통하게 여겼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느냐.” 하고, 마침내 절대로 다시 하지 않았다.
나공이 봉산(鳳山) 수령에 제수되자, 숙인이 말하기를, “이곳은 바로 오랑캐 사신이 왕래하는 길이니, 어찌 갈 수 있겠습니까. 훗날 호서(湖西) 고을의 수령이 되어 호우(湖右)의 여러 현인(賢人)들에게 두 아들을 가르치면 됩니다.” 하니, 나공이 그 의리에 감복하고 그 의견을 훌륭하게 여겼다. 현도가 아들이 없자 숙인은 석좌(碩佐)의 장남 연(演)을 양자로 들일 생각이었으나, 장남이 양자가 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나기 때문에 스스로 상언(上言)을 올렸는데, 상언을 탁자 위에 두고 뜰에 내려가 네 번 절하고서 보냈다. 상언에 대해 윤허하는 회계(回啓)가 내리자 또한 절을 하고 받았으니, 그 의리에 밝은 것이 이와 같았다. 만약 조정의 일 처리에 잘잘못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근심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말하기를, “안팎이 모두 세신(世臣)이니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정직한 성품을 추모하여 항상 이에 대해 언급하였다.
현도(顯道)가 정묘년(1627, 인조5)에 올린 항소(抗疏)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다 말이 나오자마자 화가 따르리라는 것을 알았는데, 숙인은 사일지의(事一之義)로 권면하였다. 현도가 유배 가게 되자 또 위로하여 말하기를, “너는 이미 의리를 지켜 견책을 받았으니, 나는 서로 이별하는 한(恨)이 없다. 모름지기 병을 조심하고 잘 다녀오도록 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은 더욱이 평범한 부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계유년(1693, 숙종19) 12월 18일에 병으로 작고하니, 나이 80세였다. 이듬해 2월에 그해의 운수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임시로 묘(墓)를 쓰고, 을해년(1695) 2월 모일(某日)에 나공의 묘 왼쪽에 합장하였다.
명좌(明佐)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는데, 그의 처 송씨(宋氏) 또한 자결하여 그 뒤를 따랐으며 후사가 없다. 양좌(良佐)는, 현도가 곧 그의 자(字)이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다. 2녀를 두었는데 윤가교(尹可敎)와 정수기(鄭壽期)가 사위이다. 측실에게서 2남 3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윤심교(尹心敎)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석좌(碩佐)는 기지(氣志)가 있고 행의(行義)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지냈는데, 또한 일찍 작고하였다.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바로 연(演)이고 차남은 준(浚)이다. 김수항(金壽恒)은 6남 1녀를 두었는데, 창집(昌集)은 호조 판서이고, 창협(昌協)은 이조 참판이며, 창흡(昌翕)은 주부(主簿)이고, 창업(昌業)과 창즙(昌緝)은 모두 동몽교관(童蒙敎官)이며, 창립(昌立)은 일찍 죽었고, 사위는 이섭(李涉)이다. 이사명(李師命)은 사위 둘을 두었는데, 정언(正言) 김보택(金普澤)과 사인(士人) 김용택(金龍澤)이다.
아, 숙인의 아름다운 덕과 훌륭한 행실은 상주(喪主)가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나는 현도 형제와 형제의 의리가 있고, 또한 모두 일찍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다. 아, 시집가기 전에는 부모가 그 효성을 칭찬하였고, 시집간 뒤에는 시부모가 그 성심(誠心)을 칭찬하였다. 남편을 섬기는 데는 공경하면서도 경계하는 말을 하였고, 자녀를 훈육하는 데에는 사랑하면서도 엄숙하게 하였다. 도리(道理)의 대체(大體)를 통달한 데에 이르러서는 또한 글을 읽은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아, 어찌 옛날의 이른바 여사(女士)가 아니겠는가. 이에 감히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비석의 뒷면에 새기도록 하였다.
[주D-001]명촌(明村) 나군 현도(羅君顯道) : 나양좌(羅良佐:1638~1710)를 가리킨다. 명촌은 호이고, 현도는 자이다. 부친은 해주 목사(海州牧使) 나성두(羅星斗:1614~1663)이다.
[주D-002]정축년 난리 : 1637년(인조15)에 청나라 군사들에게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된 사건을 말한다.
[주D-003]전(奠) : 장례 지내기 전에 영전(靈前)에 주과(酒果)를 올리는 일이다.
[주D-004]참의공(參議公) : 숙인 경주 김씨의 시아버지인 나만갑(羅萬甲:1592~1642)을 가리킨다.
[주D-005]정 부인(鄭夫人) : 숙인 경주 김씨의 시어머니로, 정엽(鄭曄:1563~1625)의 딸이다.
[주D-006]청렴을 상하게 한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얼핏 보면 취할 만하고 자세히 보면 취하지 말아야 할 경우에 취하면 청렴을 상하게 한다.[可以取 可以無取 取 傷廉]”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주자(朱子)는 이 글의 내용을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주D-007]사위 김 의정(金議政) : 영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을 가리킨다.
[주D-008]사일지의(事一之義) : 사일은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약칭으로,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와 글을 가르쳐 준 스승과 밥을 먹게 하여 준 임금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小學集註 明倫》
[주D-009]처 송씨(宋氏) : 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딸이다. 《萬姓大同譜 安定羅氏》
[주D-010]이사명(李師命) : 나성두(羅星斗)의 사위, 즉 숙인 경주 김씨의 사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이공(李公) 묘갈명
공의 휘는 지웅(志雄), 자는 만부(萬夫),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고려 개국 공신 총언(悤言)의 후손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였고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휘 약동(約東)이 덕행과 청렴결백, 분수에 자족하며 물러난 것으로 이름이 났다. 소재(小宰)를 지냈고 시호는 평정(平靖)인데 곧 공의 7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석명(碩明)인데 군수를 지냈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청렴한 절조는 집안에 대대로 전해 온 것으로 사람들이 그의 절조를 ‘맑은 물[淸水]’에 비유하였다. 증조의 휘는 희선(喜善)인데 경행(經行)이 있어서 동몽교관이 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상급(尙伋)인데 병조 참지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형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과 함께 모두 곧은 절개로 당시에 존경을 받았다. 선고(先考)의 휘는 련(堜)인데 지조와 행실이 남보다 뛰어났고, 모친상을 당해서 애통함으로 몸이 몹시 상한 나머지 작고하였으며,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가림 조씨(嘉林趙氏)와 전성 이씨(全城李氏) 두 분인데,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이씨는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구준(耈俊)의 따님이자 청강공(淸江公) 제신(濟臣)의 손녀이다. 숭정 무진년(1628, 인조6) 7월 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아이 때부터 효애(孝愛)가 순박하고 독실하였다. 8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초상 치르기를 성인처럼 하였고, 10세에 승중상(承重喪)의 상복을 입었다. 계부(季父) 승지공(承旨公)에게 수학하였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장성해서는 시문(詩文)으로 당시에 이름이 났다. 27세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31세에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고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로 승진하였다. 그 뒤에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을 거쳐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 승진하고 형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한마디 말로 옥사를 판결하여 송사 문서가 적체되지 않으니, 여러 당상들이 너나없이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이때 모부인이 나이가 많은 탓에 공은 고을 수령 자리 하나를 얻어 모부인을 봉양하겠다는 소원이 매우 간절하였다. 그러나 형조의 규례로 인하여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20여 개월 재직하다가 모친상을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가슴 아파하였다. 묘소 아래에서 시묘를 살았는데 애통함으로 몸이 몹시 상한 나머지 거의 죽을 뻔하였고,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묘소를 지키느라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 가을에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곧 체직되었다. 겨울에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되고 사직서 영(社稷署令),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로 옮겼다. 경술년(1670) 겨울에 가평 군수(加平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이해는 흉년이 든 데다, 본군(本郡)은 기내(畿內)의 잔약한 고을이어서 평소 저축한 것이 없었다. 공은 지성으로 경영하고 상사(上司)에 곡식을 보내 주도록 청하였으며, 혹은 부유한 백성에게 곡식을 내도록 권유하고, 심지어 자신의 녹봉을 떼어서 돕기까지 하였다. 무릇 백성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음을 다하여 행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온 경내가 이에 힘입어 보전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고을 백성들이 묘당(廟堂)에 1년 더 잉임시켜 줄 것을 청하였고, 송덕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정사년(1677, 숙종3)에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무오년(1678)에 안성 군수(安城郡守)에 제수되었는데 곧 파직되었다. 경신년(1680)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고 3년 있다가 병으로 체직되었다. 계해년(1683)에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에 제수되고, 그해 겨울에 김제 군수(金堤郡守)에 제수되었는데 또 기근을 만나게 되자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를, 한결같이 가평 군수 재임 시에 한 것처럼 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나무를 깎아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萬世難忘]’라는 글귀를 써서 온 경내에 두루 세웠다. 공은 5년 동안 재임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고, 정묘년(1687)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기사년(1689) 여름에 궁궐에 변고가 있자, 공은 오공 두인(吳公斗寅)의 상소에 참여하고 이어 두문불출하였다. 갑술년(1694)에 한성부 서윤에 제수되자 마지못해 직무를 맡았고 병자년(1696, 숙종22)에 체직되었다. 무인년(1698)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에 제수되었고, 해직되어 집에서 한가하게 지낼 때에는 오직 도서(圖書)를 보면서 스스로 즐겼다. 신사년(1701) 7월 14일에 갑자기 병도 없이 작고하여, 판서공(判書公)의 묘소 아래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천성이 어질고 자애로우며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온화하고 근신하며 주도면밀하고 상세하여, 아무리 급작스러운 때를 만나더라도 마음이 동요된 적이 없었다. 남들에게 매우 정답고 친절하였으며 남들의 시비와 과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내 마음을 다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나 벼슬자리에 있을 때나 항상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군현(郡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항상 말하기를, “수령이 된 자는 조정에서 명한 칠사(七事)를 힘써 행하며 항상 여기에 능숙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백성에게 논밭을 갈고 씨 뿌리는 것을 제때에 하게 하고, 유생(儒生)들에게 학업을 하는 데 일과(日課)가 있게 하며, 군사는 정해진 인원을 채우고 백성에게 규정 이외의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는다면 거의 칠사를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응전(鷹鸇)이 난봉(鸞鳳)만 못하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손을 위하여 생계 수단을 마련할 것을 권하니, 공이 말하기를, “청렴결백을 집안 대대로 전해 온 것은 본래 선대(先代)의 훈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손들이 마땅히 경서의 가르침을 생업으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여 스스로 수립하는 바가 있으면 그만일 뿐이다. 내가 어찌 자손들을 위해 생계 수단을 마련할 것인가.” 하였다. 이런 말을 살펴보면 공이 지키는 바를 알 수 있다.
공은 계씨(季氏) 첨추공(僉樞公)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각자 멀리서 벼슬살이할 때가 아니면 만나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형제간의 화목한 즐거움은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다. 벼슬하지 않아 양식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일은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것인데, 공은 담담히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여러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여 질병과 우환이 있으면 몸소 자상하게 돌봐 주었고, 친척은 멀고 가까운 사이를 따지지 않고 돈독함과 화목함에 차이가 없었으니, 공의 아름다운 덕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배위(配位)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익위사 사어 인실(仁實)의 따님이다. 단정하고 맑은 성품을 타고났고 부도(婦道)를 잘 갖추어서 일가친척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세황(世璜)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목사(牧使)를 지냈고, 차남은 세구(世球)인데 일찍 죽었으며, 삼남은 세관(世瓘)인데 또한 공보다 먼저 죽었고, 막내는 세환(世瑍)인데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장녀는 윤규(尹揆)에게 시집갔는데, 그는 경행(經行)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고, 차녀는 윤황(尹熀)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죽었다.
세황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상(挺相)이고 딸은 유급(柳級)에게 시집갔다. 서출 아들이 둘인데 정의(挺椬)와 정량(挺樑)이며, 딸 하나는 어리다. 세구는 1녀를 두었는데 김성대(金聲大)에게 시집갔다. 세관은 딸이 둘이고 아들이 없어서 아우 세환의 차남 정박(挺樸)을 후사로 삼았고, 딸은 한덕일(韓德一)과 박징빈(朴徵賓)에게 시집갔다. 세환은 2남을 두었는데 정욱(挺郁)과 정박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윤규는 2남을 두었는데 장교(莊敎)와 영교(英敎)이고, 딸은 이석기(李錫祺)에게 시집갔다. 윤황은 2남을 두었는데 취만(就晩)과 최만(最晩)이고, 딸은 이잠(李潛)에게 시집갔다.
정상은 1녀를 두었고, 정욱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나는 공과 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情誼)가 깊은데, 공이 남쪽 지방에 올 때면 자주 깊은 산골짜기까지 찾아 주시어 그 자상하고 두터운 정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아우 추(推)가 김제(金堤)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공이 백성들에게 남긴 은택이 있어 지금까지 그 맑은 덕을 칭송하고 있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공의 행의(行義)를 더욱 잘 알았다. 공의 아들 세환이 묘문(墓文)을 부탁하였는데 나는 쇠병(衰病)으로 글을 짓지 못한다고 사양했지만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묘문을 편차하고 명(銘)을 짓는다.
아름다운 자질이여 / 有美其質
타고난 기품이 돈후했고 / 稟則厚兮
성대한 문장이여 / 有蔚其文
재주가 빼어났도다 / 才則茂兮
크게 재능을 펴지 못했으니 / 而不大闡
운명이 기구하였네 / 命之畸兮
말년의 유유자적한 생활 / 棲遲末路
끝내 여기에 그쳤구려 / 竟止斯兮
오직 하늘이 내린 양심을 / 唯有天衷
유독 홀로 보전하였으니 / 獨自保兮
세상살이 부침이야 / 世間升沈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 詎足道兮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여 / 塤篪相和
늘그막까지 즐거워했는데 / 暮境樂兮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서 / 一日觀化
티끌세상에서 벗어났네 / 蛻塵濁兮
대대로 음덕을 쌓아서 / 世積其餘
후손에게 남겨 주었네 / 以遣後兮
비석에 비문을 새기니 / 劖之于石
오랜 후세에 징험하리라 / 可徵久兮
[주D-001]소재(小宰) : 이조 참판의 별칭이다. 소재는 춘추 시대에는 태재(太宰)를 보좌하여 국정(國政)을 다스렸고, 명청(明淸) 시대에는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소재(少宰)와 통용된다. 《春秋左氏傳 宣公2年》 《傳習錄 中 答羅整庵小宰書》
[주D-002]경행(經行) :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약칭으로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르다는 뜻이다.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를 천용(薦用)하는 인재 등용 방법의 하나이다. 《國朝寶鑑 卷23 明宗 21年 5月》
[주D-003]승중상(承重喪) : 아버지를 여읜 맏아들이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상을 당한 경우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이지웅(李志雄)의 조부 이상급(李尙伋:1572~1637)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간 형 이상길(李尙吉)을 찾아가다가, 도중에서 적병을 만나 살해된 사건을 말한다. 《인조실록》 15년(1637) 2월 2일 기사에는 이상급이 길에서 얼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04]계부(季父) 승지공(承旨公) : 이인(李:1608~?)을 가리킨다. 《韓國系行譜 碧珍李氏》
[주D-005]기사년 …… 있자 :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된 사건을 말한다. 1688년(숙종14) 숙원(淑媛) 장씨(張氏)가 뒷날 경종이 된 왕자 윤(昀)을 낳았는데, 1689년 2월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老論)이 윤을 원자(元子)로 봉하는 데 반대하면서 숙종과 대립한 결과,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다시 집권하면서 장씨는 희빈(禧嬪)이 되었고, 민씨는 그해 5월 남인들의 주장으로 폐위되었다.
[주D-006]공은 …… 참여하고 : 전(前) 사직(司直)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이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오두인, 박태보(朴泰輔) 등 몇 사람이 한밤중에 친국(親鞫)을 당하였다. 《肅宗實錄 15年 4月 25日》
[주D-007]칠사(七事) : 수령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로, 농상(農桑)을 진흥하고, 호구(戶口)를 늘리고, 학교(學校)를 일으키고, 군정(軍政)을 잘 다스리고,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고, 사송(詞訟)을 간결하게 하고, 간활(奸猾)이 없어지게 하는 일을 말한다. 《經國大典 吏典》
[주D-008]응전(鷹鸇)이 난봉(鸞鳳)만 못하다 : 어진 정사가 가혹한 정사보다 낫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이 엄맹(嚴猛)한 정사를 숭상하다가, 구람(仇覽)이 덕으로 사람을 교화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주부(主簿)로 임명하고서 말하기를, “주부는 진원(陳元)의 죄과를 듣고도 처벌하지 않고 그를 교화했다 하니, 응전 같은 맹렬한 뜻이 적은 게 아닌가?” 하니, 구람이 말하기를, “응전이 난봉만 못합니다.” 하였다. 《後漢書 卷76 仇覽列傳》
[주D-009]계씨(季氏) 첨추공(僉樞公) : 이지걸(李志傑:1632~1702)을 가리킨다. 《明齋遺稿 卷39 僉知中樞府事李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136輯》
[주D-010]경행(經行) :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약칭으로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르다는 뜻이다.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를 천용(薦用)하는 인재 등용 방법의 하나이다. 《國朝寶鑑 卷23 明宗 21年 5月》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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