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한글창제 비밀장소 '태산학당'의 역사

도심안 2022. 8. 12. 06:25
오경 2019. 10. 8. 08:19

가야족 '허경종'이 퇴출궁녀 측천무후를 입궁시켜  당나라를 멸하고 허씨부인 종소경 진현래 최일웅 등 백제족이  당현종의 구테타  군사로 성공하고  귀국하여 훗날  칠보면 허산(시산) 고향에  당현종이 부활하여   황제만이 타는  '5두마차'를 바위로 조성하여 타고  중국으로 가려는 허기장군 신당 그 아래 당현종의 모친 두씨황후 굴  '허왕두'굴이 있다

 이를 한글 가사로 찬송하는것을  유자광이 악학괘범에 넣으려했으나  성현이 이융기(당현종)를 성참판. 성도령으로 만들려다   이몽룡 행단  방죽  춘향제 등 이곳 이름으로 춘향전이 춘향가 유씨 소설로 시작되어  일본이 협율사에서   조선악행 변학도 선전가로 유행 시켰다    

 

가야국 김수로왕 후손 역사학자 김병모 박사는'허황후는  인도 구자라트에서  중국 서촉 사천성으로, 가서 가야로 왔다'고 발표했다  또  포로 의자왕 마을 낙양성 십리밖  동촌 운주별가에서 왕족 몰살의 위험에서  허기. 진현례 군악으로 진격 구테타로 이융기를  당현종 황제로 올리고    그공으로  의자왕 증손녀가 夫餘太后로 봉하다 (711년 10 13,) 현종은 장안 근교의 여산(驪山) 아래 대규모의 군사 훈련 구테타로 당현종황제로 만든   태인 허씨 '허기'는  당현종이 양아들로 사성 '이기'이름으로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정치. 전투.  군가 .의학 .웅변등 서역지역의  교육 도서자료등 고서  전서 자로 허경종, 허왕두, 당현종 등 역사로 배우는 학당이 후백제에서  고려 원종때   이곳 송씨와 원 쿠빌라이 화목시대  개성으로 올라가고 다음 충열왕때    옹동면 능향성의 시씨 무비와 허씨 후궁 허씨가 몽고 공주를 독살시킨 사건은 허경종 당현종 지혜를 태산학당(현무성서원) 교육 과정 그대로 이다  

여기에 인도 구자라트 제국시대  연고 허씨 송씨 홍씨 호족의 한글 문자  전서가 있었  한다  

 

 세계 서적을 다 모은 원나라 만권당 이재현의 처조카 권우는 고려 최후 두문동(상두산) 에서 길재 정몽주 학통으로 그 책으로 태산학당에서 가르치다가 태종이 불러 세종태자의 빈객으로 이곳에서 배운 백제부터 고려시대 까지 중국을 정복한 경험 역사와 통치자료로 배우는 학교 학당이 조선 말에는 중국에 복종하는 모화 교육 무성서원으로 변하였다

당을 멸망시킨 허경종 그리고 백제인이 왕으로 만든 당현종

몽고 쿠빌라이 그 전투 개선가 군가를 우리말로 쓰는 데 불편하여 인도 구자라트에서 서촉 사천성, 거기서 가야로 그리고 백제로 망명한 허씨(허세신. 허기 허사문 이허겸 이의방 이자겸등) 태인 허씨 호족이 도서자료등 글자로 통용해보다가 이곳 사람 권우가 세종을 빈객으로 교육시 제시하여 세종에 감격 정의공주를 이곳에 시집 보내어 공주와 비밀리에 연구한다

그리고 호족 송현수 집에 도움을 받아 단종왕비 이곳 여자다

그 한글 노래 곡은 정읍곡에 가사를 붙인 소리이고 현재 옹동면 농악으로 한류 음악의 근본이다

한글이

 

 

정읍시 칠보면  서낭산 정상에 성종15년에  대사성   유자광이 정극인에 지어준 

태산'學堂학당' 이름  글자 기와파편,  뒷산은  서낭산 배경 현재모습  그래서

정극인은 상춘곡 귀거래사 불우헌가등  이곳 후백제 애국가 정읍곡에 모두 가사만 바꾸어 노래하였는데   그 소리는 한일 합방으로  이 마을 김낙기가 전광문 서넙죽 김시랑 이재선등이 농악으로  협율사를 구성하고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 에 유학하여 일본 '팅동'   농악으로 전하였다

정극인 후손 정웅 장군이 전투마다  이순신의 스승으로 활동햇다   

대륙의 땅 은나라. 당나라. 원나라 등을 정복하고 통치하면서 배운 로마교육 제도 군사 .의학. 웅변. 음악 4과목 기술학교로 888년 허사문 장정필 최치원이 만나서 태산학당을 세고 후백제를 건국하고 신라국 김씨 왕조가 박씨 구테타로 경애왕 박씨왕 으로 정복하니 진현례 손 진훤왕이 습격 박씨 경애왕을 치우고 김씨 경순왕으로 사실상 신라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후백제가 신검 반란으로 고려통일로 되자 신라왕족 김선평. 허사문의 사돈 권행. 장정필을 삼태사공으로 최초의 고려사당이 안동에 설립되고 태산학당은 최치원 사당은 화랑곶’ ‘미륵 탑거리 현재 이름으로 전투 군가 훈련장으로

 

중국 대륙이 약해지면 정복 통치한 경험의 기질로 준비하는

한국 유일의 학당 인데 고려통일로 왕건의 사위 하사문이 소유하고 후손 이허겸 이자겸 이의방 이한 족벌 세력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전투에서 개선가를 부르는데 우리말로 그대로 읽는 가사

군가로 힘차게 부르는 우리글이 필요하였다

 

무성서원(최치원 사당)은 시산(중국어許山)리 허세신이 당나라에 잡혀가서 허씨 친족 허경종許敬宗을 움직여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왕비로 들게하여 당나라 고종과 그 왕족을 모두 죽이게 하고 당이 멸망하고 무씨武氏 周나라로 만들었다

 

 신라시대 부터  허기장군 최치원  후백제 견훤왕  조선시대 신숙주 후손 신잠이 국사당으로 

소조상에  '주상전하 수만세' 용비어천가 가사를 부르고있었다   

당현종의 성경《명황계감》을 한글가사(歌詞) 로   양귀비는 춘향  이융기는 이몽룡으로 발전

태산학당(,무성서원) 고서 성경책인 명심보감에 허경종의 행적을 찬송하는 성경책 용도의 내용인데 이때 원나라에 시달린 이의방 고려 후백제 창당 태산족 세력은 허경종과 당현종 의 어록을 갈오되”“갈아사데 공자 맹자 신격으로 정읍곡으로 현재 정읍 태산군 지역 농악 멜로디로 노래한 가사이다

 

許敬宗曰 春雨如膏 行人惡其泥 秋月揚輝 盜者憎其照鑑

허경종왈 춘우여고 행인오기니녕 추월양휘 도자증기조감

 

허경종이 말하기를, "봄비는 기름과 같으나(농작물에 내리는 단비와 같으나) 길가는 사람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달은 밝게 비치나 도둑은 그 밝게 비치는 것을 싫어한다."

 

허경종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였던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690705) 때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건망증이 심하여 '암중모색(暗中摸索)'이란 말로 유명하다.

 

- 최항  허경종의  측천무후 이용 당나라 멸망역사       백제인 진현례 허기 최일용이 이융기를 당현종으로 세운 구테타 역사  '명황계감'을   1459(세조 5) 을 한글로 번역  명황계감의 가사(歌詞)를 한글로 번역하는 한편,  명심보감 허경종의 전기를 교육하고 당현종과 기황후 시대처럼 대륙을 정복 하는   비밀 교육 학당이였다

 

 그리고 백제 노예 출신 진현례 허기 종소경 허씨부인 왕모중이 의자왕 증손녀 등이   측천무후 무씨 주나라로  이융기를 주융기로 된 멸망국  당의 왕손 이융기를 당현종으로 구테타에 성공하여 의자왕 증손녀 가 부여태후가 되고 백제족 '혜초'가  친선교역 사절단으로 서역  로마 학당 까지 가서 로마 제국 교육 4교과 전투 음악 의학 웅변 교과를 당현종시대에 활용하였던 당현종의 立部技樂 은 현재 정읍 태산학당 칠보 지역 농악으로 1군왕만세- 2염불- 3새타령- 4당악 5잡희 곡의 순서가 같다  

당나라 현종때  당음악에  입부기(入部技)  새타령을 조가만세창(鳥歌萬世唱)으로 기록하였다

측천무후 불상 아래 흑치상지 묘비기록에는 흑치상지는 전투마다 동방 개선가를 만들어 불렀다고 기록한 비석이 있다

안록산난에   태자 숙종의 황제 찬탈로  허기는 신라에 경덕왕15년 군사를 모아 당현종 복위를 위하여 양자강을 타고 사천성으로 지원하고 최치원의 조상으로 보이는 최일용 최원등 최씨 족들이 당현종 반란족을 격퇴하고 그 후에 장보고 .최치원 등이 최후로 당에 차래로 지키다가 귀국했다  이틈에 신라에는 김씨 정권이 흔들려서 장보고 등이 지원하여 버티다가 진성여왕때 최치원이 도우려고 귀국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887년 태산군(정읍시 칠보면) 태수로 물러나서 

 호족 허사문과 진현례(지네)와 허씨  최씨 등이 지네깃발 대왕기로   진훤왕 후백제가  군장깃발이   조선시대까지 군악깃발로  '主上殿下壽萬歲(주상전하수만세)' 라고 사용한것을  일본총독부에서 '농자천하디대본야'라고 식민지 노예 깃발로 되어 부끄럽다 

 

고려시대  최충헌 정권 몽고 7차 침입에 송군비장군의 내장사 입암산성 전투에서 몽고포로와 화친 송씨 홍씨 태산족과 당현종시절 중국에 대대로 연고가 있는 군장들이 연결하여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와 고려 원종이 결합하여  최치원 사당을 개성학당으로 서울에 고려의 유일한 로마식 전투' 웅변 의학 군악4교과 전문 대학으로 세웠다

그래서 노래와 춤 단결 대장금등 의학과 판소리 웅변이  정읍곡인데  정몽주와 이방원의 담판노래 단심가와 하여가를 목격한 매헌 권우梅軒 權遇가  정읍곡 전반부곡으로 가사를 붙여 태산학당에서 노래하여 이곳 홍씨 홍빈의 사위로 결혼하였는데 그 권우 처제 외손 안맹담에  세종의정의공주가 시집을간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한글비밀제작으로 권우가  첫고시 합격생  권제 안의 최항 권채를 보내니 

권제를따라온 여동생이 이곳 서미성과 결혼 하여 한글 의학 음악이   세조에서 연산군까지 

 르네상스를이루다가  중종반정으로 문정왕후의 측천무후 모방 숙청으로  쇠퇴하다가  영조대왕때 이곳 서씨 세력의 의학과 서명응 정읍곡(대악후보)로 전해온 것을 일본인 석천의일이  수제천이름  느린소리로  추하게 명령변질하여 기피한다

 

손자 왕춘의 친족으로 태산(옹동면 능향) 출신으로 시씨 무비 세력시대인 충렬왕 때 편찬한 명심보감 충열왕때 태산에서 개성으로 그리고 조선의 서울로 간 5부학당의 교수 그고에 용비어천가 로 조직하여 중국에 숨기려고 정읍 칠보면 최치원 학당에서 비밀리에 세종의 정의공주와 승지 대사성 사가독서 권채를 유배로 위장하여 보냈다

 

옛부터 이재현이 원나라에서 모은 만권당 만권 서적을 모은 정몽주 학문을 나주의 신숙주 하동의 정인지 등이 모이고 이를 권우- 권제 등이 세종에 계승 전달 시킨 학교로서 한글을 중국에 몰래 숨기고 피하여 여기서 만들었다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들 중에는 친명(親明)을 주장하며 한글을 반대하는 최만리(崔萬理) 등 연장(年長) 학사들과, 한글을 창제(創製)를 주장하며 비밀리에 연구하는 권채(權採), 최항(崔恒), 안의(安誼)등의 태산  학당파 소장(少壯) 학사들로 구분된다.

 

한글창제 발상 근원지는 권채(權採), 최항(崔恒), 권제(權題), 안의(安誼), 정의공주(세종의 둘째 딸)등이 전라도 정읍 상두산 자락을 중심으로 사찰에서 은거하며 비밀리에 한글을 연구 하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 최항(崔恒) 등에게 비밀리에 특지를 내려 한글을 연구 하도록 특명을 내린다.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는 한글을 만든다는 것은 성패(成敗)에 있어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은밀히 왕족출신인 수양대군과, 세종대왕의 둘째 공주 정의공주를 후원자로 삼아 보냈다, 또한 정의공주는 전라도 정읍 부근 태인현(泰仁縣) 시댁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학사들을 정읍 상두산 사찰(미륵당)로 보낸 것이다. 수양대군은 칠보면(七寶面)의 송현수(宋玹壽) 친구 집에서 집현전 학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은거하며 생활 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이 왕자시절 왕명으로 민족음악을 채집하면서 가무여인 박씨(후일 후궁 근빈박씨) 처녀와 수양대군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덕원군(德源君), 창원군(昌原君))을 낳았다. 그리고 윤씨 왕비에서 두 아들을 산외면 도원에서 낳아 도원군(桃源君 인수대비 남편)과 평남정에서 낳아 평남군(桃源君) 예종왕)을 낳아 예종대왕 태실묘를 모악산에 세웠다.

 

수양대군은 왕자시절  모악산 남녁 상두산 미륵당 가무기예 무녀(無比身)으로 보이는 근빈박씨가 여기서 두 왕자를 낳은후에 윤씨왕후로 도원군(桃源君)과 평남군(平南君)인데 산외면 도원마을과 평남정 마을이름으로 왕자의 아명이 지명으로 불린듯하다. 수양대군이 자주 목욕하는 목욕소(목욕리)마을이 있고 그 산외면(山外面) 목욕 마을에 근빈박씨 두 왕자(덕원군, 창원군) 들이 왕이 되려고 명당으로 왕자산과 태자봉을 정성으로 신봉하자 예종왕이 불러서 금지시켰다.

 

최항(崔恒)의 부친(父親) 최사유(崔士柔)는 외직(外職)으로 두 고을 의성현령(義城縣令)과 용담현(龍潭縣令)을 지냈다, 용담현령(龍潭縣令) 당시 세종의 스승 권우가 고려 충신 길재 이색 정몽주 단군 민족어 한글과 학문을 아들 권채 권기 조카 유자광과 이곳 옹동면(瓮東面)에서 출생(出生) 거주(居住)한 것으로 문헌(文獻)에서 확인(確認)된 소년 최항이 전라감사와 매헌문집을 출판한다

 

그러나 이곳 단종 충신 숙청한 주역 한명회 세력에 유자광이 유배되는 시기()성종5)에 최항이 의문사 하여 실권 없는 성종이 유자광을 석방시켜 최치원 사당에 허경종 당현종 허기 그리고 최항 등의 선비를 모시는 사당으로 생각하고

 

유자광은 우선 정극인에게 한글창제 보존 선비 사당으로 정극인 학당으로 생각하였다

 

용비어천가 '봉래의' 격식의 '나례농악'을 교육하여서 이름이 "봉래의(발르메)" 화랑곷. 재인동이 지명이있다

 

 

  정몽주  세종  세조 정통 한글 음악 군사등   유자광이 한국 유일의 실학 훈련   향학당으로   지었으나  이이 송시열 이후는  모화 맹종  서원으로  변천하였다

 

1485(성종 14) 한명회가 은퇴하면서 김종직이 돌연 석방를 환영하자 모두가 따른다 유자광 1486(성종 15) 2월 유자광 서용의 명이 내려지고 조정에서 실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유자광 안처겸 정여립등을 대대로 모함 조작한 송사련 송익필 부자가 대를 이어 이이 성혼 당파에 간첩으로 역모 조작 세종대왕 한글 실학파 계보 권우- 권채- 최항 안지 -유자광 -정여립 학문을 문정왕후 명으로 숙청하고 근거도 없는 김종직의 아비 김성자를 붙여서 옹동면 상두산 권채 소장의 자료가 금강산 유점사에 이전하여 그 곳에 살다가 풍기군수가 된 이율곡이 송사련 밀고로 입수된 안당. 안처겸 시산정 이정숙 연구자료 고문서를 노획 인용하여

 

최치원 정극인 이후에는 대국정복역사. 그리고 세종 .한글.실학파를 자기들 제자로 이어 메꾸었다

 

정확한 왕조실록에 남이 반역이 대량으로 기록되여 있는데 대동야승 저자 한문파 현대 정치의 조선시대 댓글부대 글로 성현은 유자광의 남이 역모 사건을 악의적으로 모함 조작하였다

 

유자광은 적 성현이 경상도로 좌천된 것을 유자광이 성종에 간청하여 이조판서로 상경 악학괘범을 지었는데 대동야승 잡록에 쓴 은혜를 원수로 먹칠하는 사림들이 서원 인물로 다수 채우고 있다

 

남이 장군 기록은 상세하게 한명회가 심판하는 조선예종실록 기록이 CCTV 처럼 대량으로 확실한 것을 그 예종 성종 왕조실록의 기록이 두려운 참에 임진왜란에 증거인멸 행동으로 자기파 김성일등이 거짓 보고로 왜침을 숨기고 권율의 사위도 아닌 신립은 사위로 조작하고 왜군침입을 신고한 자를 참수하는등 간첩으로 의심 된다

 

이들 반 세종파 에서 털려난 한글실학파는 보림사에 이항,( 김천일) 상두산 모충사에( 전덕린 백광언), 권채의 친척 남명 조식(곽재우). 최항의 후손 이치전투 (최응립). 전사하고

 

전주부윤 권수는 전사하고(전라감사 이광 도망침에) 친척 권서는 장인 안의와 손홍록(사위) 3가족이 조선왕조실록을 구하러 전주안덕원 왜병 을 막고 진주성에서 전투하였다

 

고려 정몽주 단심가 -조선 용비어천가  비들기왕 단군이 은나라를 비들기 탕왕 종교통치 찬송하는 대국 학당 교육은 절단되고 소국 식민지에 만족하는 서원교육으로  모화 굴복하는 충신 양성소가 된다

 

식민지 모화 찬양교육자료로서  공자. 맹자. 사서삼경에 맹종하는  서원으로 변질된다  연산군때 유자광의 계교로 친척 홍길동 오끼나와 왕으로 간 실화를 태인정읍 겸임현감 이순신이 임진난에 태산학당패 송상현은 부산사수 전사 하엿는데    이순신은 부산진격 어명 거부로 복역할 죄에 불안 할 때에 권율장군은   배설장군을 기여코  체포하여 참수하였다 이를 보고  불안해 잠적 13년간 변론 자료로 작성 글이 "난중일기" 인데  똑같은 이씨 성씨 도망대장 이광 역시 똑깉은 이름도 "亂中日記"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 구출한  태인현 옹동 사람인  권서의 외조부 안의.  그리고 사위  손홍록 3가족이 합세한 공로인데   그 공으로  추증 판서가 된 권서를 빼고  이광이 총지휘 한 걸로 하고 이름도  "亂中日記" 라고   되어있다  

 

전라감사로서   이광이  도망칠때  전주 부윤으로 권수는  전사하여  

논산시 부적면 휴정서원 (休亭書院) 1751년에는 임진난 전주 안덕원 전사한 전주부윤 권수를 추증 전라감사로  배향하였는데 . 일본이 권수를 치우고 그 자리에 대신1905년 정여립 역모조작 태산학당 세력숙청 조선국방력 제거자 송익필(宋翼弼)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들 잠적시기에 송익필이   정여립 역모조작 주모자도  잠적하였는지  이해 사망해로 되어 있으니 지금 세월호 유병연도  순천에 살아  있다는  뉴스도 있다

송희립 역시 송익필 가문 송씨이며  이순신 삽교천  지역 마을사람이다  

태산학당 정극인 후손 정웅과  정운의 전투를 후일 정조대왕이 극찬했다     일본이 왜 난중일기를 거액으로 출판하였나  

 일본이 들어와   논산시 '휴정서원'에  충신으로 전주를 사수하다 죽은 권수를 치우고  그자리에  송익필을 복권시켜 모셨다  

 이순신  친족 택당 이식이 유성룡 손 유득공과 홍길동전 표절 변론서일까 이순신전을 의심한다

 

-이은식 지음 원균 그리고 이순신 타오름 판 참조 바람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

이종호· 과학저술가 지음 등등 고증 자료가 있다

 

 

 

712-중국  역사

'종소경산' 이름이  정읍 산내면 구절초 공원 주산이다   종속산 종암산 종산리 등  허씨부인의 남편이름  종소경 산 산내면 여러 이름이다  

그 북쪽은 허씨  허기 허사문  장군의  산 으로 사당 과 '허궁실'   허씨  허기 이허겸 이자겸 궁궐이 잇었다고 한다 

 

당현종이  백제 노예출신  허씨족 등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구테타 반격으로 가는  중국사 일부 

  이융기 (당현종)는 6 20일 저녁, 어둠이 짙어갈 무렵 이융기는 복장을 갈아입고 도사 풍처징의 엄호를 받으면서 몰래 왕부(王府)를 떠나서, 정변의 지휘부인 금원총감(禁苑總監)종소경(鍾詔京)의 저택에 도착하였다.

. 이융기는 큰 지혜와 용기로 기세를 떨치고 일어났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현종의 신변에 있던 몇몇 사람은 두려움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의 하나가 종소경(鍾紹京)이다. 그는 왕숭엽(王崇曄)의 연결로 밀모에 참여하였는데, 정변의 지휘부는 바로 그의 집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융기가 도착하고 거사가 시작되려 하자,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전쟁에 임하자 겁이 많아져서, 이융기가 그의 관사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생각하였다.

금원총감(禁苑總監) 종소경의 처자 허씨는 매우 대담하게 그에게 

"몸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죽는 일에는 신께서 그들을 도우십니다. 또한 함께 도모하고자 진실로 정하였는데, 지금 하지 않으려 하신다고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권하였다.

 

종소경은 그제서야 굳게 다짐을 하고 나아가 이융기를 영접하였다.

이밖에 또 다른 사람은 이융기의 심복인 무사 왕모중(王毛仲)인데, 그는 정변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어디로 가야할지 안절부절 못하다가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밤이 깊었다. 만기장군 갈복순(葛福順)과 이선부(李仙鳧)가 종소경의 집으로 와서 이융기에게 명령을 내려주도록 청하였다.

 이융기는 이번 정변에 대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가슴에 칼을 품고 있었다. 그의 행동 지침 가운데에서 첫번째 공격의 대상은 현무문(玄武門)이었다. 현무문을 얻느냐 마느냐에 궁정 정변의 성공과 실패라는 관건이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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