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강포에서]호남의 명문가 이야기
- 기자명 강진일보
- 승인 2015.06.0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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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권력은 경상도가 다 해먹은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 안동의 택호를 보면 교리댁, 정연댁, 승지댁 정도였다. 중앙 정부의 과장급에 불과하다. 왜 택호가 정승댁, 판서댁이 없는가 봤더니 벼슬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남에서 가장 센 집안이 의성 김씨인데 가장 높은 벼슬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병조참의였다고 말한다. 이는 국방부 차관보 수준이다. 경상도에서 유성룡 이후로 정승 나온 사람이 없었다. 1623년 인조반정과 같은 반란이 있었다. 서쪽 기호학파가 동쪽 퇴계학파를 잡은 사건이다.
이후로 박정희 때까지 영남이 정권을 잡지 못했다.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가진 영남 출신들이 없었다. 전라도에서는 지난 3백년 동안 영남사람들이 다 해먹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동학 때 호남공동체 사라져
그런데 동학을 기점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동학때 전라도와 충청도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만 경상도는 죽지 않았다. 수운 최제우가 경주 출신으로 동학에서 화약을 만들어 전라도 지역에서 사용하다보니 많이 죽고 공동체가 파괴될 정도였다.
전봉준이 우금치로 1만2천명의 농민들을 데리고 쇠스랑이랑 곡괭이 들고 대적했지만 6백명의 일본군이 모젤 기관총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무려 9천명이나 죽었다. 또 전봉준이 3천명을 이끌고 또 대적했다가 2천5백명이 죽고 5백여명만 남았다. 이 당시 일본군은 7명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다.
6.25 때도 영남사람들은 별로 죽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을 중심으로 생존했는데 호남은 소작농이 많아서 지주계급에 대한 반항이 생겼다. 그래서 또 학살당하고 많은 공동체가 사라지는 일들이 벌어졌다.
여수에 가면 봉화의 집이라 말하는 영광 김씨 고택인 봉소당이 있다. 봉소당이 오늘날까지 큰살림을 유지하는 것은 성실한 소작인들에게 남몰래 덕을 쌓고, 지나는 과객에까지 자립의 발판을 만들어준 조상의 적선공덕 덕분이다.
영화 ‘가문의 영광’ 세트장으로 사용되었다. 여순반란사건 때 여순혁명사령부로 사용됐다. 분기탱천한 젊은 소작인의 아들이 완장을 차고 봉소당으로 쳐들어갔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집의 여섯 살 난 아들이 무심코 손에 쥔 삶은 밤을 건네며 “형! 이 밤 좀 먹어봐”하고 건넸다. 완장을 찬 이는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냥 지나갔다. 밤을 건넸던 그 아이는 이제 나이가 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 무심코 내민 그 삶은 밤 한 주먹이 나를 살렸다”고 말한다.
또 이 집 주인을 불러 앉혀놓은 채 그는 돌아앉아 신문만 보고 있었다. 10분, 20분이 지나도 말이 없었다. 그래서 도망가라는 의미인 줄 알고 창문으로 뛰어 나가 도망했다고 한다. 원래 집주인이 소작농에게 잘해주어 소작농 아들이 학교도 가고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해석된다.
현대그룹 현정은의 할아버지가 현준호이다. 현준호가 사실상 전남의대를 거의 세웠다. 자신에게 신세 진 사람이 있는데 중국에서 큰 돈을 벌어온 사람이 있어 그에게 돈을 내라고 해서 1백만원의 종자돈으로 의대를 세웠는데 한강 이남에서 빠르게 세웠다. 또 일제강점기때 민족자본을 보호해야 한다며 호남에 세웠다.
창흥의숙의 인재양성
구한말 인재가 많이 나온 곳이 창평에 창흥의숙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망했다면서 규장각 직각이었던 춘강 고정주가 고향집 사랑채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가르쳤다.
수남학구파(창평향교)의 재산 일부를 기부받아 학교재원으로 하고, 둘째아들 광준, 사위 김성수(2대 부통령), 외척 김병로(초대대법원장), 친지 송진우(3대 동아일보 사장)를 불러 외가 이씨의 정자인 상월정에서 1907년 영어를 가르친 것이 그 시작이다. 이들이 3.1운동을 하고 한민당을 세워 정치를 했다.
창흥의숙이 오늘날 창평초등학교가 되었다. 현준호와 김성수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전북의 김철수도 함께 친하게 지냈다. 현준호의 딸은 현정은이다. 현대그룹 정몽헌의 부인이다. 현정은 회장은 2003년 남편 정몽헌 회장이 죽은 후 12년째 현대그룹을 이끌고 있다. 현준호의 오른팔이 김신석이다. 그는 부산상고를 나온 산청사람으로 호남은행 목포지점장을 맡겼다. 그는 산청에서 목포로 호적을 옮겨 딸을 낳았는데 그가 김윤남이다. 김윤남은 광주웃고녀, 지금의 전남여고를 다녔다.
최근 호남의 명문가를 살펴보면 신안의 인동장씨인 장재식씨 집안을 들 수 있다. 장재식은 산자부장관과 제14,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헌 국회의원인 장홍염이 그의 숙부이고,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인 경제학자 장하준이 그의 장남이다. 장하석은 런던대 석좌교수를 했다.
그의 조카인 장하성은 고려대 교수로 한국의 자본주의라는 책을 썼고, 소액주주운동을 했다 그의 누님인 장하진은 여성가족부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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