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송당 지엄대사 1690년 발간한 벽송집(二老行錄) 중에
벽송당 지엄대사
지엄대사의 속성은 여산송씨이며 송복생의 장남인 송미대(彌臺 1464~1534)이다
벽송과 명당 (1993년 정읍시 칠보면 칠보면지 수록된 이야기)
智嚴大師는 조선 초기에 유명한 고승으로 고현 출신이다. 고현내(현 정읍시 칠보면) 여산송씨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불가에 귀의한 그는 많은 설화를 전해주고 있다.그 어머니 왕씨 부인은 출가 했으나 바로 남편을 사별하고 청상과부로 지내다가 여산송씨 가문으로 개가하여 벽송을 낳았다.
벽송은 점점 자라면서 적작자 아니라는데서 가정과 사회의 괄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시대적인 사회의 제도이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굴레를 벗어나 절로 들어가서 수도나 열심히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운주산 도통암으로 들어갔다. 수도 십년에 풍수지리에는 달통했다
어느해 여름이었다 아저씨인 송연손(왕자사부 한산군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조문을 하러 찾아갔다. 조문을 마치고 그 아들 말하자면 조카들에게 “평생에 많은 덕을 끼치고 돌아가신 한산공(송연손)의 안택 하실곳을 내가 마련하겠노라” 고 일렀다.
아저씨 연손은 학력이 높은 인물로 벼슬에 있으면서도 가장 자기를 이해 해주는 친척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음먹고 명당자리를 하나 잠아주려고 조카들에게 자기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조카들은 가정적으로도 비천한 처지이지만 佛子라는데서 더욱이 그의 말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한산공도 생전에 벽송을 만나 주지조차 않았던 것을 조카들도 잘알고 있기는 했으나 아버지의 안택지를 마련해 준다는데 마음이 쏠려 이를 응락했다. 그리하여 벽송은 친척 아저씨 한사람과 함께 모악산에 올라 한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이곳에 정확한 유치를 잡아 방위를 어기지 않도록 오시오”하고 지팡이로 위치와 방위를 세밀하게 알려주고 아저씨에게
“돌아가는 길에 냇물을 조심하시오”라고 이르고 서로 작별하였다.
벽송을 작별한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오다 때마침 여름철 홍수가 져서 냈물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몇 해가 지나서 벽송은 한산공(송연손)의 집을 찾아 갔다가 사촌누나를 만났다. 사촌누나는 이웃마을 도강김씨 가문으로 출가한 마음씨 좋은 사람이어서 벽송이 어려서부터 많이 따랐다. 사촌누나는 깜짝 반가히 맞아주며 환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아버님의 묘자리를 하나 잡아달라고 간청했다. 벽송은 누나의 모처럼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벽송은 누나와 함께 상두산을 오르다가 누나에게
“누나는 당대의 운을 바라십니까? 자손의 부귀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누나는 당대의 부귀를 바란다고 했다. 벽송은 먼곳으로 갈것없이 가까운 곳에 모시자 하고 비봉리 수약동(현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에 명당 자리를 잡아주었다. 과연 도강김씨는 이로부터 부귀가 끊이지 않고 흥성했다고 한다.
(1993년 정읍시 칠보면 칠보면지 수록된 이야기)
현제 까지도 500년 전 구전이 이어오고 벽송대사가 모악산에 잡아놨던 명당자리를 찾아 생전에 모악산을 자주 갔다는 제 친구 아버님도 있습니다. 다만 500년 전 일이라 구전과 실제의 차이는 있을수 있으며, 또 구전이라 전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큰 맥락은 대동소이 합니다
구전과 실제에 차이를 문헌을 통하여 접근해봅니다.
벽송당이야기가 현제까지 구전으로 전래 되는 진실은?
(1) 송연손(1460~1508)벽송당(송미대 1464~1534)과의 관계
4세송송례--5세송염--6세송운(원윤공파)--7세송호산--8세송윤--9세송복생--10세송미대(벽송당)
4세송송례--5세송분--6세송린(지신공파)--7세송 교--8세송희--9세송계성--10세송복리--11세송연손
벽송당과 송연손은 13촌간으로 벽송당이 4살이 작지만 족보상 아저씨가 되는듯 보인다.
(2) 원윤공파와 지신공파의 세거지는?
여산송씨 지신공파 한산공 송연손은 고현내면에 힙향조 송계성의 손자로 아버지 송복리가 결혼하면서 태인현 고현내면에서 옆 면인 동촌면으로 이사후에 송연손이 태어나 살았고, 벽송당은 여산송씨 원윤공파로 벽송당에 法孫인 서산대사(1520~1604)가 지은 벽송당야로행록에 부안에서 태아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고현내면(칠보면 인근)과 분명히 연관이 있으니까 구전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것이다
(3) 부안 출신에 벽송당 이야기가 칠보면 옹동면에 전래되는 이유는?
벽송당에 구전이 칠보면 옹동면에 구전되는 이유는 벽송당이 이 지역 일가인 송연손 집에 와서 유학을 하며 기거 하였기에 사람들이 칠보 출신으로 생각하는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 태인현(칠보면)에는 유명하신 정극인 선생이 불우헌을 짓고 가숙을 하였기에 인근에 양반 자제들이 유학을 왔을 것이다 . 정극인 선생의 집과 송연손 선생의 집은 대략 2k미만으로 가까웠으며, 송연손에 아버지인 송복리가 1472년에 돌아가셨기에 벽송당에 부친은 이곳에 조문을 와서 정극인 선생 이야기를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벽송당은 송연손은 같이 다니며 정극인선생에게 학문을 배웠을 것이고 신광한 선생이 지은 송연손 신도비문에도 송연손에 스승이 정극인선생이라는 내용이 있다.
(4) 벽송당이 부안출신이라는 이유는 항렬상 조카인 송연손의 배위가 부안출신으로 세조때 군수를 지낸 김보칠이며 김보칠의 묘는 현제 부안읍 모산리에 있는데, 벽송당 집안이 부안이기에 부안 명문가인 김보칠의 따님을 송연손과 혼인하게하는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5) 1508년 가을 45세로 태인현에 왔으며 금강산에 가기전이었다
벽송당에 구전대로 송연손이 부음을 듣고 태인현 동촌면에 왔던 해는 1508년 45세였는데, 어릴적 부안에서 유학을와 지내며 송연손과 벽송은 정극인 선생에게 학문을 배운 관계임으로 많은 추억을 가지고 이었기에 수도 중이었음에도 조문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벽송은 1492년인 28세에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으로 출가하여 조징(祖澄)의 제자가 되었고 어느덧 45세가 되었다.
송연손에 3아들은 송세구 송세림 송세형인데 세림가 세형이 문과 급제를 하였고 세형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6) 여산송씨는 왜 벽송당이 잡은 명당에 모시지 않았나?
벽송당이 여산송씨를 위해 잡은 명당은 전주에 있는 모악산과 옹동면 비봉산으로 추정되는데. 고현내면에서 모악산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며, 여산송씨는 이미 고현내면 원촌마을 뒤편 향도골에 선산이 있었다. 한산공 송연손 선생에 유택도 여기 향도동에 있다. 따라서 멀리 떨어져 내왕이 불편한 모악산보다는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이 있는 세장지 태인현 고현내면 향도동(칠보면)이 모신것으로 추정된다.
(7) 여산송씨(송세구, 송세림, 송세형)은 벽송당이 佛子라 해서 무시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여산송씨 선산 앞쪽에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삼층석탐이 있는데, 송세림선생이 살았을 당시에 석탑을 중수했는데 여기에 살던 송세림이 선생이 발문을 지었다한다. 아마도 송세림선생은 여기에 살면서 향도동에 있는 아버지묘소를 참배할때마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석탑이 안쓰러워 중수한것으로 생각된다. 이 삼층석탑은 1935년 일본인에게 매각되어 해체 할때에 항아리가 나왔는데 그 속에 송세림선생이 지은 중수기가 나왔다고 한다. 만약에 불자라 무시했다면 송세림은 삼층석탑을 중수하지도 않았고 중수기를 짓지 않았을 것이며, 송세림 선생이 남긴 한문작품 어면순을을 보면 매우 개방적이지만 합리적인 분으로 보여진다.
족보를 보면 벽송당은 서자도 아니며 벽송당이 출가전 낳은 딸이 있는데 사위가 생원이라는 기록이 있어 서자는 아닌것으로 보인다.
(8) 여산송씨와 도강김씨의 관계는?
여산송씨와 도강김씨가 혼맥이 성사되는 시점은 송연손(1460~1508)에 둘째 딸이 김희석(1472~1536)에게 출가하였고 5째 딸이 金若晦(1481생)에게 출가하였는데 김약회의 아버지가 金希尹이며 김희윤의 막내동생이 김희석이다. 송연손에 둘째 딸이 도강김씨 김희석과 김약회가 여산송씨 집안으로 장가를 간것이지만 두 집안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9) 벽송당(1464~1534)이 잡은 명당은?
金希奭석의 선대에 묘는 태인현 고현내면 은석골에 있으며 김희석의 묘가 태인현 동촌면 白楊洞에 있는데 현지명으로 옹동면 수천마을 뒤를 말하며, 비봉산 줄기에 속한다. 여러 정황상 참봉공 金希奭에 묘를 잡은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듯 하다.
김윤손에 3아들 중에 김희윤(장파) 김희설(중파) 김희석(계파) 김희윤과 김희석의 묘는 옹동명 수천마을 뒤에 있고 중파 김희설의 묘는 반곡리 백화동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 중대한 모순이 있다. 벽송당(1464~1534)이고, 족보에 김희석은(1472~1536)으로 벽송당 사후 2년뒤에 김희석이 죽었기 때문에 김희석의 묘자리를 잡을수 없다는 것이다. 구전에 목사 자리라 했는데, 그렇다면 송연손에 막내 딸로 김약회와 혼인하여 시부 김희윤의 묘자리일 가능성이 커보이지만 단정 할수는 없고 김희윤과 김희석 두 분에 묘가 비송산 줄기에 있어 이 분들 중에 중에 한분일 가능성은 있다.
김희석(1472~1536)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이 진사 약현(1490~1581)이고 차남이 양주목사인 김약묵(金若默 1500[연산군 6]∼1558[명종 13])이다 . 이 동내인 수천에 사는 친구가 말하길 白楊洞은 뱀이 많아서 배암골로 부른다 하는데 , 한자로 白楊洞이라 쓰여 있는데 한글 지명과 한자지명이 다른 이유나 연관 관계는 모르겠다.
(10) 벽송당이 잡은 또 다른 여산송씨 명당이 있다
이 내용은 여산송씨 집안에 내려오는 구전으로 당시 비봉산에 묘를 잡을때 벽송당에 송씨 집안에 묘를 잡아줬서 할머니를 모셨다하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의 묘자리인지 물어보질 못했다. 이후 후손들은 직계보다 방계 후손이 잘되었다고 한다.
(11) 벽송당에 불교에서의 역활은??
『선원집(禪源集)』과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으로 초학자들을 지도하여 참다운 지견(知見)을 세우게 하고, 다음 『선요(禪要)』와 『대혜서장』으로 지해(知解)의 병을 제거하고 활로를 열어 주었다. 이 네 가지 문헌은 현재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서 사찰 강원 사집과(四集科)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연원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1534년 지리산 수국암(壽國庵)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강하다가 방편품(方便品)의 “제법(諸法)의 적멸상(寂滅相)은 말로써 선설(宣說)할 수 없다.”는 구절까지 설명한 뒤, 제자들에게 밖에서 구하지 말고 노력하여 진중할 것을 당부하고 나이 70세,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가송(歌頌) 50수를 엮은 『벽송집』 1권이 있다.(한국민족문화 백과사전 내용)
벽송당의 불교에서의 역활을 보면 학문적으로 심오함이 있어야 가능할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학문적 근원은 부안에서 태어나 태인현 동촌면(옹동면)에 유학을 와서 고현내먄에 사셨던 불우헌 정극인 선생에게 수학한것으로 추정되며 불교를 배척하였던 정극인과 불자가 되어버린 송미대(벽송당)와의 인연은 스승과 제자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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