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카나 신라 유래설' 제기한 일본 학자 "'각필' 볼수록 확신"
노형석 입력 2020.01.29. 18:46 수정 2020.01.29. 20:56
2020년 제기한 파격적인 학설로
한·일 고문서 학계에 파문 일으켜
연구 성고 담은 저서만 30여권
11년째 한국 학자들과 공동 작업
"한일 고대어 해석에 중요한 각필
일본 문자 탄생에 결정적 영향 줘
학문은 사실 발견과 해석의 과정
일 학계서 소외된다 생각지 않아"
벌써 여섯 시간째다. 92살 먹은 일본인 노학자는 어두운 암실에서 눈을 부릅뜬 채 돋보기를 들고 1200년 전 신라인의 먹글씨로 채워진 불교 경전 필사본을 뜯어보고 있다. 불경 속 먹글자를 찾는 게 아니다. 그는 신라 승려들이 정성껏 옮겨 쓴 <화엄경> 필사본에 적힌 무수한 한자 옆의 여백을 주시했다. 신라인들은 필사본의 여백에 끝이 뾰족한 도구로 한자의 뜻이나 한자 단어를 잇는 신라말 조사의 발음을 담은 부호를 눌러 새겼다. 이른바 ‘각필’이다.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확 띄지 않는다. 두루마리 필사본을 펴들고 할로겐 조명등으로 여기저기 비춰야 부호의 흔적이 겨우 나타난다. 1200여년 전 신라인들이 썼던 생생한 입말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한 작업이라고 노학자는 말했다.
27~30일 일본 옛 도읍인 나라시의 큰 절 도다이사 경내 도서관에서 한국과 일본 고문서학자들이 모여 신라 불경 필사본 화엄경에 대한 공동 판독 작업을 했다. 학자들을 이끈 리더는 한일 고대문자 연구 권위자인 고바야시 요시노리(92) 히로시마대 명예교수. 그가 두루마리를 펴들고 불경 속 각필을 판독해 메모하면 옆에서 지켜보던 국내 원로학자 남풍현 단국대 명예교수와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 권인한 성균관대 교수가 함께 각필 내용을 검토하고 생각이 일치하면 정자로 기록하는 작업을 거듭했다.
한일 학자들이 도다이사에 모여 신라 불경을 공동 판독하는 프로젝트는 2009년 처음 시작됐다. 올해로만 벌써 15차 판독회다. 한국 학계에 신라 각필을 처음 소개하고 알린 고바야시 교수의 노력과 이에 호응한 한국 소장학자들의 의기투합 덕분에 성사된 독특한 한일 협력의 결실이다. 고바야시 교수는 ‘일본 특유의 가타카나 문자가 신라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을 2002년 처음 제기했다. 가타카나가 7~8세기 일본에 전래된 신라의 불경 필사본에 발음과 뜻을 표시하기 위해 붙인 신라인의 각필에서 비롯되었다는 이 학설은 한일 고문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고바야시 교수는 또한 고대 신라와 일본의 불경, 문서에서 각필을 찾아내고 연구를 시작한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일본과 한국에 있는 고대 한반도의 각필 자료는 그가 처음 확인한 것들이다. 이런 연구 성과를 담은 저서만 30여 권을 냈고, 최근 수년 사이엔 그동안 연구 성과를 정리한 전집 9권도 냈다.
“2000년 한국 성암고서박물관에 찾아가 고려 초조대장경의 ‘유가사지론’을 보는데 글자 옆에 뾰족한 것으로 새긴 발음부호 같은 각필을 처음 발견했지요. 그게 한국과 일본 글자의 고대어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직감했어요. 그리고 2년 뒤, 일본 교토 오타니대학이 소장하고 있던 8세기 원효의 불교 논리학 저술 <판비량론>의 단편 조각에서도 그런 각필을 확인한 겁니다. 고대 일본인이 중국 등의 한자 문헌을 읽을 때 점을 찍거나 부호로 읽던 것이 가타카나가 된 건데, 여기에 신라 각필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을 논문으로 알렸지요. 이후 한국 학자들과 도다이사 소장 화엄경에 대한 공동 판독을 통해 똑같은 신라 각필을 다수 확인하면서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28일 저녁 나라 시내 숙소에서 만난 그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했다. 고바야시는 공동 판독회를 하면서 일본 가타카나의 각필 기원론에 대한 근거 자료를 충실하게 확보하고, 한국에서도 각필 연구자가 나타나면서 연구 성과도 쌓인 것을 가장 큰 보람을 꼽았다.
그가 제기한 ‘일본 가타카나의 신라 각필 유래설’에 대해 일본 학계는 대부분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후배 학자들과 미묘하게 대치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학계의 거부감이 적잖은 만큼 90살 넘도록 연구해온 내용을 학회에서 새로 발표할 기회가 사라지지 않았느냐는 말에, 그는 의연하게 답했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학문이라는 것이 밝혀낸 사실로 이야기하고 해석하고 평가를 받는 과정이니까요. 일본 학계에서 소외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사 마지막 날인 29일 다시 만난 그는 “오전 판독회에서 뜻밖에도 신라인이 남긴 각필 글자 5종을 추가로 발견하는 성과를 거뒀다. 너무 기뻐 함께 박수를 쳤다”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도다이사 소장 신라 불경 필사본은 이번 조사를 끝으로 2년 넘는 수리 보수 작업에 들어간다. 사실상 마지막 조사가 되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는 싱긋 웃으면서 되받았다. “글쎄요. 몸이 성하다면 한국 연구자들과 또 조사할 겁니다. 63살에 정년이 도래해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 10년 계획을 세워 전국을 돌며 각필 자료를 다 조사했어요. 고문서 연구는 몸의 수고로움을 마다치 않아야 성과가 납니다.”
일본 나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많이본 뉴스
- 뉴스뉴스
- 1위720명 중 무증상자 우선 귀국..120여 명 전세기 포기
- 2위[취재후] "왜 이제 와서 폭로하냐고요?"..원종건 피해여성의 절규
- 3위[사실은] "고꾸라진 감염자" 공포로 몬 영상, 추적하니
- 4위한국당 "중국인 입국 금지"..정부 "국제법상 큰 문제 야기"
- 5위우한서 돌아온 자국민..일본은 자택, 미국은 격납고, 호주는 섬
- 6위"4월부터 월급 못 준다"..9천 명 한국인 직원이 볼모?
- 7위中 관광객 뚝 끊겼다.."사드 이후 최악 위기"
- 8위태국서 다친 여행객, 이송비 5천만원?..한국 이송 '막막'
- 9위[르포]'우한폐렴' 1번환자 폐 사진 꺼냈지만..공항검역 '빈틈' 없었다
- 10위삭발한 간호사, 돌아온 노의사..전염병과 '목숨 건 사투'
- 연예
- 스포츠
실시간 이슈
- 전체
- 뉴스뉴스
- 1위국세청
- 2위코로나 바이러스 원인
- 3위문병호
- 4위삼정검
- 5위코로나바이러스 마스크
- 6위컨트롤 타워
- 7위청와대
- 8위군산
- 9위아산 경찰 인재개발원
- 10위삼광초
- 연예
- 스포츠스포츠
- 1위최충연
- 2위라파엘 나달
- 3위김병호당구
- 4위월드베이스볼 클래식
- 5위나르시소 엘비라
- 6위베르바인
- 7위맨시티 맨유
- 8위구자욱
- 9위두산 베어스 김재환
- 10위기아 윌리엄스
이 시각 추천뉴스
"2천400년전 카자흐 동남부 주민은 백인종..육식 즐겨"
- 머니투데이1644-2000번, "스팸전화 아닙니다. 받아 주세요!"
- 서울신문'장기까지 훤히' 볼리비아 투명개구리 18년 만에 발견, 세 마리나
- MBC中 관광객 뚝 끊겼다.."사드 이후 최악 위기"
- 뉴시스[르포]'우한폐렴' 1번환자 폐 사진 꺼냈지만..공항검역 '빈틈' 없었다
- 중앙일보[단독] 천안 반발에..'우한 전세기' 교민, 아산·진천에 격리수용
선덕여왕은 무슨 이유로 '향기나는 절'을 지었나
- 연합뉴스'아슬아슬' 얼음판에 갇힌 러시아 강태공 600명, 가까스로 구조
- 뉴시스中, '신종 코로나' 풍자 만평 게재한 덴마크 언론에 사과 요구
- 연합뉴스미국 시총 1조원 날린 초단타매매범에 1년 자택구금 선고
- 중앙일보"시속 50km 외줄로 남한강 활강" 산골마을에 190만명 몰렸다
- 뉴스1황교안 "靑 우한폐렴 확산 차단보다 반중 정서 차단에 급급"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옹동면 산성리에 모충사 (0) | 2020.05.15 |
---|---|
[스크랩] 관곡지 연과 강희맹 (0) | 2020.04.14 |
1500년 전 신라인들이 보낸 '타임캡슐'일까 (0) | 2020.01.22 |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47-마지막] 경남 함양·산청③ 산청 남사마을 옛집 굴뚝 (0) | 2020.01.18 |
서거정과 쌍벽을 이룬 조선 전기의 문장가 강희맹 (0) | 2020.01.18 |
일본에도 진실한 사람이 있네.
가타가나는 각필 뿐만 아니라 신라 이두를 차용하여 만든 것이다 이건 새삼스런 것이 아니고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야기하니 언 넘이 이두는 중국영향을 받았으니 어쩌구 저쩌구 하더라
ㅋㅋㅋㅋ 일본인들 억장 무너지겠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