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형에게 보내는 편지 2 (초고)
국화 한 송이 핀, 질마재의 고창
김 채 석
형.
아직도 그 흔한 여권 하나 없는 제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 나라 땅의 여기저기를 주유하면서 보고 느낀 생각의 보따리를 풀어 놓듯 기억의 한 조각을 유추해가며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행이나 경험의 기억은 그 기억 자체가 기록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강물에 비친 달을 내려다보는 것만큼이나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을 편지로 쓰려고 하면 밤하늘에 교교히 뜬 달을 따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딸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면서도 따려고 하는 시늉이라도 해보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며 가치일 거라는 생각에 오늘도 메마른 풀잎에 이슬이 내리듯 펜촉 끝에 감성의 잉크를 촉촉이 적셨습니다.
형.
언젠가 판소리 열두 마당 중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 여섯 마당을 정립하신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이 있는 전북 고창(高敞)에 간 적이 있습니다. 고창은 높고 너른 뜻처럼 해가 뜨는 쪽은 내장산으로 이어지는 노령의 산줄기가 힘차고, 해가 지는 쪽은 드넓은 푸른 보리밭이 아름다운 평지입니다. 이런 형국인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고창읍성, 달리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석성이 있는데 평지에서 시작해 점점 산으로 올라가는 지형을 한 평산성입니다. 낙안읍성이나 혜미읍성은 평지에 있어 말 그대로 평지성이고,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은 산에 있어 산성이지만, 평산성은 우리나라에 그리 흔하지는 않습니다. 수원의 화성이나 부산의 동래읍성이 그 이름을 함께 하고 있고, 특이한 것으로 울산에 가면 서생포 왜성이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이듬해인 1593년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축성된 일본식 평산성입니다.
그런데 형,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그리고 후드득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선운사에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비겁하지 않게 뚝 지고 마는 멋진 동백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석산石蒜(꽃무릇)만 보았습니다. 가을에만 갔으니 말입니다. 선운사 일주문 앞을 지나는 개울물을 따라 진흥굴을 지나 동불암 마애불이 있는 도솔암에 이르기까지 짧지 않은 길 양옆에 단풍이 붉게 타기 전 먼저 타버리는 꽃 석산은 서로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해 상사화라 부르기도 하지만, 실지로 상사화는 따로 있고, 곱고 수줍은 선홍의 진달래의 순수함에 비해 미용성형이라는 이름으로 양심도 버린 여자의 거짓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천해 보이듯, 꽃무릇도 은은함이 없이 질리도록 유혹하지만, 천하기는 매일반입니다. 이 꽃의 원산은 일본으로 악마의 현혹이랄까. 너무나 가까이서 보면 실지로 눈이 실명할 정도의 독성을 지니고 있으니 유의하셔야 합니다. 마치 수작을 걸어오는 꽃뱀의 유혹과도 같은 생각이 드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운사를 대표하는 꽃은 단연 동백입니다. 4월 말경에 피는데 3,000여 그루에 이른다더군요. 수령이 500여 년이 넘는 것도 수두룩한 데다 붉고 선연하게 핀 꽃을 보면 붉은 가사 장삼을 입은 스님의 모습이기도 하고, 수많은 작은 연등을 켜놓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불교의 트리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예전에 이 꽃을 구경하러 온 시인이 있었습니다. “선운사 골째기로 /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선운사 동구, 육필원고 전문] 라고 한 시인 미당은 좀 서둘러 왔었나 봅니다. 아니면 막 거른 막걸리가 생각날 수도 다분히 있었겠으나 목이 쉰 육자배기 가락에서 질박한 아름다움의 동백으로 확장 시키는 가운데 ‘상기도’ 남았다며 교묘히 작년 것과 대비시킵니다. 또한, 막걸리 집 여인과 시인의 삶을 대변하고 있으며 반복적으로 남았다며 동백에 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심사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실지로 그 막걸리 집 주막의 여자가 적지 아니 예뻤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지난 후에 종적을 감추었는데 빨치산이었다고도 하고 빨치산의 끄나풀이었다는 말도 전해옵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구성지게 뽑아내는 육자배기 가락에 막걸리나 한잔 쭉 들이켜고 싶은데 선운사 입구 어디에나 막걸리보다는 복분자 술에 풍천장어 간판이 눈앞을 어지럽힙니다. 풍천장어가 무엇입니까? 풍천장어는 고창을 흐르는 주진천(인천강)과 서해가 만나는 심원면 월산리 부근에서 잡히는 뱀장어를 말하는데 독특한 양념구이의 맛은 그야말로 일미랍니다. 그런데 이곳 주민들은 주진천을 풍천강이라고 부릅니다. 실뱀장어는 민물에서 7~9년 이상 성장 후 알을 낳기 위해 태평양 깊은 곳으로 가기 전 바닷물과 민물이 합해지는 지역에 머무는데 풍천강이 바로 그런 곳이어서 '풍천장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실지 하루 2번 바닷물이 들어오는데 자연산 장어가 바닷물과 바람을 함께 몰고 들어온다고 해서 '바람풍(風)' 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풍천, 거기에 장어를 합한 것입니다.
형.
제가 원래 맛이나 먹거리에는 젬병인데 실없는 소리나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눈에 어른거리는 풍천장어 간판을 뒤로하고 용선 삼거리에서 주진천을 건너 734번 지방도의 이름이 인촌로입니다. 인촌은 건국 2대 부통령이며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를 설립하시고 교육, 언론, 정치, 문화 등 많은 분야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김성수의 호입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부안면 선운리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 말이 짐을 싣고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의 질마재 마을로 미당 서정주 선생의 생가가 있으며 옛 선운초등학교는 폐교되었었지만,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듯이 이제는 미당시문학관으로 남았습디다. 그리고 마을의 여기저기엔 온통 노란 국화의 물결이 흐릅니다. 그러니 그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 옆에서] 전문.
국화가 누님이고 누님이 국화로 생각하면 세상을 단순하고 편하게 사는 사람들에겐 간단하게 정리가 되지만, 사유가 깊으면 깊을수록 녹록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국화 한 송이의 피어남이 그냥 피어남이 아니고, 밤에만 우는 소쩍새의 그리움과 안타까움 속에 천둥과 먹구름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더 나아가 커다란 시련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뒤안길은 집으로 가는 편안한 길처럼 여유 있게 인생의 역정을 돌아볼 수 있는 한갓진 마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거울은 자아의 내면을 반추할 수 있는 도구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하나 늦가을에 처음 내리는 무서리는 또 다른 어떤 시련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자연의 섭리 속에 어떤 고난과 역경과 환경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국화는 광복이나 환생, 인연 외에도 흔히들 말하는 인생의 많은 지혜와 경험과 견식을 쌓아 넓고 원만한 지경에 이른다는 공자의 원숙경(圓熟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며 옛 폐교를 리모델링한 미당시문학관에 이르렀습니다.
2001년에 개관한 문학관의 가장 상징적인 6층 전망대로 먼저 올랐습니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부끄럽지 않게 스쳐 갔습니다. 실지는 미당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제일 부자라는 주호(主戶)였다는데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고, 스물세 살의 한 시인을 키워주는데 8할의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바람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바람이, 선운리 문학관의 가장 전망 좋은 곳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습니다. 그 바람을 따라 조망되는 곳에서 왼쪽으로 미당이 태어나 자란 집은 물론이고, 서해는 물론 변산반도까지도 한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오른쪽으로는 평생의 반려자였던 방옥숙 여사와 함께 나란히 누워 있는 묘소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곳 바로 돋음 볕 마을은 선생의 외가 마을이었답니다. 아무튼, 문학관의 여기저기를 돌아보면서 선생의 첫 시집 ‘화사집’으로부터 마지막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두 번째 전시실에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동안 논란의 실타래로부터 헝클어진 친일 시 몇 편과 전두환 정권 당시 군사정권에 대한 용비어천가 같은 시 때문에 말입니다.
물론 이 시들은 생전에 선생이 감추고 싶었을 터인데 끊이지 않는 논란 속에서도 전시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 욕을 하든, 이해하든, 이제는 죄인처럼 독자의 처분에 맡긴다는 관계자의 깊은 숙의가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됩니다. 사실이지 친일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으로도 부끄러운 일이긴 하나 이는 나라가 망해버린 결과로, 망하게 한 가해자의 나라에 협력하고 부역하면서 잘사는 영악한 춘원 이광수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거부감을 가지고 자신의 아버지를 친일파로 분류하고 ‘친일문학론’을 쓴 임종국 선생님과 같은 분이 있는가 하면, 좌우단간에 이런들 저런들 상관하지 않고 우마처럼 이리하면 이리로 저리면 저리로 이끌려가는 우매한 사람의 류가 있는바, 우매한 제가 보기에는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는 직접 뵙지 못해서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문학적 성취나 업적으로 볼 때 자신의 영달이나 어떤 목적을 바탕에 두고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단지 바람처럼 머물지 못하고 떠돌던 한 시인의 인간적 면모의 큰 틀에서 이해하려고 하니 이해 못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마치 저 자신이 바람이라도 된 듯 가벼워졌습니다.
형.
남의 시비에는 밝으면서 자기의 시비에 어두운 것은 한쪽 눈을 가린 것 같은 편벽된 사고 때문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저는 모든 것을 긍정의 힘으로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실지로 자유가 아닌 시대적 상황에서 글을 쓴다는 것도, 시를 쓴다는 것도, 자유의 노래가 아닌 옥중 춘향이의 목에 걸린 칼과 같은 억압이나 강제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이해하려고 하니 제가 갑자기 소인이 아닌 대인이라도 된 기분이고 자유라는 것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어떤 나쁜 게 있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로움. 말입니다. 결국, 내 마음이 편안해야 그것이 자유인데 욕심은 욕심대로 놔두고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시인의 문학적 업적이나 영욕의 세월을 기록한 전시관에서 고지식하기만 하고, 구리처럼 휘어지지 못하고, 대쪽과 같이 쪼개지거나 부러질지언정 현실과 타협하지 못했던, 아니 안 했던, 그 알량한 자존심을 버린 게 아니라 죽였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 묘한 거, 죽었는데 살아난 부활의 의미 같은, 눈을 감았는데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보이는 심미안 같은 혜안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고창이 높고 너른 것처럼......,
아무튼, 고창에 와서 그 고소하고 독특한 양념구이의 풍천장어에 마셨다 하면 요강의 존재 의미가 상실된다는 복분자로 담근 술맛은 비록 보지 못했지만, 몸과 마음의 자유를 얻는 방법을 알았으니 굳이 복분자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했습니다. 지나가는 바람결에도 취했고 한 송이의 노란 국화꽃에도 말입니다. 그런데 왜 미당은 ‘격포 우중’에서 “쏘내기 퍼붓는 해 어스럼. / 떠돌이 창녀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 같은 / 변산 격포로나 한번 와 보게.” 했을까요. 아! 슬픈 사타구니 황진이,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사련(思戀)이 아닌 떳떳하지 못한 빗나간 사랑 같은 사련(邪戀)이래서 그랬을까요? 제 생각엔 밀물과 썰물이 교접하고 흘러간 자리에 분비물처럼 끈적끈적 거리는 갯벌의 나이테가 돌이켜 보면 언제나 함께 했던 세월의 흔적과 같은 것이듯, 아름답지 못한 기억이나, 떳떳하지 못했던 기억이나, 불편했던 기억의 흔적에다 참고 참았던 세월의 슬픈 비애 같은 쏘내기 오줌을 질펀하게 깔겨버리면 답답하게 막힌 생가슴이 확 뚫릴 것 같은 생각입니다.
형.
오늘 높고 너른 고창을 여행하면서 선사시대의 흔적 상갑리 고인돌이나 북방식 고인돌로 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도산리 고인돌, 무장남문이나 토성, 동헌이나 객사와 같은 역사가 있는 곳의 방문은 뒤로 미루었지만, 옛 시인의 흔적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동안 미당의 시는 좋아했지만, 선생에 대해선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생각만으로 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큰 죄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죄업은 하나의 인과응보로 남이 가져가 주는 것이 아니라 멍에처럼 언제나 자신이 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미워하는 마음도 나쁘지만, 남에게 모호한 말로 속을 상하게 하는 것, 남의 비밀을 엿보거나 엿듣기를 좋아하는 것, 남의 아픈 비밀을 폭로하고 비방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답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일임을 알기에 동안 나만 옳고, 나만 바르고, 나만 곧다는 그 알량함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여행은 나를 찾아서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요?
형.
동백꽃을 보러 가서 동백꽃을 못 보면 또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것 중에 바람 아닌 것이 있습디까. 상처 아닌 것이 있습디까. 그래서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그 생각 속에는 명예나 권력, 욕심, 원망, 시기, 모함, 질시와 같은 삿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건 상처와 바람과 같이 진절머리나도록 밀려오는 슬픔과 고독함이었습니다. 하나 이러한 마음을 담아 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니 허기진 풍경도 맛있게 보였습니다. 결국, 행복이었습니다. 고창여행이 그랬습니다.
이제 아쉽지만, 종결의 의미로 오늘의 편지를 마치기 위해 마음을 내려놓듯 펜을 내려놓습니다. 잉크병의 뚜껑을 닫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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