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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정사와 인물들

도심안 2019. 7. 19. 04:44

영주정사와 인물들| 정읍지역사 자료

곽형주 | 조회 183 |추천 0 | 2013.11.13. 07:45

인문학 2강

 

[연재] 곽형주의 그 마을에 가고 싶다...

두승산 아래 문화유산 가득한 흑암리 (상흑-하흑-신흥마을)

곽 형 주

흑암리는 호남의 명산인 두승산 동편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과거 소성면이었으나 지금은 정읍시로 편입됐다.

거멍바위를 뜻하는 흑암리는 과거 정읍과 부안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으며, 마을 앞에는 서출북류의 명당수가 흐르는 지세를 이루고 있는데, 지형이 마치 키(치)를 닮은 지형이어서 치재라는 지명도 있는 마을이다.

치재는 꿩(雉)字를 쓰지만 치는 농기구의 일종인 키를 말하는데 흑암리의 지형이 치(키의 사투리)를 닮았다고 해서 풍수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흑암리는 원래 소정면으로 1914년 당시의 분리는 신흥리, 흑암리, 하흑암리였는데, 현재의 분리는 상흑암, 하흑암, 신흥으로 나뉘어졌다. 그 마을들은 시내와 근접거리이면서도 풍광이 아름답고 문화유산이 가득하여 정읍의 미래를 도모할만한 곳으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마을 가운데 까만 바위가 있어 현암 혹은 흑암이라고...

흑암리(黑岩里.下黑岩)의 마을 가운데는 까만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을 현암이라 일컫어 왔는데, 일제시대에 흑암으로 불리웠다는 어른들이 전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조선 정조13년(1789년) 조사된 최초의 마을기록인 호구총수에는 상흑암리, 하흑암리가 기록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흑암으로 바뀐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근래에 흑암에서 현암으로 지명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현암 즉 흑암을 하흑암이라 하며, 상흑암은 원흑암의 윗편에 있는 마을이다. 상.하 흑암리를 통틀어 검은바우(거멍바우) 라 일컫는다.

결국 마을 이름은 일제 강점기가 아닌 어느 시기에 근세 사람들이 현암으로 바 꾼 것.

 

신흥마을은 갓점으로 유생들에게 갓과 망건 만들어 팔던 곳

신흥은 속칭 갓점이라 불리우는데, 원래 사찰의 이름에서 유래된 마을이라고도 한다. 두승산의 동쪽에는 여러 사찰, 암자가 있었으나 어떤 사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거 기록에는 신흥마을을 원촌리(院村里)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신흥마을은 정충사 아래에 새로 생긴 마을로, 과거 갓점은 흔히 서원이나 사당이 있는 마을에 공부하는 선비들이 있어 이들을 상대로 갓과 망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있어 흔히 갓점으로 불렸다고 한다. 신흥마을은 원촌(갓점)에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갓점이란 말을 싫어한다고 했다.

상흑마을 입구에 들어가면 먼저 마을입구의 고목과 그 아래에 보기 드물게 멋진 샘이 하나 있는데, 그 샘은 수도가 보급되면서 자연스레 용도 폐기됐지만, 아직도 맑은 물을 용출시키고 있었다.

 

 

흑암리의 상흑-하흑-신흥 모두 고목아래 아름다운 샘이 있다

하흑마을 역시 샘이 고목아래에 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샘으로 지금까지 보고 조사된 어떤 샘보다도 아름다운 샘이다. 샘은 보통 “井” 字 형태가 주종을 이루지만 이 샘은 팔각형태로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바닥도 연화문양처럼 바닥돌을 깔았으니 참으로 멋을 아는 사람이 모양을 낸 듯 하다. 그 아래로 난 배수구도 석축으로 이루어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다른 마을이라면 아마도 콘크리트 관으로 바꾸었을 텐데 석축 또한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몇가구가 이 샘물을 이용하는 것을 모터 파이프가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정읍에서 가장 멋진 샘 ....

샘고을이라 하는 정읍에서 식수로 쓸 약수터조차도 몇 개 없는 정읍...

(정읍에서 전국 최초로 해야 할 운동은 우물 샘 보존운동으로 후손들이 그 물을 다시 식수로 사용 할 때 까지) ....

상흑 하흑마을의 두 샘 주변에는 과거 새마을사업 당시 시설물로 보이는 공동 목욕탕과 세면장이 있었다. 당시 마을사람들의 새마을사업 때에도 샘을 가꾸고자 하는 열정이 대단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물도, 목욕탕도, 세면장도 텅 비어 있다.

신흥마을 역시 4그루의 고목나무 아래에 있는 샘이 아름답기만 하다. 이 마을은 아직도 이 샘물을 식수로 활용하는데, 마침 마을의 한 아낙이 찬물에 더덕을 씻고 있었다. 저 샘도 광역상수도가 들어오면 수명을 다 하겠지.....라고 기록 했었는데, 몇 년 후 이 강의를 위해 답사했을 때에는 이미 광역상수도가 설치되어 우물은 덮여 있고 모터 파이프가 박혀있었고 일부 주민들이 샘물을 활용하고 있었다. 아직 생명줄은 달고 있는 샘이다.

 

  고인돌과 유교 문화의 향이 그득한 곳

 

흑암리에는 문화유적이 많기도 하다. 이름에서 언급되었듯 검은바우는 흑암리 고인돌을 말하는데, 상흑 하흑 신흥 모두 고인돌을 갖고 있다. 이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이 터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상흑마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과 두남 박세경 선생을 배향하는 노양서원(魯陽書院; 尤庵 宋時烈 斗南 朴世經 享祀)이 있다.

 

 

 

노양서원

❏배향인물: 송시열(宋時烈) 박세경(朴世經)

❏창건연도: 1693년(숙종 19)

❏향 사 일: 음 3월 1일

연 혁

송시열(宋時烈)이 1687년(숙종 15) 정읍에서 사약(賜藥)한 후 1693년(숙종 19) 고암서원을 창건하여 175년간 향사하여 오던 중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당초의 사우가 훼철되었다. 85년 후인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삼년간에 유림들의 발기추진(發起推進)으로 호남의 사대향교(四大鄕校)와 성균관에 통문을 내어 답통(答通)을 접수, 1958년 10월 25일에 송시열을 주벽으로 박세경(朴世經)을 배향으로 위패를 봉안하고 노양서원이라 하였으며 강당은 산앙재(山仰齋)라 편액하였고, 1962년 3월 10일에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992년에 사우를, 1993년에 내삼문을 1996년에 강당을 1998년에 관리사(管理舍)를 각각 해체 중건 및 이건하였다.

 

배향인물

○주벽-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 70여 곳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논맹문의통고][경례의의][심경석의][찬정소학언해][주문초선][계녀서]등이 있고,문집으로는[우암집](167권)·[송자대전](215권) [송서습유](9권) [속습유](1권) 등이 간행되었다.

○박세경(朴世經)

 

조선 중기 학자, 자는 제이(齊而) 호는 두남(斗南), 본적은 밀양, 재(載)의 아들이다. 송시열의 문인이다. 10세에 능히 글을 지은 수재로 15세에 송시열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에 전심하여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우암이 남북으로 유배될 때에도 같이 수행하여 6년을 하루같이 대소사를 살폈다. 우암이 ‘성현이 되는데 가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爲聖爲賢 何所不可)’라 하며 칭찬하였다. 심성정삼영(心性情三詠)과 심열(心說), 경열(敬說) 등 2편은 아무도 언급한 바 없는 탁견으로 이름나 있다. 전우가 학문을 논할 때 삼영(三詠)을 이야기 했다 한다. 우암이 써준 ‘가난에 편안히 하고 뜻을 지키며 고요한 가운데에 건곤이라’(安貧守志 靜裡乾坤)는 8자를 증정하여 그 어짊을 포양(襃揚)했고 세상을 떠나자 많은 학도들이 문하에 모였다.

 

▲ 신흥마을의 정충사

신흥마을에는 조선 인조 10년 건립된 정충사가 있다. 이곳에는 송상현, 신호, 김준선생을 배향하고 있는데, 정충사는 정읍에서 가장 먼저 임금의 현판(賜額)을 받은 곳이다. 자료출처:[정읍인물사]

 

송상현(宋象賢)

1551(명종 6)∼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현감 복흥(復興)의 아들이다. 덕천면 천곡마을 출생. 마을이름에서 號를 泉谷으로 했다.(교과서에 수록된 인물)

어려서 경사(經史)에 통하여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저작(著作)·박사(博士)에 승임(陞任)되었다. 이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1583년 지평으로 들어와 예조·호조·공조의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집의·사간과 사재감(司宰監)·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동래부사가 되었다. 왜침의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때 부사였던 그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그 뒤 적군은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조복(朝服)을 덮어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다. 왜장 히라요시(平義智)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후에 이조판서·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 충렬사·개성 숭절사(崇節祠)·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고부 정충사(旌忠祠)·청원 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武壯公 申 浩

平山人이니 고부군 남산리(현, 북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낙안군수로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전공이 가장 컸다. 정유재란 때 남원 교룡산성 수어장이 되었다. 남원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다달았고, 절체절명한 순간에 치아 한 개와 적삼을 벗어 본가에 보내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니 이것으로 장사 지내라‘ 하고 병사 이복남, 부사 임 현, 별장 김경로 등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조정에서는 형조판서를 贈하고 남원에 立祠하였다.

 

 

○壯武公 金 浚

선조 15년(1582~)고부 두승산 아래 정문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안주목사겸방어사 김준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안주성 전투에서 절도사 남이흥이 이끄는 병사와 합세 1,000명으로 36,000명의 청나라군과 일전일퇴의 공방으로 혈전을 벌였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적군을 유인하여 미리 준비한 화약에 점화 수많은 적병과 함께 분사하여 순절했다. 작은아들도 함께 싸우다 전사했고, 부인 김씨도 3살 된 딸과 함께 자결하였으며, 출가한 딸도 친정에 왔다가 목숨을 끊었다. 노비 헌충도 주인의 비보를 듣고 따라 죽으니, 일가족이 한 날에 순절하여 삼강의 애국충절을 동방에 찬연히 빛냈다고 했다. 인조는 신하는 충에 죽고, 아들은 효에 죽고, 아내는 열에 죽으니 한집안에 삼강을 갖추었다고 탄복하고 삼강정려의 정표를 내렸다. 초강십리와(楚江四方十里)와 사산십리(賜山十里)를 사패지로 하사했다. 부조묘를 세워 불천위로 제향케 명하고, 소현세자도 예관을 보내 치제 했다. 5년 후 인조는 안주 충민사와 정읍 정충사에 사액을 내려 연년세세 향사토록 하였다. 정충사 앞에있는 600년 된 느티나무 노거수가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 하흑마을

영주정사 위쪽에는 영양사가 있는데 공자, 기자, 안자, 맹자, 자사, 주염계, 정명도, 장횡거, 소강점 등을 영상으로 모셨는데 그 영상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영양사의 격자문짝들도 도둑들이 모두 떼어 간 흔적만 남아있어 가슴 아프게 한다. 그러나 이런 유서 깊은 곳에 안내판조차 없었다.

지금은 문짝도 보수되었고 경내도 정비된 모습이다.

마을 가운데에는 효자 박두원의 정문도 서 있다. 박두원은 박만환의 선조이다. 이 정문은 원래 찰방 박만환이 살았던 집 앞에 있는데, 후손은 모두 떠났는지 문중의 다른 사람이 임자가 되어 있었다.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깨끗한 골목길이 돋보이는 하흑

 

하흑은 원래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각종 기록에도 열심히 학문을 갈고 닦은 자료가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이 아주 깨끗하고 골목길이 훤히 정비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새마을사업 당시 주민들이 100년 앞을 내다보고 사업을 시작한 결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유치원이 있고 경로당, 마을회관, 모정 등 편의시설이 다 갖춰져 있지만 어느 곳도 지저분한 곳을 볼 수가 없었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마을 전통도 살아 있었다. 당산나무 두 그루가 할매당산, 할아버지당산으로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당산제를 지낸다고 했다.

 

마침 마을에 사는 어떤 분을 만났다. 그는 자칭 조경예술가라고 했다. 그 사람에 따르면 10여년 전 이 마을은 독일의 한스 재단과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때 이곳을 방문한 재단측 사람들은 이 마을의 원형을 잘 보전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 마을을 관광자원화 하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정읍시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마을에 정성을 쏟았는데 지금은 손을 떼었는지 모든 게 흐지부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설계도까지 모두 나왔었다는데 지금은 일언반구도 없다고 했다.

 

"정읍 문화예술인마을 1순위는 흑암리"

 

정읍에서는 이 마을처럼 아름답고 살기좋은 마을이 없다고 그 마을주민들은 자랑이 대단하다. 정읍 관광자원의 미래가 이 지역에 있다고 강조한다. 문화마을, 예술인 촌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엄청난 예산 들이지 말고 이런 마을에 사람만 들어와 살면 되는, 그런 여건을 만들어 주면 되지 않겠는가? 반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을사람들은 이 마을의 자원인 역사문화를 이해하는 것에서는 내 욕심에 미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자원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 마을 앞에는 치재에서 아산병원까지 벚나무가 심어져 있고 두승산 기슭에는 녹차밭이 수만평이 조성되어 있다. 그 한편에는 천불암이란 절터가 있다고 한다. 앞으로 몇 년 후면 이 흑암리가 정읍에서 가장 큰 녹차 재배지로 이름을 떨칠 것이라며 자랑이 대단하다.

지금은 두승산 아래 지역에 대단위 녹차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배영고 뒤편 두승산 아래 신흥마을은 돌담길도 참으로 아름답다. 정충사와 어울어진 돌담길은 최참판댁 마을의 돌담길보다 더욱 아름답다. 비록 주민 수가 줄어들어 제대로 손 볼 사람이 없어 잡초에 묻힌 돌담도 많지만 돌은 썩지 않기에 언제라도 자원으로 활용할 수가 있다.

 

▲ 신흥마을 돌담길 -*상학마을

아파트가 싫어 시골에 가고 싶다면 강추!

 

시내와는 차로 10분여 거리에 위치하여 교통도 편리한 마을인데 멀리 있는 자원만 생각하지 말고 이런 아름다운 마을을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아이들 데리고 운동 삼아 이 마을의 문화유적과 골목을 다니면서 아름다운 우물도 살펴보고 마을 앞의 논과 밭, 개울의 맑은 물 흘러가는 것도 살펴보자.

아파트가 싫어 시골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은 이 아름답고 유적많은 흑암리를 한번 다녀갔으면 한다. 아니면 시골마을 정취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도 한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 back 영상물 시청

 

박만환 家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북의 발견>에서 소개하려는 분은 정읍 출신의 박만환 박승규 부자(父子)입니다.

두 분 모두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부자가 각각 학교를 세웠던 분들입니다. 그 학교는 ‘영주정사’와 ‘승동학교’ 아버지는 유교에 기반을 둔 전통적 학교를, 아들은 신식 학교를 세웠습니다. ‘영주정사’는 조선 성리학의 맥을 이은 간재 전우 선생이 6년간 후학을 양성했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아들 박승규는 학교를 세웠을 뿐 아니라 백정기 의사의 독립운동을 돕고 많은 독립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책무를 다 하고자 했던 박만환 박승규 부자 이야기<전북의 발견>에서 ....

 

怡心亭

  망국제를 지내는 사람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1910년 초가을 어느날 전북 정읍시 공평동 야룡마을 뒷산 소년봉에 일단의 사람들이 집결했다. 고인주(38세), 고응중(36세), 백관수(22세), 김성수(20세), 김연수(15세), 박봉규(20세), 박승규(17세), 김기홍(17세), 한성수(17세), 백정기(15세), 최동규(14세), 박방원(13세) 등 모두 12명이었다.

성당유고를 편찬한 박인규도 이마을 출신이다.

박만환의 초상은 석지 채용신이 그렸다. 석지 채용신은 당시 정읍에 살면서 교류하는 사람들의 초상을 그렸다 . 동초 김석곤, 간재 전우, 박 만환의 초상도 이때 그려진 것 같다.

 

이들은 충남 아산의 전재 임헌회의 문하에서 간재 전우와 동문수학했던 박만환(1849-1926)이 그의 고향인 정읍시 흑암동에 건립한 사립 교육기관인 영주정사(瀛洲精舍)에서 간재 전우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하던 중 경술국치를 당했다. 이날 학감이었던 고인주(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12대 후손)의 발의와 주도로 국권을 잃은 것에 통분하여 서울을 향해 대성통곡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굳게 다지는 ‘망국제(亡國祭)’를 지낸 것이다. 이상

 

 

영주정사와 박만환

 

영주(瀛州)고을에 영양사(瀛陽祠)가 있으니, 그곳이 지금의 농소동에 있는 현암(玄岩)마을에 있다.

영양사기문(瀛陽祠記文)

내가 일찍보니, 鄕校 선비들이 삭망焚香하고 봄과 가을에 석전에 제사를 지내면서 聖賢을 높이고 스승으로 모시는 것을 禮節이라 이르니, 이는 聖賢이 밝힌 法規를 낮과 밤에도 講讀하고 行動하며 몸에 맞도록 하여 이를 어기지 아니함이 眞實로 聖賢을 높이고 스승으로 모시는 선비이다.이제 변방의 오랑케가 中華를 어지럽게 하고 간사한 말들이 하늘을 덮으니 고을 鄕校가 퇴폐하고 선비들이 갈 곳이 없어졌다.朴晩煥이 분발하여 강당뒤에 祠堂 세칸을 세워서 서쪽 한칸은 箕子를 모시고, 東쪽 두칸은 중앙에 孔子를 모시어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配享하고 다음으로 주염계 정명도 장횡거 소강점 주자를 配享하였다, 다 화상으로 되어있다. 이를 이름하기를 瀛陽祠라 하였다.이는 진실로 마땅한 일이다. 광활한 天下에 祠堂이 滄海에 一派에 지나지 아니하나 祠堂이 後日의 좋은 조짐으로 점점 回復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내가 말하기를 聖賢의 法을 세우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마음이 法規에 어기지 않은 것이다.대범 父子의 親한 것이나, 君臣간의 의리와, 夫婦의 有別이나,長幼의 차례와 벗끼리의 믿음은 다섯 가지 人倫의 법이요, 나아가고 물러가고 있고 없음의 道理와 紀綱을 세우고 정치하는 體制와 노래하고 抒情하는 말과 條理 節文의 중용과 음율 宣暢의 화합과 물리치고 表彰하고 刑罰하는 法을 여섯경전의 법이며 언어 동작 음식잔치하는 일이 법이 아닌 일이 없다.여러 선비는 祠堂에 봉심할 적에 법에 뜻을 두고 몸을 세우고 소홀함에서 정밀한데로 젊음에서 늙음으로 마음과 이치가 하나가 되어 聖賢과 같이하면 장차 큰 道가 행하여지고, 큰 經倫이 받들어져 天下의 모든 나라가 平和로울 것이다.슬프다! 이 祠堂이 작다고 할 것이고 만일 祠堂의 화상을 봉심하면서 희망만 하면 鄕校의 선비가 봉심만 하고 배우는 데에는 힘쓰지 아니하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警戒하여야 할 점이다.後學 潭陽 田 愚 記

 

<증보 영주지>에 기록되길

“망화대, 망선대 글씨는 두승산 위에 있으며,

간재, 참봉 정해근, 군수 서택환, 반환 소요지처 盤桓逍遼處士"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간재는 전우선생을, 참봉 정해근은 잘 모르겠고, 서택환은 이평사람으로 19세에

구례군수를 지냈으며, 지운 김철수선생(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다. 대한민국 독립장 수상)의 스승이다. 소요처사는 동초 김석곤선생의 별호로 불린다.

동초선생은 간재의 문인이었으며, 두승산에 천원지방을 표현하는 水斗木升을 암각했다. 望華臺 암각글씨도 동초선생의 글씨로 짐작이 간다. 동초선생이 水斗木升을 새겨 음향오행의 이치로 암각했다. 상학마을의 최석학은 되와 말을 조각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홍산문화 때부터 전해오는 선인들의 사상을 표현했는데, 현세의 사람들은 곡식을 계량하는 도구를 표현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맺는 말

 

지금 전국은 관광산업의 열풍속에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의 자원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지만 시각적인 화려함의 만족에 치우쳐 그 지역만의 정체성이나 역사성을 외면한다. 스토리텔링이라는 새로운 창조를 요구하면서도 그 지역의 차별화 된 자원은 외면한다. 스토리텔링은 역사와 향토사를 왜곡한다. 향교나 서원 등 웅장한 건축물의 화려한 단청과 새롭게 단장한 하드웨어만 강조한다. 화려함 속에 잊혀지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 구석마다 그들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각자의 삶을 통해 마을이라는 공간에 얼과 문화유산을 남겼고, 지식인은 기록문화로 후대를 기르고자 했다. 이를 통해 사람끼리 소통하고 꿈꾸며 국가에 공헌했다.

흑암리라는 작은 공간에서 출생하고, 영주정사라는 같은 공간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이 영상물과 자료를 인용하여 공부하고자 했다.

마을에서 자원을 찾는 것은 건축물의 화려함이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발견하는 일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 정읍사람들의 역사적 정체성과 얼은 유.무형 유산으로 남는다.

 

어쩌면 이런 강의도 마을 사람들이 직접 했어야 되는 것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