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凡日誌는 대륙조선을 말하고 있다. 1900년 전후 근대사
白凡日誌는 대륙조선을 말하고 있다. 1. 아래의 내용은 학민사에서 출판한 <正本백범일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행간의 의미를 정밀히 읽다보면, 白凡이 살았던 강역이 이 半島가 아니라, 대륙이었음을 얼마든지 알아낼수가 있는 것이다. 일전에 올렸던 白頭山의 기행기록은 그대로 다시 게재했다. 1895년 백범이 올라갔던 白頭山이 바로 대륙의 한복판 알타이산임은 충분히 고증이 되고도 남는 것이었다. 백범의 관점을 대륙으로 옮기면서 글을 읽어가다보면 우리가 배워서 알아온 우리역사의 작은 편린들이 결코 이 왜소한 半島가 아니었음을 몸으로 느끼면서 전율할수 있는 것이다.
1997년<正本 백범일지>가 나오기까지 解放 직후의 國士院 판 白凡日誌를 필두로 하여 30여종의 白凡日誌가 출간되었지만, 모두가 국사원 판을 底本으로 한 것이었다. 白凡日誌의 판본에는 3종류가 있다. ➀親筆本이다. 현재 白凡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다. 1994년 집문당에서 影印함으로써 일반인이 볼수 있었다 上卷은 만52세때인 1928년3월경 上海에서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 5월3일 종료헀다. 下卷은 66세때인 1942년 重慶에서 집필헀다. ➁두번째 판본은 미국 컬럼비아 大學에 소장되어 있다. 上卷집필을 끝내고 이를 측근에게 筆寫시켜 美州지역의 同志들에게 보낸것이다. 謄寫本이라고 한다. ➂해방후 측근이 친필본을 필사한 것이다. 이것이 고서점에 유출되었다가 이동녕 선생의 孫子인 이석희씨가 입수하여 현재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白凡日誌를 쓴 목적은 자식들에게 아비의 행적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解放후 온 국민에 읽혀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로 1947년 白凡 생존때 국사원을 통해 初刊本이 빛을 보게 되었다. 單獨政府수립후 李承晩 정권기에 들어와서 白凡日誌는 황당하게도 禁書취급을 받아 이후 출간되지 못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9년에 서문당에서 원본 白凡日誌가 출간됨으로써 國士院刊 白凡日誌가 결코 權威本 대접을 받을 수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2. 다음은 본문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나라가 신성하게 망한다 함은 一般百姓이 옳음을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적에게 覆沒을 당하여 망함이요, 더럽게 망한다 함은 一般百姓이 적에게 아부하다가 敵의 술수에 떨어져 降服하고 망함일세.
萬古天下에 無長存不亡之國이요, 萬古天下에 無長生不死之人인즉 자네나 나는 一死報國의 한가지 일만 남았네. (만고천하에 망하지 않고 오래가는 나라는 없고, 만고천하에 죽지않고 오래사는 사람은 없은즉,)
咸鏡道의 교육제도가 兩西(황해,평안도)보다 일찍 발달된 점으로는, 아무리 가난하여 게딱지만한 家屋을짓고 사는 동네일지라도 書齋는 반드시 기와집으로 지었고, 그 외에 都廳이 있는 것이라, 都廳은 동리의 공용가옥으로서 비교적 크고 화려하게 지어 그 집에 모여 놀기도 하고, 소설책도 보고 짚신도 삼았다. 동네 뉘 집에서나 손님이 오면 식사를 대접하여 都廳에서 歇宿(쉬고 묵음)케 하며, 無錢客이 헐숙을 청하면 그 都廳의 公款(공금)으로 음식을 대접하는 규례가 있다. 오락기구로는 북,장구,꽹과리,통소 등을 都廳에 비치하여 두고 동네 사람들이 종종 모여 즐기기도 하고 손님 위로도 하는 美俗이 있더라
洪原 어떤 큰 동네 서재를 방문한 즉 건축이 굉장한데, 敎師3인이 있으니, 高等敎師 한 사람은 학생 중 경서반을 맡아 교수하고, 그 다음은 증등과를, 그 다음은 유치반을 분담 敎授하였다. 대청 좌우에 북과 꽹과리를 걸어 북을 치면 學生들이 讀書를 시작하고, 꽹과리를 치면 讀書를 파하는 아름다운 규례를 보았다.
端川 摩雲嶺을 넘어 甲山郡에 이르니 乙未(1895)7월경이라, 그 읍 역시 山中 巨邑이요,----그곳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殮襲(염습)할때 봇껍질로 싸면 땅속에서 萬年 가도록 해골이 흩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惠山鎭에서 白頭山 노정을 물은즉 西大嶺을 넘어서 간다 하여 三水郡으로, 長津郡으로, 厚昌郡으로, 慈城郡 中江을 건너 중국지대인 帽兒山에 도착하였다.
帽兒山에서 서북쪽을 향해 老人峙(노인치)라는 고개를 넘고 또 넘어 西大嶺 가는 길을 따라 전진하는 중에 우리 사람을 百里에 2-3인을 만나는데, 西大嶺을 넘는 중도에 嚮賊(嚮馬賊)이란 中國人 도적떼가 사람을 죽인다하여 白頭山 拜觀(공손한 마음으로 참관함)을 중지하고 通化縣城에 도착하였다. 城 내외 500여호가 있는데 우리 동포는 단지1호인데 胡通辭(현청의 통역사)이다 내가 돌아다닌 곳은 通化縣과 桓仁, 寬甸,臨江,輯安(집안) 등 네 郡인데 어디나 胡通辭(통역사)의 폐해는 동일하더라. 그때에 水田은 보지 못하였으나, 근본 土質이 肥沃하여 잡곡은 무엇이나 비료를 주지 않아도 1인이 지어서 10인이 먹어도 족하겠고, 한갓 소금만이 제일 귀하더라.
그 地境에 들어가는 소금은 다 義州 방면으로부터 물길 따라 數千里 수송하여 판매되더라.
어찌 되었든지 大君主(李太皇)가 친히 電話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때 京城府 내는 이미 電話가설이 된 지 오래였으나 경성 이외에는 長途電話(장거리전화)가 仁川까지가 처음이요, 仁川까지의 電話 가설공사가완공된지 3일째 되는 날이라, 만일 電話 준공이 못 되었어도 사형 집행되었겠다고 한다.
내가 상놈으로 海州 西村에 난 것을 늘 한하였으나, 이곳을 와서 보니 양반의 樂地는 삼남이요,상놈의 樂地는 西北이로다. 내가 海西 상놈이 된 것이 큰 행복이지, 만일 三南 상놈이 되었던들 얼마나 불행했을까?
三南 양반의 위세와 속박이 심하고 또 심한 중에도 약간의 美俗이 없지는 아니하다. 移秧(모내기)시기에 김제 萬頃을 지나며 본즉 농군이 아침에 일을 나갈때에 司命旗를 들고 錚鼓(꽹과리와장고)를 울리며 야외에 나간다. 깃발을 세우고 모를 심을 때는 선소리꾼이 鼓를 치고 農歌를 인도하면 남녀농군은 手舞足蹈(손발을 흔들며 춤을 춤)하며 일을 한다. 주인은 탁주를 논두렁에 여기저기 동이로 놓아두고 마음껏 먹게 하고, 行人이 지나면 다투어 권한다. 농군이 음식을 먹을 때는 현직 監司나 수령이라도 말을 내려 禮辭(예로서 하는 인사말)를 표한다.
西安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山東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 보내어서 국내의 要所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飛行機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美國 陸軍省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倭敵이 降服하였으니 진실로 前功이 可惜이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戰爭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議政院에 나아가 해산도 총 사직도 천만부당하다고 단언하고 서울에 들어가 전체 國民의 앞에 政府를 내어 바칠때까지 현상태로 가는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서울에는 美國 軍政府가있으니 臨時政府로는 入國을 허락할 수 없은즉 個人의 자격으로 오라 하기로 우리는 할 수 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위의 글에서 白頭山 서대령 넘어가는 여정은 이미 지난글에서 설명했거니와 鴨綠江을 통해 수천리길에 소금을 가져다 준다는 기록은 이 반도의 鴨綠江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바로 義州에서 현 자이산호를 지나 북쪽으로 가는 이리티시강으로 그리고 이 이리티시강에 유입되는 수많은 강의 지류들을 통해,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등으로 소금이 운송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일제의 패망후 백범은 美軍政의 입국승인이 늦어져서 계속 上海에 머물다가 1945년11월23일 하지장군이 보낸 비행기 한대로 臨政요원 일부와 함께 귀국했다. 미군정은 臨時政府의 환국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할것 등의 조건으로 차일피일 귀국을 지연시켰다. 미국측은 駐中 웨더 마이어 사령관을 통해 臨政의 개인자격 귀국, 政府로 행세하지 않을 것, 美軍政 질서확립에 협력한다는 조건을 승낙받고서야 귀국을 허락했다.
웨더마이어 사령관은 백범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백범일지에서 보여주는 1895년의 강역의 모습은 분명 大陸朝鮮이 확실한대, 백범은 말이 없다. 아니 그 말을 우리 후세인들이 못알아 듣고 있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덜 애리다. 망명정부를 27년동안 올곧게 이끌며, 朝鮮의 생명력을 후손에 일깨워준 불세출의 영웅, 白凡 金九는 후손으로 하여금 영원히 옷깃에 눈물 여미게 하는 活火山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 全有大東의 朝鮮에 충절의 선비가 있었으니, 有史以來 前無後無 白凡金九! 이 글로도 부족함을 느낀다.
2019.05.14. 松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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