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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통일했다는 지역은 반도가 아닌 대륙이다

도심안 2019. 4. 20.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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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109>

신라가 통일했다는 지역은 반도가 아닌 대륙이다

역사왜곡은 지명과 지역을 모두 반도로 옮기며 이뤄졌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4-14 20:05:25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역사를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현재 우리나라 역사교재가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자가 제멋대로 쓴 것임을 알게 된다
. 우리 교육부는 이 중대한 역사교과서 하나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인 교육부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 역사가 반도의 역사도 아니고 대륙의 역사이고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간 역사도 모르는 자가 우리의 역사교재를 썼다는데 그 내용이 다 맞지 않고 뒤집혀 있다는데 너무 한심해서 그 행정 책임을 우리 교육부에 묻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교육부라면 있으나 마나한 부서가 아닌가?
 
우리 국사교과서는 필자가 초등학교에서 배운 역사와 마찬가지로 환국의 환인(桓因), 배달국의 환웅(桓雄)은 아예 없는 것으로 하고 있다.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古朝鮮)이라고 하면서 단군왕검(檀君王儉)에서 기자(箕字)위만(衛滿)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가계보(國家系譜)에는 그 어디에도 이런 국가계보(國家系譜)를 찾아볼 수 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우리민족 계통을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기자(箕子)위만(衛滿)으로 이어졌다고 하며, 이 기록은 위서(魏書)에서 인용했다고 햇으나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에는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의 동이(東夷) 기록에서는 단군(檀君)기자(箕子=대륙의 기자)위만(衛滿=대륙의 위만)으로 조선이 이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의 동이(東夷)기록에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환인(桓因)환웅(桓雄), 즉 상고(上古)의 역사(歷史)를 기록하지 않고, 단군부터 우리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단군조선은 최초의 국호(國號)가 아니고 중국25에 의해 동이민족의 계통은 구리(九黎)의 치우(蚩尤)조선(朝鮮)의 단군(檀君)기자(箕子)위만(衛滿)으로 조선이 이어졌다고 했다.
 
지금 우리나라 교과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계통도, 삼국사기(三國史記)계통도, 중국25()계통도 닮지 않았다. 여기서 무엇이 틀렸는가? 그것은 기자(箕子)가 살던 조선이 삭제되고 조선영역을 서화(西華)에서 반도까지 해야 함에도 반도만 기자조선으로 했으나 그 실체가 없다.
또한 단군 이전의 국호 배달국환국이 삭제되었고, 기자(箕子)는 반도인(半島人)이 아니고 대륙의 사람임에도 반도에 한정시켰다. 기자(箕子)가 살던 곳은 하남성(河南省) 서화(西華)로 반도와 관련이 없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반도에 있었다면 그가 나서 살던 대륙의 서화(西華)와 몽성(蒙城)이 반도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반도엔 서화(西華)와 몽성(蒙城)이 없다.
 
반도식민사관자(半島植民史觀者)들의 주장이 맞다면 환인(桓因환웅(桓雄치우(蚩尤), 기자(箕子), 위만(衛滿)도 둘이 있어야 한다. 이들은 사서(史書)와 다른 역사를 만들어 고조선(古朝鮮)도 신화(神話)로 돌리며 부정하고 있는 것은 모순되고 잘못된 것이다.
오늘은 우리 역사가 뒤엎어진 사실을 지금까지 나타난 사서(史書)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고대 우리나라의 지역은 과연 어디였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쓴 김일연(金一然)은 단군왕검(檀君王儉) 때부터 고조선(古朝鮮)을 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 하였다고 하고, 이것을 인용(引用)한 사서(史書)는 위서(魏書)에서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에 나라를 세우셨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서(史書)의 서책(書冊)들에서도 그렇게 적은 것을 인용(引用)하였다고 하였다.(三國遺事 卷一).
 
그리고 고조선(古朝鮮)도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무진년(戊辰年 唐堯 25)에 백악산 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 나라를 세우셨다가 23년 경인년(庚寅年)에 압록강(鴨綠江)의 북녘 송화강(松花江=동말강(涷沫江;栗末江) 유역에서 서울을 옮겨 평양(平壤)이라 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하였다.(閨怨史話 二 檀君記). 이곳이 반도인가! 이곳은 현 만주(滿洲)길림성에 있는 곳으로, 전에 소밀성(蘇密城)이라 하였는데 지명을 때도 시도 없이 옮기는 중국인데도 이곳은 대륙이 아닌가!
 
또한 위만조선의 서울인 왕검성(王儉城)이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라 하였는데 이것 또한 어불성설(語不成說)인 허구(虛構)의 사실을 쓰고 있다. 왕검성(王儉城)은 여러 곳에 있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서울 왕검성(王儉城)은 전한서(前漢書)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중국요녕성(中國遼寧省) 반산현(盤山縣;大凌河流域)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前漢書 卷28下 地理志 遼東郡 險瀆:中國古今地名大辭典 險瀆縣).
 
또 일제(日帝)는 한()이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낙랑·진번·임둔·현토의 4()을 두고 그들의 관리를 보내어 다스렸다고 하였는데 이것 또한 일제(日帝)가 꾸며낸 거짓말로서, ‘낙랑(樂浪)은 평안도 대동강유역이고 현토(玄菟)는 만주(滿洲)의 통구요, 진번은 황해도에 있다고 하였는데 도대체 중국 원서도 보지 않고 큰 거짓말은 통한다고 새빨간 거짓을 말하고 있다.
 
이곳은 우리 고죽국(孤竹國)이 북평(北平)으로 되었다가 북연(北燕) 때에는 평주(平州)와 낙랑군(樂浪郡)으로 나뉘어졌으며, 또 후위(後魏) 때에는 낙랑(樂浪)을 고쳐서 다시 북평(北平)이 되었다. 전한서(前漢書)의 지리지(地理志)에는 낙랑군은 평북지역인 유주(幽州)에 속했는데 그 곳은 본지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고 또 이 낙랑군(樂浪郡) 안에 대방(帶方)이 있었던 곳이다.
 
현토군(玄菟郡)도 유주(幽州)에 속했으며 또 그곳은 진번조선국(眞番朝鮮國)이라 하였다. 그런데 현토(玄菟)가 북경(北京) 산해관(山海關)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진()나라 때 편찬된 삼국지(三國志)등에서도 밝히고 있다.(前漢書 卷28下 地理志 玄菟郡 屬幽州 (應召曰 故眞番朝鮮國).
 
여기서 유주(幽州)는 어디인가? 삼국사(三國史)() 46에서 말하는 유()는 유주(幽州)를 말하는 것으로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는 유연제노오월(幽燕齊魯吳越)을 다물(多勿) 하였다. 고 한 북경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말한다면 아래와 같다.
 
이 지금부터 4300년 전인 단군과 요임금 시대에 우리 동이 전체를 9()로 나눴던 것을 순()임금 때 기주(冀州)가 너무 넓어 이를 기주(冀州유주(幽州병주(竝州) 3주로 만들었는데 유주(幽州)는 현재 북경이 있는 하북성 일부와 열하성과 현재 요하 서녘지역 전부를 말한다.
 
고대 삼국과 왜()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다
 
우리나라 역사교제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가 강성(强盛) 할 때는 유연제노오월(幽燕齊魯吳,)을 다물(多勿)하였다는 사실을 어찌해서 기록하지 않은 것인지! 도대체 우리나라 교육부(敎育部)는 역사를 바로하지 못하고 무엇을 하는 기관(機關)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역사는 대륙역사(大陸歷史)임에도 반도역사(半島歷史)로 일관(一貫)하여온 무지(無知)는 우리의 사서(史書) 삼국사(三國史)() 46과 중국의 남제서(南齊書)() 58의 기록도 있는데도 이를 묵살하고 일제(日帝)의 반도식민사관(半島植民史觀)을 그대로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찌해서 사서(史書)에 나와 있는 것도 연구를 않으면서 외면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최영희(崔永禧) 국사편찬위원장 때인 70년대, 초대문교부장관이셨던 안호상(安浩相) 박사가 국사교과서내용시정요구에 관한 청원을 내고 국회에서 공청회까지 하였는데도, 지금까지도, 이를 바르게 시정(是正)을 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늦게나마 역사를 연구하는 한 서생으로서 그때 청원서내용을 그대로 살펴본다.
 
국사교과서내용시정요구에 관한 청원서(請願書)’에서는 백제(百濟)가 서기 3세기 끝 무렵부터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300여년 동안 중국(中國) 북경(北京)에서 상해(上海) 남녘, 곧 오월(吳越)나라를 통치(統治)한 사실은 완전히 기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헌통고(文獻通考), 주서(周書), 양서(梁書), 북사(北史),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말한 ()나라 때 고구려(高句麗)는 이미 난하(灤河) 동녘지역인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 동녘지역인 요동(遼東)을 차지하였고, 백제(百濟)는 요서(遼西)인 북경지역(北京地域)을 차지하고 백제자치군(百濟自治郡)이라 하였다.
 
그리고 서울을 요서(遼西)에다 두고 이름을 고마성(固麻城)’이라 하였다. 또 조선 땅의 백제(百濟)를 다스리기 위해 서울을 전주(全州)에다 두고 거발성(居拔城)이라 헸다라고 하고 있다.
 
백제가 진(((() 때에는 양자강(揚子江) 북녘을 다 차지하다가 후위(後魏; 서기 5세기)때에는 양자(揚子) 남녘인 오월(吳越)까지를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그럼으로 당서(唐書)에선 백제의 서녘 경계선이 월주(越州)요 남녘 경계선은 왜()라고 하였다.(公聽會記錄667).
 
신라(新羅)의 영역(領域)은 처음엔 경상도에서 만주(滿洲) 길림성(吉林省) 조납(鳥拉;목단강(牧丹江)지역까지고, 서녘은 봉천(奉川)과 장춘(長春)의 지역까지인 것을 교과서(敎科書)는 완전히 빼어버리고 또 삼국통일의 국경이 한 때 북경지역(北京地域)까지이었던 것을 경상도(慶尙道)만인 것처럼 꾸며두었는데 이것 또한 일제(日帝)의 허위조작에 따른 허구임을 지적하고 있다.
 
신당서(新唐書)에서의 신라(新羅)의 땅이 가로가 천리(千里)요 길이가 3천리며 또 서녘은 개원(開原)과 철령(鐵嶺;봉천(奉川)과 장춘(長春)지역이다가 무열왕(武烈王) 때에는 이 봉천과 장춘이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취함으로 동서(東西)900리요, 남북(南北)이 천여리(千餘里)나 더 넓혀졌다고 하였다. (滿洲源流考 卷九 新羅九州 ; 公聽會記錄668面 參照 引用).
 
삼국통일(三國統一) 후의 우리의 영역
 
삼국시대 삼국 중 가장 약체였던 신라(新羅)가 당()과 연합하여 서기 660년에 백제(百濟)를 멸망시키고 668년에는 고구려(高句麗)까지 남생(男生남건(男建남곤(南袞)의 형제의 불신과 신라의 요승(妖僧)인 신성(信誠)의 술책(術策)에 넘어가 멸망한 후, 신라(新羅)의 영역(領域)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달라진 것을 기록하고 있다.
 
, 서부(西部) 만주(滿洲)와 북경(北京) 지역의 고구려와 백제의 땅을 모두 차지한 뒤 거기에 상주(尙州명주·양주·웅주·전주(全州문주·한주·삭주 등 구주(九州)를 두었는데 상주(尙州)는 길림성(吉林省)인 북경로(北京路)에 속함으로 길림(吉林), 영안현(寧安縣)이요. 전주(全州)는 동경로(東京路)에 속하였음으로 하북성(河北省)과 열하성 지역이요, 강주(康州)는 대능하(大淩河)의 동쪽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지역이라 하였다. 필자도 2016년 답사한 곳이다.
 
그럼으로 신라(新羅)가 구주(九州)를 설치할 적엔 동녘으로는 길림(吉林)이요, 서녘은 북평(北平) ()은 길림, (西)는 강녕, 북평(北平)까지라 하였다.(滿洲源流考 卷九 新羅九州). 그러다가 성덕왕(聖德王) 첫 무렵부터 발해(渤海)가 강해져서 만주와 동경지역은 모두 발해에 빼앗기고 성덕임금 35(唐開元 24; 서기 736)에 압록강 남역(南域)만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통일 국경이 한때 길림에서 북경(北京)까지요, 또 이 지역에다 구주(九州)까지 두었는데 우리나라 국가교과서는 이 구주(九州)를 대동강남녘에 배치하였다. 이런 근거가 어디에서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기록을 어떤 사서를 참고(參考)하였는지 참으로 한심한 인간들이다.
 
더 황당한 것은 대륙의 전쟁을 국내로 끌고 와서 신라는 당의 20만 명을 의정부 부근에서 거의 멸망시켰고 이어서 금강 입구에서 당의 해군을 크게 격파하였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마침내 당군을 이 땅에서 축출하고 숙원의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고 있지도 않은 전쟁터를 조작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반도사관 자들은 아직도 신라의 통일국경을 알지도 못하고 있다.
 
더구나 1979년부터는 또 고쳐서 발해(渤海)가 대동강(大同江)유역에서 원산만(元山灣) 이북을 차지하였다하고, 고등학교 교과에선, ‘대동강 이남을 당()이 승인하였다고 하였다는 등, 도대체 이런 역사문외한이 제멋대로 함부로 적고 있는 것은 너무 역사무지 함에 경악(驚愕)을 금치 못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서(史書)를 근거로 한 역사를 모르는 몰상식(沒常識)이 극치(極致)임을 모르고 있다. 나당연합군이 싸운 전쟁터는 이미 밝혔듯 한반도가 아니고 대륙이다.
 
이러한 역사의 기술(記述)은 반국가적이고 반민족적일뿐더러 비과학적이고 몰상식한 것이라고 아니 말 할 수 없다. 이런 반도에 우리 역사를 가져다 놓은 어불성설의 교재는 말도 아니 되는 엿장수 식으로 마음대로 교과서를 쓰고 난발하는 것은 국가민족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
 
이들은 하남성(河南省) 서화(西華)에서 한반도(韓半島)에 이르는 하나의 민족임을 입증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다. 설령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正史)를 부정한다고 하여도 광개토태왕비문(碑文)만으로도 서화(西華) 동쪽과 한반도가 하나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예컨대 기자조선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한문으로 쓴 기자조선의 기록이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중국에는 우리나라에 없는 기자조선(箕子朝鮮)도 시전(詩傳), 사기(史記),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자치통감(資治統監), 주서(周書), 진서()), 양서(梁書), 수서(隨書), 남사(南史), 구당서(舊唐書), 당서(唐書), 통전(通典)등에서 기자가 중국에서의 기록이 적혀 있다.
 
글을 맺으며,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자들은 할 일은 하지 않고 기득권에 안주하며 광복 후 오늘날까지도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사관을 지금까지 교육하는 역적에 비유할 수 있는 죄를 범하고 있는데 이들이 우리 삼국사(三國史)46남제서(南齊書)58의 기록의 확인과 시전(詩傳), 사기(史記),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자치통감(資治統監), 주서(周書), 진서()), 양서(梁書), 수서(隨書), 남사(南史), 구당서(舊唐書), 당서(唐書), 통전(通典)등을 제대로 연구했으면 한다.
 
지금 우리 교과서는 우리의 정통역사를 말살하고, 있지도 않은 허구의 역사로 국민을 속이는 기만성(欺滿性), 사기성(詐欺性), 죄악(罪惡性)이 하늘에 닿아있는 상태이다. 이는 학문(學問)의 배신(背信)이요, 양심을 속이는 비겁성과 노예성과 타락심만 심어줌으로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을 조장하는 일제(日帝)가 목표한 식민교육을 조장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찾고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가졌고 우리민족이 인류역사에 어떻게 기여하여 왔는가! 제대로 알고 바로 가르쳐야 한다. 이를 제대로 못하는 교육부는 큰문제다. 우리역사를 모르는 부서라면 무엇 때문에 존치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교육부는 어느 나라 공직자인가! 중국인가! 일본인가! 의심되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까지 무사안일하게 지내온 무책임하게 역사교제를 중국과 일본의 조작 왜곡한 것을 그대로 방관하여온 그 책임은 이제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사료 된다. 광복 73년이 지나도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은 교육부는 있으나마나한 부서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일본의 역사를 왜곡하며 자기들 역사를 천년이나 늘리고 일본의 역사가 우리역사보다 먼저인양 꾸민 당치도 않은 일제식민사관그대로 따르는 것은 반국가적(反國家的)이고 반민족적(反民族的)인 행태는 우리의 전통성(傳統性)과 정체성(正體性)을 부정(否定)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지금 정부는 적폐(積弊), 적폐(積弊)하는데 이 역사 왜곡(歪曲)을 방치(放置)하는 것이야 말로 적폐(積弊)중 가장 큰 적폐(積弊)라 본다. 일제(日帝)가 통제(統制)와 규제(規制)로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해 온 것을 이대로 방치(放置)는 장차 우리자손에게 좌절(挫折)만 심어 줄 뿐이다.
 
이제는 역사를 왜곡하려해도 할 수없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학계만이 정체(停滯)되어있는 것은 문제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가치관이 변질되고 공동체의식이 없는 개인주의 이기주의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부터라도 초심으로 돌아가 위대하고 찬란한 우리역사 바로 잡고 가야 한다. 고대부터 세계로 웅비한 우리선조의 기상(氣像)을 제대로 심어 줘야 할 때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東夷歷史 ’. (右犂)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國會 文公分科委員會, 國史敎科書內容要求請願-國史公聽會 陳述人 發言內容.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李進熙’ ‘好太王碑’.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歷史’. 石井進外3,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べる日本史’. 槐一男,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歷史. , . 李民樹,'朝鮮傳‘.外 其他多數書冊參照, 本文引用 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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